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두 번째 개막전(1) >
캑터스리그 소속 밀워키 브루어스의 시범경기 홈구장 매리베일 스타디움.
원정팀 선수 가족들이 모여 있는 구역에, 유독 눈에 띄는 두 명의 동양인 여성이 앉아 있었다.
평일에는 LA의 학교에 다니고, 주말에는 시범경기가 열리는 애리조나로 출근도장을 찍는 박도아와 이나현이었다.
“아웃!”
“아아아아~!”
8회 초 2아웃 주자 2루의 득점권 찬스.
잘 맞은 타구가 담장 근처에서 잡히자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는 두 사람.
그녀들은 대기 타석에 서 있던 타자가 덕아웃으로 돌아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늘은 경기 중반 대수비로 교체 투입되었던, 박도아의 남자친구이기도 한 유격수 구현기를.
“언니, 올해도 다저스가 우승할 수 있을까요?”
전광판을 쳐다보던 박도아가 불쑥 그렇게 물었다.
스코어 4대 1.
경기 전반부까지 1대 0으로 끌려가다가, 주전 선수들이 투입된 이후 순식간에 경기를 뒤집었다.
시범경기 성적이 무의미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후보 선수들이 경기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다 보니, 괜히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올해는 충분히 가능성 있어요. 아니, 올해가 지나면 당분간은 힘들 거예요.”
“올해까지라고요? 그럼 언니는 내년부터 다저스가 리빌딩에 들어갈 거라고 보시는 건가요?”
“제가 단장은 아니니까 확신은 못 해도, 사실 원래대로라면 작년에 이미 시작하지 않았을까요?.”
작년의 다저스는 선수단 연령이 다소 양분되어 있었다.
한쪽은 비싼 연봉을 받는 베테랑, 다른 한쪽은 서비스타임 3년 미만의 젊은 선수들. 그 중간 연차의 선수들이 적었으니까.
만약 지구 우승이 어렵겠다 싶으면, 고액연봉자 중 성적이 괜찮은 선수들은 싹 다 팔려나갔을지도 모른다는 것.
“일단 투타에 코어 선수를 하나씩 심어두고, 지금 백업 멤버들이 주전급으로 성장할 때까지 2~3년 정도 시간을 들이며 유망주도 모으고, 뭐 이런 플랜이지 않을까 싶네요.”
그 코어 선수라는 게 각각 8년과 12년짜리 연장계약에 사인한 서로의 남자친구겠지만.
본인 입으로 말하기 민망했던 이나현은 화제를 돌렸다.
“물론 올해라고 불안 요소가 없는 건 아니지만요.”
중견수? 이미 수비가 괜찮은 메이슨이 있고, 외야 컨버전을 선언한 채드윅과 트레이드로 영입한 마이크도 있다.
5선발? 작년에 선발과 불펜을 오간 모리츠와 신인 에드윈이 경쟁 중이다. 만약 둘 다 부상으로 퍼진다면 김희영이란 카드도 있다.
“제가 보기에 가장 시급한 건 좌완 셋업맨이에요.”
마리오 로드리고를 애리조나로 보내고, 새로 영입한 김희영도 롱릴리프나 세컨더리 셋업맨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필승조 불펜 중 좌완은 조쉬 먼로밖에 남지 않은 것.
번뜩이는 재능은 있지만 아직 경험이 너무 부족하고, 주자가 나가면 흔들리는 것도 불안 요소다.
당장 8회 말을 막으러 올라온 지금도 투 아웃까지 잘 잡아놓고는 안타 하나 맞더니 곧바로 볼넷까지 내주고 있었으니까.
“조쉬는 아직 미래가 창창하니까요. 요즘처럼 승패에 대한 부담이 없을 때 위기를 자기 힘으로 극복하는 습관을 들여야······.”
따아아아아아아악―!
“야!!!! ······이야이야~ 그렇게 사랑하고~”
승패에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말한 지 몇 초나 됐다고.
어떻게든 화 안 난 척하려고 급하게 고전 유행가를 흥얼거리는 이나현을 보며, 박도아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어, 결국 내려가네요.”
3점 홈런을 맞으며 순식간에 동점을 허용한 조쉬 먼로의 역할은 여기까지.
다음엔 누가 나오려나 싶어 불펜으로 시선을 돌린 두 사람이었지만, 그 안에 출격을 준비하는 투수는 없었다.
“어······?”
그 대신, 좀 전까지 유격수 자리에 있던 구현기가 마운드에 올라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못해도 3~4점 이상의 점수 차가 날 때 등판했는데, 지금은 경기 후반의 동점 상황.
그것부터가 이례적인 일이긴 하지만, 지금 그녀들이 당황하는 건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지금 글러브 오른손에 끼고 있는 거 맞죠?”
홈팀 배트보이가 가져다준 구현기의 새로운 글러브.
그 글러브에 끼워 넣은 손은 틀림없는 오른손이었다.
전달받은 공을 글러브에 집어넣은 구현기가, 왼손에 로진을 묻히기 시작했다.
* * *
감독님과의 면담에서 내가 요구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동점 상황이나 점수 차가 적게 나는 상황에서 등판하고 싶다는 것.
다른 하나는, 왼손으로 공을 던져보고 싶다는 것.
‘언제 한번 이런 상황에서 등판해보고 싶었거든.’
무조건 0대 0에서 출발하는 선발 등판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가.
사실상 승패가 확 기운 상태에서 등판하는 게 관리받는다는 느낌보다는 조금 밋밋하다는 느낌이 앞서더라고.
물론 동점이나 1~2점 차 만루에서 등판한다거나 하는 건 또 느낌이 다르겠지만.
[근데 갑자기 왼손으로 던지겠다는 게 더 놀랄 일 아닌가? 감독님이 그 부분은 딱히 지적을 안 하시던데.]
‘놀랄 일도 많다. 애초에 내가 좌완투수 출신인데,’
블래스 신드롬 호전을 확인한 작년 말부터, 왼손으로 던지는 연습 자체는 꾸준히 했었다.
스프링캠프에서의 불펜피칭과 라이브 피칭에서도 왼손을 사용한 적이 있었고.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으니, ‘데칼코마니’의 영향으로 왼손으로 던지는 공의 구위가 늘어났다는 건 모르셨겠지만.
‘오히려 타자가 훨씬 더 놀란 것 같네.’
왼손으로 연습 투구를 던지는 걸 목격한 브루어스 타자는 혼란스러운 듯 나와 자기 팀 덕아웃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당혹스러움보다 짜증이 앞섰는지 인상을 팍 구긴다.
내가 좌완 출신이라는 걸 알긴 해도, 투수 복귀전 이후 단 한 번도 왼손 투구를 한 적이 없으니. 자기가 만만한가 싶었겠지.
“스트라이크!”
만만한가 아닌가를 따지자면 뭐, 만만하다고 할 수밖에.
주로 우완투수 상대로 나서는, 지난 시즌 좌완 상대 타율이 2할대 초반에 불과한 좌타 플래툰 1루수.
몸쪽 낮은 코스에 꽉 차게 들어가는 시속 92마일 포심에,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게 여기서도 보인다.
“스트라이크!”
근데 그러면 안 되지.
지금 내가 저 투수의 좌완 복귀전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건가, 여기서 아무것도 못하고 당하면 그림이 이상해지는 건가, 뭐 이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건 알겠는데.
투수가 대놓고 투구 동작에 들어가는데도 집중을 안 하면 쓰나,
그러니까 몸쪽으로 들어오다 확 꺾이는 슬라이더에 아무런 대응을 못 하지.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완벽한 투수의 카운트.
‘이제 와서 머리 굴려 봤자 뭐하나. 체크할 데이터도 없는데.’
선발 시절의 데이터를 지금 와서 써먹을 수는 없다.
구종별 구위와 제구가 어느 정도 수준으로 회복되었는지, 뭐 이런 정보가 전무하니까.
뭘 던져도 타자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소리.
‘커브는 이런 상황에서 던지는 거란다,’
전날 선발로 나와 잘 던지다 커브 실투 하나로 쓰리런을 허용했던 에드윈에게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던진 3구.
공이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구종을 파악했는지 타자의 눈이 아주 잠깐 번뜩였고.
아래로 떨어지는 공을 향해 힘차게 배트를 휘둘렀지만.
후우우웅!
공의 궤적이 타자의 예상과는 한참이나 벗어났는지, 배트는 허공을 갈랐고.
바운드된 공을 안정적으로 블로킹해낸 백업포수 브레이든이 타자의 허벅지를 태그했다.
좌완 복귀전에서 첫 타자 삼구삼진.
오래도록 박제될 명장면이 또 하나 탄생했다.
“정말 놀라워, Koo! 솔직히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은데 니가 서운해할까 봐 그냥 좀 놀라 봤어!”
“우리 마무리 정강이도 시원찮은데 그냥 니가 마무리까지 다 해먹어라!”
“어디서 내 자리 은근슬쩍 빼려고 해?! 다 나은 지가 언젠데!”
줄줄이 서서 맞이해주는 동료들과 하이파이브하며 돌아간 덕아웃.
딴 일 다 제쳐두고 투수 코치부터 찾았다.
던지는 걸 보고 9회에도 올릴지 말지 결정하겠다고 귀띔했으니까.
“9회에도 계속 왼손으로 던질 건가?”
투수 코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론이죠. 그러려고 연습한 건데요.”
“그래. 그럼 연습의 성과는 이따 보여주고, 타석으로 나갈 준비해.”
아무리 공 세 개를 던졌다지만, 마운드에서 내려오자마자 바로 타석으로 들어간다는 게 좀 빡세긴 하다.
그러니까.
따아아아아아악―!
시간 오래 끌 거 없이, 그냥 초구에 바로 넘겨버렸다.
스코어 5대 4로 다시 앞서가는 솔로 홈런.
삼구삼진에 이어 이번 시즌 내 시범경기 첫 홈런마저 허용했다는 생각에 좌절했는지, 지나가며 보니 내야수들 얼굴이 아주 그냥 탈색됐더라.
뭔가를 특별히 더 했다기보다는, 그냥 슬슬 홈런이 나올 타이밍이었다고 본다.
담장 바로 앞에서 잡히거나 담장을 때리는 타구를 만들었던 그 모자란 한 끗이, 경기를 계속 뛰어가며 저절로 채워진 거지.
[LAD 9 : 4 MIL]
타자들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뻘짓을 반복하는 브루어스를 두들기며 추가 점수를 냈고.
9회 말 다시 마운드에 올라 삼자범퇴로 막아내면서.
[투타겸업 우려 불식하나? 컨디션 완전히 돌아온 Koo, ‘답답해서 내가 쳤다!’]
비록 시범경기지만, 내가 직접 결승타를 날려 구원승을 따내는 진귀한 기록을 세웠다.
* * *
시범경기 일정이 슬슬 막바지를 향해 치닫는 지금.
액티브 로스터에 거의 근접한 선수들만이 클럽하우스에 남을 수 있었고.
마이크 올리버 단장님은 그런 선수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오늘 이렇게 경기 전 따로 자리를 마련한 건, 전달 사항이 있어서야.”
시즌을 앞두고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할 단장이 직접 와서 전달할 만한 사항이 뭐가 있나.
입지가 불안한 몇몇 선수들은 혹시나 자신한테 방출의 칼날이 떨어지려나 싶어 눈치를 봤지만.
단장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지금 이 자리를 마치고 나면 곧바로 보도자료가 나가겠지만, 바로 어제 이사회에서 안건 하나가 통과됐어. 혹시 그게 뭔지 짐작이 가는 사람 있나?”
이사회까지 올라가야 할 안건.
그 말을 듣는 순간, 단장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있었다.
“바로 2030년부터 2035년까지 다저스에서 활동했던 Park의 등번호 45번의 영구결번 지정을 확정했다는 소식이다.”
단장님의 그 말에, 몇몇 선수들이 내 쪽을 쳐다본다.
내가 장기계약 조건으로 박도현의 구단 영구결번 지정을 요구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까.
영구결번.
팀이 한 선수를 기억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방법.
만약 오랜 활약 끝에 팬들과 동료들의 축복 속에서 커리어를 마친 선수였다면, 곧바로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겠지만.
“아······.”
“그렇게 됐구나.”
“그래, 사실 장례식 때 바로 지정했어도 이상할 건 없었지.”
[뭐야, 내가 생각했던 분위기랑 너무 다른데?!]
그럼 사고로 일찍 세상 떠난 선수 얘기하면서 웃고 박수 치게 생겼냐.
애가 눈치만 없는 게 아니라 개념도 없어.
“사무국과 일정 조율 중이기는 하지만, 큰 변수가 없다면 7월 홈 경기에서 영구결번식을 진행할 거야. 그리고 그때 상영할 헌정 영상도 제작에 착수할 거고.”
“헌정 영상이요?”
“그래. 실무자 회의에서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가자고 잠정적으로 결론이 났어. 그냥 다저 스타디움 앞에 동상을 세우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나왔는데, Park이 살아 있었다면 부담스러워하지 않았겠느냐더군.”
[안 부담스러운데! 본인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고!]
단장님은 본인이 데려온 선수면서 아직도 박도현이 어떤 놈인지 모르는구나.
살아 생전 자기 동상 세워줬으면 허구한 날 찾아가서 셀카 찍고 다닐 놈인데.
“카메라가 경기 중 모습이나 클럽하우스 내부를 촬영하는 건 평소랑 똑같으니까 별문제 없겠지만, 몇몇 선수들한테는 Park에 대한 코멘트를 촬영할 수 있다는 점 양해해줬으면 좋겠네.”
박도현이 어떤 선수였고, 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 뭐 이런 얘기하는 걸 촬영하겠다는 모양이다.
‘고니요? 제가 아는 타짜 중 최고였어요.’ 이런 분위기로다가.
[다들 막 나에 대한 추억을 풀어놓다가 그리움에 못 이겨 울어버리는 거 아닐까?]
‘촬영날 니 전여친이랑 있었던 흑역사 다 풀어버리기 전에 조용히 해라.’
[개너무하네 진짜······.]
말이야 그렇게 했는데, 막상 박도현의 등번호가 다저 스타디움 한쪽을 영원히 장식하게 되었단 소식을 들으니.
미국으로 건너오기도 전, 메이저 팀 여럿과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이 떠오른다.
‘우리 둘이 같은 팀 가서 나란히 메이저 씹어먹고 둘 다 동시에 영구결번 달면 진짜 개멋있을 것 같지 않냐?’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직 계약서에 사인도 안 한 놈이 벌써부터 허파에 바람 들어갔다고 갈궜던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이뤄질 줄은 나도 몰랐지.
‘아니, 아직 전부 이뤄진 건 아니구나.’
사실상의 종신계약을 맺으며 프랜차이즈 스타의 기본 자격은 채웠지만.
그에 걸맞은 책임감과 활약이 없다면, 영구결번은커녕 먹튀로 악명이나 날릴 테니.
최소한 지난 시즌보다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타자로서의 두 번째 개막전을 준비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