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두 번째 개막전(2) >
코앞까지 다가온 2038시즌 메이저리그 개막전.
월드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간직한 채 기나긴 휴식기에 들어가야만 했던 다저스 팬들은, 일찌감치 개막 시리즈를 매진시켰고.
그런 팬들이 4월을 지나 시즌이 끝날 때까지 다저 스타디움에 꾸준히 발길을 옮기도록 만드는 것이 프런트의 업무였다.
“다음은 최근 언론에서 주로 언급되는 사항을 점검해보도록 합시다.”
팬들의 기대감을 자극할 수 있는 부분과 불안함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부분을 체크해 대응하기 위한 회의.
LA 다저스 마이크 올리버 단장의 지시와 함께, 홍보팀에서 올라온 보고 자료가 회의실에 배부됐다.
[‘The Young Legend’ No.45 Do―Hyun Park, 다저스의 영구결번으로 남다]
구현기의 요구에 따라 이사회에 올렸고, 팀의 상승세에 탄력을 더하고 싶었던 이사들의 만장일치로 통과된 안건.
이미 지정된 줄 알았다는 팬들도 많았다.
“영구결번식 날짜는 7월 10일 자이언츠와의 홈 3연전 중 1차전으로 확정되었답니다.”
“한국에 거주 중인 Park의 부모님께도 초청 의사를 전달했더니, 기꺼이 참여하겠다고 하셨고요.”
“헌정 영상 기획안도 홍보팀 내부적으로 가닥이 잡힌 모양입니다. 다들 사활이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매달리고 있다더군요.”
영구결번식 홍보에서 강조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짚어낸 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MVP+사이 영 석권, 제리 헤이즈택! 장기 연장계약 이후 첫 시즌 시범경기서 ERA 1점대 대활약!]
지난 시즌 보여준 활약을 생각하면 저렴하게 붙잡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제리 헤이즈택.
팀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던 로버트 켈리의 은퇴로 이탈할 뻔했던 팬들을 붙잡은 일등 공신이기도 했다.
“현장에서는 장기계약 이후 워크에식이 더 좋아졌다고 평가하더군요.”
“관련 상품 판매량도 Koo와 1위를 다툴 정도로 급상승했다고 합니다.”
“다만 유일한 불안 요소는, 본인의 사생활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건데······.”
서른이 다 되도록 변변찮은 연애 한 번 못 하고 살다가, 처음으로 하는 공개 연애.
오프 시즌 훈련지 플로리다와 스프링캠프가 열리는 애리조나에서 공개 데이트를 하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었다.
연애가 잘 풀리고 있는 지금은 상관없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
혹시라도 안 좋게 끝나서 멘탈에 타격이라도 입는다면, 그 뒷감당은 오로지 다저스 몫이었다.
“······선수 본인한테 적당히 대응하라고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겠습니다.”
“그러네요.”
제리의 여자친구가 열렬한 다저스의 팬이기도 하니, 만약 끝내더라도 팀을 생각해 좋게 마무리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시겠습니다.”
아무리 성적이 좋고 기대를 많이 받는 팀이라도, 긍정적인 기사만 나오지는 않듯.
2038시즌을 앞둔 다저스를 향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시범경기로 가능성 증명했던 ‘믿고 쓰는 파드리스산’ 에드윈 니콜슨, 개막 앞두고 트리플 A로··· 서비스타임 관리 때문인가?]
시범경기 내내 이어진 저울질 끝에 모리츠가 잠정적으로 5선발 자리를 차지하며, 에드윈은 마이너로 내려가게 됐다.
솔직히 기자의 지적에 아니라고 대답할 순 없었다.
현재 에드윈은 40인 로스터 밖의 선수.
그를 개막 로스터에 넣으려면 누군가 한 명을 지명할당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내려보낸 것은 아니었다.
막말로 메이저 타자들을 두들겨 팼으면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했을 테니까.
“새로 장착한 구종을 더 잘 활용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해야겠습니다.”
지금 에드윈이 순항하는 건, 오프 시즌 동안 Koo에게 배워 왔다던 커브를 쏠쏠히 활용해온 덕분.
그러나 실전에서 충분히 연마하지 않은 상태로 섣불리 빅리그 타자들을 맞붙게 했다간, 오히려 자신감만 잃을 수도 있다.
트리플 A에서 커브 활용법을 익히며 기다리다가 부상 등으로 자리가 나면 콜업하는 게 프런트가 생각한 플랜이었고, 이 점은 올리버 단장이 에드윈에게 직접 설명해줬다.
“이제 남은 건 Koo에 대한 기사들인데······.”
올리버 단장은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감쌌다.
[2할 후반대 타율에 2홈런, 작년에 비해 퇴보한 시범경기 성적··· Koo는 정규시즌에서 반등할 수 있을까?]
[투수로선 ‘합격’ 타자로선 ‘글쎄’··· Koo, 4억 3천만 달러짜리 불펜투수 될 수도]
[투타겸업에 이어 이제는 하다하다 스위치 피처까지? 끝을 모르는 Koo의 ‘무모한 도전’]
[동점 및 초접전 상황에서의 연이은 등판! 다저스가 생각한 ‘투수 Koo’의 활용법은?]
단순히 시범경기 성적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기사들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당사자인 구현기 역시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고.
그러나 ‘투수 구현기’에 대한 기사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스위치 피처에 필승조 활용이라니.
올리버 단장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무모해 보였으니까.
‘Koo는 괜찮습니다. 애초에 힘들 때 내색 안 하고 숨기는 선수도 아니고요. Koo를 걱정할 시간이 줄어드니 요즘 아주 여유로워서 드라마도 챙겨 봅니다.’
감독의 농담 섞인 말을 떠올린 올리버 단장은 이를 악물었다.
본인은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시킨 마당에, 짤려도 재취업은 걱정 없다 이거지.
자신은 구현기가 먹튀로 전락하는 순간 프런트 커리어가 끝장날 텐데.
“Koo는······. 당장은 방법이 없으니 개막 이후 좀 지켜보도록 합시다.”
결국 방학숙제를 미루는 학생의 심정으로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고.
회의가 계속되는 사이 시곗바늘은 자정을 지나, 개막전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2038시즌 메이저리그 개막전의 상대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지난 시즌 내내 으르렁거렸던 팀과의 3연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 * *
지난 시즌에 유독 갈등의 골이 깊어지긴 했지만, 사실 다저스와 파드리스는 전통적으로 라이벌리가 강했다.
워낙에 자이언츠와의 맞대결 구도가 부각되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을 뿐이지.
그래서 개막전 상대로 파드리스가 낙점되었을 때도,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지난 시즌 월드시리즈 우승팀과 지구 꼴찌팀이라는 성적의 차이는 둘째치고서라도.
만약 전처럼 야구 외의 수단으로 압박하려 든다면 죄책감 없이 찍어 누를 수 있었을 테니.
그런데, 올해의 주장으로 선임된 클레망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피터 콜린스의 복귀와 주장 선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가 돌아오면서 큰 힘을 얻을 파드리스와 개막전에서 만날 날이 기대된다. ― 클레망 파로]
작년 파드리스전, 내가 무보살 삼중살을 잡는 과정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해 시즌아웃을 당했던 피터 콜린스.
복귀와 함께 새로 선임된 감독에 의해 주장 자리까지 얻어낸 그를 SNS에서 언급하며 화해 분위기를 연출했고.
[내셔널리그의 일원으로서 조금 늦었지만 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 피터 콜린스]
피터 역시 다저스의 우승을 축하해주며 그 화해를 받아들이는 제스처를 보였다.
생각보다 평화로운 분위기에 난투극을 기대했던 일부 팬들은 실망감을 내비치기도 했는데.
사실 클레망의 판단이 틀린 건 아니다.
어떤 선수들은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니.
감정의 골이 지나치게 깊어지기 전에 끊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다친 덴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야, 피터. 새로운 감독님은 어때? 나도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인데.”
“글쎄, 능력은 시즌 들어가 봐야 나오는 거긴 한데. 일단 말은 잘 통해.”
아무리 그래도.
설마 경기 시작 전, 양 팀 주장끼리 같이 사진 찍으러 나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나까지 데리고.
[이거 완전 크보 스타일 아니냐?]
‘양 팀 주장들께서 평화주의자라고 하시는데 내가 어쩌겠냐······.’
물론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함께 딸려온 선수들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옆에서 어슬렁거리기만 했다.
클레망이 데려온 선수들은, 파드리스 출신으로 피터와도 친분이 있는 벤과 싸움의 발단이 된 나. 이렇게 두 명.
피터도 어지간하면 다저스 선수들과 친분이 있거나, 벤치 클리어링에 가담했던 선수들을 데려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그라운드를 찍어대는 기자들 앞에서 화해했다는 걸 더 잘 보여줄 수 있을 테니.
“오랜만이다, 카일.”
“어······ 응.”
인종차별 발언을 했던 보 파커는 트레이드됐고, 작년 시범경기 때부터 나랑 대립각을 세웠던 셋업맨 매버릭은 성적 부진으로 결국 방출당했으니, 영 데려올 사람이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카일이라니.
[근데 얘 상태가 왜 이래? 살도 쪽 빠지고. 이상한 냄새 나는 것 같은데. 머리는 감았나?]
지난 시즌 파드리스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보복구를 지시했다가 뒤로 쏙 빠진 게 들통났다던 카일.
그 후로 별도의 징계 소식은 없어서 그대로 흐지부지된 줄 알았는데.
지금 상태를 보니, 공식 징계보다도 호된 대가를 치른 듯하다.
“저기, Koo. 잠깐만.”
그때, 클레망과의 대화를 마친 피터가 나한테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어깨동무하는 척하며 속삭인다.
“사실 너희랑 쟤 감정 안 좋은 줄은 아는데, 얘가 혼자 너무 힘들어해서 뭐라도 좀 시켜야겠다 싶어서 데려왔다. 내가 너 시간 될 때 좋은 데서 밥 한 끼 사줄 테니 혹시 좀······.”
지난 오프 시즌 동안, 파드리스는 개혁을 선언하고는 선수단 상당수를 물갈이했다.
카일도 어지간하면 트레이드로 보내버리고 싶었겠지만, 데려갈 팀이 있을 리가 없고. 연봉은 또 많이 받아먹어서 지명할당도 어려우니.
그냥 벤치에 처박아두기로 한 듯, 시범경기 내내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몇 달 만에 사람이 이렇게 망가지네.]
‘왕따라는 게 그래서 무서운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카일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리더니, 뒤로 슬쩍 몇 걸음 물러나는 카일.
그러거나 말거나, 손을 내밀며 힘주어 말했다.
“오랜만이다, 카일. 몸은 좀 괜찮아?”
“어, 아니, 뭐.”
“서로 묵혀둔 감정 있으면 그냥 다 풀자. 팬들도 그걸 원할 거야. 우리 오늘 야구 하려고 여기 온 거잖아. 그치?”
“아, 아냐. 감정은 무슨······.”
악수하는 내내 눈을 피하며 말끝을 우물거리는 게, 정말로 내가 알던 카일이 맞나 의심이 될 정도.
사람 엿 좀 먹이겠답시고 되도 않던 머리를 굴리던 카일 캠프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물론 오늘 너한테 야구를 할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좀 안쓰러워서,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속으로만 했다.
오늘 경기 카일 캠프는 파드리스의 선발 라인업에 포함되지 못했다.
아마 내일도. 그리고 그다음 경기에도 똑같지 않을까.
* * *
“스트라이크 아웃!”
개막전답게 양 팀의 에이스가 등판한 경기.
올 시즌 가장 기대를 많이 받는 투수 중 한 명으로 급부상한 제리가, 1회 초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아낸 순간.
“Yeahhhhh!!! 역시 MVP!!!”
“이거지!! 작년 그 모습 안 죽었구만!!”
“작년엔 연속 퀄리티스타트 기록 세웠었지?! 그럼 올해는 무실점 기록 한번 세워보자고!!!”
숨죽여 지켜보던 홈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질러 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관중석 한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갑자기 기분 나쁘게 히죽 웃는 제리.
보나 마나 여자친구라도 발견한 거겠지. 기분 나쁘게 일관적인 새끼 같으니라고.
[표정 또 왜 그러냐?]
‘또 뭐.’
[아니, 니 얼굴 원래부터 사악하긴 한데, 오늘은 특히 더 그런 거 같아서.]
사악하다는 말에는 절대 동의 못 하겠는데, 굳이 따지자면 좀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긴 했지.
지난 시즌 내내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대던 앙숙 같은 사이로 지냈는데.
기자들이 찍어대는 악수하는 사진 몇 장으로 그런 기싸움이 끝난다는 게, 뭔가 좀 찝찝하다고 생각했을 뿐.
“볼! 베이스 온 볼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 타석이 찾아왔다.
삼자범퇴로 깔끔하게 막아낸 제리와는 달리, 파드리스의 에이스는 풀카운트 승부 끝에 조지를 내보내면서 무사 주자 1루.
지난 시즌 2번 타순으로 나가게 되고서부터 내가 가장 선호했던 상황이 찾아왔다.
“볼!”
“파울!”
“볼!”
한 팀의 에이스라고는 해도 경험 자체는 부족한, 게다가 나와의 상대 전적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던 데다가.
내 뒤로는 줄줄이 클린업 트리오가 이어지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투수가 자신감 있게 던질 수 있는 공은 그리 많지 않았고.
쐐애애액!
크게 빠져나가는 두 개의 공과, 어렵지 않게 커트해낸 하나의 유인구.
초조해진 투수는 나한테 있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먹잇감인 몸쪽 실투를 던지고 말았고.
따아아아아아아아악―!
혹여라도 책잡힐까, 얌전히 배트를 내려놓고 베이스를 돌았다.
질린 듯한 표정의 내야수들을 빠르게 통과해 홈플레이트를 밟은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치. 오늘은 야구 하러 온 거였지.’
작년에 이미 배웠던 건데, 깜빡 잊고 있었지 뭐야.
누군가를 두드려 팰 때 꼭 주먹만 쓸 필요는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