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세대교체(2) >
모든 프로스포츠에서 세대교체는 피할 수 없는 순리다.
언제나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줄 것 같던 프랜차이즈 스타가 노쇠화로 후배에게 밀려나거나, 자금 사정상 연장계약을 맺을 수 없는 선수를 트레이드로 보내거나, 아니면 박도현처럼 불의의 사고로 강제 세대교체가 벌어지거나 하면서.
메이저리그 30개 팀의 주전 라인업은 그렇게 매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변화를 얼마나 잘 메우느냐에 팀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강팀으로 분류되는 팀이 하나같이 육성에 일가견이 있고, 백업 뎁스가 두꺼운 게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다저스만 해도, 올해를 마지막으로 계약이 끝나는 3루수 켄과 은퇴가 머지않은 1루수 클레망의 자리를 각각 조나단과 랜디가 노리고 있고.
주전 포수 헨리는 아직 계약 기간이 몇 년 남았지만, 원래부터 육성에 시간이 걸리는 포지션 특성상 특급 유망주 브레이든이 일찌감치 출전 시간을 나누며 경험을 쌓는 중이지.
‘Koo, 내가 보기엔 넌 선수로 성공 못 해도 코치로 나가도 괜찮을 것 같거든?’
하이싱글 A에서 고작 몇 달 함께했을 뿐이지만, 유독 나한테 잘해주던 젊은 투수 코치가 해준 말이 떠오른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코치라뇨?’
‘일단 너는 사람이 냉정해. 정에 휘둘리지 않아. 안 되겠다 싶은 선수들은 칼같이 쳐내는 것도 코치의 역할이거든.’
‘어쩌라고요.’
‘그리고 상대 타자에 대한 데이터랑 실제 타석에서 보는 타자의 모습을 잘 조합해서 피칭 플랜을 짜는 것도 네 특기잖아. 선수를 분석하는 능력은 앞으로 네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거다.’
나는 될 놈이라고, 자신의 모든 걸 가르쳐줄 테니 빅리그 올라가서 자신을 잊지 말라고 큰소리 뻥뻥 치던 주제에.
파워볼에 당첨되자마자 옳다구나 하고 야구계를 떠나버린 그 인간은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너는 신인 선수한테 가장 필요한 경험이 뭐라고 생각하냐?’
처음 그 질문을 들었을 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 관심도 없었지.
빅리그에 올라가 선발투수로 뛰다가 사고를 당하고, 지옥 같은 재활 끝에 유격수로 복귀해 30홈런을 날리는 등. 길지는 않아도 임팩트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시간들을 보내고 난 지금은, 나름대로 생각해낸 대답이 있다.
이기는 경험.
압도적인 승리도 도움이 되지만, 아득바득 매달린 끝에 접전으로 이기거나, 설령 지더라도 무기력한 모습 없이 하나의 타석과 한 이닝의 수비에 목숨을 걸고, 성과를 내보는 것이 그 무엇보다 큰 자산이 되더라.
[ATL 1 : 3 LAD]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시즌 1차전이 바로 그런 경기였다고 본다.
3점의 득점 지원을 안고 7회 초 2사까지 순조롭게 던지던 제리가 뜬금없이 솔로포를 얻어맞고, 그 여파였는지 주자 두 명을 연달아 내보냈다가 강판당한 뒤.
두 번째 투수로 올라온 고든이 추가 실점 없이 이닝을 끝내긴 했지만, 다음 이닝에도 올라가 똑같이 주자 두 명을 남겨둔 채로 강판.
마운드에 올라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감독님의 선택은 나를 유격수 자리에 남겨둔 채 마무리 새뮤얼을 조기 투입하는 것이었고.
[구현기 선수, 오늘 경기 진짜 대박이었어요. 특히 8회 초에 직선타 잡아내서 병살로 연결했던 거! 눈이 정화된다는 게 이런 걸까요?]
[감사합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옆자리 관객분한테 실수로 음료를 죄다 쏟아버렸지 뭐예요! 다행히 그분도 흥분한 건 마찬가지라서 세탁비 물어드리는 걸로 끝났지만!]
[그런 것까지는 안 알려주셔도 돼요.]
‘왕관의 무게’의 컨디션 보정 효과 덕분이었을까.
제리의 여자친구이자, 경기 내용에 따라 든든한 팬과 악성 훌리건을 오가는 이나현이 인정할 정도의 호수비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경기는 이겼고, MVP 인터뷰도 마치고, 가슴을 졸이던 팬들도 행복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떠났지만.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아, Koo!!! 수고하셨습니다!!!”
지금 막 클럽하우스에서 마주친 조나단이, 오늘 경기에서 영 힘을 못 썼다는 것.
타석에서는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하고. 수비에선 안타로 기록되긴 했지만 실책성 플레이로 위기 상황을 자처하기도 했으니.
나 때문에 팀이 질 뻔했다는 자괴감에 빠지기 딱 좋은 상황이다.
‘겉으로는 밝은 척해도, 속은 아닌 애들도 종종 있잖아.’
[글세. 내가 보기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긴 한데······.]
작년까지는 스스로 알아서 해결할 문제겠거니 하고 대충 위로나 해주고 말았겠지만.
나를 팀의 기둥으로 삼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는 12년짜리 계약서에 사인하고 나서도, 내 성적에만 신경 쓸 정도로 양심 없는 놈은 아니라서.
최대한 선량한 얼굴을 하려고 노력하며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선발로 나와서 피곤했지? 밥 먹고 바로 들어가는 거야?”
“아뇨!!!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경기에서 제 몫을 다하지 못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저 자신에게 벌을 주려고 합니다!!!”
얘가 요새 제리랑 놀더니 물들었나.
한숨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조곤조곤 타일러보기로 했다.
“내가 작년에도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체력이 영원히 가는 게 아니라고. 풀타임으로 뛴 날에는 간단하게 마무리 운동 정도만 하기로 하지 않았나?”
“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벌이란 건 뭔데.”
“오늘은 저녁밥을 한 접시만 먹을 겁니다!!! 직원분들이 정성껏 만들어주신 음식을 제가 과연 먹을 자격이 있을지 고민하긴 했는데요!!! 배가 고파서 일단 한 접시만 먼저 먹고 마저 고민해보려고요!!!”
이번에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이런 놈을 데리고 앞으로 못해도 6년은 더 뛰어야 한다니.
[내가 걱정할 필요 없을 거라고 했지?]
박도현이 우쭐대는 게 꼴 보기 싫긴 한데, 딱히 반박할 거리는 없었다.
‘그래, 징징대는 것보다야 낫긴 하다.’
새뮤얼이 9회 초를 삼자범퇴로 막아내며 오늘 경기가 끝난 순간, 대기 타석에서 맥없이 고개를 떨구던 넬슨 데스파이네가 떠오른다.
오늘 조나단과 똑같이 4타수 무안타에 수비에서도 정신을 못 차리던데.
‘어차피 걔도 앞으로 최소 8년은 내셔널리그에서 뛸 텐데, 호구 잡아놓으면 편하지 않겠어?’
[넌 진짜 나중에 어떡하려고 숨 쉬듯 업보를 쌓냐?]
* * *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중심 타선을 책임지고 있는 외야의 개노답 삼형제.
작년에 장기계약이 만료된 베테랑 좌익수 뤼카 스킬라치가 1년 1,000만 달러라는, 경력과 공로를 생각하면 염가나 다름없는 계약으로 잔류하자, 브레이브스 팬들은 ‘우리 1년 더 하게 됐다고’를 외치며 환호했지만.
막상 개막 후 2주가 지난 지금, 뤼카 스킬라치는 2할 초반대의 타율에 홈런은 개시조차 하지 못하며, 팬들은 번쩍 치켜든 손으로 뒷목을 붙잡아야 했다.
[애초에 이럴 거 알고 붙잡은 거 아니었어?]
물론 옹호 아닌 옹호 여론도 적지 않았다.
타율과 출루율은 해가 갈수록 떨어지는 중이었고, 젊은 타자들과 비교해서 경쟁력을 갖춘 건 매년 20홈런을 만들어내는 장타 툴 하나뿐.
당장 성적이 안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으니, 팀의 위닝 멘탈리티를 이끌고 젊은 선수들을 다독이는 베테랑의 역할을 기대하자는, 응원인지 돌려까는 건지 모를 글이 팬 커뮤니티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나.
‘세대교체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팀이 딱 지금 브레이브스가 아닐까.’
기존의 주전 선수와 신인 선수가 출전 시간을 나누며 적절하게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줘야 할 베테랑이 세월의 칼바람을 너무 세게 맞아버린 거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상대 클린업 트리오 중 4번 타자 뤼카 스킬라치는 현재로선 딱히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었고.
지난 시즌 신인왕을 받은 넬슨 데스파이네, 그리고 행크 애런 상과 중견수 골드 글러브를 받은 앤드류 매닝은 ‘왕관의 무게’의 영향을 받아, 작년 정규시즌에서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살짝 나사가 빠진 듯한 플레이를 보여줬기에.
2차전 역시 낙승까지는 아니라도 승리를 챙겨올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따아아아아악―!
[소리만 듣고도 다저스 야수들이 걸음을 멈췄습니다!!! 다저 스타디움의 외야 한복판에 꽂히는 타구! 전날의 부진을 씻어내는 넬슨 데스파이네의 투런포! 이로써 올 시즌 개막 후 처음으로 브레이브스의 클린업 트리오 전원이 타점을 기록하는 경기가 나왔습니다!!!]
‘왕관의 무게’에 대해 새삼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경기였다.
어디까지나 컨디션을 약간 찌뿌둥하게 만들 뿐, 밋밋하게 들어오는 실투를 놓치는 얼간이로 만들어버리지는 않는다는 것.
[ATL 10 : 3 LAD]
“Booooooooo!!! 인생 최악의 경기를 굳이 눈꺼풀에 처박아줘서 고오맙다 아주!!!”
“내가 이딴 경기나 보려고 월차 낸 줄 알아?!”
“야!!! 다니엘!!! 잘 던져 봤자 타자 놈들이 점수 안 내준답시고 시위하는 거야 뭐야!!!”
개막 후 16경기를 치러 12승 4패, 승률 75%를 기록 중인 팀이라도 지는 날에는 어김없이 팬들의 비난이 쏟아진다는 게 스포츠 선수의 고충이 아닐까.
[어쩔 수 없지. 오늘 전체적으로 다들 무기력했으니까.]
오늘 선발 다니엘 슈미트의 성적은 3과 3분의 2이닝 7실점.
5선발로 기용된 모리츠가 좀 헤맸던 걸 빼면, 1선발부터 4선발까지는 호투를 이어갔기에, 이렇게 큰 점수를 허용하는 경기가 익숙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팬들에게나, 우리에게나.
“162경기 중 한 경기를 치르느라 다들 고생 많았다. 승리도, 패배도, 우리한테는 익숙한 일이니, 이젠 내일을 준비할 시간이다. 만약 아직도 패배가 낯선 선수가 있다면 나한테 들키기 전에 얼른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고.”
감독님은 선수들에게 짤막한 메시지를 남기고는 라커룸을 벗어났다.
“고생들 했다. 가서 푹 쉬어.”
“오늘은 딴짓하지 말고 일찍들 들어가. 내일 바로 밀워키행 비행기 타야 하는 거 알지?”
고참 선수들이 슬슬 해산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와중에, 이번 시즌 최악의 투구를 펼쳤던 다니엘은 착잡한 표정으로 자기 라커 앞에 서 있었다.
감독님이 남기신 말뜻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중일까.
“다니엘.”
슬쩍 다가가서 말을 걸자, 근처에 있던 몇몇 선수들의 시선이 쏟아진다.
쟤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뭐 이런 불신의 눈빛이 섞여 있는 게 마음이 아프긴 하다만.
“아까 감독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떠오른 건데, 익숙해지는 거랑 당연하게 여기는 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 그게 무슨······.”
“오늘 나 진짜 X 같았네, 하고 투덜대면서도 집에 돌아가면 아들한테 밤늦도록 목마를 태워 줄 수 있는 게 진짜 익숙해진다는 거 아닐까?”
성적에 비해 승수를 못 챙기는 투수는, 그만큼 연패에 빠지기도 쉽다.
아무리 승리투수가 사장된 지표라지만, 패배는 쌓이면 쌓일수록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러는 건, 다니엘이 오늘 경기를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라는 나름의 배려다.
“그러니까, 오늘 집에 가면 아들이랑 같이 목욕을 하고,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잘대는 걸 들어주면서, 잠들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봐. 여기서 그렇게 죽상으로 서 있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겠어?”
“아니, Koo.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결혼을 아직······.”
그러자, 나 못지않게 남 놀려먹는 데 진심인 R.H.가 은근슬쩍 끼어든다.
“맞아! 다니엘 네 아들도 다저스의 투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면서?! 정신 차려! 넌 네 아들의 꿈이야!”
“전에 클럽하우스에 데려온 그 아이 맞지? 애가 아주 씩씩한 게 너를 쏙 빼닮았더라!”
“아니 뭔 소리예요. 저 여자친구한테 차인 지 얼마 되지도 않았······.”
“자자! 우리 다니엘의 귀여운 아들에게 내일 경기 승리를 바치자고! Lat’s Go!!!”
“Dodgers!!!”
사람이 세 명 모이면 없던 호랑이도 생겨난다고 했던가.
하나둘 천연덕스럽게 끼어들더니, 어느새 장가도 안 간 총각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버렸다.
원래는 농담으로 다니엘에게 웃음을 되찾아주고 싶었는데, 뜻하지 않게 희생양으로 삼아 팀의 사기를 올린 꼴이 되어버렸지만.
뭐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팀에 더 큰 도움을 줬으니 야구의 신이 상을 내려주지 않을까?’
[만약 나중에 니가 주장이라도 달면 팀 꼬라지 진짜 볼만하겠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솔직히 4회도 못 넘기고 7실점 했으면 이 정도 놀림은 감당해야지.
* * *
[뭐? 야구의 신이 상을 내려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3차전을 앞둔 오전.
낮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일찌감치 출근한 나는, 오늘 경기의 선발 라인업이 적힌 종이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1루수 랜디, 3루수 조나단, 포수 브레이든, 중견수 채드윅, 좌익수 벤.
백업 선수들을 꽉꽉 채워 넣은 채 치르게 된 오늘 경기.
원활하지 않은 세대교체니 뭐니, 속으로 브레이브스를 깎아내렸던 업보를 정말로 받는 걸까.
어디 진짜 세대교체가 뭔지 보여주라는 듯, 2번 유격수에 내 이름이 떡하니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