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다시, 봄(1) >
‘너 나중에 국대 뽑히고 해서 병역특례 받으면 훈련소 가야 되거든? 거기 가면 아마도 시즌 전에 몸 만드는 거랑 느낌이 비슷할 거다.’
한국에서 묘교 방문 행사를 마치고 단둘이 만났을 때, 김희영이 해준 말이었다.
‘뭐가 비슷한데요?’
‘하루는 그럭저럭 빨리 가는 것 같은데, 일주일은 엄청 길게 느껴지고, 퇴소는 진짜 오는지 안 오는지 모를 정도로 까마득한 거?’
이번 연장 계약이 끝나는 시점에서 내 나이가 만 37세.
물론 미국 영주권을 따면 병역을 미룰 수는 있는데.
만약 병역특례를 못 받으면 계약 종료와 거의 동시에 입대해야 할 테니, 김희영의 말에 관심이 갔다.
‘그럼 형님은 시즌 전에 몸 만드는 거랑 군대 훈련소, 뭐가 더 할 만했나요?’
그러자 김희영은,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얘 좀 봐. 당연히 훈련소지. 거기선 장인어른 따님 전화 안 받는다고 혼날 일도 없거든?’
* * *
김희영의 말에 전부 동의하긴 힘들었지만.
적어도 시간이 오지게 안 간다는 것만은 100퍼센트 공감할 수 있었다.
작년보다 타자로서 한층 발전하기 위해 훌리안과 함께 보내는 하루하루.
끝나지 않는 겨울이라는 게 무엇인지 몸소 체험했으니까.
“이따위로밖에 못 할 거야?! 네놈이 아직도 유망주인 줄 알아?! 타석에서 삼진이라도 한 번 당했다간 네놈 SNS 댓글창이 돈값 못 하는 벌레새끼라는 조롱으로 가득할 거다!!!”
훈련소에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빡세진 않다는 말도 사실인 듯하고.
적어도 교관이 이런 식으로 윽박지르지는 않겠지.
“진짜 이게 최선이야?! 너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어?! 자꾸 나 실망시킬 거야?! 대답 안 해?!”
“아닙니다······!”
“지금 대답이 나와?! 아직 내가 덜 굴렸구만?! 또또또 허리 무너지는 거 봐라!!! 자세 무너지면 한 세트 추가한다는 거 빈말로 들렸나 보다?!”
아니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아무튼, ‘체력은 근력’의 영향으로 죽어라 굴려도 다음날 어떻게든 회복된다는 걸 간파했는지, 작년보다 훨씬 빡세진 훌리안의 트레이닝을 견뎌내는 한편.
시간이 남을 때면 같은 센터에서 진행 중인 제리의 미니 캠프를 찾아갔다.
“저기 그, Koo처럼 타자들 배트를 잘 끌어내는 커브는 도대체 어떻게 던져야 할까요?”
“타자들 배트? 그거야 스윙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고 가면 휘두르게 되어 있어. 구종이 중요한 게 아니라, 투 스트라이크에서 먹음직스러운 공을 던지는 게 중요하지.”
“그래도 일단 타자들 눈을 속이려면 무브먼트를 늘리는 게 중요하겠다 싶어서······.”
“그걸 하루아침에 어떻게 늘리냐? 그리고 일단 접근법 자체가 틀려먹었어. 내 공을 똑같이 따라 던진다기보다는, 네가 던지기 편하고 제구가 잘 되는 방향으로 요령을 쌓아가는 게 먼저지.”
내 커브를 고작 5분 만에 비슷하게 흉내 낸 에드윈.
애가 성실하긴 한데 하위 지명자라 그런가, 자꾸 정석으로 안 가고 야매로 손에 익히려 들길래. 제대로 연습하고 있나 종종 감시하게 됐다.
[애가 마이너에서도 내구성은 괜찮다고 했으니, 잘만 키우면 선발 한 자리 차지하겠는데?]
‘본인 하기 나름이지.’
이렇듯 내 훈련과 함께 남의 훈련까지 도와주면서 기나긴 겨울을 보냈지만.
아무리 그래도 쉬는 날 없이 달릴 수는 없는 법.
“오빠! 세상에! 얼굴 반쪽 된 거 봐!”
“얘가 뭔 소리래. 나 5키로 넘게 증량했는데.”
“아니, 보통 오랜만에 보면 이런 소리 하는 것 같길래······.”
도아네 학교가 있는 LA에서 이곳 플로리다까지 비행기로만 거의 5시간이니 자주 보진 못하지만.
본인 입으로 학점 따위 포기한 지 오래라던 이나현처럼 매주 찾아오지는 않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내서 찾아와준다.
“어, 제리 목격담 떴다. 얘는 진짜 여기저기 잘도 돌아다니네. 여자친구가 가이드라 그런가?”
“진짜네. 근데 글 뉘앙스가 왜 이래? 메이저리그 스타가 아니라 무슨 희귀 야생동물 발견한 것처럼 써놨네.”
메이저리그 스타가 나이 서른 다 되도록 모태솔로로 지내면 이렇게 된단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제리의 명예를 생각해 입으로 뱉진 않았다.
“내년부터는 서부에 따로 훈련장을 잡을까 봐. 애리조나나 뭐 이런 데로.”
“응? 지금까지 여기가 편해서 고른 거 아니었어?”
“이것저것 챙겨주는 게 편하긴 했는데, 그거 다 따로 사람 쓰면 해결되는 거니까. 너랑 자주 못 만나는 게 제일 힘들어.”
“아, 뭐야아. 오빠 나 없다고 외로웠구나? 내가 어떻게든 시간 빼서 더 자주 올게.”
“그건 기쁜데. 너 지금 손이 어디로 가냐? 그런 못된 손 어디서 배웠어.”
“맨날 나한테 운동선수 스태미나가 어쩌고 하더니. 이젠 힘들어? 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대로 보낼······ 꺅!”
김희영이 한 말 중에서 유일하게 공감이 안 됐던 부분이 바로 이거다.
장인어른 따님이랑 연락 못 하는 게 메리트일 수가 있나.
얘라도 못 만나면 내가 이 생활을 어떻게 견뎌.
* * *
아무리 훈련소의 시간이 바깥과는 다르게 흘러가더라도, 전역을 못 하고 평생 눌러앉아 사는 사람은 없듯이.
죽도록 안 가던 훌리안과의 시간도 결국 끝을 맞이했다.
물론 이 2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많은 걸 얻었다.
지난 시즌을 치르는 동안 눈에 띄게 빠졌던 근육이 돌아온, 190cm에 95kg의 탄탄한 몸.
이 거지 같은 훈련도 견뎠는데 뭔들 못 하겠냐는 독기.
그리고 훌리안의 진심 어린 극찬.
“내가 도대체 뭘 키워낸 거지······?”
나한테 직접 해준 말은 아니고, 혼잣말로 중얼대는 걸 멋대로 엿들은 거지만.
‘작년엔 어디 가서 타격으로 욕은 안 먹을 거라 그랬었지 아마?’
그리고 그해 나는 3할 타율과 30홈런을 동시에 기록했었지.
수비 훈련에 적지 않은 시간을 썼던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타격에 좀 더 집중하기도 했으니.
과연 지금의 나는 타자로서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일까.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는 가운데, 스프링캠프가 열리는 애리조나로 향했다.
“컨디션은······ 제가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군요.”
“그럼요. 완벽하죠.”
올해 스프링캠프에 입소하는 길도 데릭과 함께였다.
작년에는 언제 터질지 모를 요주의 대상이었다면, 올해는 애쉬튼 베이스볼 에이전시 사상 최대 규모 계약을 선사한 고객으로서.
“이제는 명실공히 슈퍼스타 반열에 올랐으니, 작년만큼 공격적인 질문이야 안 들어오겠지만. 그렇다고 호의적인 질문만 날아오진 않을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Park의 10년 3억짜리 계약을 두고도 과도한 투자라고 떠들던 놈들이 수두룩했는데.”
“비즈니스가 뭔지도 모르는 얼치기들이죠. 그래도 Koo는 언론을 상대해본 경험이 많으니, 알아서 잘 대처하실 거라 믿습니다.”
데릭은 내가 다저스와 맺은 계약에 대해 어떤 각오를 품고 있는지, 시즌을 앞두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안다.
바쁜 와중에도 종종 트레이닝 센터에 들러 내 훈련을 지켜봤으니까.
다만 다른 사람들이야 그걸 알 도리가 없고.
“Koo, 이번 연장계약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날아오지.
대놓고 꼽을 주는 건 아니더라도, 내 계약이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비꼬려는 의도가 보인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 다저스가 제 가치를 좀 더 후하게 쳐줬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4억 달러 넘게 태워주신 우리 구단주님을 위해 살짝 기름칠부터 해주고.
“그래서 저는 연장계약도 좋지만, FA까지 남은 1년 동안 제 가치를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작년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그다음은 오프 시즌 동안 쌓아둔 자신감을 드러낼 차례.
게다가 거짓말은 한마디도 안 했다.
내가 올해도 잘할 자신 있고, FA 시장 나가서 가치 평가 제대로 받겠다는데.
경쟁 붙으면 못 잡는다는 생각에 몸이 달아서 4억 3천만 달러짜리 계약을 받아들인 건 다저스 쪽이지.
“이미 계약은 맺었고, 이제는 다저스가 옳은 선택을 했다는 걸 증명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선언하고는 추가 질문도 안 받고 훈련장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뒤에서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싸그리 무시하면서.
[너 괜찮냐? 뭐 이렇게 어그로를 빡세게 끌어.]
‘내가 설마 그거 가지고 쫄겠냐? 이제는 어지간히 잘하지 않으면 욕먹는 사람이 됐는데.’
원래 고액연봉자들 역할이 그런 거다.
팀 성적이 괜찮을 땐 팀원들 덕, 연패라도 당하면 내 탓.
그런 불합리한 대우에 멘탈이 흔들릴 것 같으면 애초에 구단에서도 장기계약 제안을 안 하지.
[예상은 했는데, 좀 허전하구만.]
투타겸업을 선언하긴 했지만, 투수는 어디까지나 옵션이고 기본적으로는 야수이기에, 야수조 소집일에 맞춰 팀에 합류했고.
이미 먼저 온 선수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클럽하우스를 어슬렁거리는데.
로버트나 루카스 등등, 몇몇 익숙한 얼굴이 더는 없다는 걸 실감했다.
특히 로버트가 없으니까 분위기 자체가 다르네. 예전엔 입소 전날부터 긴장하고 그랬는데.
“이게 누구야! 우리 4억 달러짜리 유격수님 아냐!”
물론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선수들도 있었다.
올해 2년짜리 연장계약을 맺은 베테랑 불펜 앤서니 아우젤로.
새로운 투수조 조장으로 뽑히기도 한 그가 내 등을 후려치며 살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몸을 아주 짱짱하게 만들어왔는데? 작년 이맘때랑은 차원이 달라.”
“뭔 소리예요, 앤서니. 작년에는 스프링캠프 다 끝나고 트레이드로 왔었잖아요.”
“으하하하하! 이걸 들키네.”
함께 라커룸으로 향하는 길.
앤서니로부터 새로 팀에 합류한 투수들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물론 올해 1년 270만 달러 계약으로 팀에 합류한 김희영도 그중 한 명이었고.
“휴이한테 들었어.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면서? 메이저리거를 두 명이나 배출한 거 보니 엄청난 명문인가 본데?”
원래부터 ‘Heui―Young’이라는 이름이 발음하기 힘들다면서 휴이라고 불리던 김희영이었는데.
이번 시즌을 앞두고는 아예 등록명까지 바꿔버렸다나.
“뭐 그렇죠. 앤서니가 보기엔 어때요? 적응 잘하는 것 같아요?”
“응. 무난하게 지내고 있어. 몸도 꽤 잘 만들어 온 것 같더라.”
박도현 말고 다른 한국인 선수랑 함께 뛰는 건 처음이다 보니,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는데.
정작 라커룸에 도착해 가장 먼저 마주친 뉴페이스는 김희영이 아닌 다른 투수였다.
“오랜만이네, Koo. 설마 너랑 같은 팀에서 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작년 시범경기에서는 나한테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를 허용하고, 정규시즌에선 다저스 상대 9이닝 1실점 도미넌트 스타트를 하고도 불펜의 방화로 승리투수가 되지 못했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선발 투수, 호세 리카르도.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그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내게 악수를 권했고.
“너 뭐냐? 니가 왜 여기 있어?”
“어?! 아니, 왜냐니······. 나 지금 유니폼 보면 알잖아, 며칠 전에 트레이드돼서······.”
“농담이야.”
상대로서 만날 때마다 호구마냥 안타를 퍼주길래 슬쩍 건드려봤는데, 실제 성격도 그런 면이 좀 있다.
같은 지구 팀끼리는 트레이드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누가 그랬던가.
작년 카일 캠프를 파드리스로 보냈던 트레이드에 이어, 올해도 투수조 소집 직전 같은 지구 팀 디백스에서 트레이드로 선발을 영입했다.
“노, 농담 맞지? 난 또. 아무튼 이제 같은 팀이 됐으니 잘해보자고. 혹시 몰라? 내년에도 여기 남아서 한동안 계속 함께 뛸지.”
“응, 다저스 나한테 4억 태워서 너까지 잡을 돈 없어. 그냥 올해 FA로이드나 제대로 맞고 한몫 챙겨 가라.”
“말을 꼭 그렇게 해야 돼······?”
비록 FA까지 1년밖에 안 남았고, 작년 후반기에 페이스가 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선발 매물인 호세 리카르도.
그 반대급부로 다저스는 작년 4선발로 시작해 필승조로 시즌을 마감했던 마리오 로드리고를 보내야 했다.
믿을 만한 필승조가 전멸하다시피 한 디백스의 사정 덕분에 성사된 트레이드였지.
“아무튼 이왕 왔으니 잘해봐. 우리 에이스랑 서로 잘 맞을 것 같으니 얼른 친해지고.”
“제리 말이야? 아직 인사 정도밖에 안 나누긴 했는데. 내가 좀 믿음직스러워 보인다는 뜻인가?”
맨날 혼자 동네북 취급당하던 제리지만, 이제 동료가 생겼으니 외롭지 않겠지.
아무튼, 떠나간 사람들과 새로 합류한 사람들로 시끌벅적해진 클럽하우스.
야구가 없는 겨울이 끝나고, 다시 새로운 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