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너에게 난, 나에게 넌(1) >
4월이 끝난 시점에서, 다저스는 18승 8패로 내셔널리그 승률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런 다저스의 독주를 두고, 전문가들은 잠깐 부진하더라도 금방 정신을 차리는 선발진, 적절한 경쟁을 통한 긴장감을 집중력 있는 수비로 표출할 줄 아는 야수진, 작년에 20홈런을 넘긴 타자로 절반 이상을 채운 타선 등등, 각자의 분야에 비춘 의견을 내놓았지만.
그 전문가라는 게, 전부 작년에 내 타자 전향이 망할 거라고 확신했던 양반들뿐이다 보니, 업계 관계자들 말고는 딱히 귀담아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공 좀 더 신중하게 고르지 그랬냐!!! 이 망할 놈들아!!! 베타카로틴 듬뿍 들어간 당근이나 실컷 처먹어라!!!”
“목욕하고 마사지 받고 잠이나 처자!!! 내일도 우리한테 이딴 경기 안 보여주려면 푹 쉬란 말이다!!!”
아무튼, 팀이 잘나가다 보니 홈 경기에서 패배하고서도 쌍욕 아닌 격려가 쏟아지는 엄청난 메리트를 얻었고.
덕분에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직업 만족도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팀이 잘나가도 너는 똥을 싸고 있었다면 과연 직업 만족도가 높았을까?]
내가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을 별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박도현이, 굳이굳이 더러운 비유로 내 속을 뒤집어놓으려고 했지만.
‘내가 똥을 쌌어도 과연 다저스가 잘나갔을까?’
똑같은 표현을 인과관계만 뒤집어서 응수했다.
그러니 박도현도 차마 반박은 못 하고 꿍얼거리기만 한다. 사실이거든.
슬래시라인 0.438/0.494/0.712에 9홈런, 12도루.
도루 시도는커녕 안타 치고 나가면 대주자로 교체되기까지 했던 작년 이맘때와는 달리 마음 놓고 달렸더니,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먼저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하게 됐는데.
사람들이 환장하는 포인트는 여기가 아니었다.
[Koo, 4월 전 경기에서 안타 폭발! 연속 경기 안타 및 출루 기록은 26경기로 현재진행형!]
개막 이후 차근차근 안타를 쌓아가다 보니, 어느새 한 달 내내 매 경기 안타를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선수가 됐다.
어떤 언론에서는 박도현의 연속 안타 기록을 정조준하는 중이라며 설레발을 치기도 했는데, 아무리 내가 평소 박도현을 만만하게 본다지만 이건 선 넘은 거지.
이 미친놈이 조 디마지오가 보유하던 기존의 연속 안타 기록을 무려 78경기로 갈아치운 덕분에, 아직도 반환점은커녕 3분의 1지점밖에 도착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투수 구현기가 등판한다면 어떨까?’
박도현은 분명 위대한 선수고, 한 5년만 더 살았다면 충분히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겠지만, 얘가 타석이 아닌 마운드에 올라간다면 그보다 만만한 놈이 없을 거다.
사실 나도 이번 시즌 그리 많은 이닝을 소화하진 않았고. 작년까지는 아예 변화구도 못 던지는 신세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쟤보다는 낫지.
4월 한 달 성적이 8경기 6.2이닝 4승 2홀드 ERA 0.
남한테 이닝만 가려놓고 보여주면 ‘이런 투수를 왜 선발과 불펜을 오가게 만들어요?’라는 소리 나오기 딱 좋은 성적.
물론 등판 간격이 보통 불펜투수들과 똑같았다면 절대로 낼 수 없는 성적이었겠지만.
매 경기 동점, 혹은 1~2점 차 접전 중 주자 있는 상황에서 등판해 단 한 명의 승계 주자조차 불러들이지 않았으니, 팀 승리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요새는 감독님 욕하는 사람 많이 줄어든 모양이던데?]
‘애초에 본인은 신경도 안 쓰시긴 했지만.’
부담스러운 상황마다 올리는 게 감독으로서 할 짓이냐느니, 공을 적게 던지게 하면서도 투수를 갈아 넣는 신개념 착즙기를 개발했다느니, 뭐 이런 살벌한 DM도 많이 받으셨다던데.
내가 먼저 원했다거나 한 달 동안 블론이 한 번이라도 나오면 그만두기로 했다는 소리는 한마디도 안 한 채, 그저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Koo는 이미 슈퍼스타입니다. 다저스는 그걸 알고 그 친구에게 그만큼의 투자를 했고요.”
부담을 덜어줘도 모자랄 판에 이게 뭔 짓거리냐면서 인터넷이 한동안 떠들썩했지만.
역시나 본인은 코딱지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거 보면, 빅리그 감독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싶더라.
* * *
감독님이 인터뷰로 기름칠을 해주시긴 했지만.
이번 시즌을 앞두고 갱신하거나 새로 맺은 스폰서 계약 규모만 봐도, 명실공히 스타 선수로 분류됐다고 봐도 될 거다.
그리고, 슈퍼스타의 사생활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든 넘쳐났다.
[Koo. 대학생 여자친구와 경기장 근처 카페에서 밀회!]
[UCLA 캠퍼스에서 여자친구를 차에 태우는 Koo의 모습 포착!]
내 여자친구가 다저스의 아픈 손가락인 박도현의 동생이라는 점도 있어서, 한동안은 어디 돌아다닐 때마다 파파라치들에게 찍힌 사진이 인터넷이 떠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싹 사라진 뒤였다.
[Koo 이 인간은 경기장 가고 여자친구 만나는 것밖에 안 하고 사냐?]
재미가 없어졌거든.
사실 도아가 박도현 동생이라는 게 관심 끌었던 것도 잠시였지, 따지고 보면 소꿉친구끼리 연애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데다. 얘 만나는 것 말고는 어디 싸돌아다니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젠 그나마 종종 보이던 목격담도 더 보기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나 그럼 진짜 신청서 낸다? 이제 못 물러?”
“그러라니까.”
앞으로는 도아와 한집에서 살게 됐으니까.
기숙사 연장을 거부하겠다는 신청서를 내고, 2학년에 올라가는 올해 가을학기부터 우리 집에서 통학하기로 했다.
사실상 일주일에 몇 번 정도는 자고 가는 반 동거 상태였기에 허락을 받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만, 일단 도아네 부모님께 정식으로 보고는 드렸는데.
“그, 그래······. 안 그래도 도아한테 미리 얘기 듣긴 했다······.”
아버님은 목소리가 좀 떨리시긴 했지만, 반대하시지는 않았다.
반대를 안 한 건지 못 한 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근데 현기야, 그럴 거면 굳이 도현이 집을 네가 돈 주고 살 필요는 없지 않았니?”
어머님은 무슨 새삼스럽게 허락을 받느냐는 식으로 대꾸하시더니, 도리어 이렇게 물었다.
그냥 웃으면서 얼버무리기는 했는데, 사실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가뜩이나 부동산 시장이 미쳐 날뛰는 LA에서 이 집을 사느라 썼던 돈은, 당시만 해도 장기계약을 맺기 전이었던 나한테 아예 타격이 없진 않았으니.
[그때는 내 집 놔두고 도아가 기숙사에서 살면 그림이 이상하고 그러지 않았냐?]
그것도 맞지.
실제로 도아의 미국 유학이 한국에서 잠시나마 화제가 됐던 걸 생각하면,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세금 문제도 무시 못 했고. 버는 만큼 써야 세금 폭탄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으니까.
세금을 덜 내는 지역에 별장을 마련하는 선수도 적지는 않았지만 그건 그것대로 그림이 이상하고.
근데, 그것 말고도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박도현한테는 절대 말할 일 없는 이유가.
‘사람 호의에 기대서 누릴 거 다 누리고 사는 거, 그거 엄청 꼴사나운 짓이다.’
아버지가 예전부터 계속 강조했던 말이었다.
예전에야 육아는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주제에 뭔 호의 타령이냐는 생각이 앞섰고. 그래서 보란 듯이 박도현의 호의에 기대서 월세 안 내고 얘네 집에 얹혀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야 나는 마이너에서 갓 올라온 최저연봉자에, 박도현은 연봉만 3천만 달러였다는 명분도 있었고.
근데, 내가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게 되고, 투수로서 이뤄온 모든 걸 잃어버릴 지경에 놓이고 나니까, 결국 아버지 말이 옳았다는 걸 알게 됐다.
박도현과 그 가족들한테 받았던 호의.
내가 그걸 영영 돌려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으니까.
‘그리고, 뭐. 나도 겸사겸사 독립할 때가 되기도 했으니까.’
그냥 이렇게만 말해두기로 했다.
예전에는 내가 좀 이기적이고 애새끼처럼 굴었다고, 얘한테는 낯 뜨거워서 도저히 말 못 할 것 같으니.
[처가살이하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내 깊은 속을 알 리가 없는 이놈은 이딴 소리나 하고 있다.
심지어 잘 생각해보면 이게 또 틀린 소리는 아니라서 더 열받아.
* * *
팀도, 개인 성적도, 사생활도 순항하는 4월을 보낸 뒤.
5월의 첫날은, 전날까지 쭉 이어진 원정길에 다녀오고 나서 주어진 휴식일이었다.
따로 처리해야 할 일정이 있었기에, 다시 찾아온 중간고사 준비로 정신이 없는 도아를 집에 둔 채 다저 스타디움 내부 스튜디오로 향했다.
“아, Koo! 오셨군요! 바로 메이크업 들어가시겠습니다!”
오자마자 분칠까지 해가며 카메라 앞에 서게 된 건, 인터뷰 촬영 때문이었다.
단순한 인터뷰였으면 이렇게 쉬는 날에 사람 불러다가 요란 떨지는 않았겠지만.
오늘 찍을 건 무려, 7월 초 박도현의 영구결번식에서 최초 공개할 헌정 다큐멘터리에 들어갈 컷이었다.
‘통 크게 준비하더라. 무슨 상 받은 유명 감독까지 불렀다던데?’
지금 찍는 개인 인터뷰 영상만 봐도, 사실 따지고 보면 다 합해서 1분이나 나올까 싶기도 하고. 아예 찍어두고 안 쓰는 선수도 있을 텐데.
박도현의 전성기를 함께 보냈지만 지금은 다른 팀에서 뛰는 선수들까지 여럿 찾아가서 일일이 인터뷰를 땄을 정도니.
[그냥 동상이나 하나 세워주지. 너한테 돈 다 퍼주느라 못 세우는 거 아냐?]
물론 받는 사람이 전혀 고마움을 못 느끼고 이따위로 툴툴대는 거 보면 헛돈 쓰는 것 같기는 한데.
천만다행으로 내 돈 들어가는 게 아니니까 그러려니 했다.
원래 추모라는 게 떠난 사람을 그리기보다는 남은 사람들끼리 위로하는 의미가 더 크기도 하고.
“어, Koo······.”
지금 막 복도에서 마주친 제리만 봐도 알 수 있지.
눈가는 시뻘겋고, 코를 훌쩍이는 게. 여자친구가 생긴 이후로는 거의 만날 일이 없었던 쭈굴쭈굴 제리 그 자체였다.
“크흠, 먼지 알레르기인가? 눈이 좀 따갑네.”
“뭐래 찐따야. 아주 울었다고 광고를 해라.”
“아, 아니거든?”
전에 다저스 포럼에서 봤던 것 같은데, 나나 제리, 아드리안 등등 젊은 투수들은 박도현의 전성기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고.
냅두면 안타가 될 타구를 미친 듯이 건져내 주는 유격수가 개인 성적 챙기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신인 시절에는 모르는 법이니까.
지금의 제리라면 알 수 있겠지.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엄청 소중했다는 걸.
“그, 그러는 너는. Koo 너는 안 이럴 것 같아?”
“나 뭐.”
“인터뷰 컷 모은다고 했을 때 반응이 떨떠름했잖아. 촬영하다가 눈물 나올 것 같아서 그런 거 아냐?”
떨떠름하다기보다는 똥 씹은 표정을 짓긴 했지.
박도현이 바로 옆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와중에,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게 기분이 좀 그렇잖아.
[나보고 어디 딴 데 가 있으란 소리는 안 하네?]
‘내가 시킨다고 니가 말을 듣겠냐?’
[그건 맞지.]
맞지는 무슨. 처 맞을라고 진짜.
어차피 주먹 휘두른다고 맞는 것도 아니니, 다음에 박도현이 지켜보는 앞에서 도아한테 기습 뽀뽀라도 해버리기로 다짐하며 촬영장에 마련된 의자로 향했고.
마지막으로 사전에 받았던 질문지를 점검했다.
[당신에게 Park은 어떤 선수입니까?]
각자의 관계에 따라 질문이 서로 다르다고들 하고, 실제로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인지 내 질문지가 장난 아니게 빡빡하긴 했는데.
이거 하나만큼은 공통 질문이었다고 한다.
보통 이런 질문은 옛 추억을 곰곰이 떠올리면서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해야 할 것 같은데.
당사자가 바로 근처에서 팔짱 끼고 근엄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그딴 분위기는 나올 리가 없다.
딱밤 마렵네 진짜.
“Koo? 시작해도 될까요?”
“아, 네네.”
언제 어떻게 들어갈지는 나도 모르지만, 완성본에 무조건 들어갈 게 분명한 내 인터뷰 영상의 첫 질문.
막 불빛이 들어온 카메라 렌즈 앞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한테 Park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