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다시, 봄(3) >
[캑터스리그 15개 팀, 시범경기 로스터 확정! 야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전날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하던 클럽하우스가 부쩍 조용해졌다.
연습경기가 끝나고 나서, 곧장 컷오프의 칼날이 휩쓸고 지나갔으니까.
이제 남아 있는 선수들은 최소한 긁어볼 만하거나 경험치를 먹여야 할 자원이라고 판단한 선수들뿐.
“내가 왜 아직도 여기 있지······.”
“제발, 제발, 제발, 올해는 진짜 올라가야 돼······.”
시범경기 개막전이 코앞까지 다가온 지금, 자기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선수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경기에 한 번이라도 더 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겠지.
여기까지 와서 떨어지면 아쉬움이 더욱 클 테니.
[쟤 이번이 첫 스프링캠프라고 안 했나? 아직도 살아남았네?]
자연스레 모여 앉은 비 주전 선수들 사이에는, 같은 에이전시 유망주이자 커브 수제자 에드윈의 얼굴도 있었다.
‘쟤가 잘되면 우리 유망주들도 동기부여가 많이 될 텐데.’
작년 초까지만 해도 구단별 유망주 랭킹 50위 밖의, 터지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데려온 선수였는데.
그런 선수가 꾸준히 활약하면서 결국 개막 로스터까지 꿰찬다?
‘쟤도 하는데 내가 왜 못해?’라는 생각이 절로 들 거다.
[니가 커브 가르쳐준 걸로 생색내고 싶은 건 아니고?]
‘그런 건 내가 따로 생색 안 내도 인터뷰 몇 개만 나오면 다 알려지는 법이야.’
[인생 X나 계산적으로 사는 새끼······.]
박도현의 근거 없는 비난을 한 귀로 흘리며, 오늘의 선발 라인업을 확인했다.
개막전인 만큼 주전 선수들로 채워져 있긴 한데.
‘어차피 중간에 교체돼서 다 나가겠지.’
주전 선수들의 가장 큰 특권 중 하나는, 시범경기 출전도 본인 루틴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는 것.
지금은 지난 시즌 꼴찌팀 파드리스에서도 입지가 불안한 카일처럼, 컨디션 점검만 하는 수준으로 드문드문 출전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연습벌레인 조지처럼 나갈 수 있을 만큼 최대한 꽉꽉 채우는 선수도 있다.
[시범경기는 시범경기다. 알지?]
타자 전향 첫해였던 작년엔 기회를 주는 대로 나가야 했으니, 나한테 맞는 루틴이 뭔지도 모른다.
초반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성적이 좀 들쑥날쑥할 수도 있다는 거지.
박도현은 그럴 때 괜히 무리해서 페이스 끌어올릴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다.
선발 투수로 뛸 때는 강제로 등판 간격이 조절되니 오버페이스고 뭐고 없었는데, 야수는 그런 게 안 되니까.
‘괜찮아, 괜찮아. 까짓거 욕 좀 먹지 뭐.’
시범경기부터 과몰입하는 극성팬들도 분명 있지. 이나현이라던가.
그런데 내부에서는, 특히 코칭스태프들한테는 사정이 다르다.
어떤 코치들은 주전 선수들에게 100%의 힘을 내지 말라고 강조할 정도니까.
한 팀의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는 건, 그만큼 실력을 충분히 증명했다는 것.
분명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는 시범경기 본래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되는 거긴 한데.
‘올해는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 없는 거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지.’
4억 달러짜리 장기계약? 투타겸업?
물론 그것도 증명해야 하는 건 맞는데.
메이저리그에서 어지간히 이름을 날린 선수조차 거의 가지 않았던 길을, 이번 시범경기에서부터 개척해야 할 테니까.
* * *
시범경기 개막전의 상대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같은 시카고를 연고지로 둔 컵스에 비하면 존재감이 부족한, 솔직히 성적도 중간 정도로 무난하고 알짜배기 선수들도 좀 있는데 주목은 못 받는 팀.
[근데 그건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 팀이 다 비슷하지 않나?]
‘아무리 팩트라도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올해 인터리그 로테이션상 NL 서부가 AL 중부가 맞붙게 되는데, 그것 말고는 나랑 딱히 인연은 없는 팀.
물론 시범경기 때 홈구장을 공유하긴 하는데, 훈련 공간을 공유하는 건 아니니까.
“Koo! 기분 좋아 보이네. 어제는 푹 잤어?”
굳이 따지자면, 저쪽에서 이쪽으로 온 사람을 한 명 알기는 한다.
지금 막 밝게 인사를 건네는 채드윅 마틴이 다저스에 오기 직전 소속팀이 바로 화이트삭스였다.
“너야말로 얼굴 토실토실해진 것 봐. 아내분이 잘해주냐?”
“응. 나중에 아이 생기면 계속 같이 지내긴 힘드니까. 지금은 최대한 같이 있고 싶대.”
“결혼이 좋긴 좋나 봐. 우린 최소한 4년은 있어야 하지 싶은데.”
“아, 여자친구가 대학교 1학년이랬지? 그럼 좀 고민되겠다. 제리는 내일 당장이라도 식 올리고 싶은 거 참는 중이라고 하던데······.”
“미친놈 아냐. 이제 막 모쏠 탈출한 놈이 무슨 벌써 결혼 얘기 꺼내고 있어.”
“음, 솔직히 그 자리에서 말은 못 했지만 나도 비슷한 생각이 들긴 했어.”
오프 시즌 동안 채드윅은 오랫동안 사귀어온 여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다.
고향이 가까운 몇몇 선수들과 감독님은 참여했는데, 그때 나는 한국에 있었으니 부득이하게 선물만 보냈었지.
“근데, 너 라인업에 중견수로 올라가 있더라? 감독님이랑 얘기는 다 된 거야?”
채드윅이 외야수 겸업을 시도한다는 건 훈련 때 오가는 걸 보고 대충 짐작은 했는데.
벌써부터 선발로 나가는 걸 보면, 아예 이쪽으로 빠지려는 건가 싶기도 하고.
“빅리그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내가 기회를 만들어야 할 것 같더라고. 그래서 회복기 끝나자마자 3루수랑 중견수 수비도 준비하기 시작했지.”
“아, 그럼 루카스 트레이드 소식 듣고부터 준비한 건 아니겠네?”
“응. 그때부터 준비 시작했으면 시간이 모자랐을걸?”
선수로서 더 발전하기 위해 중견수 수비를 준비했는데.
때마침 들려온 주전 중견수의 트레이드 소식.
행운이 찾아와도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그럼 백업 유격수가 사라지는 건가?]
‘얘만한 백업 구하기가 어려우니 아예 전향은 안 시킬걸. 그냥 소화하는 포지션이 늘어나는 거지.’
결혼과 함께 새로운 포지션으로 봄을 맞이하는 채드윅의 얼굴에는 기대와 설렘이 가득하다.
이 친구한테 이런 속물적인 질문을 하는 게 좀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물어볼 건 물어봐야겠다.
“저기, 채드윅. 혹시 화이트삭스에 경계할 만한 애들 있어?”
그러자 채드윅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가 있었을 때 그렇게 기억에 크게 남는 선수는 없었던 것 같은데······.”
몇 번이나 방출을 당하며 밑바닥을 찍고 올라온 채드윅은 어지간해선 남 실력을 깎아내리지 않는 편인데.
얘가 기억에 안 남는다고 하면, 진짜 안 남는 거다.
최소한 새로 영입한 선수가 아닌 기존 선수들 중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벗어나려는데, 뒤이어 던진 한마디가 귓가에 날아와 박힌다.
“아, 근데 다른 포지션에 비해 외야는 살짝 아쉬운 것 같긴 하더라. 왜 영입을 안 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 * *
시범경기 홈구장을 공유하는 화이트삭스와의 개막전.
협의에 따라 홈팀 덕아웃을 쓰게 된 다저스의 1회 초 수비는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스트라이크 아웃!”
나만큼은 아니지만, 고작 한 번의 몬스터 시즌치고는 과한 계약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던 제리였는데.
그런 의혹을 불식하듯 초장부터 화이트삭스 타자들을 두들겨 팼고.
“아웃!”
중견수 데뷔전을 치르게 된 채드윅은 짧은 타구를 쫓아 내려와 처리하며 이닝을 끝냈다.
“야!!! 공을 좀 보고 치란 말이야!!!”
“너네 올해 인터리그에서도 이따위로 플레이할 거야?!”
여러 팀이 한데 모여서 하는 시범경기인 만큼, 다저스와 화이트삭스 팬들 말고도 다양한 야구팬들이 모여들었는데.
이상하게 유독 상대 팬들의 고함은 더 잘 들리는 것 같더라.
[이제 겨우 1회에 시범경기인데, 이렇게 열낼 일 있나?]
‘돈도 쓰고, 유망주도 팔았으니까. 못하면 욕먹는 건 어쩔 수 없지.’
몇 년에 걸친 리빌딩을 통해 좋은 선수들을 모았던 화이트삭스는 올해야말로 대권을 노리겠다는 듯.
오프 시즌 동안 적극적으로 전력 보강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1회 초부터 이러는 건 팬들이 과몰입하는 거란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특히 지금 마운드 위의 선발 투수는, 핵심 유망주를 털어 모셔온 귀한 몸.
본인 몸값에 걸맞게 리드오프 조지를 삼진으로 처리해냈다.
“Koo!!! 겨울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겠지?!”
“트라웃만한 계약을 얻어낼 가치가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
대기 타석에서 타석으로 이동하는 동안, 여기저기서 응원과 야유가 섞인 듯한 짓궂은 목소리가 쏟아진다.
누군진 몰라도 최소한 다저스 팬은 아닌 것 같네. 이런 식으로 부담 주는 걸 보니.
“볼!”
“볼!”
만약 화이트삭스 팬들이 이런 거라면, 완전 역효과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저 투수도 나름 이름을 날리는 선수이긴 해도, 그래도 제리나 나 같은 계약을 얻어내긴 힘들 텐데.
지금 자기 상대가 거대 구단이 역대급 장기계약으로 붙잡은 선수라는 걸 새삼 느꼈을 테니.
쐐애애액!
유리한 카운트에서 3구를 맞이한 순간, 지난 오프 시즌 동안 지겹도록 연습해온 게 떠올랐다.
도중에 스윙 궤적을 수정하더라도 밸런스가 무너지거나 힘이 분산되지 않는 탄력 있는 몸을 만들어왔으니까.
바깥쪽 공이라는 노림수는 들어맞았지만, 생각보다 높은 코스로 들어온 투수의 공.
꾸준한 훈련에 ‘스윙의 달인’의 밸런스 조정 효과까지 더해지니, 실시간으로 스윙을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지진 않았고.
따아아아아아악―!
밀어친 타구가 담장을 맞고 떨어지는 걸 보며, 2루를 향해 질주했다.
외야수들이 조금 아쉽다던 채드윅의 말과는 달리, 생각보다 이른 타이밍에 타구를 처리하려는 좌익수를 보며 슬슬 속도를 줄여야 하나 싶었는데.
“어!!! 이거 뭐야!!!”
“야!!! X발 지금 장난해?!”
갑작스레 터져 나온 욕설에 뭔가 싶어서 보니.
좌익수는 쓰러져 있고, 경기장 구석으로 굴러가는 타구를 중견수가 허겁지겁 쫓아가는 중이었다.
타구 속도와 중견수의 위치를 확인하고, 순식간에 계산을 끝내고는 3루를 돌아 홈으로 대쉬했고.
“세이프!”
홈에 들어와 선취점을 올리며, 스코어 1대 0.
그라운드 홈런인지, 장타 후 실책 진루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저스 팬들의 기대에는 나름대로 부응한 것 같다.
[좌익수가 하라는 야구는 안 하고 축구를 하던데?]
이어지는 리플레이를 보니, 박도현의 말대로였다.
타구를 잘 쫓아가 놓고 그걸 발로 걷어차서 경기장 구석으로 보내버리는 좌익수.
정규시즌에서 저랬다간 투수가 멱살 잡았겠네.
[시범경기에서 2루타를 기록했습니다.]
[3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5430]
시스템 메시지도 홈런이 아닌 2루타라고 인정하는 걸 보면, 기록도 그렇게 되겠지.
홈런이든 2루타든, 이렇게 시스템 메시지를 보니.
다시 야구의 계절이 찾아왔다는 게 새삼 느껴진다.
* * *
다저스 타자들이 멘탈이 나간 선발 투수를 공략하며 대승으로 끝났던 개막전 이후.
시범경기 일정이 반환점을 돌아간 시점.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은 태블릿 화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Koo, 올해 시범경기서 작년과 확연히 다른 페이스··· 섣부른 장기계약 독 됐나?]
모종의 악의마저 느껴지는 기사 제목에 머리가 지끈대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잘하고 못하고를 따져야 할 시기가 아니지만, 작년에 유입된 팬들은 그걸 잘 모른다.
그러니 저딴 기사에 휘둘리며 이상한 댓글이나 남기지.
“애초에 여기서 뭘 더 잘하라는 거야?”
타자 구현기의 성적은 8경기 16타수 4안타 3볼넷으로, 타율은 정확히 2할 5푼.
투수 구현기의 성적은 2경기 2이닝 3K ERA 0.
성적만 놓고 보면 예전보다 페이스가 떨어진 것 같지만.
작년에 14경기에서 실책 6개를 범하던 건 벌써 잊어버린 건가.
타격에만 올인하던 때랑 수비도 함께 점검해야 하는 지금은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물론 지금까지는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당장의 성적에 아무런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고, 구현기가 어지간한 상황엔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던데다.
‘Koo의 멘탈을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드라마를 보겠습니다.’
클레망에게 넌지시 구현기의 속마음을 떠보라고 부탁했을 때, 이런 대답이 돌아오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한동안 마음을 놓고 지냈건만.
똑똑.
“어, 들어오게.”
오브라이언 감독은 황급히 태블릿을 집어넣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선수는 다름아닌 구현기.
그가 갑자기 안 하던 걱정을 하게 된 이유였다.
지난 시즌부터 자신이 구현기를 면담실로 부르면 불렀지, 선수 본인이 먼저 면담을 신청한 적은 없었으니까.
“요즘 야구도 제대로 안 보고 기사 쓰는 놈들이 왜 이리 많아졌는지 모르겠어. 지금 자네 페이스 때문에 걱정하는 거라면······.”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닌데요.”
구현기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눈만 꿈뻑였다.
오히려 오브라이언 감독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있었던가.
“오늘 온 건 따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인데요······.”
이윽고 구현기가 그 부탁이란 걸 말하고 나자.
오브라이언 감독은 조용히 헛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냥 드라마나 볼 걸 그랬어.”
“네?”
“아니, 아무것도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