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36화 (136/200)

136. 영광의 길(6)

야구가 단장 놀음이라는 말은 이제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선수로서는 그 사실을 느낄 기회가 별로 없다.

드래프트나 국제 유망주 계약에서 자신을 선택한 단장이 잘리면서, 다음 단장의 첫 업무인 로스터 정리 때 ‘발전 가능성 없음’ 도장이 찍히며 방출 통보를 받거나.

아니면 기껏 빅리그에 올라와 슬슬 적응 좀 될라치면 트레이드 칩에 끼어 생각지도 못한 팀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할 때 잠깐 느끼지.

팀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면, 단장이 휘두르는 권력도 자신을 비켜 가기 시작하는데.

그때쯤 되면 단장이 바뀌었다는 소식에 ‘저 양반 갔구나’ 하고는 자기 할 일 하러 갈 수 있게 된다나.

아직 올리버 단장님이 잘린 적은 없으니 모르겠지만.

그러나 팀이 가을야구를 치르게 되면, 그때부터는 자기 팀 단장이 한 해 농사를 어떻게 지었는지 확실하게 체감이 된다.

여기서 선구안이랑 컨택 좋은 타자 한 명만 더 있었더라면, 선발진에 믿을 만한 카드 딱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 이런 아쉬움이 들기 시작한다는 거지.

“스트라이크 아웃!”

그런 면에서, 올리버 단장님은 팬들의 지지를 얻을 자격이 있다.

팬 포럼에서 누가 그러길, 오늘 다저스의 선발 투수 아이작 란드리를 데려왔다는 것만으로도 본인 연봉 값은 충분히 했다나.

고작 반 시즌 뛰고 떠날지도 모르는 투수한테 선수 3명을 투자했다고 욕이란 욕은 다 쏟아내던 사이트에서 그러는 게 좀 묘하긴 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아마 블루제이스 선수들에게도 한 줌의 독기쯤은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제 열린 3차전에서는 내내 아슬아슬한 점수 차를 유지했고, 만약 9회 초 2사에서 유진이 허무하게 견제사를 당하지만 않았어도 진짜 역전을 노려볼 만했으니까.

유진이 리드를 벌리는 걸 지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던 1루 코치도 심기일전한 듯 눈을 부릅떴고.

“스트라이크 아웃!!!”

그러나, 아이작은 그 한 줌의 독기마저 허무하게 지워버렸다.

고작 12구 만에 얻어낸 KKK.

올해 포스트시즌 3경기에서 선발 등판해 단 1점의 자책점도 허용하지 않은 투수 앞에서, 블루제이스 타자들의 멘탈이 바스라지는 게 보였다.

‘쟤도 분명 미스터 옥토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을야구 관련 재능 하나쯤은 갖고 있을 거야.’

[아님 FA로이드를 빡세게 맞은 걸지도 모르지.]

어제 경기가 끝나고 나서 감독님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려봤다.

우리가 조금만 더 득점 기회를 확실하게 살렸다면, 애초에 마무리 투수가 등판할 상황 자체가 없을 거라던 그 말.

그리고 그 기회는 예상보다 이른 타이밍에 찾아왔다.

“베이스 온 볼스!”

블루제이스의 선발 투수는 1차전에서 한 번 상대해본 정규시즌 2선발, 해럴드 스키너.

리드오프 조지가 끈질기게 커트를 해내면서 매달린 끝에 볼넷으로 출루하며, 무사 1루에서 첫 타석을 맞이했고.

“스트라이크!”

초구를 지켜보고 나서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지쳤구나.’

포스트시즌 3인 로테이션이라는 가혹한 스케줄의 여파.

전날 상대했던 에이스 앤디 스완슨의 공도, 좀 까다롭긴 했지만 챔피언십시리즈에서 3승을 거둔 투수치고는 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뜩이나 30대 중반의 베테랑에게는 버거운 데다, 시리즈 0승 3패로 자신이 무너지는 순간 스윕패라는 압박감까지 더해지니.

따아아아아악―!

[1루수 키를 넘겨 빠르게 흘러가는 이 타구! 페어볼! 우측 파울라인까지 굴러가는 타구를 우익수 폴 이바노프가 쫓아갔지만! Koo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대로 2루까지! 2루에서 세이프!]

해럴드 스키너는 가운데로 몰리는 체인지업 실투를 던졌고.

이번에는 그 찬스를 놓치지 않고 무사 2, 3루의 기회를 만들었다.

[TOR 0 : 2 LAD]

클린업 트리오가 두 명의 주자를 모두 홈으로 들여보내 주면서, 1회부터 선취점을 낸 다저스.

이 시점에서 이미 해럴드 스키너의 투구 수는 30개를 넘겼고.

“하…… 돌겠네.”

“무슨 이딴 월드시리즈가 다 있어…….”

그와 동시에, 캐나다 야구팬들을 대표해 다저 스타디움까지 찾아온 원정팬들의 눈빛에서도 생기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 * *

아무리 객관적인 전력이 밀린다고는 해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의 자리는 고스톱 쳐서 딸 수 있는 게 아니고.

메이저리그에서 10년 이상의 시간을 선발투수로 버티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1회에 이어 2회에도 불안한 제구를 선보이며, 내 앞에 2사 만루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파울 두 개로 카운트가 몰렸다가, 바깥쪽 절묘하게 흘러나가는 유인구에 헛스윙 삼진.

주심의 삼진 콜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지금이 4차전이라 다행이다.’

지금 이 삼진이 승부의 추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상대 중심 타자를 상대로 삼진을 잡으며 만루 위기를 넘겼는데도, 블루제이스 덕아웃에서 억지로 쥐어 짜낸 듯한 환호성밖에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이러니까 지금까지 월드시리즈에서 역스윕이 안 나왔던 거네.’

1차전부터 3차전까지, 블루제이스한테는 언제든 경기를 뒤집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결과를 냈다면, 상대한테 분위기가 확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

다저스 덕아웃 분위기도 지금보다 훨씬 가라앉았을 거고.

“정신 차려, Koo. 내일은 선발 투수로 등판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감독님마저도 고작 2점 차 경기에서 이런 농담을 하실 정도였으니까.

따아악―!

“아웃!” “아웃!”

그 와중에 3회 초에 올라간 아이작은 오늘 경기 첫 안타를 내줬음에도, 침착하게 더블 플레이를 유도하며 실점 없이 이닝을 마쳤고.

블루제이스가 저항할 힘을 점점 잃어가는 게 덕아웃에서도 보였다.

[다음 투수로 누가 올라오는지 봐야겠는데?]

3회 말에도 주자를 내보냈지만 간신히 실점 없이 막아내는 데는 성공한 해럴드 스키너.

그러나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4회 말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안타와 볼넷으로 주자 두 명을 내보내자, 블루제이스 투수 코치가 공을 받아들어 마운드로 향했으니까.

‘포기는 안 했다 이거네.’

블루제이스의 두 번째 투수는 소노다 테루유키.

정규시즌 동안 하위 선발은 맡겨볼 만한데, 포스트시즌 선발로는 계산이 안 서는. 딱 그 정도의 투수.

그나마 선발 짬이 있어서인지 불펜으로 나와서도 멀티 이닝은 섭섭지 않게 먹어주긴 한다.

에이스는 이미 어제 나와서 패전투수가 됐고. 3선발도 불펜에는 있지만 이미 2차전에서 탈탈 털렸던 지금.

블루제이스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카드라는 건 맞지만.

[너 인터리그 때 저놈한테서 2타수 2안타 뽑지 않았냐?]

나한테는 좋은 기억을 안겨줬던 투수라는 게, 상대 입장에서는 불안 요소겠지.

그때 한일전에서 이겼다느니 뭐니, 인터넷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했던 거 아직도 기억난다.

“세이프!”

올라와서 처음 상대한 타자 헨리에게 2루수 앞 땅볼을 유도했지만.

전날 견제사가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는지, 타석에서도 내내 침묵했던 유진 리빙스턴이 타구를 빠트리며 주자 올 세이프.

‘쟤 우나?’

[보니까 우는 건 아니고, 욕은 하는 듯.]

‘그 정도로만 끝내면 쟤도 성인군자인데.’

더블 플레이 찬스가 날아가면서 무사 만루가 됐는데. 멘탈이 온전할 투수가 도대체 어디 있을까.

“스트라이크 아웃!”

그나마 배터 박스 끝에 선 아이작에게서 삼구삼진을 잡아내긴 했지만.

“베이스 온 볼스!”

조지가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볼넷을 얻어내면서, 밀어내기 볼넷으로 스코어 3대 0.

이번에도 만루 찬스를 앞두고 타석에 들어가게 됐다.

포수가 타임을 요청하고, 통역과 함께 마운드에 방문하면서 잠시 상황을 분석해볼 시간이 생겼다.

지금 투수는 무조건 스트라이크를 던져야만 한다.

이미 밀어내기 볼넷이 나왔고, 감독은 최대한 많은 이닝을 소화해주길 강요하며, 내 뒤로는 클린업 트리오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투수 할 때 생각나네.’

빅리그에서 투수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런 순간에 무뎌져야 한다.

당연히 한두 번으로는 택도 없고. 수없이 얻어맞으면서 패전도 쌓아가다 보면 배우는 거지.

이런 상황에선 투수 못지않게 타자도 압박감을 느낀다는 걸.

무사 만루에서도 내 공을 던질 수 있게 되고부터야 투수라는 포지션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는데.

설마 사고로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죽은 박도현이랑도 다시 만나고, 타자로 빅리그에 복귀하고,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만루를 앞둔 채 타석에 들어갈 줄은 더더욱 몰랐지.

쐐애애액!

‘미스터 옥토버’로 한층 예민해진 감각이, ‘몸으로 말해요’의 몸쪽 코스에 대한 직감을 증폭시킨다.

머릿속에 완벽하게 그려진 스윙 궤적을 따라, 배트에 모든 힘을 실어 휘두른다.

후우우웅!

타자로 전향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아무리 친구라고는 해도 남이 타고난 재능을 내 것처럼 쓴다는 게 아주 살짝 양심에 찔리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박도현만의 재능도 아니고, 나만의 재능도 아닌, 두 재능이 서로 합쳐져 만들어진 게 바로 지금의 나다.

따아아아아아아아악―!

“넘어갔다아아아아악!!!”

“그랜드슬램이야!!! 월드시리즈에서 X발 그랜드슬램만 3번이라고!!!”

“Kooooooo!!! 프런트 놈들이 제시하는 연장계약이 시원찮다면 내 계좌라도 털게!!! 제발 남아줘!!!”

지금 이 순간, 수만 명의 관중들이 들어찬 다저 스타디움을 뒤흔드는 거대한 환호성.

나는 이걸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 * *

[TOR 0 : 7 LAD]

1사 만루에서 나온 그랜드슬램은 블루제이스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남은 아웃카운트 두 개를 없애기 위해 한 점을 더 내주는 동안, 끝까지 투수를 바꾸지 않았으니까.

[TOR 0 : 8 LAD]

다음 이닝, 그다음 이닝까지도 블루제이스의 투수 교체는 없었다.

오히려 경기가 확실하게 넘어가고 나서부터 안정을 되찾은 듯, 6회까지 추가 실점 없이 버틴 소노다 테루유키.

물론 그동안 맥없는 스윙만 반복해대는 블루제이스 타자들을 차근차근 요리하던 아이작 때문에 빛이 바래긴 했지만.

[TOR 2 : 11 LAD]

아이작이 6회 초를 마지막으로, 포스트시즌 선발 4경기 무실점이라는 진기록과 함께 자기 역할을 마친 뒤.

오브라이언 감독님은 아직 월드시리즈에 등판해본 적 없는 투수들을 올렸고.

7회 초와 8회 초에 각각 1점씩 내주긴 했지만, 공격에서 3점을 챙겨 오는 양심 없는 교환비를 선보이며 격차를 더 벌렸다.

그렇게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 기회.

다저스 불펜에 남아 있는 투수 중, 올해 월드시리즈에 등판한 적이 없는 투수는 단 하나뿐이었다.

“로버트!!! 진짜 에이스가 누구인지 저놈들한테 똑똑히 보여줘!!!”

에이스에서 2선발로. 선발에서 불펜으로.

점점 자리에서 밀려나면서도 올해 다저스의 야구가 끝나는 순간까지 팀을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남자.

자신의 야구 인생 마지막 포스트시즌 등판을 홀드로 장식하기 위해, 로버트 켈리가 마운드에 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