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영광의 길(7)
로버트 켈리는 딱히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만약 남한테 이 이야기를 하면 헛소리 말라고 코웃음 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싸움 자체는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남들이 자신을 만만히 보는 간 죽도록 싫었다.
그런 놈들이 모여드는 곳이 운동부이다 보니, 그가 학생 시절부터 남들과 주먹다짐을 벌였던 것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주먹질에 타고난 소질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너 자신이나 너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켜야 할 때만 주먹을 써라. 그렇지 않으면 넌 스포츠 선수가 아니라 갱스터가 될 거야.’
고등학생 시절, 평소 사사건건 부딪치던 동급생을 주먹 한 방으로 기절시켰던 날, 야구부 감독이 해준 말이었다.
처음에는 꼰대 같은 소리라며 코웃음을 쳤지만, 그 말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나중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주먹 좀 세다고 으스대는 양아치에 불과했다는 것을.
프로에 지명되고 나서부터, 로버트는 자기만의 원칙을 세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동료는 때리지 않는다.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온다면 가장 먼저 뛰쳐나가 동료를 지킨다.
누가 들으면 투수가 아니라 실전에 투입되는 용병 아니냐며 황당해할 만한 원칙이었지만, 자신의 힘을 써야 할 곳을 명확하게 정해두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투수로서도 성공했고. FA로 빅마켓 구단으로 이적하며 큰돈을 벌었고.
엄격하지만 믿음직한 덕아웃의 리더로서 존경을 받았고.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가정도 꾸렸다.
많은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돌이켜보면 행복한 야구 인생이었고.
앞으로 몇 년이나 더 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잘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의 화장대 서랍에서 우울증 약과 수면제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냥 내가 좀 더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괜히 나 때문에 부담 주고 싶지 않았어. 당신 안 그래도 힘들잖아.’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나한테는 당신밖에 없다고. 당신부터가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왜 내 걱정부터 하느냐고.
그렇게 말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그 무렵의 다저스는 정말로 힘들었다.
팀의 핵심 타자이자 주전 유격수가 사고로 세상을 떴고. 로버트와 함께 선발진을 든든하게 받쳐주던 투수는 블래스 신드롬으로 은퇴하네 마네 했다.
그나마 로버트를 비롯한 베테랑들이 팀의 분위기를 다잡으며 어느 정도 반등은 했지만, 연패를 밥 먹듯이 하던 그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늘 불안했다.
팀과 가족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2037시즌이 개막했고.
그가 선택을 미루기만 하는 동안, 가끔 만나는 아내는 멍하니 앉아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고, 개인 성적은 내리막길을 탔다.
“아웃!”
자꾸만 추락하는 성적에 팬들도 더는 자신을 에이스로 불러주지 않게 되었을 때.
팀의 상처로 남았던 주전 유격수의 빈자리가 기적처럼 채워졌다.
한때는 자신의 뒤를 이어 에이스가 될 자질을 타고났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투수로서의 모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어엿한 내야수로 성장한.
지금 막 이닝의 첫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구현기 덕분에.
“원 아웃! 원 아웃!”
11대 2의 스코어임에도 목청껏 외치는 구현기를 보며, 로버트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저 선수가 없었더라면, 내야 수비에 영향을 많이 받는 후배 제리가 에이스로 성장하지도 못했을 거고.
자신도 단장에게 은퇴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을 거다.
‘로버트. 내가 지금 이 말을 하는 심정이 어떤지는 자네도 잘 알 거라고 믿지만, 포스트시즌에서는 많은 기회를 주기 어려울 것 같아.’
포스트시즌을 눈앞에 둔 어느 날, 오브라이언 감독이 그를 따로 불러 조심스럽게 해준 말이었다.
챔피언십시리즈 3차전, 크게 지고 있는 상황에서 무사 만루를 만들어놓고 강판되었던 걸 생각하면, 합리적인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오늘은 악몽 같던 그 날이랑은 전혀 달랐다.
컨디션도 좋았고. 뻐근하던 등허리 근육도 멀쩡했으며, 무엇보다 이번 시즌 내내 그를 괴롭혔던 투심의 제구 난조도 없었다.
‘늘 오늘만 같았으면 2년은 더 뛰겠는데.’
그런 실없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을 정도로.
그러나 로버트는 이내 코웃음을 쳤다.
그는 떠들썩하고, 자유분방하고, 다루기 힘든 선수들이 모여 있는 이 팀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이제 이 친구들은 자신이 없어도 잘해나갈 수 있을 거다.
오늘은 이곳을 떠나 자신이 꼭 옆에 있어 줘야 할 사람에게로 돌아가는 날.
지금 컨디션은 마지막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라는, 야구의 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따아아악―!
그런데 그 선물을 온전히 받아먹지 못했는지, 이닝의 세 번째 타자를 상대로 실투를 던지고 말았다.
이왕이면 삼자범퇴로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포수를 향해 글러브를 벌리려던 그 순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Kooooooo!!! 이 미친놈이 그걸 또 잡네!!!”
“우승이야!!! 우리가 우승이라고!!!”
다저 스타디움을 뒤흔드는 소리에 로버트는 뒤를 돌아보았고.
글러브에서 공을 꺼내면서 달려오는 구현기의 환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호수비를 펼칠 때마다 칭찬해 달라는 듯 달려오던 박도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서.
구현기의 몸에 박도현의 영혼이 들어갔다는 등신 같은 음모론자들의 말을 아주 살짝 이해할 뻔했지만.
“마지막 홀드 기념구입니다. 따로 드릴 건 없고 마음만 듬뿍 담았으니 챙겨가십쇼.”
구현기가 입을 열자마자 그런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박도현은 저런 식으로 퉁명스럽게 구는 놈은 절대 아니니까.
하긴 남들이 다 무서워하는 자신한테도 이렇게 구는 놈이니, 투수에서 내야수 전향이라는 정신 나간 짓거리를 시도했던 거겠지.
“로버트!!! 고생 많았어요!!!”
“데뷔 시즌을 당신과 함께 보낼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전에 그러지 말라고 그랬던 건 기억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질척대볼게요. 진짜 1년만 더 뛸 생각 없어요?”
구현기에게서 공을 받아 주머니에 소중히 챙기는 사이, 덕아웃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우르르 뛰쳐나와 로버트를 둘러쌌다.
사람들 사이에 완전히 묻혔다는 확신이 들 때쯤, 그는 글러브로 얼굴을 덮었다.
구현기의 말이 맞았다.
주머니 속의 공에 마음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넘칠 만큼.
“고맙다, Koo.”
자의로든 타의로든, 매년 수많은 선수들이 경기장을 떠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한 명의 투수가 생애 마지막 등판을 마쳤다.
한 해의 야구가 완전히 끝나는 날, 월드시리즈 우승을 축하하는 팬들의 환호와 눈물 속에서.
* * *
어느 스포츠든 마찬가지겠지만, 우승을 확정 짓고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든 선수들을 시상대로 올리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다.
눈물 콧물은 기본에, 허공에서 무한으로 쏟아지는 꽃가루로 범벅이 된 선수들이 하나둘씩 모여 섰고.
“이 팀에는 올해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주전 선수들의 이탈, 시즌 도중의 부진과 연패. 결국 시즌 최종 시리즈가 되어서야 지구 우승을 확정할 수 있었죠. 그러나 포스트시즌에 들어서는 자신들이 어째서 전통의 강호인지를 증명했습니다. 축하합니다. 2037시즌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승자, LA 다저스!!!”
커미셔너가 구단주에게 트로피를 전달하고, 그 트로피가 허공에 번쩍 치켜 올려진 순간.
더는 목소리 쥐어짤 힘도 없을 줄 알았던 동료들이, 다시 고래고래 악을 쓰기 시작한다.
“Yeahhhhhh!!!”
“우리가 진짜로 이 트로피를 가져왔다고!!! 이게 말이 돼?!”
“새뮤얼!!! 거기서도 우리를 지켜봐 주고 있을 거라 믿어!!”
[미친놈들, 누가 들으면 내가 하늘나라라도 간 줄 알겠네.]
영상통화로 연결된 태블릿 속에서 진절머리를 치는 새뮤얼.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선수 생활 오래 하고 싶으면 가만히 있으라는 의사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참여하는 중이다.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이 좋은 날에.]
‘아니, 뭐…….’
아버지랑 대판 싸우면서 가출한 줄 알았던 내 안의 유교맨이 돌아오기라도 한 걸까.
새뮤얼의 얼굴이 표시된 태블릿이 선수들 품에 돌아가며 안기는 걸 보니, 뭔가 영정 사진 같아서 흥이 식는다.
“다음은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가장 훌륭한 활약을 선보인 선수에게 주어지는 윌리 메이스 상의 주인공을 발표하겠습니다!”
그래도.
흥분이 좀 가라앉은 덕분에, 동료들 틈바구니에서 누가 탈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굴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먼저 설레발치는 건 좀 민망하잖아.
“이 선수는 월드시리즈 4경기 동안 3개의 그랜드슬램을 포함해 4개의 홈런을 때렸고, 타석에 18번 들어가 10타수 6안타 7볼넷 1사구로 6할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유격수로서의 생애 첫 포스트시즌에서 단 하나의 실책도 저지르지 않았죠.”
월드시리즈뿐 아니라, 포스트시즌 전체에서 실책이 하나도 없었다.
올해 시범경기만 해도 14경기 6실책을 기록하며 ‘내야수로는 못 써먹을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어깨 펴라. 너 진짜 대단한 거 해낸 거야.]
‘너만 하겠어.’
내가 박도현 말에 사사건건 비꼬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이번엔 진심이다.
박도현은 생애 첫 월드시리즈에서 이것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뒀다.
더 놀라운 건, 그러고도 우승을 못 했다는 거지.
“축하합니다. 올해의 월드시리즈에서 가장 빛났던 선수, Hyun!!! Ki!!! Koo!!!”
지금 내 등을 앞으로 떠밀고 있는 동료들이 없었더라면, 이 영광 역시 없었을 거라는 사실의 산증인이나 마찬가지다.
[히든 업적 달성!]
[모든 야구팬들이 염원하는 한 시즌의 종착지, 월드시리즈. 당신은 그 무대에서 함께 뛴 모든 선수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활약을 선보였습니다. 이 상이 당신이 올해 최고의 선수임을 증명해주지는 않지만, 당신의 팀을 올해 최고의 팀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증거로는 충분하죠!]
[재능 뽑기권이 지급됩니다.]
[5,000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13,560]
달성하기가 어려운 업적이어서인지, 뽑기권 하나와 더불어 포인트까지 추가로 지급해준 시스템.
통 큰 선물에 혀를 내두르다가, 사방팔방에서 터져 나오는 큰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Koo!!! Koo!!! Koo!!! Koo!!!”
Koo 콜에 맞춰 팔을 흔드는 홈팬들이 관중석에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냈고.
윌리 메이스의 모습을 본뜬 트로피를 번쩍 치켜들자, Koo 콜은 커다란 함성으로 바뀌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사회자의 제지에도 좀처럼 끝나지 않던 함성이 멎기를 기다려 받은 첫 질문.
“축하합니다, Koo. 대타 겸 백업 내야수로 이번 시즌을 시작해, 월드시리즈 MVP까지 올라왔는데요. 기적 같은 일을 이뤄낸 지금 이 기분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이 질문이 나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어떻게 대답할지도 미리 정해뒀고.
“음, 사람은 아니지만, 야구의 신에게 가장 먼저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사고를 당한 직후엔 왜 나를 지옥에 빠트렸나 죽도록 원망했지만, 어찌 보면 이 자리로 저를 인도하기 위한 게 아니었나 싶네요.”
만약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갔다면 박도현은 다저스 모자를 쓴 채 명예의 전당에 갔을 테고, 나는 FA 자격을 얻은 뒤 가장 조건이 좋은 팀에서 계속 투수로 뛰다가 명전 투표에서 첫해에 광탈했을 거다.
항상 옆에 있던 박도현이 사라지고 혼자 재활에 매달리던 시절에는, 그 사실이 나를 아프게 찔렀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다음은 제가 사고가 났던 날 운전대를 잡지 않아서 메이저리그의 역사가 안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했던 사람이 떠오르네요. 여전히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지만, 이제는 당신이 준 상처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관중석은 물론, 뒤에서 지켜보던 동료들까지도 그 새끼가 누구냐며 난리가 났다.
그 악플러 놈, 이제 고등학교 들어갔으려나 모르겠네.
이 이상 언급할 생각은 없으니 신상이 털리지는 않겠지만, 어디 똥줄 좀 타보라지.
“그만 화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나눠줄 건 감사와 사랑밖에 없으니까요.”
함께 뛴 동료들, 감독님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들, 프런트 직원들, 한국에서 응원해주는 팬들, 최근 보크가 뭔지 드디어 알았다는 아버지.
그리고 그라운드 근처에서 다른 선수 가족들과 함께 눈시울을 붉힌 채 서 있는, 도아와 그 가족들.
“마지막으로, 다저스의 야구를 사랑해주는 모든 사람들. 오늘 당신들에게 그 사랑을 조금이나마 돌려줄 수 있어 기쁩니다. Love You Guys!!!”
MVP 수상자가 발표되던 순간보다도 훨씬 격렬한 환호가 그라운드에 쏟아진다.
작년 한 해 동안 암흑기를 견뎌온 팬들에게 확실하게 ‘뽕’이 차게 해주는 한 방.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올해보다 성적이 좀 하락하더라도 이제 팬들이 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일은 없겠지.
“OK, Koo. 그럼 내야수로서 첫 시즌을 치른 소감을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아마 이 자리에서 나한테 아시안 선수 특유의 겸손함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거다. 내가 애초에 그런 성격도 아니고.
그렇다면 기대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대답을 해줘야겠지.
“이제야 빅리그에서 타자로 뛰는 데 적응이 좀 된 것 같습니다.”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리포터와 선수들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이제 겨우 첫 시즌이 끝났을 뿐인데.
명예의 전당까지는 갈 길이 멀다 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