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39화 (139/200)

139. 수확(2)

“제리.”

“네?! 아, 네.”

“혹시 저랑 같이 있는 게 별로 안 즐겁나요? 저는 즐거운데.”

“음, 저도, 네. 즐겁네요. 하하.”

“저를 배려해서 한국 식당으로 와주신 것도 감사하고. 꽃다발도 너무 예뻤어요. 집에 저 꽃을 전부 담을 만한 꽃병이 있는지는 찾아봐야겠지만.”

“어, 좀, 많았나요. 하하, 그래도, 저기.”

“아까 대충 세보긴 했는데. 49송이 맞죠? 제리 당신 등번호. 럭키 세븐의 제곱이라서 선택했다는 인터뷰를 본 기억이 나네요.”

“와, 잘 아시네요, 하하.”

“그러고 보니 당신과 메이저리그 동기인 Koo도 44번에, 지금은 비공식 결번 취급받고 있는 Park의 45번도 그렇고. 다들 40번 대에 몰려 있네요.”

“네, 그쵸. 음, 좋은 친구들이죠.”

“맞아요. 다저스의 팬으로서, 당신을 비롯해 2030년대 초반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선수들 덕분에 암흑기를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음, 네. 콜업 초기에는, 좀 그랬죠. 분위기라던가, 뭐 그런.”

“전부 지금의 마이크 올리버 단장이 스카우트 팀장 시절 데려온 선수들이기도 하죠. 그전 단장들은 진짜…… 아, 죄송해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험한 말 나올 뻔해서.”

“네, 그쵸. 앤드류 프리드먼 이후로는, 단장들이 좀.”

“그때 제리나 Koo마저 보내버렸으면 진짜로 다저스 팬 때려치웠을지도 몰라요. 특히 그게 걸작이었는데. 유망주 셋을 한번에 묶어 보내고 반 시즌짜리 투수 한 명 받아왔는데 보낸 선수들이 다 터진 거.”

“아, 그 레드삭스랑 했던 트레이드. 저도 기억나요. 선수들끼리도, 어, 단장이 정신 놓은 거 아니냐고 얘기 나왔는데.”

“특히 그 셋 중에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끼어 있었다는 게 가장 어이가 없죠. 뭐 돌고 돌아서 결국 필리스에서 터진 거긴 하지만, 그래도 30홈런 내야수를 공짜로 넘겨준 거나 다름없잖아요.”

“맞아요. 그놈은 또 다저스한테 원한 품어서, 인터뷰 때마다 헛소리나 하고.”

“다른 데서 빌빌대다가도 다저 스타디움만 오면 개같이 부활하는 것도 너무 짜증 나지 않아요?”

“그쵸. 재작년이었나? 한 5경기 연속 무안타였다가 다저스 원정 첫 경기에서 사이클링 히트 쳤을 때.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아요.”

“아, 그때 저도 보러 갔어요. 제리가 선발이었죠?”

“네네. 그때 경기 끝나고 나서 ‘오늘 투수 컨디션을 생각하면 정식 기록이라고 보기 어렵다’ 뭐 이런 개소리 지껄이는데 진짜 뒷목이 땡기더라고요.”

“아니 제가 원래 이러는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열 확 뻗치네요? 말을 그딴 식으로밖에 못 하나?!”

“크리스토퍼 이 개자식 같으니라고! 심지어 이제는 Koo한테 눈독까지 들이고!!!”

“개자식아!! 꼭 그렇게 다 가져가려 들어야 속이 후련했냐!!!”

* * *

“그걸 지금 우리보고 믿으라고?”

예전에 여자 소개받았을 때처럼 다저스 얘기에 급발진해서 떠들어댔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상대 여자도 똑같이 급발진하면서 긴장도 풀리고 얘기도 잘 통해서 사귀게 됐다니.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길래 이야기가 그쪽으로 빠진 거야?”

“아무 상관 없는 크리스토퍼는 왜 욕먹은 거고?”

“아니 뭐, 욕먹어도 싼 놈인 건 맞는데.”

황당해하기는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

일단 사귄 지 하루도 된 여자친구를 여기 데려온 것부터가 전례가 없던 일이고.

무엇보다 지금 이나현을 보면, 평소보다 조금 들떠 있긴 해도 제리 말대로 험한 소리 내뱉으며 급발진할 것처럼 보이진 않으니까.

“클라라, 슬슬 버스 타야 하니까 이쪽으로 와요.”

“아, 네!”

그래도 뭐.

아무리 동료라도 여자 문제는 사생활인 데다가,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서로 마주 볼 때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고, 무엇보다 제리가 말도 안 더듬고 자연스럽게 대하는 걸 보니.

[저딴 데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버스 타자! 빨리!]

생전 월드시리즈에 두 차례 진출했지만, 두 번 모두 고배를 마셨던 박도현이 잔뜩 흥분해 얼른 가자고 보챘다.

‘왜 이렇게 졸라대. 나 만나기 전에 키우던 애들은 월드시리즈 우승 못 해봤냐?’

[다저스 소속으로는 한 번도…… 아니, 못 들은 걸로 해.]

야구의 신들 사이에서도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는지, 곧바로 얼버무리는 박도현.

그러거나 말거나, 도아의 손을 붙잡고 버스 위층으로 올라갔다.

“어때? 경치 잘 보이지?”

“응. 근데 좀 떨린다.”

배시시 웃으며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는 도아.

‘버스를 고르길 잘했네.’

퍼레이드에 사용하는 차는 딱히 정해진 건 없지만, 보통 앞쪽에 스포츠카나 픽업트럭이 지나가고 이층 버스가 뒤따르는 편.

월드시리즈 MVP는 앞쪽에 내보내는 게 관례이긴 한데, 몰려든 인파 앞에서 도아랑 단둘이 있으면 부담스러울까 봐 일부러 버스를 골랐다.

아무래도 여러 선수들이 함께 타니까 시선도 좀 분산되고, 경치도 더 잘 보이니.

[팬 여러분,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포스트시즌 무대는 자주 밟으면서도 월드시리즈에서는 번번이 미끄러지기를 무려 17년. 드디어 여러분께 우승 퍼레이드를 선보일 날이 다가왔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고막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환호성 속에서 시작된 퍼레이드.

흥겨운 리듬을 연주하는 마칭밴드의 뒤를 따라, 감독님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들이 탄 차가 줄줄이 시동을 걸었고.

“버스 출발하겠습니다! 안전거리 유지해주세요!”

잠시 후 버스가 출발하면서, 펜스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팬들과 만날 시간이 찾아왔다.

“Let’s Go!!! Dodgers!!!”

“오늘 이 모습을 다시 보기까지 17년이 걸릴 줄 누가 알았겠어!!!”

“로버트!!! 제발 가지 마!!! 당신 없으면 이제 투수조 기강은 누구보고 잡으라고!!!”

“아니 이 미친 인간이 좋은 날 초상집 분위기 만들 일 있어?!”

유니폼과 깃발, 바디페인팅으로 무장한 팬들이 펜스에 기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어떻게든 선수들의 얼굴을 더 잘 보겠다고, 가로등이나 동상에까지 다닥다닥 붙어 있기까지.

[내가 살아 생전 이 모습을 못 봐서 성불을 못 한 거겠지……?]

생전 다저스의 선수이자 다저스의 팬이었던 박도현이 감격에 찬 얼굴로 중얼거린다.

다저스를 좋아하게 된 시기나 이유는 각각 다르겠지만, 우승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이 자리까지 와준 건 똑같으니.

오늘 하루가 그들에게 최대한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라며,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지는 방향을 향해 웃으며 포즈를 잡았다.

“Kooooooooo!!!!”

“MVP!!! MVP!!!”

“설마 내년에 다른 팀 가는 건 아니지?! 프런트가 돈 때문에 서운하게 굴면 기자한테 흘려!!! 보이콧이라도 할 테니까!!!”

한 손으로는 도아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을 팬들을 향해 흔들어주니.

상반신 탈의한 몸에 온통 다저 블루를 발라댄 과격한 팬이 눈에 핏발이 서서 외쳐댄다.

내가 활약한 게 1년도 안 되는 시간인데도 이 정도로 반응해주는 걸 보니.

그동안 팀에 쏟은 노력을 이 사람들이 알아주긴 하는구나 싶어, 살짝 감동할 뻔했다.

“근데 Koo 옆에 제리 맞지? 지금 설마 여자 손 붙잡고 있는 거야?!”

“뭐?! 제리한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거야 지금?!”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 비참하게 삶을 마감할 줄 알았던 제리가?!”

물론 사람들의 관심이 나한테서 제리로 옮겨 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제리 이놈은 도대체 평소 이미지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반응이 이따위야.

* * *

[(Photo) LA 다저스, 월드시리즈 우승을 축하하는 카 퍼레이드 개최!]

└ 여기 사진에 나 찍혔다! 이날 하도 소리 질러서 목 다 나갔는데!

└ 진짜 부럽다…… 기말고사 기간만 아니었어도 보러 갔을 텐데…….

└ 이런 날이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데 그깟 시험이 중요해?

└ 개소리 마라. 다저스가 Koo랑 제리 둘 다 붙잡으면 이 둘이 은퇴하기 전까지 최소 2~3번은 더 우승 쌉가능이거든?

└ 여기 캐나다야. 비행기로 다녀올 돈도 없고, 어찌 티켓 끊는다 쳐도 2박 3일은 걸릴 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해?

└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너 다저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어떤 팀을 이기고 우승한 건지 알기는 하냐?

[(Photo) ‘다저스의 새로운 에이스’ 제리 헤이즈택, 우승 퍼레이드에서 여자친구와 행복한 한때]

└ ???

└ 나 제대로 본 거 맞지? 제리한테 여자친구라고?

└ 나는 허락한 적 없는데?

└ 아니, 선수가 연애하는 데 니들 허락이 왜 필요해? 잘 어울리기만 하네.

└ 뉴비다! 뉴비가 나타났다!

└ 제리의 진정한 매력은 여자한테 차일 때 나온다는 것도 모르면서 다저스의 야구를 볼 생각이었나?

[제리 헤이즈택, 우승 소감 발표하는 자리에서 연인을 향한 애정 공세! “비록 우리가 연인이 된 지는 하루밖에 안 됐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날 이상으로 오래도록 함께할 생각.”]

└ 얘 진짜 뭐임???

└ 사귄 지 하루밖에 안 된 애를 월드시리즈 퍼레이드에 데려온 거였어?!

└ 저 여자는 그걸 또 따라왔고? 도대체 뭐 하는 여자야?

└ (링크) 누구인지 알아냈다. 이름은 클라라 나현 리. UCLA 재학생이자 한국인 고객을 주로 상대하는 개인 가이드라더라.

└ Koo 여자친구랑 같은 한국인에, 대학까지 같다고? 그럼 그쪽 소개로 알게 된 건가?

└ (링크) 나는 저 가이드의 예전 고객입니다. 내 아내와 함께 LA 갔습니다. 아내는 영어를 모릅니다. 그래서 가이드를 불렀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도움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 SNS에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영어가 틀렸다면 미안합니다.

└ 아저씨 자상하시네 LOL

[익명을 요구한 다저스의 한 선수, “제리가 데이트하는 여성이 있다고 이미 LA 기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지만,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 랜디 어서오고

└ 얘는 익명 요구해 봤자 정체 다 뽀록난다는 거 진짜 모르고 이러는 건가?

└ 근데 기자들한테 다 얘기한 건 자주 있는 일이니까 그렇다 쳐도, 한 명도 기사를 안 썼다는 건 좀 충격인데?

└ 충격받을 게 뭐 있어? 다른 지역 기자도 아니고 LA 기자잖아.

└ 제리가 여자랑 데이트 한 번 하고 그날로 차이는 게 LA 언론에서 기삿거리라도 될 줄 알았어?

* * *

우승의 기쁨과 여운에 젖어 있던 카 퍼레이드가 끝나고, LA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스토브리그를 마주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팀들은 이미 월드시리즈가 끝나자마자 출발했고, 다저스는 소식이 좀 늦었던 거지.

[클레망 파로, 다저스의 퀄리파잉 오퍼 수락! 연봉 2016만 달러 단년 계약으로 내년 시즌도 다저스에서 뛴다!]

다저스의 첫 FA 계약 소식은, 올해로 장기계약이 끝난 클레망이 QO를 받아들이며 현역 생활을 연장했다는 거였다.

본인이 팀에 대한 애정도 많고, 내년에도 뛰겠다는 의지도 강했으니, 여기까지는 많이들 예상했던 소식이겠지.

[놀런 그리핀(LAD) ↔ 마이크 셰링턴(CLE), 트레이드 합의!]

그다음으로는 올해 빅리그와 트리플 A를 오갔던 루키 투수 한 명이 클리블랜드의 백업 외야수와 트레이드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메이슨이 백업 역할을 잘해주긴 해도 파워가 아쉽단 소리가 심심찮게 나오니, 뎁스 보강 차원에서 데려온 거겠지.

그렇게 본격적으로 스토브리그의 시동을 걸 줄 알았지만.

[뭐 이렇게 잠잠해? 누구 데려온다는 소식도 없고.]

그 뒤로 한동안 몇몇 선수의 지명할당 외에는 유의미한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빅마켓 팀으로서는 그리 흔치 않은 행보이긴 한데.

‘돈을 아낄 이유가 있나 보지 뭐.’

데릭에게 듣기론, 다저스가 나랑 제리의 연장계약에 꽤나 관심을 보이는 모양이라나.

제리는 몰라도 나는 금액 측면에서 딱히 양보할 생각이 없으니, 아마 다저스 프런트에서도 머리를 쥐어뜯고 있겠지만.

정말 다행히도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따로 있지.’

MVP, 신인왕, GG, SS 등 개인 타이틀이 하나둘 발표되기 시작했으니까.

[솔직히 MVP 후보에도 못 든 건 좀 아니다 싶긴 해.]

‘별 수 있나. 이미 끝난 일인걸.’

올해 내셔널리그 MVP 후보는 다저스의 제리 헤이즈택, 컵스의 A.D. 존슨, 그리고 브레이브스의 앤드류 매닝.

제리와 존슨이 오랫동안 깨지지 않던 연속 퀄리티스타트 경기 기록을 경신하며 미친 듯한 페이스로 달렸기에, 이 두 명이 후보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나머지 한 자리는, 나와 나란히 3할―30홈런에 30―30클럽까지 도달한 앤드류 매닝의 차지가 되었다.

‘역시 임팩트는 홈런을 이길 수가 없나 보네.’

타율도 내가 좀 더 높긴 했지만, 턱걸이 30홈런과 42홈런은 좁히기 힘든 차이였던 거겠지.

그러나 만약 내가 앤드류 대신 후보에 올랐더라도 MVP를 손에 넣긴 어려웠을 거다.

[LA 다저스 제리 헤이즈택, 역대 12번째 MVP ― 사이 영 상 동시 수상!]

200이닝 이상을 던지며 ERA 1점대라는 미친 듯한 활약을 선보인 제리를 누르긴 힘들었을 테니까.

[NL 포지션별 타이틀 수상자 확정! Koo, 골드 글러브&실버 슬러거 수상 및 ALL MLB FIRST TEAM 선정!]

대신 유격수 타이틀은 죄다 쓸어담았지.

홈런 개수가 크리스토퍼에게 밀려서 실버 슬러거는 아슬아슬하겠다 싶었는데, 연속 타석 안타 기록의 임팩트가 가산점이 되었는지 내 차지가 되었다.

[이러면 내년에는 크리스토퍼한테 ‘왕관의 무게’는 못 써먹는 거겠지?]

‘그치. 그 타이틀 니가 전부 뺏었으니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가져온 게 하도 많으니 이 정도는 크게 티도 안 나긴 하겠지.

그렇게 개인 타이틀이 전부 발표된 뒤, 미국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공항으로 향했다.

“오랜만이다, 한국.”

사고 이후 처음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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