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겨울나기(3)
1년 만에 찾아온 에이전시 산하 트레이닝 센터.
시설이나 위치도 그대로였고, 눈앞에 서 있는 타격 인스트럭터 역시 작년과 똑같은 사람이었다.
“다저스가 그리 통 크게 나올 줄 알았으면 그냥 계약금 늘려달라고 생떼부리는 건데 말이야.”
작년에 나의 타자 전향을 도우면서, 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훌리안 로페즈.
말은 이렇게 해도, 이번 겨울 재계약에 흔쾌히 동의해줬다.
누구랑은 다르게 올스타전 초청이나 홈런 더비 배팅볼러 섭외 등등 이것저것 챙겨주기도 했고.
무엇보다 건강검진으로 조기에 암을 발견하고 치료까지 끝낼 수 있게 도와준 덕분이겠지.
“에이, 제가 누구 덕분에 이런 계약을 맺었는데, 설마 입 싹 씻겠습니까? 따로 보너스 챙겨드릴게요.”
“어흠, 흠. 꼭 그런 걸 바라고 한 소리는 아닌데 말이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챙겨주겠다는 보너스를 굳이 마다할 양반은 또 절대 아니지.
“뭐 아무튼. 지난 올스타전 때도 대충 말해두긴 했지만, 다음 시즌은 홈런을 늘린다는 생각보다는, 스프레이 히터를 노린다는 식으로 접근할 거다.”
훌리안은 내게 홈런을 만들기에 충분한 파워가 있다고 공언했었다.
삼진을 당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윙에 더 힘을 싣는, 타석에서의 접근법이 더 중요하다고도 했고.
즉, 여기서 장타력을 위해 따로 기술적으로 무언가를 추가할 필요는 없다는 것.
“네놈이 각각 밀어치기와 당겨치기로 만들어낸 인플레이 타구 비율은 알고 있지?”
“아, 네. 당겨친 타구가 1할 이상 높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몸으로 말해요’의 효과 덕분에 몸쪽 공을 비교적 쉽게 공략하면서 장타율 면에서 이득을 봤지만.
바깥쪽 공, 그중에서도 특히 무브먼트에 강점을 보이는 좌투수의 공은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이제는 투수가 어떤 코스로 어떤 공을 던지든, 네놈이 분간할 수 있는 한에서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목표로 프로그램을 구성했고.”
밀어치기와 당겨치기 모두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스프레이 히터.
선구안이 좋다는 전제하에, 공이 사방팔방으로 들어오더라도 일정 수준의 타구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만큼 스윙이 좀 중구난방이 되다 보니, 한 번 스윙 밸런스를 잃으면 되찾는 데 오래 걸린다는 단점도 있는데.
‘마침 이번에 스윙 밸런스를 보정해주는 재능이 들어왔잖아?’
스윙 밸런스가 어긋날 때마다 몸이 경고를 보내는 ‘스윙의 달인’.
여기에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한 훌리안의 지도가 더해지면 대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었지만.
“올해는 작년처럼 설렁설렁하지 않을 테니 각오해둬라. 작은 꼬맹이.”
부푼 가슴은 훌리안의 말 한마디에 원상복구됐다.
설렁설렁이라니. 작년에 했던 개고생이 아직도 뼈마디에 새겨져 있는데.
[넌 죽었다 이제.]
불길하기 짝이 없는 박도현의 말과 함께, 훌리안과 보내는 두 번째 겨울이 막을 올렸다.
* * *
“내가 몇 번 말했냐!!! 중간에 페이스 늘어지면 효과 팍팍 떨어진다고!!!”
훌리안의 프로그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강도 웨이트 트레이닝.
회복기 동안 느슨해져 있던 몸에 무자비한 자극이 쏟아진다.
“오케이! 그만! 2분 휴식!!”
철푸덕!
“허억! 허억! 허어억……!”
휴식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닥을 뒹굴었다.
힘이 풀릴락 말락 하는 타이밍에 딱 한 개 더 하고 끝내는, 절묘한 타이밍은 여전하다.
겨우겨우 숨을 고르며 느긋하게 구경하는 박도현을 향해 한탄했다.
‘저 양반 분명 S등급 재능 하나쯤은 있을 거야. 어쩜 사람 한계를 이렇게 잘 알지?’
[글쎄. 그건 그렇고 일어나지 그러냐? 지금 누우면 다음 세트 때 더 힘들 텐데.]
‘아오 씨……!’
구르는 입장에서야 죽을 맛이긴 한데, 훌리안과 다른 인스트럭터의 차별점이 바로 이런 데서 나온다.
남들이 기술적으로 보완이 필요한 부분을 채워준다면, 훌리안은 자기 이론에 맞게 선수의 몸을 단련시켜버리니까.
그 과정이 엄청나게 빡세서 문제지.
“점심 먹고 나서는 타격 훈련장으로 오도록!”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끝난 웨이트 트레이닝.
후들거리는 몸을 이끌고 식당으로 가니, 제리와 몇몇 선수들이 먼저 밥을 먹고 있다.
“오늘도 실컷 구르고 왔나 보네, Koo.”
“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식사 맛있게 하십쇼!”
“어 아냐. 앉아들 있어.”
작년에 로버트가 꾸린 캠프에서 시즌을 준비하더니, 그 경험이 인상 깊었는지.
올해는 자신이 후배들을 이끌어보겠다면서 같은 에이전시 소속 유망주들과 함께 몸을 만들고 있다는 제리.
밥 먹을 때 말고는 동선이 전혀 안 겹쳐서 몰랐는데. 적어도 나보다는 할 만해 보인다.
“제리가 잘해주냐?”
“네! 훈련도 그렇고 경험도 그렇고 정말 많이 도와주고 계십니다!”
괜히 찐따처럼 버벅거리거나, 허세나 부리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
투수들이 먼저 먹고 떠난 자리에서 후들거리는 팔로 포크를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제리는 아직 연장계약 소식이 없네?]
‘뭐 알아서 하겠지.’
제리의 충성심이 높다는 걸 이용해서, 올해는 연봉조정으로 가고 FA 때 붙잡는 거 아니겠느냔 분석도 나오긴 했는데.
어차피 데릭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그런 꼼수는 통하지 않을 거다.
‘당장은 내 훈련이 더 중요해.’
체력적으로는 죽을 맛이지만, 얻어가는 게 있으니 기꺼이 지옥불에 몸을 던지는 요즘.
조금이라도 더 쉬었다 가기 위해 서둘러 음식을 욱여넣었다.
* * *
월드시리즈 MVP와 함께 얻은 재능 중 하나인 ‘스윙의 달인’.
방 안에서 대충 배트를 휘둘러볼 때도 잘만 쓰면 대박이겠다는 예감이 들었는데.
훌리안과 훈련을 진행하면서 내 생각보다도 훨씬 쓸만하다는 게 드러났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스윙 훈련을 마치고 장비를 벗는 내 귀에 훌리안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원래부터 이해가 빠른 놈이긴 했는데, 이렇게 밸런스를 금방금방 잡는다고?”
상황에 따라 타격 메커니즘을 바꾸다 보니 나도 모르게 스윙에 힘이 덜 실릴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스윙의 달인’이 신호를 보내주니, 훌리안의 피드백도 더 빨리빨리 받아들일 수 있게 됐고.
덕분에 훌리안의 예상보다 빠른 페이스로 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4억 달러짜리 선수인데, 이 정도는 해야죠.”
“자랑이다 이 새끼야.”
이대로 시즌 개막 전 목표치만큼 폼을 끌어올린다면, 몸쪽과 바깥쪽을 가리지 않고 인플레이 타구 비율을 높일 수 있겠지.
대놓고 고의사구를 남발한다면 모르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상대에게 부담이 가는 전략이기도 하고.
“그놈의 투타겸업은 어지간하면 말리고 싶은데, 내가 말한다고 해서 네놈이 듣기나 하겠냐?”
“하하하. 그래도 출전 시간 관리는 해주시겠다고 감독님도 약속했어요.”
“좀 힘들다 싶으면 바로 드러누우란 말이야. 다저스는 네놈을 타자로 보고 장기계약을 제시했다는 거, 잘 알지?”
사람을 입에 단내가 나도록 굴려대는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포스트시즌에서야 멀티 이닝도 소화하긴 했는데. 정규시즌에서 그럴 일은 없을 거다.
필승조를 내기엔 애매한 상황에 어쩌다 한 번 등판하면서 투수 운용에 숨통을 틔워주는 것.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을 테고. 요구한다고 해서 들어줄 생각도 없지.
* * *
아무리 투수로서의 출전도 생각해야 한다지만, 투수로서의 훈련에 타격 훈련만큼 시간을 쓸 수 없다 보니.
너무 훈련 일정이 촉박해지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하기도 했다.
[‘스윙의 달인’ 못 뽑았으면 진짜 시간 모자랐을 수도 있겠는데?]
‘진짜 그랬으면 투구 훈련을 스프링캠프 때로 좀 미루든가 했겠지.’
아무튼, 그동안은 쉐도우 피칭과 롱토스 등 단계별 피칭 프로그램으로 공을 던질 만한 몸 상태를 만들었고.
오늘은 처음으로 불펜 피칭에 들어가는 날.
“50%부터 서서히 피치 올려주시고요! 포심부터 10구 가겠습니다!”
에이전시의 소개로 고용한 피칭 디렉터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투구판을 밟고 섰다.
공을 쥐고 있는 손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오른손.
[좌완투수로 복귀할 생각은 아예 접은 거야?]
‘생각을 접었다기보다는, 내가 좌타자니까 몸에 가해지는 부담을 생각하면 오른손으로 던지는 게 나을 수 있지.’
우완투수로서의 내가 실전에서 먹힌다는 건 작년 포스트시즌에 이미 확인했으니까.
애초에 내가 패스트볼 계열보다는 변화구 위주의 레퍼토리를 자주 써먹던 투수이기도 했고.
퍼어어엉!
“나이스! 나이스!”
퍼어어엉!
“공 좋습니다!”
그렇게 불펜포수의 호들갑과 함께 조금씩 속도를 늘려가며 한 구 한 구 던져가는데.
투구 수가 늘어날수록 어째 반응들이 조심스러워진다.
“구속이 벌써 작년만큼 나오네요?”
마지막 10구째를 던지고 나서, 피칭 디렉터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이었다.
스피드건 데이터를 보니, 마지막에 던진 공은 시속 91마일.
피지컬 훈련과 타격 훈련을 병행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임을 고려하면 페이스가 상당히 빨리 올라온 셈.
“구위도 많이 올라온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 공은 손이 저릿저릿하던데요?”
여기에 직접 공을 받아본 불펜포수의 증언까지.
‘어째 좀 긁히는 느낌이 들기는 하던데…….’
좋은 느낌이긴 한데, 정확히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생각만 하던 도중.
갑자기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아까랑 똑같이 10구 던져보겠습니다!”
“네? 루틴대로라면 이제 변화구로 넘어갈 차례…….”
“아뇨! 왼손으로요!”
그렇게 다시 몸풀기부터 시작해 똑같이 10구를 던져보고 난 후.
스피드건의 데이터를 비교해보면서,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인했다.
월드시리즈 MVP 수상 이후 뽑은 두 번째 재능, ‘데칼코마니’.
이게 타석뿐만이 아니라 마운드에서 공을 던질 때도 적용된다는 것.
‘그러고 보니 상세 설명란에도 나와 있었지.’
좌우 한쪽의 신체 능력을 반대 방향에서도 발휘할 수 있다고.
즉, 오른손으로 던져도 왼손으로 던질 때만큼의 구속과 구위를.
왼손으로 던지면 오른손으로 던질 때만큼의 제구력을 보장한다는 거다.
그렇다는 건.
“혹시 제가 스위치 투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보나요?”
꾸준한 훈련을 통해 투구 밸런스를 조절해준다면, 실전에서 양손 모두를 활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피칭 디렉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선수라면 몰라도 Koo라면 금방 적응할 수 있다고 봅니다. 좌완투수, 그것도 선발 경험이 많으시니까요.”
물론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특히 한 이닝 안에서 글러브를 바꿔 끼며 좌우를 오가다 보면 이래저래 꼬일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이미 좌완에서 우완으로 전향한 경험이 있는데, 적어도 그것보다는 쉬울 거라나.
‘내 손에 들어온 무기는 최대한 활용해야지.’
시속 95마일짜리 패스트볼에 낙폭 큰 커브, 리그 평균 이상의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타자가 약점을 보이는 쪽 손으로 던진다?
당장 유격수 때려치우고 선발투수로 전향해도 4억 달러가 아깝지는 않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