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너에게 난, 나에게 넌(2) >
박도현의 추모 영상에 들어갈 인터뷰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찾아온 페넌트레이스의 하루.
5월의 첫 경기를 치르러 다저 스타디움에 출근한 내가 가장 먼저 마주친 선수는.
“저기, Koo. 혹시 시간 괜찮아?”
바로 오늘 등판할 예정인 선발 투수였다.
시범경기 내내 이어진 5선발 경쟁에서 승리하며 한 달 내내 선발 기회를 얻었지만, 5점대 ERA로 부진하며 승리 없이 2패를 기록 중인 모리츠 슈타인마이어.
“왜 그래, 모리츠? 난 지금 제리가 어제 Park에 대해 인터뷰하다가 울었다는 소문을 내러 가야 해서 바쁜데.”
[니가 사람새끼냐?]
표정이 별로 안 좋길래 농담을 던져봤는데, 별 반응이 없다.
혹시 뭔가 심각한 얘기를 하려는가 싶어 표정을 고쳤는데.
“되게 이상한 질문이라는 건 아는데, 그······ 내가 선발 투수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상한 질문은 아니다. 좋은 대답을 얻기 힘든 질문일 뿐.
선발 투수로 살아남는 법? 지금보다 볼넷을 줄이면서 소화 이닝을 늘리고, 몰린 카운트에서 다급하게 꽂아 넣었다가 장타 얻어맞는 걸 줄여야지.
그걸 얘가 모를 리가 있나. 못 해서 문제지.
“갑자기 왜 그래.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그러자 모리츠가 머뭇거리며 대답한다.
“내가 계속 선발로 나서는 게, 팀한테 도움이 안 되고 피해만 준다는 생각이 요새 자꾸 들어서······.”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다.
지금 다저스의 1선발부터 4선발까지는 상당히 안정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에이스 제리는 물론이고, 나머지 셋도 어쩌다 한 번 미끄러지더라도 바로 다음 경기에서 털고 일어나니까, 요새 계속 버거워했던 모리츠랑은 기록이든 실제 플레이든 비교가 많이 될 수밖에.
“그러면 감독님께 말씀드리면 되잖아. 선발보다는 불펜에서 성적도 더 좋았고, 팀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으니 포지션 바꾸겠다고.”
“그, 그건······.”
“그건 또 싫지? 그리고 그렇게 내려가면 적어도 감독님 계시는 동안은 다시는 기회 안 올걸? 버티고 버티다 쫓겨나는 거면 몰라.”
정곡을 찔렸는지 입을 다무는 모리츠.
모리츠가 다저스에 입단한 건 작년이지만, 지난 1년 동안 감독님 성격이 어떤지는 충분히 겪었을 테니까 얘도 알 거다.
부상도 아니고, 정신적으로 부담스러워서 선발로 못 뛰겠다는 놈을 어르고 달랠 정도로 무르진 않다는 걸.
“지금 생각이 복잡해 보이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너는 오늘도 선발 등판할 거고, 늘 하던 대로 공을 던지면 돼.”
“하던 대로라니······.”
“작년에 선발로 많이 나왔던 거 기억나지? 그때보다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때만큼만 하자. 어지간한 땅볼은 내야를 못 벗어나게 해줄 테니까. 우리 내야에 돈 얼마 들어가는지 너도 알지?”
작년에 로버트가 컨디션 난조로 등판을 여러 번 건너뛰면서, 여러 투수가 대체 선발 기회를 얻었는데.
그중 가장 인상 깊은 활약을 보여준 게 바로 모리츠였다.
전형적인 땅볼 유도형 투수인데, 내야진이 탄탄한 다저스와 궁합이 잘 맞았고. 후반기에 아이작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선발 로테이션에 일찌감치 정착할 수도 있었겠지.
“응, 고마워······.”
곧바로 돌아서는 바람에 표정이 어떤지는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지금까지와 비슷하게 경기를 풀어간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빅리그와 트리플 A를 오가던 시간이 길어 서비스타임은 나보다 한참 모자라지만, 경력 자체는 나와 거의 비슷하니 이 이상 참견하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그냥, 멀어지는 뒷모습에 대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자신감 있게 던져! 그다음 일은 야수들한테 맡기고!”
그러나 잠시 후.
따아아악―!
[8구 스윙! 핫코너로 향하는 이 타구가! 아아아! 페어볼! 오늘의 선발 3루수 조나단 라틀리프의 글러브 옆을 빠져나갑니다! 타구를 확실하게 가뒀으면 단타에 그쳤을지 모르겠지만! 마무리가 아쉬운 수비로 주자는 2루까지!]
자신감 있게 던진 공으로 땅볼을 만들어낸 건 좋은데, 내야수가 그걸 처리를 못 하자, 모리츠는 억울한 듯 이쪽을 쳐다봤는데.
‘뭐. 왜. 어쩌라고.’
조나단 쟤는 평소엔 잘하다가 왜 갑자기 버벅대고 그런대.
이러면 내가 뭐가 되냐고.
* * *
[COL 10 : 6 LAD]
경기 초반, 주자를 내보내다가도 위태롭게 버티던 모리츠는 조나단의 불안한 수비 한 번에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만약 모리츠가 안타를 내주더라도 단타에 그치고, 코너웍이 조금만 더 잘 됐더라면, 경기의 향방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누구한테든 안 그러겠냐마는, 모리츠에겐 특히나 아쉬운 경기겠지. 오늘 패배하기 전 4연승을 달리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상대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리빌딩을 진행하고 있는 로키스라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모리츠는 성실한 선수지만, 이럴 때일수록 한 템포 쉬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수에게 열의만 있다면 기회를 꾸준히 주는 감독님의 성향을 생각하면, 등판을 한 차례 건너뛴다는 게 꼭 나쁜 신호만은 아닐 거다.
구위가 어떻고, FIP가 어떻고, 뭐 이런 것까지 내가 분석할 순 없지만. 수비하는 입장에서 작년에 비해 잘 맞은 타구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체력을 회복할 시간을 줘서 나쁠 건 없다는 소리지.
“그럼 모리츠 선수를 대신해서 등판할 투수는 이미 결정이 된 겁니까?”
솔직히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당장 트리플 A에서 2점대 초반의 ERA를 기록하며 얼른 올리라고 시위 중인 에드윈을 비롯해, 마이너에서도 대기 중인 선발 자원이 많고.
작년에 대체 선발 경험이 있던 불펜들도 대부분 팀에 남아 있으니. 앞으로 한두 경기 정도 던지는 걸 보면서 골라도 늦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감독님은 이미 구상을 끝내놓았던 듯, 망설임 없이 대답을 내놓았다.
“당일까지 특별한 이슈가 없다면, 파이리츠와의 홈 시리즈 3차전에 선발 등판하는 투수는 휴이 킴이 될 겁니다.”
누군가가 잠깐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다른 누군가에게 기회가 찾아오는 메이저리그.
모리츠의 부진으로 김희영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 시즌 끝내 이루지 못했던 메이저리그 첫 승을 거둘 기회가.
* * *
[전에 모리츠가 감독의 불륜 증거라도 갖고 있을 거라던 놈 아직 남았나? 아마 네놈이 틀린 것 같다. 드디어 그 적폐 투수 놈의 모가지가 날아가게 생겼으니까!]
└ 그놈 아이디 이미 신고 폭탄 처맞고 정지됐어.
└ 그래? 그땐 우리가 아직 팩트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나 보다. 이렇게 시즌 초에 훌쩍 앞서나가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말이지!
└ 대체 선발은 휴이 킴? 얘보다 선발 경험 많은 투수들도 있지 않나?
└ 휴이는 작년 파이리츠에 입단하기 전 KBO에서 13시즌을 보냈고, 커리어 대부분을 선발로만 뛰었어. 구속은 좀 느려도 베테랑 좌완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거야.
└ (신고가 누적되어 삭제된 댓글입니다.)
└ ↑ 신고나 처먹어라, 망할 자이언츠 놈아!
└ 뭐라 그랬는데? 나 자이언츠 포럼에 Koo가 안타 치는 장면 도배하고 오느라 못 봤어.
└ 너 같은 놈 한 명 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재작년에 우리가 털린 경기 움짤 가져오면서 설레발이 어쩌느니 하던데, 강팀이 약팀을 이해해줘야 하지 않겠어?
└ 작년도 아니고 재작년? Park도 Koo도 없는 다저스 상대로 승리 좀 쌓았다고 잘도 뻐기네.
└ 방심하지 말라느니 하는 소리는 보통 순위가 비슷할 때나 하는 거 아닌가? 지구 2위도 아니고 3위 팀 팬이 어디서 고개를 들고 다녀?
5월의 첫 경기를 치른 지금 시점에서, 다저스는 18승 9패로 지구 1위를 달리는 중.
그 밑으로는 불펜 보강에 힘쓴 디백스, 다저스와 마찬가지로 내부 단속에 더 힘을 준 자이언츠,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선언한 파드리스. 이렇게 세 팀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중이었고.
작년에는 파드리스의 삽질 덕분에 어영부영 지구 4위로 마무리했던 로키스는, 박 터지는 지구의 리빌딩 팀이 마땅히 가야 할 최하위 자리에서 골골대고 있었다.
따아아아악―!
[Koo의 벼락 같은 스윙! 이 타구는! 좌중간 펜스를 향해! See! You! LAter!!! 전날 패배의 울분을 풀려는 걸까요? Koo의 시즌 10호 홈런이 터지며 점수 차를 7대 0으로 벌리는 다저스입니다!]
1차전에서 어쩌다 승리를 내줬다고 해도, 나머지 경기까지 줄줄이 내줄 만한 팀은 아니라는 거지.
[COL 0 : 7 LAD]
“잘했어, 타자들. 평소에도 이 정도만 쳐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말이야.”
7이닝 무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를 기록하며 시즌 ERA를 1점대로 낮춘 제리가, 또 그놈의 치명치명 모드로 거들먹거리길래.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그따위로 거들먹거리면 네놈이 Park에 대해 인터뷰하면서 질질 짰다는 사실을 다 까발려버리겠어.”
내 말뜻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입에 자물쇠를 채워준 제리 덕분에, 남은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휴이 킴, 선발 등판 앞두고 멀티 이닝 소화하며 컨디션 점검! 2이닝 16구 퍼펙트로 팬들에게 기대감 선사!]
4일 후로 예정된 선발 등판에서 그리 많은 이닝을 맡길 생각은 없는지, 김희영에게 경기를 마무리하도록 지시하신 감독님.
젊은 타자들에게 베테랑 투수를 투입하는 노림수가 적중하며 2차전은 다저스의 영봉승으로 끝났다.
[COL 2 : 11 LAD]
다음날 열린 3차전에서는, 전날 타선의 폭발은 전초에 불과했다는 듯, 로키스에서 내보내는 투수들 모두에게서 점수를 뽑아냈고.
모처럼 다니엘에게 승리투수 자격을 안겨주며, 시즌 2승째를 올리게 해줬다.
“타자들이 이 정도는 해줘야 내가 승리투수가 될 수 있다는 건가······?”
허망한 표정의 다니엘이 중얼거리는 이 말에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Koo, 멀티 홈런으로 시즌 11&12호 홈런 적립! 작년 전반기에 기록한 15홈런이 벌써 코앞까지!]
선발 타자 전원 안타에, 팀 홈런이 4개나 나올 정도로 상대 투수를 두들겨 팬 3차전.
그 와중에 나는 멀티 홈런을 챙겨가며 연속 안타 및 출루 기록을 29경기로 늘렸다.
[이번에 유독 초구에 배트를 많이 내더라? 따로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야?]
‘스윙의 달인’을 얻으며 스윙 밸런스가 쉽사리 무너지지 않게 된 이후로 타석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승부할 수 있게 되긴 했는데, 이번 시리즈에서는 유독 눈에 띄긴 했지.
시리즈 내내 기록한 3개 홈런 중에서 2개가 초구를 받아쳐서 만든 거니까.
‘로키스는 리빌딩 팀이잖아.’
강타자를 상대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꽂아 넣는 투수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자존심 강한 에이스, 다른 하나는 도망가는 습관이 들면 안 된다는 이유로 벤치에서 승부를 강요하다시피 하는 루키 투수.
그리고 리빌딩 팀은 언제나 경험치를 먹여야 할 투수들로 가득하다.
‘다음 시리즈도 리빌딩 팀이니까. 적립할 수 있을 때 적립해 놔야지.’
그러자 박도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 거 일일이 다 신경 써 가면서 경기 뛰어야 해? 그냥 좋은 공 들어왔을 때 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마 박도현은 좀 더 길게 살아서 명예롭게 은퇴했더라도 좋은 지도자는 못 됐을 거다.
훌리안 밑에서 오래 구르다 보니 타격 이론은 빠삭하긴 한데, 일단 눈치가 더럽게 없는 데다가, 이딴 식으로 선수들 속이나 뻥뻥 터트리고 다닐 테니까.
이 미친놈이 남들도 다 지처럼 매년 40홈런씩 치는 줄 아나.
‘그게 안 되니까 머리를 쓰는 거 아냐, 이 빡대가리야.’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데, 그럼 몸이 좋으면 머리는 좀 나빠도 커버가 된다는 건가.
속담을 제멋대로 어레인지해 보다가, 이내 잡념을 털어내고 전력분석 자료에 집중했다.
다저 스타디움으로 찾아올 다음 팀은 내셔널리그 중부지구의 피츠버그 파이리츠.
그놈의 리빌딩이 끝나는 날이 올지 알 수 없는, 김희영이 끝내 메이저리그 첫 승을 거두지 못하고 떠나온 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