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겨울나기(2)
다저스는 올해의 윈터 미팅에서 소소한 트레이드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영입이 없었다.
당장 급한 영입은 은퇴를 선언한 로버트 켈리, FA 이적이 유력한 아이작 란드리를 대체할 선발 투수뿐이기도 했고.
‘선발 한 명쯤은 어떻게든 구할 수 있지.’
다저스의 마이크 올리버 단장은 FA로 풀린 투수들보다는 트레이드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이미 몇몇 팀과 구체적인 카드를 맞춰보고 있는 데다.
최악의 경우 외부 영입에 실패하더라도, 내부 육성 자원으로 5선발을 발굴해낼 수도 있다.
‘불펜도 이대로면 충분하고.’
올해 트레이드로 영입해 불펜의 마당쇠를 맡아준 앤서니 아우젤로와 2년 계약을 맺었고.
앤서니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며 대체 선발까지 기대할 수 있는 김희영을 신규 영입했다.
‘같은 한국인인 Koo의 존재를 어필했던 게 먹혔지.’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빅마켓 팀인 다저스의 단장인 그였지만.
올해 스토브리그에서는 유독 ‘가성비’를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단장님. 오늘도 유익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이 악마 같은 에이전트 놈의 고객 두 명을 반드시 붙잡아야 했으니까.
아무리 MVP 후보급 활약을 선보였다고는 해도, 타자로 전향한 지 고작 1년이 된 선수에게 트라웃 수준의 계약을 요구하면서.
‘묻고 더블로 가’를 외치던 구단주의 입을 다물게 만든, 데릭 애쉬튼의 고객을.
“그래. 적어도 지난번보다는 유익한 시간이 될 거야.”
그러나 이제 더는 계약 규모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어졌다.
에이전트가 제시하는 연봉을 조금이라도 깎는 것이 단장의 역할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구단주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으니까.
“다저스는 그쪽에서 제시한 12년 4억 3천만 달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네.”
본인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돈도 아니지만, 절로 손이 떨리는 금액.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 장기계약이 먹튀로 전락하는 순간, 올리버 단장의 프런트 경력도 그대로 끝장날 게 분명했으니까.
‘자네는 Koo가 이 돈을 주면서까지 잡아야 할 선수라고 보나?’
구단주가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던졌던 이 질문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것은 분명 올리버 단장 자신이었다.
‘Koo와 제리, 두 명 모두를 잡으려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입니다.’
나란히 내년에 FA 자격을 취득하는 구현기와 제리 헤이즈택.
두 선수를 노리는 빅마켓 구단들이 한둘이 아닌 이상, 경쟁은 무조건 붙을 수밖에 없다.
“우리로서도 무척 큰 투자이기 때문에 결정에 시간이 걸렸다는 걸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그럼 이제 세부 옵션에 대한 조정을…….”
“아, 잠시만요. 이 말씀은 꼭 드려야 해서.”
“또 뭐지?”
올리버 단장은 마음이 급하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구현기와의 계약을 얼른 마쳐야 제리의 계약을 두고 협상을 시작할 테니.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너무 의외인 나머지 그만 포커페이스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저희 선수가 추가로 요구한 조건이 있어서요.”
“조건…… 이라고?”
물론 옵션에 이런저런 조건을 주렁주렁 다는 경우야 흔하다.
다만 구현기는 평소 구단에 무언가를 요청하는 일이 거의 없는 선수였기에 의아했을 뿐.
‘애초에 미국 생활에 적응이 필요한 국제 FA도 아니고, 연봉도 이만큼 받아 갈 마당에 더 필요한 게 있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어서 말해보라는 듯 재촉한 올리버 단장이었지만.
“Koo는 이번 계약의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로, Park의 생전 등번호 45번의 영구결번 지정을 요구했습니다.”
“아……!”
데릭의 그 말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박도현의 영구결번 논의는 예전에도 한 번 나온 적이 있지만, 실제로 지정되지는 못했다.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보다 급한 일이 많다는 의견에는 모두가 동의했으니까.
사망 직후에는 추모 행사를 치르고, 완전히 어긋나버린 다음 시즌 구상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렇게 개막한 2036시즌 전반기는 역대급으로 말아먹는 바람에.
자연스레 영구결번 지정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박도현의 자리를 메우기는커녕 팬들이 탄식만 하게 만들었던 카일 캠프 대신, 타격 포텐을 가진 유격수가 된 구현기가 든든하게 자리를 채워줬고.
그 타격 재능을 바탕으로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가져오며, 다저스 팬들의 충성도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지금.
‘친구이자 동료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지켜보지 못했던 Koo가, 그 친구를 영구결번에 올려주며 한을 풀겠다는 건가?’
진실이 어떤지 올리버 단장으로선 알 길이 없다.
다만, 박도현을 그리워하던 사람들이 구현기의 마음 씀씀이와 동료 의식에 감동하도록 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다저 스타디움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알겠어. 이 건은 이사회에 긍정적 의견을 담아 건의해보도록 하지.”
“좋습니다. 그럼 이제 세부 옵션에 대해 합의해볼까요?”
구단주의 말마따나, 에이전트에게서 한푼이라도 깎는 것이 단장의 의무.
서로 마주 보는 올리버 단장과 데릭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 * *
도아가 짧은 겨울방학을 맞이한 12월의 어느 날.
호텔 방안에서 하루종일 뒹굴다가 저녁으로 먹을 치킨을 시켰다.
룸서비스가 편하고 빠르긴 한데, 원정 때 질리도록 먹어서 그런지 손이 안 가더라.
[너 그렇게 계속 밥 먹고 누워만 있으면 소 된다.]
‘진짜 소 되면 와규 정도는 돼야겠네. 내 몸값이 얼만데.’
귀국 직후 한동안은 아버지 집에서 지내다가, 도아가 귀국하고 나서는 호텔로 거처를 옮겼다.
사실 아버지야 그냥 계속 집에서 지내도 된다고 하시는데, 내가 도아랑 손만 잡고 자는 사이는 아니라서.
[화장실에 처박혀 있는 친구가 불쌍하지도 않냐?]
‘맘만 먹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거기 처박히게 할 수도 있어. 내 능력 몰라?’
[미친놈…….]
물론 도아도 가족과 지낼 시간이 필요하긴 하니, 오늘처럼 박도현이랑만 보내는 날도 있지만.
로비에서 치킨을 받아오자 금세 기분이 풀어져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박도현과 함께 방으로 돌아온 그 순간.
우우웅. 우우웅.
[에이전트 데릭]
화면 위로 떠오른 이름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직감했다.
LA 시간으로는 새벽인 지금, 나한테 직접 전화를 걸 만큼 중요한 일.
그건 아마도.
[Koo, 다저스가 저희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박도현의 재능을 이어받아 활약했던 지난 1년.
죽어라 굴렀던 그 시간이, 12년 4억 3천만 달러의 장기 연장계약이라는 보상으로 돌아왔다.
[지금부터 옵션에 대한 상세 설명을 드릴까 하는데, 시간 괜찮으실까요?]
“없어도 만들어야죠.”
갓 배달된 치킨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동안, 데릭에게서 계약서 파일을 받아 조항 하나하나를 꼼꼼히 따져가며 이야기를 나눴고.
그로부터 두 시간 후.
“데릭.”
[네?]
“제가 처음 내야수로 전향하겠다고 했을 때, 데릭이 저한테 해준 말 기억해요?”
전화 너머로 데릭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1년 전 그날, 데릭은 내가 타자 전향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끝까지 옆에 남아 있겠다고 약속해줬다.
“저를 버리지 않았던 당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 기뻐요, 데릭.”
[저야말로, 트라웃을 뛰어넘는 규모의 초대형 계약을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2037년 연말의 어느 특급호텔 방 안에서.
나의 미래가 다저스 원클럽맨으로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 *
[LA 다저스, Koo와 12년 4억 3천만 달러의 장기 연장계약에 합의!]
처음 타자 전향을 선언했던 2036년 겨울 이후, 전국 언론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유격수’ 구현기의 난데없는 초대형 FA 계약에 전문가들 ‘갑론을박’]
[3년간 메이저에서 증명한 Park은 10년 3억 달러, 고작 1년 뛴 Koo에겐 12년 4억 3천만 달러? 다저스의 이해할 수 없는 계약 기준!]
[Koo의 활약에 ‘사짜’ 굴욕당한 굿데이 베이스볼 패널 일동, “Koo가 일으키는 기적을 여러 차례 목격했지만, 이번 계약은 정말 확신이 서지 않는다.”]
[시즌 도중 경질된 前 파드리스 단장의 강도 높은 비판! “야수 전향 2년 차를 맞이하는 선수에게 장기계약은 미친 짓이다. 다저스는 소포모어 징크스의 가능성을 떠올리지도 못했나?”]
도아와 함께 미국으로 들어가, 계약서에 사인하는 모습이 공식 계정에 올라온 지 벌써 며칠.
이번 계약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기사들이 초 단위로 갱신되고 있다.
대부분은 다저스가 잠깐의 활약만 보고 지나치게 판돈을 걸었다는 반응이지만.
긍정적인 기사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다저스 팬 포럼, Koo의 장기계약 소식에 환호! “하늘나라의 Park이 우리에게 새로운 유격수를 선물해준 것 같다. 이번엔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월드시리즈 패장’ 안드레아 슐츠 블루제이스 감독, Koo 향한 이례적 칭찬! “그는 훌륭한 유격수이자, 동시에 훌륭한 투수이기도 하다. 그의 건투를 진심으로 빈다.”]
[Koo가 개인적으로 요구한 유일한 추가 옵션은? “Park의 영구결번 지정을 요구한다. 그에게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LA 다저스 마이크 올리버 단장, “Park의 등번호 45번은 이미 암묵적으로 비워두던 중이다. 빠르면 다음 시즌 안에 영구결번식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지난 월드시리즈에서 내 활약에 눈이 돌아가 버린 열성팬들은, ‘그래도 좀 과한 거 아니냐’는 소수의 팬들을 야알못이라고 몰아세우기 바빴고.
먼저 세상을 뜬 절친한 친구의 영구결번을 요청했다는 훈훈한 미담 역시 인터넷을 떠돌았다.
[헐, 뭐야아아. 나 모르게 이런 거 부탁했던 거야?]
뒤늦게 기사를 확인한 박도현이 징그러운 소리와 함께 질척거리길래,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주었다.
‘뭔 개소리야. 너 좋으라고 그런 거 아니거든?’
[어? 그럼 뭔데?]
‘니 계약 규모를 생각해봐라. 내가 유격수로 고작 1년 뛰고 너보다 훨씬 좋은 계약을 얻어냈는데, 입 싹 씻으면 욕먹기 딱 좋지 않겠냐?’
물론 박도현의 계약은 본인의 강력한 의지 덕분에 이뤄질 수 있었던 거지만, 대중들이 그걸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내가 박도현을 이렇게나 각별히 여기고, 그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다, 이런 식으로 물타기가 필요한 거다.
물론 박도현은 배신자라느니, 사람도 아니라느니, 생긴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느니 하면서 떠들어대긴 했는데.
다행히도 나한텐 듣기 좋은 말만 빼고는 하나도 신경 안 쓰는 재주가 있었다.
[Koo,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저도 Koo처럼 팀에 반드시 필요한 선수가 되겠습니다!!! ― 조나단 라틀리프]
[축하드립니다. 다음 시즌엔 경기장에서 Koo의 공을 받아낼 기회가 더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 브레이든 돌턴]
메시지마저도 시끄러운 조나단과 내 블래스 신드롬이 호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브레이든을 비롯해.
다저스의 동료들은 다들 응원과 부러움이 섞인 메시지를 보내왔고.
[(사진) Koo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픈 날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 ― 크리스토퍼 엘리엇]
SNS에 개소리와 함께 지멋대로 내 이름을 새긴 필리스 유니폼 사진을 게시하며, 다저스 팬들의 쌍욕을 수집하는 크리스토퍼를 비롯해.
친분이 있는 몇몇 다른 팀 선수들도 장난 섞인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으며.
[현기야, 형이 크보에서 번 돈 다 합쳐도 네 1년 연봉이 안 되네……? ― 김희영]
제주도에서 KBO 시절 후배들과 미니 캠프를 차려 몸을 만들 예정이라던 김희영은, 인생의 허무함이 뚝뚝 묻어나는 듯한 문자를 보내왔다.
‘다들 반응이 각양각색이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이 여러 가지로 나뉘는 가운데.
이번 계약이 다저스에게 있어 혜자 계약일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계약을 마치고 구단주와 단장, 몇몇 이사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할 때도.
백발이 성성한 구단주는 내게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는 이 계약에 어울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나?’
그때 이렇게 대답했었지 아마.
‘FA로 나가기 전에 싸게 잘 잡았다는 찬사를 듣게 해드리겠습니다.’
평소에 안 하던 호언장담이 나왔던 걸 보면, 역대급 계약에 나도 모르게 들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뱉은 말이니 책임을 져야지.
그 첫발을 떼기 위해, 애쉬튼 베이스볼 에이전시의 트레이닝 센터가 있는 플로리다행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