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두 번째 개막전(5)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개막 3연전을 막 끝낸 다저 스타디움.
클럽하우스 안에서 서성이던 다저스의 마이크 올리버 단장은,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냅다 끌고 구석으로 향했다.
“왜 이러십니까. 이제 막 인터뷰 끝내고 퇴근하려는 사람한테.”
“몰라서 물어?!”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의 능글맞은 질문에 올리버 단장은 벌컥 화를 냈다.
지금 막 승장 인터뷰를 마치고 온 감독에게 보일 만한 태도는 아니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8회 초에 Koo를 올린 이유를 좀 설명해주겠나? 가능하다면 내 이성이 남아 있는 동안에 말이야.”
8회 초, 조쉬 먼로가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는 동안 두 명의 주자를 내보냈을 때도, 올리버 단장은 전혀 화내지 않았다.
신인에게 경험치를 먹이다 보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위기 상황에서 갑자기 구현기를 올리다니.
시범경기에서도 비슷한 상황에 등판시켰던 것은, 어디까지나 대처 능력을 키우는 훈련이라고만 생각했고. 그래서 따로 추가 보고도 요청하지 않았건만.
딱히 그 뒤에 올릴 투수가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도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건가.
“막았잖습니까?”
오브라이언 감독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막긴 막았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허브티를 마시다가 교체된 투수를 확인하자마자 죄다 뿜어버린 후, 이 망할 감독한테 보낼 문자를 썼다 지웠다 하는 사이, 고작 4구 만에 이닝을 정리하고 내려갔으니까.
“심지어 막고 나서 홈런도 쳤잖습니까?”
말문이 막힌 사이, 감독은 추가타를 날렸다.
그것도 사실이었다.
8회 초를 그렇게 막아낸 구현기는, 2번 타순 그대로 라인업에 남아 있다가 1사 3루 상황에서 좌측 담장을 넘겨버린 뒤에야 교체됐다.
개막 3연전을 치르는 동안 벌써 4개째였다. 타구 질도 좋았다.
“게다가 Koo는 경기를 소화하면서 몸도 풀어둘 대로 풀어둔 상태였죠. 그러니 오늘처럼 다소 위급한 상황에서 올려도 충분히 제 몫을 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제 몫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 팀의 멱살을 잡고 승리로 이끌었다.
심지어 경기 내내 송구를 하며 어깨가 많이 풀렸을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던졌는데도, 공의 위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지, 그건 아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 오브라이언 감독이 돌아버렸다는 건 변치 않았다.
구현기가 그 정신 나간 짓거리를 실제로 해버리는 바람에 남들 보기엔 안 이상해 보일 뿐.
“투수가 공을 던질 때는 체력만 소모하는 게 아니라는 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그렇죠.”
“가뜩이나 이번 계약으로 온갖 곳에서 말을 얹는 마당에. 부담을 덜어주지는 못할망정, 이래서야 쓰겠어?”
“맞습니다.”
“정신이 피로해지면 그만큼 몸도 쉽게 긴장하게 될 테고. 그랬다가 타격 밸런스에 악영향이라도 가는 날엔 어떻게 될지 정녕 모르겠어?”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엉뚱한 짓거리를 하더니 적반하장으로 나오질 않나,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맞장구치질 않나.
올리버 단장은 지금, 이 감독이 트레이드로 보낸 마리오 로드리고의 빈자리를 채워줄 든든한 좌완 셋업맨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항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지금 단장님께서 말씀하신 것보다 10배는 더 집요하게 Koo를 말려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뜻밖의 진실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지금 감독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 8회 초 주자 있는 상황에서 등판했던 게 구현기 본인이 원해서였다는 말인데.
대체 뭐하러 그런 고난을 자처하려 드나.
“이유요? 할 자신이 있으니까 하고 싶다고, 딱 한마디 하더랍니다. 아무래도 타자로서의 Koo가 너무 임팩트가 큰 나머지 원래는 투수였다는 걸 잊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이해하려고 들면 저희 머리만 아픈 족속들이라 이겁니다.”
다른 투수들과 달리 쓸데없는 고집도 안 부리고 사회성도 뛰어난 구현기였는데, 이런 뜬금없는 데서 완강하게 나올 줄이야.
남감해하는 올리버 단장에게 오브라이언 감독이 달래듯 말을 꺼냈다.
“저도 생각 없이 허락하진 않았습니다. Koo가 지난 시즌 대타에서 출발해 주전이 되기까지 한 달 넘게 걸렸던 것처럼, 클러치 상황 전용 투수가 되려면 증명이 필요하다고 설득했죠.”
“구체적으로는?”
“4월 한 달 동안 블론이나 패전을 한 번이라도 저지른다면 앞으로 투수로서의 등판 시점에 대해선 군말 없이 따르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체력 이슈는 어떡할 거지?”
“등판 때마다 1이닝 이하로. 일주일에 2회까지. 그 이상으로는 투수를 다 써서 랜디를 마운드에 올리는 한이 있어도 추가 등판은 없습니다.”
“흠······.”
흥분이 가라앉고 이성을 찾으며, 올리버 단장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구현기의 마운드 운용 원칙에 대해 미리 추가 보고를 지시하지 않은 자신의 잘못도 있고. 구현기가 계속 불합리한 고집을 부릴 때를 대비한 안전망도 마련해뒀으니.
심각한 문제로 번질 가능성은 한없이 적다는 판단을 내렸다.
“조심해야 할 거야. 혹여 잘못되기라도 했다간 자네나 나나 방구석에서 드라마 보며 빈둥대는 신세가 될 테니까.”
구현기는 올 시즌은 물론, 나아가 다저스의 향후 10년 농사를 좌우할 주요 자원.
올리버 단장은 혹시라도 무리한 기용으로 구현기가 망가지기라도 했다간 큰일 날 줄 알라는 경고를 담아 쏘아붙인 뒤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얼마 후.
개막 홈 6연전 이후 바로 이어진 원정 8연전, 그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 홈으로 돌아오는 길.
11승 3패라는 역대급으로 좋은 페이스를 이어가게 된 선수들이 한껏 분위기를 끌어올리며 난리를 피우는 사이, 오브라이언 감독은 올리버 단장의 자리를 찾아가 넌지시 물었다.
“요즘은 Koo가 마운드에 오를 때 걱정을 좀 덜어내셨습니까?”
그러자 단장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 쓸데없는 짓에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메이저리그 단장을 어떻게 해먹겠나?”
이날 경기에서, 구현기는 1점 뒤진 6회 말 등판해 무사 1, 2루의 위기를 막아낸 다음, 바로 다음 타석에서 1타점 적시타를 날리며 본인 손으로 시즌 3번째 구원승을 얻어냈고.
구현기의 멘탈 걱정만큼 쓸데없는 게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올리버 단장은, 태블릿 PC에 오브라이언 감독이 추천해준 드라마를 틀어놓고 있었다.
“그거 재밌죠? 저도 클레망이 추천해줘서 보고 있는데.”
“다저스가 손도 못 쓰고 털리는 경기보다는 재밌지.”
“그런 경기도 덕아웃에서 보면 생생한 게 나름의 맛이 있습니다.”
“가끔 먹어야 맛있지, 매일 그랬다간 특등석을 다른 사람한테 비워줘야 할걸?”
단장과 감독이 이렇게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잘나가는 팀의 특권.
나이에 맞지 않게 투닥대는 두 사람을 비롯한 다저스의 일원들을 실은 전용기가 캘리포니아 상공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 * *
[Koo, 시즌 3승째 거두며 팀 내 다승왕 경쟁에서 공동 1위 기록!]
원정 8연전의 마지막 경기가 끝난 후,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 하나가 사람들한테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다.
자기네 팀 경기 챙겨 보느라 바쁜 사람들도 ‘Koo가 선발로 복귀라도 했나?!’라며 허둥지둥 달려왔는데.
실상은 개막 후 4경기 등판해 그중 구원승으로 3승을 챙겼다는 거였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이게 그렇게 주목받을 일인가······?]
‘대단한 건 아니고. 드문 일이긴 하지.’
구원승의 조건은 동점이나 지고 있는 상황에 올라온 뒤, 아직 마운드에 이름을 올린 상태에서 역전하는 것.
설령 그 조건을 채웠더라도, 기록원이 다른 구원 투수가 더 ‘효과적인 투구’를 했다고 판단한다면, 승리투수가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니, 멀티 이닝 소화는 없다고 감독님이 못을 박았던 나로서는 구원승을 얻기가 더 까다로울 수밖에 없고.
‘승운 더럽게 없는 투수가 둘이나 있어서, 어쩌다 보니 내가 3승 먹은 거지.’
선발 로테이션이 재조정되면서 2선발이 된 다니엘 슈미트와, 3선발이 된 호세 리카르도.
둘 다 3경기씩 등판해 그럭저럭 잘 던졌는데도 승리는 나란히 1승밖에 못 챙겼으니까.
아무리 몇 승을 했느냐를 가지고 투수를 판단하는 사람은 사라진 시대라지만.
자기보다 ERA도 낮고 이닝 소화력도 부족한 투수가 승리를 더 많이 챙기는 걸 기쁘게 받아들일 투수가 어디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썩 달가운 지표는 아니다.
[투타겸업이 임팩트가 너무 세서 그런가? 타격 쪽은 기사도 거의 없던데?]
게다가 본업인 타자 쪽은 주목을 아예 못 받고 있기도 하고.
시범경기 때 작년보다 타율 떨어졌다면서 호들갑 떨던 언론은, 정규시즌 들어 맹타를 휘두르기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췄다.
생각해보니 열받네. 그 떨어진 타율이란 게 2할 후반이었는데.
‘작년에도 초반에 4할 넘게 치다가 후반부 들어 떨어져서 그런가. 아직은 별 반응이 없네.’
개막 14경기 연속 안타에, 홈런은 6개.
애초에 시즌 초반에는 승부를 피하지 않는 투수들이 많고. 초반에 만난 팀들이 파드리스나 자이언츠를 제외하면 다들 리빌딩을 선언하며 젊은 투수들을 대거 기용했는지라.
강타자와의 맞대결이라는 경험치가 필요했던 덕분에, 승부를 피하는 투수가 적었던 것도 한몫헀지만, 어쨌든 ‘잘 친다’라고 칭찬할 수준은 한참 뛰어넘은 성적.
[내 기록 니가 다 먹을 거라면서. 그러려면 지금 반짝 잘한다고 으스대지 말고 꾸준히 이어갈 생각을 해야지.]
78경기 연속 안타, 그리고 88경기 연속 출루.
조 디마지오와 테드 윌리엄스라는 전설을 제치고, 박도현이 새로 써내려간 기록들.
홈런이야 내가 당장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문제지만, 이 두 가지는 일단 지금의 페이스를 유지한다는 생각으로 차근차근 해나가다 보면, 생각보다 빠르게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 * *
개막 후 14경기를 쉴 틈 없이 달려온 끝에 찾아온 휴식일.
오늘은 오전 수업밖에 없다는 도아와 함께 온종일 집에서 빈둥대기만 했다.
[그렇게 집에만 있으면 안 지루하냐?]
작년이었나, 박도현이 이렇게 물어봤던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이다.
제아무리 팀이 잘나가고 개인 성적이 하늘을 찌른들, 휴식 없이 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기록을 노려보기라도 하려면 일단 최선을 다해 쉬는 게 우선이지.
물론 스트레스가 풀리면 피로도 저절로 회복된다면서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 선수들도 적지 않지만.
“어, 나현 언니네 오늘은 여기 갔구나.”
도아가 SNS 화면을 이쪽으로 내밀었다.
제리도 원래는 쉬는 날이면 집에 틀어박혀 게임이나 하는 놈이었는데, 가이드 출신 여자친구의 영향을 받아 요새는 그래도 밖에 좀 다닌다는 모양.
“도아 너는 지루하지 않아? 나 때문에 집에만 있게 하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한데.”
“응? 딱히. 나도 원래 자주 외출하고 그러는 편은 아니라서.”
정말로 원래부터 집순이인 건지, 여자친구 취향에 맞춰 바깥을 자주 다니게 된 제리처럼 나한테 맞춰주고 있는 건지는 모르는 일.
내 표정을 읽었는지, 도아가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더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집에만 있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잖아.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되는 거지.”
“어? 뭐라고?”
“나 씻고 올게.”
“도아야······?”
말은 이렇게 해도.
박도현이 미리 낌새를 눈치채고 운동방으로 피신했을 때부터, 대충 이렇게 될 거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어, 오빠······?”
“나도 같이 가.”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가짐 없이는 빅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귀중한 휴식일, 몸의 회복을 포기하고 정신의 회복을 선택하며 벌인 전쟁은 결국 무승부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