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43화 (143/200)

143. 겨울나기(4)

내가 플로리다의 트레이닝 센터에 처박혀 구슬땀을 흘리는 동안.

바깥에서는 한창 스토브리그의 시간이 흘러가는 중이었고.

다저스 역시 2037시즌을 함께했던 동료들 중 몇몇을 다른 팀으로 보내야만 했다.

[‘포스트시즌 4경기 ERA 0’ 아이작 란드리, 뉴욕 양키스와 4년 1억 4,000만 달러에 FA 계약 합의!]

먼저 시즌 후반 합류해서 든든하게 활약했지만, 그만큼 몸값이 불어난 아이작이 FA를 선언하고 이적했다.

사실 이미 떠날 거라고 예상했던 선수라 여기까지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LA 다저스 외야수 루카스 에머런, 3대 1 트레이드로 텍사스 레인저스행!]

작년에 주전 중견수로 출장하면서 2할 후반대 타율과 25홈런을 기록했던 루카스가 떠났다는 소식에는 솔직히 좀 놀랐다.

연봉 1,800만 달러에 계약 기간은 2년이 남았고, 포지션을 생각하면 솔직히 연봉 값은 해주는 선수였는데.

[가정이 있는 선수를 이렇게 갑자기 보내버리네.]

‘선수들이 계약서에 트레이드 거부권을 괜히 넣는 게 아니야.’

다저스가 원래 차라리 연봉을 더 주면 줬지, 트레이드 거부권은 죽어도 안 주는 구단이다 보니. 본인도 이미 감안한 상황일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좀 찔리긴 하네.’

내 연봉이 갑자기 훌쩍 뛰어오른 게, 이번 트레이드에 영향을 안 미쳤다고는 할 수 없겠지.

선수단 연봉 총액을 줄이긴 해야 할 텐데, 고액연봉자 중에서 대체자가 있고 다른 팀이 눈독 들일 만한 선수는 루카스뿐이었으니.

그러나 며칠 후.

루카스를 이렇게 급하게 보내야만 했던 이유가 나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LA에 다녀올게.”

같은 트레이닝 센터에서 후배들과 캠프를 차린 제리가 뜬금없이 찾아오더니 남긴 말이었다.

가면 가는 거지 왜 굳이 나한테 보고하는 거냐고 황당해하려다가.

얼굴을 보자마자 딱 느낌이 왔다.

‘아, 얘도 계약하러 가는 거구나.’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듯 복잡한 표정.

FA 권리를 포기하는 거니 마찬가지니까, 어지간히 연봉을 챙겨주지 않으면 안 될 테니.

페이롤 관리를 위해서라면 루카스를 보내야만 했겠지.

[그럼 이번 시즌에 FA 대어는 못 데려오는 거 아닌가? 선발도 두 자리 빌 텐데.]

‘그거야 프런트가 알아서 할 일이지.’

작년의 다니엘처럼 저평가된 선수를 데려오든, 내부 육성 자원에서 선발감을 골라내든.

어쩌면 기회를 잡는 신인이 나타날 수도 있고.

“그래서 말인데, 나도 서두르긴 하겠지만 토요일은 돼야 도착할 것 같거든.”

“그게 왜? 그리고 굳이 서두를 거 있나?”

“나 혼자면 상관없는데, 올해는 내가 후배들을 데리고 있잖아.”

어차피 훈련 자체는 트레이너가 주도하니까, 제리가 없어도 진행하는 데 문제는 없을 텐데.

아무래도 본인이 직접 캠프를 차리는 게 처음이라 그런지.

후배들만 남겨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혹시 너 피칭 훈련 때 우리 애들이랑 같이해볼 생각 없어?”

* * *

제리의 부탁대로 후배들과 합동 훈련을 진행하기로 한 날.

“안녕하십니까!!!”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리랑 함께 있을 때는 편해 보이던 후배들은 딱딱하게 굳은 채 목소리를 높였고.

“하하, 안녕하세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같이 진행하게 됐네요.”

“아, 네. 반갑습니다. 하하…….”

뜬금없이 훈련장을 공유하게 된 양쪽 스태프들은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분위기가 별로 좋진 않은데?]

‘이렇게 될 거라고 분명 얘기했는데.’

지난 시즌을 치르면서 알게 된 건데,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루키들이 많더라.

브레이든이나 조쉬한테 듣기로는, 외모가 좀 한성깔 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다. 벤치 클리어링 때 날뛰는 것 때문에 쫄았다나.

이 후배들이 조나단처럼 넉살 좋은 스타일이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어이, 투수들. 우리 작은 꼬맹이한테 돈이라도 뜯겼냐? 왜 그렇게들 찌그러져 있어?”

멀찍이 벤치에서 빈둥대던 훌리안이 끼어들었다.

저 양반은 본인 업무 끝났으면 돌아갈 것이지 왜 남아서 구경하고 계신대.

“뜯긴 누가 뜯습니까? 제 연봉 몰라요?”

“그렇게 연봉 많이 받는 놈이 내 월급도 안 올려주냐? 그래서 살림살이 좀 나아졌어?”

“그래서 제가 따로 챙겨드렸잖습니까. 제발 구경하러 오셨으면 구경만 해주세요. 웬만하면 돌아가 주시고요.”

이번 오프시즌 최대 규모 계약을 맺은 타자와 온갖 빅마켓 구단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던 인스트럭터가 덤앤더머마냥 투닥대는 게 웃기기라도 했던 걸까.

어정쩡하게 서 있던 후배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온다.

“다 웃었으면 자기 할 거 알아서 시작하자. 너희들이 사랑하는 제리 선배가 아무래도 니들 농땡이 피우는지 감시하라고 나 부른 것 같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스태프들과 함께 시작된 훈련.

처음엔 서로 힐끔거리다 눈이 마주치는 민망한 상황이 발생했는데. 하다 보니 금방 익숙해졌다.

남 신경 쓰면서 할 만큼 만만한 훈련이 아니기도 하고.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Koo.”

“아, 네. 먼저 들어가셔도 돼요.”

전업 투수들과 비교하자면 훈련량과 강도가 적다 보니, 후배들보다 한발 앞서 끝난 훈련.

훌리안은 구경하다 질렸는지 이미 돌아가고 없길래, 비어 있는 벤치로 가서 구경했다.

[내가 이쪽 훈련은 잘 모르는데, 쟤들 잘하고 있는 건가?]

‘어. 애초에 데릭이 싹수 괜찮은 애들만 데려오잖아.’

우리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에이전트들은 드래프트 상위 순번이 기대되는 유망주들을 미리 포섭한다.

물론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에드윈 쟤도 좀 치네. 15라운드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작년 오프 시즌에 배팅볼 투수로 고용했다가, 데릭에게 성실한 태도를 인정받아 계약을 맺은 에드윈 니콜슨.

미국 투수로서는 특이하게 포크볼을 결정구로 삼는 우완 피네스 피처인데.

카일 캠프의 트레이드 카드로 파드리스에서 넘어와, 기대 이상의 성장세를 보여주며 스프링캠프 초청까지 받았다.

[아무래도 같은 팀 애라서 눈이 더 가지?]

‘그야 뭐…….’

슬슬 마무리할 분위기 같길래, 아이스박스에서 물병을 챙겨 다가갔다.

“자, 고생들 했다.”

“가, 감사합니다! Koo!”

“잘 마시겠습니다!”

다들 물병을 따고 입에 가져가기까지 기다렸다가.

“한 병에 120달러.”

푸우우웁!

이딴 근본 없는 헛소리에 속아 넘어가는 걸 보면, 애들은 애들이다 싶기도 하고.

기침하는 놈들의 상태가 괜찮아지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나한테 뭐 궁금했던 건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제리가 고작 훈련하는 거 좀 지켜봐달라고 나를 불렀을 것 같지는 않더라.

내가 지금은 내야수이긴 해도,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투수로 보냈고. 루키 시절부터 부상 없이 꾸준히 활약해온 만큼 나한테도 뭔가 배울 만한 노하우가 없진 않을 텐데.

같은 센터에서 훈련하더라도 데려올 구실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말문 좀 트여볼 심산이었겠지.

“저기, 그럼 혹시…… 커브 어떻게 던지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에드윈이 조심스럽게 묻자, 나머지 투수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얘네들 말고도 탐내는 사람이 많았던, 내 투수 시절 결정구.

“그립 자체는 전혀 특별할 게 없는데…….”

손바닥 근육에 힘을 주는 정도에 따라 놓는 타이밍을 조절한다, 머리 뒤쪽에서 손목을 이 정도 각도로 움직인다 등등등.

내가 커브를 던지는 요령을 최대한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줬다.

[그렇게 하나하나 다 가르쳐줘도 괜찮냐?]

‘괜찮아. 알려줘도 어차피 못 던져.’

투구라는 게 결국 감각에 의존하는 거라서, 내가 백날 설명해줘도 본인한테 안 맞으면 따라 던질 수가 없다.

내가 제리의 커터가 탐나서 한동안 계속 매달렸는데도, 결국 시늉만 낼 뿐 똑같은 위력은 못 냈던 것처럼.

“궁금한 거 또 있으면 오가다 마주쳤을 때 물어보고.”

“예!!! 알겠습니다!!!”

후배들에게 내 커브의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5분.

그 5분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나는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있었다.

* * *

[LA 다저스, ‘차세대 에이스’ 제리 헤이즈택과 8년 2억 5천만 달러에 장기 연장계약 체결!]

이미 한발 앞서 12년짜리 계약서에 사인한 나에 이어, 제리의 장기계약 소식까지 발표됐고.

사람들은 나 때랑은 좀 다른 의미로 왈가왈부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MVP랑 사이 영 동시에 탄 것치고는 연봉이 좀 짜지 않냐?]

박도현의 말대로, 오히려 제리가 양보를 좀 많이 한 거 아니냐는 거지.

비록 내가 단 한 번도 형 대접을 해준 적은 없고, 앞으로도 할 생각 없지만, 어쨌든 제리는 대졸이니까 계약 기간이 짧은 건 이해하더라도.

연봉은 나랑 어느 정도 비슷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대신 제리한테는 옵트아웃이 있잖아.’

옵션 관련해서 협상을 이어간 끝에 옵트아웃 조항을 빼야 했던 나와는 달리, 제리는 3년 차에 옵트아웃을 실행할 수 있다.

투수로서의 전성기에 다시 한번 시장에 나갈 수 있는 것.

‘제리 그놈 성격 보면 옵션 행사를 안 하거나 하더라도 다저스랑만 협상할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내가 그것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지.

금전적인 부분보다 원클럽맨이라는 명예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수들이 어디 한둘인가.

“이봐, Koo!”

얘도 양반은 못 되는지, 딱 지 얘기하는 타이밍에 나타났다.

“기사 봤다, 제리. 연장계약 축하…….”

“그건 됐고! 너 대체 에드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갑자기 뭔 소린가 싶어 얼타는 사이, 제리한테 끌려가듯 실내 불펜으로 향했고.

때마침 마운드에 서 있던 에드윈이 와인드업에 들어가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흐으읍!!!”

기합과 함께 공을 뿌리는 에드윈.

머리 뒤쪽에서 앞으로 넘어오는 손목이, 어딘가 익숙한 각도로 꺾이는가 싶더니.

스트라이크 존 위쪽을 향해 빠르고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는데.

퍼어엉!

정작 공이 포수 미트에 틀어박히는 위치는 존 아래쪽.

폭포수 같은 낙폭을 자랑하던 전성기 내 커브와 거의 똑같은 코스였다.

[야야야, 잠깐만! 한 번 더 던져보라 그래!]

박도현이 호들갑을 떨며 타석으로 들어갔고.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에드윈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한번 그 커브를 던졌다.

퍼어어엉!

[와, 씨. 솔직히 니 커브만큼 지저분하진 않아서 몇 번 보면 타이밍은 맞을 것 같은데. 낙폭 하나는 죽이네.]

박도현 입에서 ‘까다롭다’라는 말이 나오면, 구종 가치가 최소 메이저리그 상위권은 된다는 뜻.

게다가 아직 몸이 완전히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라는 걸 감안하면.

앞으로의 연습 방향에 따라 지금보다도 더 위력이 커질 수도 있다.

‘포크볼을 곧잘 던지던 애라 종 변화구에 대한 감각을 잘 캐치한 건가?’

그건 그렇고.

내가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해주긴 했지만, 어쨌든 한 번 듣고 이만큼 카피해낸 건 대단하고. 잘했는데.

“근데 난 갑자기 왜 끌고 왔냐?”

굳이 제리가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찾아올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심지어 ‘우리 애 커브 함 봐라, 디진다 아이가’ 뭐 이런 극성 학부모 같은 뉘앙스도 아니고.

은은한 빡침이 섞여 있다고 해야 하나.

“몰라서 물어?! 내가 커브 좀 알려달라 했을 때는 알쏭달쏭한 소리만 하더니, 얘한테는 도대체 뭐라고 알려준 거야!”

극성 학부모가 아니라 같은 반 애새끼였다.

한 팀의 에이스로서 장기계약까지 맺고 온 주제에, 후배가 잘하면 칭찬을 먼저 해줄 것이지.

“니가 말하는 그 알쏭달쏭한 소리 해줬다, 이 등신아. 애초에 너랑 나랑 몇 년을 봤는데, 내 노하우를 니가 더 들으면 들었지, 쟤네한테 뭘 더 해주겠냐?”

“그, 그럼…….”

“애초에 설명만 들어서 던질 수 있었으면 쟤처럼 한 번에 됐겠지. 나도 니 커터 계속 탐냈는데도 결국 못 배웠잖아. 내가 그렇다고 너 탓한 적 있어?”

“그건 아니지만…….”

“제발 철 좀 들어라. 애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팩트 폭격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침울해진 제리.

여기선 제법 듬직한 선배 노릇을 하고 있었는지, 그 모습을 본 후배들은 좀 당황한 눈치다.

“에드윈 너도 입꼬리 내려, 이 자식아.”

“네, 네헤?”

마운드에서 내려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에드윈한테도 쏘아붙였다.

설마 자신한테 불똥이 튈 줄은 몰랐는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뒤집힌다.

“지금 당장 그 공 실전에서 못 써먹는 거 너도 알지? 실실거릴 시간 있으면 이걸 어떻게 자기 걸로 만들어야 하나 고민부터 해야지. 안 그래?”

“죄, 죄송합니다!”

에이스조차 배우지 못한 변화구를 한 번에 배웠다, 뭐 이런 자신감을 갖는 건 좋은데.

그게 지나치면 태도가 바뀔 수도 있거든.

시무룩해진 제리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들썩인 에드윈처럼.

‘나 훈련하기도 바쁜데, 보모 노릇에 투수 코치까지. 아주 난리 났네.’

아직 시즌이 열리려면 한참 남았는데.

야구의 신이 연봉 값이나 하라는 계시라도 내리는 듯, 그야말로 할 일이 풍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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