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세대교체(1) >
“오빠. 이거 봤어? 애기 사진.”
“제리 조카네. 샬럿이랬나? 제리 얘 맨날 동생한테 사진 받아다가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닌다니까.”
“진짜? 완전 조카 바보 다 됐네. 근데 이쁘긴 해.”
“조카 등신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은데. 아니 자기 애면 또 몰라. 애 키우느라 정신없는 동생한테 사진 보내달라고 떼쓰는 거 상상만 해도 내가 다 속이 터져.”
“안 그래도 나현 언니도 그 얘기 하더라. 제리가 말은 안 해도 아기 가지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전에는 졸업하고 나서 생각할 일이라고 하더니. 나현 씨 이제 4학년 올라갔댔나? 졸업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졸업······. 응. 제때 할 수 있겠지. 아마도······.”
“아······.”
“언니 얘긴 됐고. 오빠는 어때? 애기 사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응? 어?”
“뭐야? 오빠 지금 망설였어?”
“아니, 아니아니, 망설이는 건 아니고. 나도 너랑 가정 꾸리고 싶은 마음 당연히 있지. 근데 너도 이제 스물하나고. 또 내가 선수 생활하는 동안에는 육아에 거의 참여를 못 할 텐데. 그러면 너도 대학 계속 다니기가 어려울 거니까 네가 생각하는 미래에도 차질이······.”
“숨넘어가겠다. 농담이야. 사실 나도 지금은 좀 이른 것 같긴 해. 내가 아이들 키우는 모습이 아직 상상이 잘 안 된다.”
“흠······.”
“왜 그래?”
“아니, 애들은 아닌데. 나도 키워야 하는 게 좀 있어서.”
“??”
* * *
지난 시즌도 그렇고, 이번 시즌도 그렇고.
시즌 초와 막바지에 묘하게 홈 경기나 휴식일이 적고, 중간에 그나마 살짝 널널하도록 일정이 짜였다.
4월의 남은 일정은 홈 3연전 후 원정 6연전, 다시 홈 9연전.
기껏 돌아온 LA에서 3경기만 뛰고 다시 중부 원정길에 오르는 빡빡한 스케줄이라서.
원정길에 나서기 전 최대한 컨디션을 끌어올려야겠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출근해 웨이트 룸으로 향했고.
“봐봐. 이제 6개월쯤 됐는데 좀 있으면 말도 할 것 같다니까? 우리 남매 중에 막내만 그나마 공부를 잘했는데 그 유전자 덕분일까? 내가 보기엔 제리라고 말하려다가 j 발음을 아직 못 해서 이런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
가는 도중, 휴식 공간에 앉아 평소처럼 조카 자랑이나 하고 앉아 있는 제리를 발견했다.
좀 있다가 등판할 예정일 선발투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태평한 모습.
“아무리 봐도 그냥 옹알이······ 윽!”
“정말 그렇게 들리는군요. 자신이 태어나는 날 삼촌이 경기가 끝나자마자 급하게 달려와 줬다는 걸 잊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건 모르겠고 그냥 귀엽네요!!!”
작년에 데뷔해, 올해 첫 풀타임 시즌을 치르는 3명의 차세대 핵심 자원, 조쉬와 브레이든과 조나단을 데리고서.
[얘는 지 등판 준비나 할 것이지 후배들 앉혀놓고 뭐 하는 짓이래.]
‘한 놈 빼고는 딱히 눈치도 안 보는 것 같다는 게 함정이지만.’
“아, Koo! 너도 우리 샬럿 보러 왔구나? 잘 왔어. 이렇게나 작고 귀여운 천사가 다저스의 승리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너도 기운을 받아 가고 싶겠지.”
“아, 오셨어요, Koo.”
“Koo!!! 안녕하세요!!! 어제는 잘 쉬셨나요!!!”
“안녕하십니까.”
평소대로 별생각 없어 보이는 조나단을 제외하면, 심각하게 도망치고 싶어 보이는 표정들을 짓고 있길래.
늘 하던 대로 제리한테 시비를 걸었다.
“이따 마운드 올라가야 할 놈이 애들 데리고 뭐 하는 짓이야. 가서 준비 안 해?”
“뭐 하는 짓이냐니. 기운을 전해주고 있지. 너도 필요해서 온 거 아니었어?”
“내 스태미너가 너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을 일은 없으니 그건 신경 끄고. 조카 자랑도 하루 이틀이지 맨날 뭐 하는 짓이야? 니가 결혼해서 아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면서.”
“물론이지. 나한테도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으니까. 아직은 가정을 꾸릴 준비가 덜 되었을 뿐.”
요즘 얘랑 같이 있으면 왜 이렇게 열이 뻗치나 했더니, 이제야 알겠다.
여자친구가 생기고, 월드시리즈 우승 퍼레이드에 데려오는 등 진도까지 팍팍 나가면서, 여자 관련해서 놀리려고 해도 도통 딜이 박히지를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너에겐 항상 감사하고 있어. 네가 그날 나를 저녁 식사에 불러주지 않았다면 클라라와의 만남도 없었겠지. 역시 넌 내 진정한 친구야.”
게다가, 어쩌다 보니 내가 다리를 놓아준 셈이 되어버려, 나한테 묘하게 친절해졌는데. 그게 또 너무 인위적이라서 더 짜증나기도 하고.
“고맙냐? 고마우면 돈 좀 빌려줘라. 나도 친구 덕 좀 보자.”
“돈? Koo 너한테라면 차용증 없이 100만 달러까지는 빌려줄 수 있어.”
[어우, 씨. 이거 완전 찐사랑인데? 너는 너네 아버지한테 돈 빌려줬어도 차용증은 무조건 받았을 거 아냐.]
‘싸물어 박도현.’
어디서 팩트를 들이대고 있어.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작년보다 한층 재수없어진 이 치명치명 제리한테서 후배들을 구해내는 거지.
“또 니 여자친구 자랑할 거면 아예 입 열지도 마라. 얘네가 대체 뭘 잘못했냐? 경기 준비하다 잠시 쉬러 왔을 뿐인데.”
“애정 표현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아버지도 아직 아침에 출근하실 때마다 어머니께 키스하시는걸요!!!”
“안 물어봤고, 앞으로도 조나단 네 의견이 궁금할 땐 내가 물어볼 테니까, 이럴 땐 제발 그냥 조용히 좀 해줘.”
“흥미로운걸. 어떻게 그리 오랜 세월 동안 한결같은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거지?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
“너는 그냥······ 아니다. 됐다. 말을 말자.”
또 지들끼리 코드가 맞아 떠들어대기 시작한 치명치명 제리와 투 머치 토커 조나단을 내버려둔 채, 나머지 애들을 데리고 비상탈출을 시전했다.
“가서 일들 봐라. 바쁠 텐데.”
“감사합니다! 가보겠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어지간히도 거북했는지, 거의 눈물까지 글썽이더니 후다닥 사라지는 조쉬와 브레이든.
아무리 제리가 에이스라도, 저렇게 충고도 조언도 뭣도 아닌 뻘소리나 해댈 땐 슬쩍 빠져도 되는데. 아직 쟤네한텐 쉽지 않은가 보다.
[너 신인 때 제리 말고 로버트가 저런 소리 했어도 슬쩍 빠질 수 있었을까?]
‘얘 정신 나갔네. 후딱 뛰어가서 메모장 들고 와야지.’
경기 준비고 자시고 일단 살고 봐야지.
아내분이 육아로 힘들어하는 것도 몰랐다던 로버트가 그런 팔불출 같은 소리를 하는 건 솔직히 상상이 잘 안 되긴 하지만.
[제리한테 저렇게 쩔쩔매는 것도 오래 안 가겠지?]
‘그걸 말이라고.’
지금이야 빅리그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게 버겁고, 주전 선수들이 대단해 보이고, 제리처럼 다른 놈들한테 호구 취급받는 선배한테조차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느끼고 있지만.
좀만 시간 지나고 머리도 실력도 쑥쑥 크다 보면 지금 같은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겠지.
‘좀 이따 만나볼 그 친구처럼 말이야.’
다시 원정길에 오르기 전, 홈 3연전의 상대는 저 멀리 동부에서 날아온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작년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만났던 이 팀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외야의 개노답 삼형제 중, 막내 겸 주전 우익수를 맡고 있는 넬슨 데스파이네.
2037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차지하며 다저스의 MVP―사이 영―신인왕 석권을 막았던 이 친구가, 전에 만났을 땐 약간 건방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새 성적이 꽤 잘 나오면서 기가 잔뜩 살았을 것 같은데, 오랜만에 좀 귀여워해 줘야겠어.
* * *
[LA 다저스 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대 LA 다저스. 시즌 1차전을 앞둔 지금, 에이스 제리 헤이즈택이 몸을 풀고 있습니다. 연습구를 하나씩 던질 때마다 홈팬들의 열렬한 환호가 터지는군요!]
[작년 가을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명승부를 펼쳤던 두 팀이죠. 공교롭게도 둘 다 비슷한 겨울을 보내기도 했고요.]
[구체적으로는요?]
[우선 두 팀 모두 외부 FA 수혈보다는 내부 자원 단속에 집중했습니다. 다저스가 투타 에이스 제리 헤이즈택과 Koo를 연장계약으로 묶었듯, 브레이브스 역시 ROY를 차지한 외야수 넬슨 데스파이네와 연봉조정 기간을 커버하는 8년 계약을 맺었죠.]
[연장계약에 돈을 많이 쓰면서, 나머지 포지션은 트레이드나 중저가 FA로 채웠다는 점도 비슷하겠고요.]
[그리고, 앞으로 1~2년 정도 더 윈나우를 달린 뒤에는 다시 리빌딩으로 숨고르기를 해야 한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아무래도 현재 주전 선수들이 그 안에 은퇴나 FA로 팀을 떠날 확률이 높으니까요. 양 팀 팬들이 지금의 야구를 마음껏 즐겨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 팀의 신인급 선수들을 주목해보는 것도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되겠습니다. 다저스에서는 오늘 3루수로 선발 출장한 조나단 라틀리프가 있겠고. 브레이브스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죠?]
[작년 내셔널리그 신인왕 넬슨 데스파이네. 오늘도 역시 3번 우익수로 출전한 이 선수를 1회 초 타석에서 만나보시겠습니다!]
* * *
데뷔 첫해 선풍적인 활약을 선보이다가, 2년 차 이후 처절하게 무너지는 소포모어 징크스.
심리적 부담감 때문이든, 반대로 작년의 활약에 취해 준비를 게을리해서든, 아니면 약점을 죄다 분석당해서 자신감과 성적의 하락으로 이어지든, 하여간 여러 이유를 가져다 붙일 수 있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그걸 돌파하지 못한다면, 빅리그에서 오래 얼굴을 볼 일은 없다.
[너한테도 소포모어 징크스 운운했던 기자 놈들 있었던 거 기억나냐?]
‘얼굴까지도 생생하다.’
사실 어지간히 활약했던 신인이라면 한 번쯤은 다 들어보는 소리긴 한데.
모르긴 몰라도 작년 겨울 나만큼이나 그런 소리에 시달렸던 선수 별로 없을 거다. 심지어 나는 신인도 아닌데.
이번 연장계약은 FA가 고작 1년 남았다는 특수한 상황 덕을 많이 봤으며, 타자로서는 한 시즌밖에 뛰지 않은 선수에게 그만한 계약을 선사한 것은 구단이 에이전트한테 끌려간 결과다 등등, 뭐 이런 구체적인 쌉소리를 길게도 써놨었지.
그런 기사 썼던 기자들?
개막한 지 2주쯤 지났는데 별 소식 없는 걸 보면, 얼굴 못 내밀고 다니는 중이겠지. 내가 제발 망해주길 기도하면서.
‘어쨌든 그만큼 2년 차 선수가 활약하는 게 어렵다는 거지.’
특히나 분석 기술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는 현대 야구에서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극복하는 선수들이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고.
데뷔 첫해보다 이듬해 더 좋은 활약을 선보이는 선수들은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실정.
싹수가 보이는 선수들을 일찌감치 장기계약으로 묶어두고 애지중지 키우는 구단이 늘어나는 이유다.
따아악―!
“세이프!”
2번 타자가 살짝 밋밋하게 들어간 포심을 받아 때리면서, 1사 1루의 상황에서 막 타석에 들어가는 넬슨 데스파이네 역시 그중 한 명.
8년 1억 달러라는, 지금은 은퇴한 브레이브스의 특급 유망주 출신 아쿠냐 주니어와 똑같은 계약을 얻어내, 현재까지는 혜자 계약이라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쏠쏠한 활약을 해주고 있는데.
[쟤 표정 왜 저래? 삐졌나?]
작년, 다저스와의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별로 좋은 기억을 가져가지 못했다.
외야에서 3루까지 정신 나간 빨랫줄 송구를 선보였음에도 주자였던 나를 잡아내지 못한 건 그렇다 쳐도. 승기를 가져올 수 있던 찬스에서 허무한 견제사를 당했던 건 확실히 타격이 컸는지.
이어지는 경기에서 아무런 활약도 못 하고 그대로 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진출을 지켜봐야 했으니까.
따아아악!
“파울!”
오늘 그때의 삽질을 만회하는 동시에 시즌 초 좋은 페이스를 이어가겠다는 듯, 방망이 돌리는 기세가 예사롭지가 않다.
제법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외야 쪽으로 향하는 파울 타구.
그러나, 정작 본인은 무언가 성에 차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한다.
‘이 상태에서 저 정도 타구가 나오는 거 보면, 정상 컨디션일 때는 꽤 까다롭겠네.’
지난 시즌 타이틀 보유자를 상대할 때 컨디션이 올라가고, 반대로 상대는 제 컨디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재능, ‘왕관의 무게’.
내셔널리그 신인왕이라는 굵직한 타이틀을 가져간 넬슨 데스파이네는 그 후폭풍을 상당히 세게 맞은 듯했고.
따아악!
“아웃!” “아웃!”
타이밍은 잘 맞았는지 나름 빠르긴 했지만, 살짝 빗맞으면서 내야를 빠져나가지는 못한 타구를 잡아 2루로 보내면서, 그대로 더블 플레이로 이어지며 이닝 종료.
기회를 허무하게 날린 넬슨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1루에서 헬멧을 벗는다.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이번 시리즈 내내 그리 수월하진 않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