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다시, 봄(2) >
스프링캠프의 목적은 시즌 개막에 앞서 컨디션을 점검하고 실전 감각을 되찾는 것이지만.
작년 스프링캠프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투수로서의 경력이 리셋되어 개인 라커조차 배정받지 못한 채, 어떻게든 시범경기 로스터에라도 들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전력질주했으니까.
물론 내가 한 선택이니 후회는 없다.
나를 다른 초청선수들과 완전히 똑같이 취급한 단장님과 코칭스태프들을 원망한 적도 없고.
‘존경하는 선수요? 그야 물론 Koo입니다! 첫 만남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네요! 스프링캠프 때 제게 함께 라커를 쓰자고 제안해줬거든요! 제가 팀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랬던 거겠죠?’
물론 팀이 애지중지하는 특급 유망주인 주제에 눈치는 더럽게 없는 조나단 라틀리프가 인터뷰에서 다 떠벌리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때가 한창 활약하면서 몸값을 올릴 때라, 괜히 나한테 푸대접했다가 팀한테 마음 떠나게 생겼다고 단장님이 욕을 배부르게 먹은 모양이던데.
뭐 그것까지 내가 알 바는 아니고.
‘그래, 이게 스프링캠프지.’
올해는 작년과는 차원이 다르다.
타구 질 하나하나, 1루 스프린트 기록 하나하나 신경 안 쓰고 훈련하니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심지어 훈련 중간중간 투수조로 건너가 피칭 훈련까지 소화하는데도, 느낌상으로는 훨씬 여유로우니. 말 다 했지.
물론 남이 여유로워하는 걸 두고 못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장기 연장계약 첫해를 맞이한 Koo, 간절함 없어졌나? 훈련 도중 자리 비우는 모습 포착!]
사전에 정해진 스케줄대로 투수조 훈련장으로 향하는 모습을 찍어다가 뇌피셜을 써 갈긴 대가로 출입금지를 당한 기레기를 비롯해.
절실해 보이지 않는다, 작년보다 잘할 거라는 호언장담에 비해 특별한 발전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는 지금이라도 투타겸업은 때려치워야 한다, 뭐 이런 기사들이 심심찮게 나왔다.
“Koo, 물론 네가 남들이 바깥에서 헛소리하는 데 휘둘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너무 정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구단하고 얘기해보는 건 어떨까?”
정작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클레망이 먼저 다가와 제안하는 걸 보면 선을 가지고 줄타기하는 놈도 있었던 모양.
근데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인데, 하나도 신경 안 쓰이더라.
“제가 아무래도 어디 해보라고 벼르는 사람 앞에서 강해지는 스타일이었나 봐요.”
잘해줄 거라는 기대감이나 망할 거라는 확신이 쏟아질 때 오히려 더 힘이 난다고 해야 하나.
작년 내 타자 전향을 두고 왈가왈부했던 전문가들이 곤란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느꼈던 묘한 쾌감이 떠오른다.
“제가 잘할수록 자기가 우스워진다는 생각에 밤마다 제발 좀 망하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흥분돼요. 제가 이상한 걸까요?”
내 말에 클레망은 아주 잠깐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아냐, Koo! 내가 미안해! 이제 네 걱정은 굳이 안 해도 되겠다!”
갑자기 밝은 표정으로 내 어깨를 한 번 두드리더니,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분명 웃고 있는데 왜 찝찝하지.’
[넌 아드리안한테 속으로 변태니 뭐니 했던 거 지금이라도 가서 사과해라.]
‘아무리 그래도 꼭 걔랑 비교해야겠어?’
내 사진을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수호천사니 뭐니 시즌 내내 애지중지하던 아드리안이지만.
올해 다시 만나고서는 그런 얘기를 꺼내진 않았다.
작년 포스트시즌 때 미신 말고 현실을 좀 보라고 윽박질렀던 게 효과가 있던 거라면 좋을 텐데.
* * *
작년과 크게 두드러지는 변화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자리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초청선수들의 시선.
작년에는 다들 적대적인 시선을 보냈었다.
내 타자 전향을 멋대로 은퇴 예고로 받아들이고는, 괜히 로스터 한 자리 차지한다고 아니꼬워들 했었지.
“와, 씨······. 덩치 좀 봐······.”
“진짜 슈퍼스타들은 분위기부터 다르다는 게 저런 거구나.”
“저 솥뚜껑 같은 손으로 홈런도 날리고, 그라운드에서 사람도 패고 그러겠지?”
“저기, Koo! 혹시 배팅 케이지 몇 시에 쓰실 건지 좀 알려주실 수······.”
“야! 가위바위보로 순번 다 정해놓은 거 몰라?!”
“옆에서 말도 못 걸고 우물쭈물하던 놈들이 순번은 무슨!”
올해는 정반대로 다들 선망의 눈빛을 보내온다.
솔직히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근데 사실 이해는 돼.’
지금 초청선수들에게 나는 인생 역전의 상징이나 마찬가지다.
자신들처럼 주전은커녕 개막 로스터도 간당간당한 입지에서, 고작 1년 만에 팀 내 최고연봉자로 발돋움했으니까.
“듣기 전에, 내가 하는 말 그대로 따라 해. Koo의 의견이 정답은 아니며 결국 최종 결정은 내 몫입니다. 그래, 잘했어. 이제 감히 내가 참견을 좀 하자면, 지금 공을 끝까지 봐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상체가 열리는 타이밍이 제각각인 게 아닌가 싶어서······.”
전업 타자로서의 경력은 한참이나 적은 나한테 뭐라도 하나 배우고 싶다고 간청하는데 별 수 있나.
나한테 남의 타격 자세를 분석하는 능력은 없으니, 박도현의 의견을 그대로 읊어주는 수밖에.
테드 윌리엄스 이후 나오지 않을 것 같던 4할 타자가 해주는 말이니 나보다는 훨씬 도움이 될 거다.
물론 그런 선수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컷오프의 칼날은 올해도 냉정했으니까.
[벌써 좀 휑하네. 작년보다 더 빨리 줄어드는 것 같은데?]
‘굳이 긁어볼 만한 포지션이 적어서 그런 거겠지.’
지금 다저스는 팀 전력이 상당히 짜임새 있게 구성된 상태.
굳이 핵심 유망주들을 벌써부터 시험대에 올릴 필요가 없다는 거다.
트레이드로 확실한 선발 카드 호세 리카르도가 합류하며 한 자리밖에 남지 않은 선발 투수.
루카스가 팀을 떠나면서 생겨난 외야 한 자리.
여기 해당되지 않는 선수들이 일찌감치 마이너 캠프로 이동하거나 방출당하면서 빠르게 흘러간 스프링캠프의 시간.
“플레이 볼!”
시범경기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
아마도 시범경기 로스터에 결정적 역할을 차지할, 일정상 마지막 연습경기가 찾아왔다.
메이저 팀과 마이너 팀으로 나누어 맞대결을 펼치는, 자리가 간당간당한 선수로서는 무조건 기회를 잡아야 하는 경기.
대타나 대주자로 주로 출전했던 작년과는 달리, 2번 유격수로 선발 출전해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첫 타석에 들어갔고.
따아아악―!
“세이프!”
올해의 나는 매 타석 결과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허무하게 아웃이라도 됐다간 작년보다 욕은 더 먹겠지만, 사실 작년 이맘때 팬들은 나한테 필요 이상으로 다정했던 거고. 이게 정상이지.
어쨌든 그런 마인드 컨트롤이 통한 건지, 2―2의 카운트에서 존에 들어오는 커브를 제대로 받아쳐 안타를 만들어냈다.
‘어디 가르쳐준 사람한테 그 공을 던져? 상도라는 게 있지.’
지금 마이너 팀의 선발 마운드에 올라와 있는 투수는 다름아닌 에드윈 니콜슨.
제리가 꾸린 캠프에서 몸을 만들던 도중 나한테 커브를 배워 간, 같은 에이전시 소속 유망주 투수.
내가 가르쳐준 커브를 잘 장착했는지 여기까지 살아남았고, 투 스트라이크에서 원작자에게 던지는 패기도 좋았지만, 보다시피 결과는 안타.
“세이프!”
게다가 연달아 도루까지 뺏어내면서, 투수를 1사 2루 득점권 위기로 내몰았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속이 후련했냐는 듯 슬쩍 2루 쪽을 쳐다보긴 했지만.
곧장 타자를 바라보며 다시 마인드 컨트롤에 들어간 에드윈.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아니나 다를까.
커브보다도 더 공을 들여 머릿속에 주입해준 멘탈 관리법을 잊지 않았는지, 자기 힘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씩 머릿속으로 외우라고 강요했던 한마디.
‘득점권에서 실투 하나 던진다고 인생 망하는 거 아니다.’
지금은 어차피 연습경기지만, 정규시즌에서도 고작 한 경기 말아먹은 걸로 그 선수의 쓸모를 판단하는 코칭스태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굳이 그런 선수한테 기회를 많이 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팀 전력이 탄탄하다는 거고.
그건 본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니까 얼른 털어버리고 다음 기회를 노려야지.
[감독님 표정 봐. 나름 만족하신 것 같은데?]
제리 헤이즈택, 다니엘 슈미트, 아드리안 빌라, 호세 리카르도.
선발 로테이션 중 네 명은 사실상 확정이고, 나머지 5선발 후보를 계속 추려내고 있는 다저스.
오브라이언 감독님은 주전 선수들이 총출동한 타선을 상대로 위기를 벗어난 에드윈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봤다.
‘내가 알려준 거 잘 실천하고 있구만.’
[뭐가? 커브? 아니면 마인드 컨트롤?]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따로 있지.
제리의 미니 캠프가 끝나고 해산하던 날, 에드윈이 나한테 이번 첫 스프링캠프에서 주의해야 할 게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줬다.
‘혹시라도 괜찮게 던졌다 싶으면 덕아웃에서 신난다고 나대지 말고, 동료들 응원이나 해줘.’
신인 선수들의 성숙한 자세를 높게 평가하는 오브라이언 감독님의 눈에 들기 위한 실전 꿀팁.
그걸 똑바로 기억하고 있는지, 덕아웃에서 하이파이브 정도만 가볍게 나눈 에드윈은 얌전히 자리에 앉아 공수교대를 지켜봤다.
[너 저번엔 쟤한테 잡기술 익힐 시간에 공부터 똑바로 던지라고 하지 않았냐?]
‘그건 마운드 위에서나 통하는 소리고. 니 정신상태가 그 모양이니까 10년 3억 달러짜리 계약밖에 못 얻어낸 거야, 이 호구야.’
[이게 진짜······!]
이게 바로 최소한 박도현보다는 무조건 좋은 계약을 따내겠다고 벼른 이유다.
팩트로 뚜드려 맞고 아무 반박도 못 하는 이 모습이, 요즘 내 인생의 활력소라니까.
* * *
애리조나에서 온 호세를 포함해, 현 다저스의 선발진 4명은 지난 시즌 동안 최소한 제몫은 해주는 투수들이었다.
난타당하더라도 끈질기게 버티며 이닝은 채워주고, 몇 경기 부진하더라도 오래가지는 않는.
유망주들 입장에서 이 넷 중 그나마 밀어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건 아드리안이었을 거다.
잘 긁히는 날에는 7이닝은 우습게 해치우는 극강의 이닝이터지만, 별로인 날에는 3회도 간당간당하는 랜덤박스형 투수.
비록 재작년까지의 모습에 비하면 작년엔 정말 많이 좋아졌다지만, 한두 해 반짝하다 원상복구되는 선수들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그런데, 적어도 오늘은 제대로 당첨을 뽑은 듯하다.
아무리 전력상 열세인 선수들이라지만, 속수무책으로 삼진을 가져다 바치는 타자들.
4이닝 동안 내 수비 기회가 고작 한 번뿐이었으니 말 다 했지.
“Koo! 수고했다. 그리고 오늘은······.”
“예. 알겠습니다.”
경기 중반, 채드윅에게 유격수 자리를 넘겨주고는 덕아웃에 앉아 경기를 지켜봤다.
따아악―!
“아웃!”
메이저 팀의 두 번째 투수로 올라온 김희영은 구속 자체는 빠르지 않아도 코너웍이 제대로 되는 패스트볼로 마이너 타자들을 농락했고.
[0 : 6]
마이너 팀의 선발 에드윈이 3이닝을 1실점으로 버틴 것이 무색하게, 후속 투수들이 죄다 난타를 허용했고.
양 팀의 수준 차이를 생각하면 승패가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
2이닝 동안 안타 하나만을 내주고 깔끔하게 막아낸 김희영이 내려가는 타이밍에, 나도 덕아웃을 벗어나 불펜으로 향했다.
찰칵! 찰칵! 파바바바밧!
몸을 푸는 동안, 불펜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 댄다.
교체된 야수가 투수로 다시 등판하는, 연습경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상황.
그렇게 충분히 어깨를 풀고 난 후.
[투수 교체: 모리츠 슈타인마이어 → 구현기]
9회 초, 마이너 팀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너를 무슨 사이비 교주처럼 떠받들던 그 친구들 맞냐? 뭐 저리 표정이 살벌해.]
지금 타석에 들어간 타자는, 자존심이든 뭐든 다 접고 나한테 뭐라도 배워보겠다고 매달리던, 나이 서른을 훌쩍 넘긴 AAAA리거.
그때와는 전혀 다른 흉흉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다.
‘사실 저게 당연한 거지.’
지난 시즌 타자로서 많은 걸 이뤄내긴 했지만.
투수로서는 지난 시즌 말에 잠깐 반짝했던, 실전 등판은 몇 경기에 불과한 우완 A 정도겠지.
아마 저 타자한테는 내가 빅리그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는 티켓으로 보이지 않을까.
“스트라이크!”
그리고 누누이 얘기하지만, 나는 남의 기대가 산산조각이 나는 모습을 딱히 싫어하지 않는다.
바깥쪽 하단을 정확하게 찌르는 92마일의 포심.
내가 피칭 훈련 비중을 적게 가져간 걸 알고 희망을 가진 모양인데, 어림도 없다 이 말이야.
“스트라이크 아웃!”
초구를 손도 못 대고 지켜보게 만들며 기를 완전히 죽여놓은 타자에게 삼구삼진을 선사한 것을 시작으로.
1이닝을 고작 10구 만에 정리하면서 경기 종료.
다저스가 과한 투자를 했다느니, 본격적인 투타겸업은 둘 다 망하는 지름길이라느니 했던 놈들의 입도 잠시나마 닫아놓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