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두 번째 개막전(3) >
월드시리즈를 앞두고 얻었던 재능 ‘제왕의 품격’.
타석에 들어서기만 해도 상대 투수가 압박을 느끼는, 그러면서 실투도 늘어나게 하는 재능이지만.
반대로 쫄아버린 투수가 아예 승부를 피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 시즌 초반에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상대 전력분석팀에서 나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도 했을 테고. 무엇보다 승부를 피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기나긴 시즌을 바라보며 달려야 할 투수들 입장에서 초장부터 그러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랬는데.
따아아아아아악―!
1회 말에 투런포를 때려낸 이후, 추가 득점은 없었지만.
여전히 투수가 경기 초반을 어렵게 끌고 가면서, 2사 1, 2루에서 맞이한 두 번째 타석.
2―0의 카운트에서 때려낸 살벌한 타구가 폴대 바깥쪽으로 넘어가자마자, 투수의 얼굴이 세탁기에 넣고 돌린 것처럼 변하는 걸 보며. 이번 타석의 결과를 직감했다.
“베이스 온 볼스!”
포수가 앉아만 있었을 뿐. 사실상 자동고의사구에 가까운 볼넷.
아직 갈 길이 먼 파드리스 배터리가 만루를 채웠다.
[그래도 삼진보단 낫지 뭐. 원래 파울 홈런 다음엔 삼진이 국룰이라잖아.]
‘삼진도 좀 속을 만한 공을 던져줘야 당하든가 말든가 하지.’
따아악―!
“아웃!”
“아아아아!!!”
3번 타자 켄의 타구가 워닝 트랙에서 잡히며 이닝이 끝나자, 홈팬들의 탄식이 쏟아진다.
그리고 탄식은 오래지 않아 분노로 바뀌었다.
“야!! 쫄아서 도망치냐?!”
“니들이 그러니까 29연패나 하는 거야!!!”
“그냥 X발 거시기 떼버려라!!! 그리고 나 줘!!!”
개막전 1회부터 선취점을 낸 덕분에 너그러워진 팬들은, 만루 기회를 날린 켄 대신 나를 거른 파드리스에게 화살을 돌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희희낙락하며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파드리스 선수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곤란한데.’
강타자 한 명만 거르면, 나머지 타자들이 조급함에 줄줄이 무너지는 패턴은 지금껏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나도 모르게 표정이 심각해졌는지, 박도현이 핀잔을 준다.
[뭐래. 우리 팀에 타자가 너 혼자밖에 없는 줄 아나.]
박도현 말대로, 굳이 내가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할 필요 없다.
나한테 30홈런을 헌납하지 않기 위해 폭탄을 돌리던 작년 정규시즌 막바지 상대 팀들도, 포스트시즌에서 맹타를 휘두르는 나를 경계하며 대놓고 걸러대던 월드시리즈의 블루제이스도.
20홈런 타자가 절반이 넘는 지옥의 타선 앞에서 무릎을 꿇었지.
물론 지금 같은 라인업이 영원히 유지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벌써 겁먹을 필요는 없다는 것.
게다가.
‘그치. 내가 훌리안 밑에서 그 고생을 왜 한 건데.’
어느 코스로 오더라도 일정한 타구 질을 만들어내는 것.
그걸 위해 들였던 노력······ 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조차 모를, 아무튼 그렇게 견뎌온 시간들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이것도 다 타자하기 나름이야. 투수한테 좋은 공 좀 내놓으라고 두들겨 팰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그치. 그렇게 해서 될 문제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아니 무슨 그렇게 살벌한 농담을 다 하냐?]
‘······.’
[농담 맞지? 응?]
* * *
2038시즌을 앞두고 파드리스의 주장으로 선임된 피터 콜린스.
그는 자신의 햄스트링 부상 이후 복귀전이자, 올 시즌 개막전 상대가 다저스라는 사실을 전해 듣자마자 한숨부터 쉬었다.
자신을 시즌아웃시켰던 그 부상을 다저스전에서 당했다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경기의 선발 투수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화했다는 것은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SD 0 : 2 LAD]
예상대로 어렵게 흘러가던 경기 초반.
그러나 경기가 중반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시점에서,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어쩌면 역전할 가능성도 있는 거 아냐?’
2회 말, 2사 만루 위기를 넘긴 것이 투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결정구 슬라이더가 다시 춤을 추면서 3회 말을 삼자범퇴로 정리했으니까.
2점이라면 어떻게든 쫓아갈 수 있는 점수 차.
작년에는 줄부상과 연패로 팀 전체가 침체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팀 구성원도 많이 달라졌고.
강팀 다저스와의 개막전에서 접전을 넘어 이기기라도 한다면, 작년의 분위기를 완전히 떨쳐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장으로서 팀의 분위기를 다잡고자 플레이 하나하나마다 목청껏 격려하고, 벤치 멤버들의 엉덩이를 걷어차 응원이라도 하라면서 덕아웃 난간으로 쫓아내던 피터 콜린스의 생각은, 잠시 후 이렇게 바뀌었다.
‘아닌가?’
“아웃!” “아웃!”
1루 근처에 서서 나라 잃은 표정으로 헬멧을 벗고 있는 타자는, 분명 좋은 타구를 만들어냈다.
다만 저놈의 유격수가 몸을 던져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잡아낸 후, 2루수에게 글러브 토스로 더블 플레이를 만들어내는 정신 나간 수비를 했을 뿐.
“저 미친놈은 지가 투수였다는 거 까먹은 게 아닐까?”
피터는 한 선수가 내뱉은 푸념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시즌 중반, 구현기를 두고 번뜩이는 센스는 있지만 안정감이 떨어진다던 수비 전문가의 말을 그 역시 딱히 부정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저놈 쪽으로 타구를 날리기라도 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베이스 온 볼스!”
득점 기회가 날아간 탓에 다시 심란해진 걸까.
4회 말 수비, 선두타자로 나온 제리 헤이즈택을 잘 처리하더니, 리드오프 조지 라모스에게 볼넷을 주며 1사 1루 상황에 놓인 투수.
타석으로 들어오는 구현기를 보며 피터는 생각했다.
‘이번에도 거를까?’
지금의 투수에게 어떤 게 좋은 선택일지 그로서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다만 덕아웃에서 별도의 사인은 없었으니 원래 위치를 지킬 뿐.
“스트라이크!”
“파울!”
앞선 타석과는 달리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로 몰아넣자, 피터도 조금은 긴장을 풀었다.
그러나, 설령 여전히 타자에게 집중하고 있었더라도, 그의 위치상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구현기가 의도적으로 배트를 짧게 잡고 컨택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볼!”
“파울!”
4구째로 던진 바깥쪽 슬라이더를 커트해내자, 관중석 여기저기서 안도의 탄식이 쏟아진다.
자세를 완전히 무너뜨리면서도 간신히 컨택에 성공하며 만들어낸 파울.
그러나 결과와는 별개로, 피터 콜린스는 갑자기 등줄기에 섬뜩한 기분이 스치는 걸 느꼈다.
‘저딴 자세로 휘두르는데도 이런 소리가 난다고?’
저 정도면 예상한 코스와 구종에서 완전히 어긋났다는 건데, 그런데도 배트가 공을 끝까지 쫓아간다?
어지간히 타격감이 올라와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빅리그에서 타자로서 10년 넘게 살아남은 그가 보기에는 그랬다.
물론 그는 자신의 감을 토대로 남한테 특정 플레이를 강요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래서, 피터 콜린스는 타이밍을 완전히 뺏었다는 자신감이 붙은 듯 빠른 템포로 투구를 이어가는 투수를 보며, 부디 자신의 감이 틀렸기를 기도할 뿐이었지만―
따아아아아아아악―!
의도한 곳으로 제대로 들어간 공을, 심지어 데이터상으로 약점을 보였던 바깥쪽 낮은 코스의 포심을 후려쳐서 만든 라인드라이브성 타구가 다저 스타디움의 우측 담장을 훌쩍 넘겼고.
투수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한쪽 무릎을 꿇었으며.
타구를 쫓아갈 엄두도 못 낸 채 가만히 서 있던 피터 콜린스는, 불현듯 작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주루 도중 햄스트링 부상을 당했고, 그걸 빌미로 파드리스 선수들이 일으킨 벤치 클리어링에서 구현기는 3명의 선수를 부상자 명단에 올렸는데.
그런 주제에, 전 동료이자 친구인 벤 리히터의 손에 이끌려 뚱한 표정으로 병문안을 왔었다.
쓸데없이 눈치 보면서 사람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태평스러움이 마음에 들어서, 조언이랍시고 이런저런 말을 좀 얹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 과거의 자신을 두들겨 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감히 누가 누구한테 조언하고 있어.
‘제발 Koo가 그때 내가 한 소리 전부 잊어버렸기를······.’
* * *
제대로 긁힌 공을 공략당한 뒤 흔들리지 않는 투수는 없다.
그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진리였지만, 오늘 파드리스의 선발은 후폭풍을 좀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SD 0 : 6 LAD]
바깥쪽 포심을 제대로 노려 때린, 오늘 경기 두 번째 홈런 이후 연달아 볼넷과 안타를 헌납한 끝에,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마운드에서 쫓겨났으니까.
[진짜 오지게도 두들겨 팼네. 이제 좀 만족해?]
파드리스와의 악연은, 지난 시즌 내내 나와 우리 팀에 끈덕지게 악의를 보내오던 선수들 때문에 생겨난 것.
그런 선수들은 전부 팀을 떠나거나, 아니면 카일처럼 철저히 따돌림당하는 신세가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작년에 받았던 스트레스가, 고작 양 팀 선수들이 몇 명 모여서 사진 한 방 찍은 거 가지고 풀리지는 않을 테니. 오늘 경기에서 파드리스를 최대한 찍어 누르는 것으로 나 나름대로 깔끔한 마무리를 짓고 싶었는데.
‘글쎄?’
사람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긴 한가 보다.
이왕 일이 이렇게 흘러가니, 아예 때려눕혀서 철저하게 기선제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드는 걸 보니.
솔직히 6점이면 뒤집기 힘든 점수인 건 맞는데, 경기 후반에 추격조들이 이닝당 한두 점씩 내주다 보면 세이브 상황까지는 만들어서 ‘졌지만 잘 싸웠다’라고 자기위로는 할 수 있잖아?
“베이스 온 볼스!”
물론 상대 덕아웃에서는 얌전히 나한테 모가지를 내밀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인지.
5회 말 선두타자로 나가 유인구 두 개에 꿈쩍도 하지 않자, 오늘 경기 파드리스의 세 번째 투수는 미련 없이 나를 볼넷으로 내보냈다.
촤아아악!
“세이프!”
‘Run Devil Run’의 영향으로 스트레스를 팍팍 받은 투수가, 1루에 조금이라도 신경 썼다간 실투가 나오겠다는 직감을 느꼈던 걸까.
아니면 선행 주자가 없는 상태에서 지난 시즌 39도루를 기록한 주자를 1루로 보냈으니, 이 정도 세금은 각오하기라도 한 걸까.
그 흔한 견제구 하나 없이, 스트라이크 콜과 도루 허용이라는 샤일록도 울고 갈 물물교환을 감수했다.
“괜찮아, 괜찮아! 집중해!”
“타자만 보고 던져!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게!”
내야수들도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투수를 다독이는 데만 집중했고.
심지어 홈팬들의 반응마저 예상보다 좀 소소했다.
개막전인데. 올해의 다저 스타디움 첫 도루인데.
2루 베이스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박도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내가 문제 하나 내볼까?’
[뭔데.]
‘오늘 내가 왜 이렇게 죽기 살기로 플레이했을 것 같냐?’
[파드리스 엿먹이고 싶어서?]
‘맞아.’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고 좀 들어봐라.
물론 오늘 나한테 가장 큰 동기부여를 준 건 그 이유가 맞긴 한데.
솔직히 도루 시도를 마음껏 해보고 싶은 마음도 컸거든.
지난 시즌에는 사실상 주전 유격수로서 완전히 자리를 잡고 나서야 그린라이트를, 그것도 사전 통보는 반드시 필요한 절반의 허락을 받아냈는데.
‘Run Devil Run’의 영향은 물론, 지난 1년 동안 주루 플레이를 해오며 나 나름대로 타이밍을 몸에 익히다 보니.
올해는 주자로서 한층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뛸게요.’
반론 따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단호한 사인.
잠시 대답이 늦어지긴 했지만, 결국 오케이 사인이 돌아왔다.
그럼. 그래야지. 오늘 홈런 두 개에 4타점을 가져다준 마당에, 혹시라도 도루자 한 번 당한다고 비난의 화살을 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리고 사실 실패할 것 같지도 않고.’
3루 도루는 투수에게서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지 않으면 잡힐 수밖에 없는, 리스크가 큰 플레이.
그러나 그 타이밍이라는 건, 투수가 주자의 도루 가능성을 1도 하고 있지 않다면, 주자로선 프리패스나 마찬가지다.
투수의 타이밍이 아닌 자신의 타이밍대로 출발하면 되는 일이니.
팍! 팍! 팍!
“3루!!! 3루!!!!”
내야수들도 예상 못 했는지 한 박자 늦긴 했지만, 어쨌든 꽤 빠른 타이밍에 베이스 커버를 들어간 3루수.
포수의 송구는 그런 3루수의 키를 넘겨 외야로 날아가 버렸고.
글러브 위로 지나가는 송구를 확인하자마자, 슬라이딩의 추진력을 이용해 곧바로 몸을 일으킨 다음 홈으로 파고들었다.
“세이프!!!”
고작 공 두 개 던지는 동안 1루에서 홈으로 이동하는, 파드리스 팬들의 어처구니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주루 플레이.
열렬한 Koo 콜을 보내주는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한편, 속으로는 다시 박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문제 하나 더 내볼까?’
[아니.]
‘선두타자한테 솔로 홈런 맞는 거랑, 볼넷이랑 도루랑 실책 엮어서 실점하는 거. 똑같은 1실점인데 어느 쪽이 투수한테 더 타격이 클까?’
따아아아아아아악―!
문제를 내자마자, 다저 스타디움을 쪼개놓을 듯한 타격음이 먼저 정답을 말해버렸다.
멘탈이 개박살난 투수가 계속 장타를 얻어맞고,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추격조들이 연달아 마운드를 이어받은 끝에.
[SD 0 : 10 LAD]
5회 말이 끝났을 때, 이미 그로기 상태가 되어버린 파드리스.
이 스코어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