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38화 (138/200)

138. 수확(1)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가져오면서 완전히 끝을 맞이한 2037년의 야구.

정규시즌 525타석 446타수 143안타 79사사구 30홈런 39도루로, 슬래시라인 0.320/0.488/0.585에 OPS는 1.073.

전체적으로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는 성적을 거둔 한 해였다.

‘기대를 뛰어넘고 자시고를 떠나, 리그 최정상급이었지.’

어떻게든 남 깎아내리길 좋아하는 놈들은 내가 시즌 초반 백업으로 뛰지 않았더라면 후반부에 체력적으로 부침을 겪었을 거라 그러던데.

그런 글들은 어그로조차 제대로 끌지 못한 채 정보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유격수로 뛰면서 챔피언십시리즈 MVP랑 월드시리즈 MVP까지 휩쓸었는데, 체력 딸린다는 소리가 가당키나 하겠어.

물론 가을 야구가 끝나면서 ‘미스터 옥토버’의 효과도 사라졌고.

몸을 마구 굴린 대가로 약 24시간 정도 자다 깨다 하며 죽은 듯이 누워 지내긴 했지.

그래도 그만큼 확실한 보상이 들어왔으니 괜찮다.

[스윙의 달인(B등급) ― 상시형]

○ 신체의 균형 감각이 보정됩니다.

○ 스윙 밸런스가 무너질 때 직감으로 알 수 있습니다.

○ 적절한 스윙 타이밍을 포착하는 능력이 보정됩니다.

우선 1만 포인트로 교환했더니 이런 게 나왔다.

B등급이지만, 어떻게 써먹느냐에 따라 훨씬 유용한 재능.

예를 들어, 훈련 중에야 스윙하는 모습을 마음껏 촬영하고, 심지어 3D 스캔까지 활용해서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데.

실전에서는 자기 스윙을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으니까, 한동안 안타를 못 치다 보면 불안해져서 하던 대로 스윙이 안 나오는 거다.

근데 자신의 스윙에서 밸런스가 흐트러지고 있다는 걸 알면, 그것만 신경 쓰면 되니 부진이 길어질 일도 없지.

실제로 무너진 자세로 스윙을 해봤더니, 뭔가 몸이 쫀쫀하게 압박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올바른 자세로 돌아오니 바로 사라지고.

[데칼코마니(S등급) ― 상시형]

○ 좌타석과 우타석 어느 쪽을 소화하더라도 신체 밸런스에 영향이 가지 않습니다.

○ 좌우 한쪽의 신체 능력을 반대 방향에서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월드시리즈 MVP를 타면서 받은 뽑기권에서 나온 재능.

원래는 A급 재능이었는데, 내가 기존에 가진 재능과 융합되어 S급 재능으로 바뀌었다.

좌타석과 우타석 모두를 소화하는 스위치 히터가 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사기적인 재능이긴 한데.

‘애초에 너부터가 스위치 히터가 아니었잖아?’

[응. 마이너에서 시험 삼아 해보긴 했는데, 그냥 한쪽에만 들어가는 게 마음이 편해서.]

문제는 박도현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딱히 다른 쪽 타석을 소화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내가 좌완 상대로 타율이 급감하는, 소위 좌상바였다면 엄청나게 유용했겠지만. 올해 내 좌완과 우완 상대 타율은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이거 참, 최고급 정력제를 선물받은 기분이 이런 걸까?’

[토 쏠리는 소리 하지 마라. 죽는다 진짜.]

남들은 못 가져서 안달이지만, 나한테는 딱히 필요가 없는 것.

지금은 도아네 부모님이 아직 이 집에 머물고 계시니, 강제로 바른 생활 사나이가 되었지만.

회복도 슬슬 끝났으니까. 머지않은 시일 내로, 음. 뭐 그렇다.

[X발, 당분간 또 나 혼자 운동방에서 자야겠네…….]

‘어차피 지금껏 너랑 계약 맺은 놈이 죄다 모쏠이었을 리는 없잖아? 밤마다 자리 피하는 건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냐?’

[너처럼 집이라도 넓으면 그러려니 하지. 어떤 놈들은 마이너 시절부터 원룸방에서 여자랑 동거하는데, 밤마다 밖에 나가 있자니 현타 제대로 오더라.]

‘와우…….’

아무튼.

낮은 등급의 쓸만한 재능과, 높은 등급의 미묘한 재능. 이렇게 두 가지의 보상 말고도, 이번 시즌을 통해 얻은 건 많았다.

[스폰서들과 단년 계약을 맺은 게 정말로 신의 한 수였군요.]

월드시리즈가 끝나자마자, 지구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이 된 데릭이 전화 너머에서 녹초가 된 채로 한 말이었다.

[찔러보듯 건네오는 계약서들조차 올해 끝나는 계약들보다 훨씬 조건이 좋습니다. 저한테 권한을 위임해주신 만큼, Koo의 이미지와 금전적인 면을 고려해 최선의 계약을 가져오겠습니다.]

“한국 쪽은 어떤가요? 올해도 그리 오래 머무르진 않을 거라, 스케줄이 너무 많이 잡히면 곤란한데요.”

[시간이 많이 드는 스케줄은 광고 촬영 정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방송 출연 제의는 어차피 전부 고사하신다고 하셨고요.]

내가 박도현보다 한국에서의 이미지가 별로였던 이유 중 하나가 방송 출연을 꺼려서였다.

야구 선수는 야구에만 전념해야지 방송물 먹으면 헛바람 든다…… 뭐 이런 신념이 있어서는 당연히 아니고.

예전에는 기자회견 때 대놓고 들이받았던 사건 때문에 방송가에서 나를 꺼렸다면.

지금에 와서는 굳이 방송 출연으로 인지도나 이미지를 챙길 필요가 없어진 거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 꼿꼿한 이미지로 굳어지면 곤란하니, 사회공헌 활동에는 참여해야겠지만.

[그리고 이건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데요. 연장계약 조건의 마지노선은 그대로라고 봐도 될까요?]

월드시리즈가 진행되던 도중, 다저스 측에서 다시 한번 연장계약 논의를 하자며 데릭을 불렀다던데.

최소한 트라웃만큼은 받아야겠다고 했더니, 일단 테이블을 접었다나.

“계약 규모 자체는 양보할 수 없지만, 옵트아웃과 기타 옵션 정도는 조정할 수 있어요.”

내가 관계자가 아니니 정확한 계약 내용은 알 길이 없지만, 알음알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트라웃도 옵션 자체는 규모에 비해 소박하다고 했고.

“대신 이쪽에서도 추가 조항 하나를 넣었으면 좋겠는데요.”

[말씀해주시면 다음 협상 때 전달하겠습니다.]

그 말에, 소파에 주저앉아 배를 긁고 있는 박도현을 곁눈질하다가 대답했다.

“아뇨, 말로 하긴 좀 그렇고. 이따 문자로 알려드릴게요.”

[네? 네, 편하신 대로 해주세요.]

추가 조항이라고 해봤자, 내 입장에선 별것 아니긴 한데.

굳이 박도현 앞에서 내 입으로 꺼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 *

월드시리즈가 끝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자, 다저스의 우승을 기념하는 카 퍼레이드가 열리기 전날.

달리는 차의 조수석에서 제리의 전화를 받았다.

[젠장, Koo. 네가 지금 피곤하다는 건 이미 들었고, 그래서 웬만하면 연락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도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다.]

“뭔데?”

[오늘 저녁에 클라라랑 약속을 잡았단 말이야. 가능하면 하루 종일 함께 있고 싶었는데 낮에는 일이 있대서.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Koo 너는 첫 데이트 때 뭘 해줘야 여자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

어지간히도 정신이 없는지, 차 안에 목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다다다 쏘아붙이는 제리.

근데 이 미친놈은 이걸 왜 지금 나한테 물어보고 난리야.

[다른 사람들한테도 물어봤는데 쓸만한 대답이 하나도 없어.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안 난다는 건 양반이고, 어차피 차일 거 괜히 돈 쓰지 말라는 소리까지 들었다니까.]

“겁나 너무하네. 누가 그래? 랜디?”

[아니, 동생이.]

동생이 말을 참 예쁘게 하네.

아이 낳은 지 일주일도 안 돼서 한창 정신없는데, 오빠라는 인간이 데이트 간다고 시시덕대며 이딴 거나 물어본다?

만약 나였으면 쌍욕부터 날아갔다.

[사실 이번 시즌 너한테 도움받은 것도 많고, 이런 일로까지 귀찮게 만들어서 미안하지만, 네 여자친구한테 클라라가 뭘 좋아할지 좀 물어봐 줄 수 있을까?]

“저기, 제리. 일단 진정하고. 너 혹시 클라라한테 오늘 가야 한다던 일이 뭔지 들었어?”

[응? 그야 모르지.]

“그 일, 내 여자친구 부모님 공항까지 모시는 거야.”

[어?]

“지금 두 분이랑, 여자친구랑, 나까지. 이렇게 다같이 차 타고 이동하는 중이고.”

[어……?!]

“운전은 클라라가 하고 있고, 나는 조수석에 탔어.”

중형 세단으로 다섯 명이 이동하는데, 내 덩치가 가장 크니 어쩔 수 없는 자리 배치였다.

목소리가 하도 커서 내가 뒷자리에 있었더라도 어차피 들렸겠지만.

끼이익.

때마침 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했고, 이나현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저기, Koo. 혹시 제가 하는 말 제리에게 전해주실 수 있나요?”

“그냥 말씀하셔도 들릴 것 같네요.”

“그런가요? 제리,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그래도 정 궁금하다면, 어디 보자…… 약속 장소 근처에 꽃집이 있었던가?”

[어, 저기, 음…… 이따 봐요…….]

클럽하우스에서의 쭈굴쭈굴한 모습으로 돌아간 제리와의 통화는 그대로 끊겼다.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운전 중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네요.”

“아뇨, 뭐.”

생글생글 웃는 얼굴의 이나현.

업무용 표정인 건지, 아니면 이런 제리가 진짜로 마음에 들어서 이런 표정이 나오는 건지 궁금하다.

“엄마랑 아빠는 티켓 좀만 더 여유롭게 잡지, 그럼 카 퍼레이드도 보고 갈 수 있었을 텐데…….”

미묘해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건지, 뒷좌석의 도아가 화제를 돌렸다.

나도 어지간하면 일정을 바꿔서라도 자리를 함께해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었는데, 상황이 따라주질 않았다.

다음날 LA발 인천행 티켓은 퍼스트까지 싹 다 매진됐고, 2~3일 뒤나 취소 티켓을 노려야 할 텐데.

“그럴 수가 있나. 장사하는 사람이 가게 오래 비우면 안 되는 법이야.”

두 분은 아들이 다저스와의 계약금으로 차려주고 간 가게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나이가 더 들어 힘에 부치면 모를까, 아직은 본인들이 직접 꾸려나가고 싶으시다고.

“엄마 아빠는 너희 둘만 잘 지내면 그만이다. 정말이야.”

출국 게이트 앞, 어머님이 나와 도아를 한 번씩 안아주면서 해주신 말씀이다.

다섯이서 출발해 셋이 되어 공항을 빠져나오는 길.

이번에는 도아와 함께 뒷자리에 앉았고.

체중을 너무 싣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도아의 어깨에 살짝 몸을 기댔다.

[부모님 가시니 살판 났네 아주. 내가 이 꼴은 못 보지.]

박도현이 끔찍한 거라도 보는 것마냥 부르르 떨더니, 뒷좌석을 뚫고 스르륵 사라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내 손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도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웬일이야? 오빠가 나한테 다 기대고.”

“그냥. 피곤해서.”

“피곤해? 도착할 때까지 좀 쉬어.”

요즘 도아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복잡한 기분이 드는데.

월드시리즈 우승 세레머니 이후, 클럽하우스에서 샴페인 파티까지 마치고 선수들끼리 한 해의 회포를 푸는 시간.

그때 로버트가 내게 해준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였다

‘내가 이번 시즌에 왜 이렇게 갑자기 말아먹었는지 궁금하지 않냐?’

잠시 둘만 남게 됐을 때, 로버트는 올해 내내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꿈에도 모르고 있던 아내의 우울증 투병, 그런 아내를 두고 한 해의 절반을 떠돌아다녀야만 하는 괴로움, 그리고 마침내 은퇴를 결심하기까지의 고민을.

‘너도 지금부터 고민해보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보기에 넌 빅리그에서 오래 뛸 것 같으니까.’

‘고민이요?’

‘좋은 선수가 될 건지, 행복한 선수가 될 건지.’

덕아웃 리더이자 에이스로서 많은 것을 짊어져야만 했던 로버트는, 자신이 좋은 선수였지만 행복한 선수는 아니었다고 했고.

‘과연 좋은 선수였는지는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보는 게 낫지 않겠…… 윽!’

나는 굳이 안 해도 되는 말을 덧붙여서 한 대 맞았다.

“도아야.”

“응?”

“너는 내가 좋은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 아니면 행복한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

그러자 도아는 으으으음, 하고 잠시 고민하더니.

내 얼굴을 자기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이듯 대답했다.

“오빠는 이미 나한테 충분히 좋은 선수니까, 내가 오빠를 행복하게 해줄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이런 애를 두고 내가 무슨 고민을 했던 걸까.

“고마워. 나도 진짜 잘할게.”

야구에도, 너한테도.

그렇게 후회 없는 삶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다시 야구의 신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야만 한다.

[어우, 씨. 너네 둘이 나 아침에 먹은 거 게워내게 하려고 짰냐?]

뒷좌석 너머 트렁크에서 박도현이 분위기를 깨는 헛구역질 소리를 냈지만, 아예 귀를 닫아버렸다.

* * *

메이저리거는 부와 명예가 주어지는 직업이다.

물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처럼, 선수들에게도 자기 나름의 고충이 많고.

그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가족 문제다.

‘로버트도 가족을 자주 경기에 초대하고 그랬다면 좀 나았을까?’

[그러다가 벤치 클리어링이라도 벌어지면 대참사일 것 같은데.]

1년에 162경기로 모든 프로스포츠 중 가장 많은 경기를 치르는데.

그중 절반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원정 경기이다 보니, 자연스레 가족과 함께할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로버트처럼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는 적긴 해도, 가정이 있는 선수들은 저마다 갈등이나 문제를 품고 산다고 봐도 된다.

[사실 가족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 전체에서 생기는 문제 같기도 해.]

‘그치. 나도 아직까지 연락하는 친구 중에 야구랑 관련 없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그러나 모든 선수가 그런 고민을 품고 사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딴 생각할 시간에 우선 모태솔로부터 탈출하고 봐야 할 선수도 있다는 거지.

“다들 인사해. 어제부터 내 여자친구가 된 클라라 리.”

“안녕하세요!”

고민을 너무 안 하다 보면, 제리처럼 어처구니없는 짓거리를 저지를 수도 있다.

오늘은 다저스의 월드시리즈를 기념하기 위해, 스포츠카와 픽업트럭, 이층 버스 여러 대를 동원해 진행되는 카 퍼레이드 날.

적어도 사귄 지 24시간도 안 된 여자친구를 데려오기에 적합한 행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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