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57화 (157/200)

< 157. 너에게 난, 나에게 넌(3) >

김희영은 실력과는 별개로 다저스 내에서 상당히 눈에 띄는 편이다.

동양인이라거나, KBO라는 미지의 무대에서 활약했다거나, 뭐 이런 이유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항상 통역을 데리고 다녀서겠지.

“Kim?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아. 그래도 뭔가······ 옆에 통역이 없을 때 한국어를 섞어서 대화를 걸어올 때면 좀 난처하더라고.”

조금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건 인간관계에서 상당한 손해로 작용한다.

통역이 없을 때는 내가 임시로 말을 전하기는 해도, 어쨌든 한계는 있으니까.

[그랬나? 나 처음 메이저 올라왔을 땐 다들 친절하던데······.]

‘너랑은 사정이 좀 다르지.’

마이너리그를 폭격한 끝에 입단 후 1년도 안 되어 빅리그를 밟은 박도현도 데뷔 초 몇 년 정도는 통역이 필요하긴 했는데.

일단 그때 박도현은 미국 나이로 열아홉밖에 안 된 꼬맹이였고. 그런 꼬맹이가 되도 않는 영어로 조잘대며 뽈뽈거리니 다들 귀엽게 봐줄 수밖에 없었던데다.

결정적으로 박도현은 야구를 잘했다.

그냥 잘한 것도 아니고 아주 미친 듯이 잘했지.

반면에 김희영은 전천후 불펜 요원 겸 대체 선발 정도로 보고 영입한 1년짜리 선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입단 초기 스프링캠프 때만 해도 조금은 겉도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는 않았는데.

‘응? 뭐 불편한 거 없냐고? 전혀 없는데? 오히려 이젠 미국 생활에 적응이 좀 돼서 그런가. 작년에 파이리츠 처음 들어갔을 때 비하면 완전 천국이다야.’

듣자하니, 파이리츠는 오랜 리빌딩으로 주요 유망주들끼리 파벌이 생겨나 팀 분위기가 콩가루 그 자체였다는 것.

작년 후반기 피츠버그 원정에서 김희영이 젊은 선수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던 모습을 생각하면 솔직히 잘 안 믿기기는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김희영은 자신이 파이리츠에 괜히 녹아든 게 아니라는 듯 미친 친화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사진) 클레망네 집에서 아재들끼리 맥주 한잔^^ 기러기 아빠 생활 외롭지 않게 챙겨주는 우리 팀메이트들 고맙고 사랑합니다! #감성 #열정 #MLB #다저스 #현기는여친이랑 #부럽다 ― 김희영]

한국에 가족들을 남겨두고 온 김희영을 걱정해서인지 쉬는 날이면 집에 초대해주는 선수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찾아가 빠르게 발을 넓히기 시작한 것.

[(사진) 출근 전 점심으로 현기가 추천해준 삼겹살집에서 오랜만에 쌈 좀 싸는 중! 랜디는 파절이 홀릭 ㅋㅋㅋ #맛집 #일상 #MLB #다저스 #K―FOOD #현기는집게사수중 ― 김희영]

김희영은 SNS를 통해 꾸준히 한국 팬들에게 일상을 전했는데, 그중에는 다저스의 스타 플레이어들과 한식이나 K팝 등 한국 문화를 공유하는 게시물도 적지 않았다.

해외 진출의 좋은 사례라면서 훈훈한 시선이 쏟아졌지만, 어딜 가나 핀트를 못 잡는 인간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구현기는 김희영보다 한참 먼저 있었으면서 이런 글 하나도 안 올리고 뭐 했음? 하는 짓 보니 국대 안 뽑히면 시민권 따서 군대 빼려고 하겠네 ㅋㅋ]

└ 옛다 관심

└ 현까 어서오고 ㅋㅋㅋ 요새 받아주는 애들 없어서 외로울 텐데 밥은 먹고 다니냐?

└ 아니 까려면 좀 팩트를 가져와야지 얘는 애초에 SNS를 거의 안하잖아 미친놈아;

언론이랑 사이도 안 좋고, 비호감 이미지가 강했던 예전이었다면 이딴 똥글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포스트시즌 MVP를 독식하며 국내 야구팬들의 뚝배기를 이미 한 차례 깨놓은 뒤부터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가 됐다.

‘내가 보기엔 애초에 이 동네에선 야구 잘하는 게 곧 국위선양이야.’

[그건 인정.]

2000년대 이후 출생한 미국인들 중에는 한국이란 나라를 박도현 덕분에 알게 됐다는 사람도 적지 않을 정도인데다.

박도현에 이어 나까지 메이저리그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자, 일본 위주로 살펴보던 동아시아 스카우트들의 눈도 한국으로 조금씩 옮겨 갔다고들 하니까.

[LA 다저스 김희영, 파이리츠전 선발 등판 확정··· 이번에는 염원하던 빅리그 첫승 가능할까]

개막 이후 나는 말할 것도 없고, 김희영도 멀티 이닝 릴리버로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한국 팬들의 기대감이 커져가는 가운데.

김희영의 시즌 첫 선발 등판 경기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 * *

파이리츠와의 1차전이 열리는 날, 경기장에 나가기 전 잠시 김희영과 만났다.

할 말이 좀 있다고 하길래, 점심 식사를 겸해서 마련한 자리.

“미안하다, 현기야. 괜히 내가 SNS에 너 태그하고 그래서 이상한 소리 하는 놈들이 꼬인 것 같네.”

“아뇨, 그런 놈들은 에이전시에서 알아서 처리해주니까 상관없어요.”

“그래? 하긴 요새는 선 넘는 애들은 고소해도 그러려니 한다더라. 선배들 얘기 들어보면 감히 선수가 팬한테 이빨 들이대느니 하면서 욕만 먹었다던데.”

출근 전 잠깐 시간을 낸 거라서, 그리 오래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상황.

김희영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 내가 선발 등판하는 경기 말이야. 그날 꼭 이기고 싶거든.”

꾸준히 멀티 이닝을 소화하며 다저스 불펜에 힘을 보태는 김희영이었지만.

구원승 요건을 갖추기 쉬운, 동점이나 접전으로 밀리는 상황에서는 아직 등판해본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구원으로만 4승을 따낸 나한테 1승만 나눠주라는 농담이 나왔겠는가.

“나도 파이리츠 애들을 나름대로 잘 알고는 있다고 보는데, 그만큼 애들도 나를 잘 알 거란 말이지.”

“그야 그렇겠죠.”

“그래서 말인데, 피칭 플랜에 변화를 좀 주고 싶어서.”

사연인즉슨, 김희영은 두 가지 스타일의 피칭 플랜을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보더라인 투구를 통해 땅볼을 유도하는 스타일.

다른 하나는 하이 패스트볼과 변화구를 적극 활용해 삼진을 솎아내는 스타일.

KBO 시절 첫 소속팀의 내야 수비력이 워낙 처참해서 이 악물고 탈삼진 비율을 높였는데, FA 이적 후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나.

그런데 메이저리그 진출 후 파이리츠에서 선발 등판을 하고 보니, 바로 그 KBO에서의 첫 팀 못지않은 내야 수비를 선보였던 거다.

‘이 사람 생각보다 훨씬 더 보살인데?’

[그러게. 너였으면 진작에 뚜껑 열렸을 것 같은데.]

아무튼.

공인구와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한편, 피칭 스타일까지 가다듬으면서 결국은 빅리그 기준으로 다소 느린 구속으로도 삼진을 솎아내는 노하우를 익힌 김희영.

“낮게 던지는 포심이랑 슬라이더, 서클체인지업을 섞어서 땅볼을 좀 많이 유도해볼 생각이야. 파이리츠 애들한테 나는 삼진을 잡아내는 투수일 테니까.”

감독님과 코칭스태프들과는 이미 상의했고, 따라서 경기 전 선수단 미팅에서도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야수들, 특히 내야수들이 잘 알아뒀으면 해서 나한테 미리 이야기해두고 싶었다는 것.

‘맨날 허허 웃고 다녀서 실감은 안 나는데, 저 양반도 하는 거 보면 영락없는 투수야.’

같이 뛰었던 선수들을 향해서도 망설임 없이 칼을 갈 수 있는 승부욕도 승부욕인데,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인종이란 말이지.

아무리 본인 제구에 자신이 있다고는 해도, 피칭 스타일을 왔다갔다하는 미친 짓거리를 실천할 인간이 얼마나 있겠냐고.

[너 요새 자꾸 잊어버리는 거 같은데, 너도 원래는 투수······.]

‘셧더 뻑업.’

김희영의 각오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한 명의 선수로서는 오늘 당장 치를 1차전이 더 급한 법.

일단 알겠다고 대답한 뒤 평소대로 경기 준비에 박차를 가했는데.

‘야, 박도현.’

[왜.]

‘너는 지금 파이리츠 타자들이 우리 투수들 공을 쳐서 처리하기 빡센 타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냐?’

[······.]

쐐애애액!

부웅!

“스트라이크 아웃!!!”

[6회 초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아내는 호세 리카르도! 방금 잡아낸 삼진이 오늘 경기 11개째입니다! 지금 이 순간! 호세가 본인 커리어 통산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호세 리카르도의 결정구 고속 슬라이더에 연달아 헛스윙 삼진을 헌납한 끝에, 6이닝 만에 두 자릿수 탈삼진을 내주고 만 파이리츠 타자들.

어지간하면 방심하지 말라고 한소리 했을 박도현마저도 입을 다물어버릴 정도의 참상이었다.

6회까지 파이리츠의 팀 전체 안타가 고작 3개뿐.

바로 지난 시리즈에서 상대했던 똑같은 리빌딩 팀 로키스와 비교해도 굉장히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줬다.

‘팀 사정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긴 해.’

리빌딩도 코어 선수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해야 하는 법.

파이리츠에도 투타에서 한 명씩 중장기 계약으로 묶어둔 준척급 선수들이 있었는데.

한 명은 계약 후 반년도 되지 않아 토미 존 수술로 이탈했고, 나머지 한 명은 끝없는 부진으로 절찬 먹튀짓을 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리빌딩도 한두 해면 모를까, 몇 년째 지구 꼴찌만 하면서 유망주들 성장도 지지부진하고.’

우승을 향해 한마음이 되어 달려가는 건 이미 포기한 지 오래고.

어떻게든 하루하루 버텨나가는 것으로, 팀 분위기 자체가 바뀌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 * *

그렇게 경기 내내 파이리츠를 찍어 누르며 우위를 점한 다저스였지만.

정작 1차전에서의 내 개인 성적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베이스 온 볼스!”

Boooooooooo!!!

“X발 이 미친 새끼들아!!! 너네가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건지 알기나 해?!”

“리빌딩을 하도 오래 해서 뇌 주름까지 싹 다 표백했냐?! Koo한테 똥물 뿌리고도 너네가 무사할 것 같아?!”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자면, 1회 말 첫 타석에서 볼넷이 나왔을 때의 리액션이다.

연속 안타 기록이 이어지면서 생겨난 변화 중 하나는, 나를 거르려는 기색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팬들이 이런 식으로 난리를 치게 됐다는 것.

최아악!

“세이프!”

선행 주자 없는 상황에서 발 빠른 주자를 1루로 보냈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투수가 초구를 던지기도 전에 2루를 훔치며 팬들의 분노를 환호성으로 바꿔놓았고.

따아아악―!

켄이 때려낸 중견수 앞 안타에 그대로 홈까지 파고들어 선취 득점을 올렸다.

나를 함부로 걸렀다간 어떤 참사가 벌어질 수 있는지 맛보기로 보여준 셈.

그래서인지 이날 경기 후반까지 파이리츠가 나한테 볼넷을 내주는 일은 없었지만.

[2사 주자 2루. 2번 타자 Koo가 타석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5월 초인 지금까지도 4할대 타율을 유지하며 절정의 타격감을 뽐내고 있지만, 오늘 경기 2타수 무안타 1볼넷으로 아직 안타는 없습니다.]

6회 말 네 번째 타석을 소화하는 지금, 앞선 타석은 모두 아웃카운트로 이어졌다.

타구가 마지막에 아주 살짝 힘이 빠지면서 외야수가 펜스에 기댄 채 잡아내는가 하면, 잘 맞은 타구가 시프트에 걸려 유격수 정면으로 향하기도 했지.

타격 코치는 타구 질이 좋았다느니 하면서 내 눈치를 보는 것 같던데, 사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좋은 플레이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야구의 일부니까.

[PIT 0 : 5 LAD]

지금은 6회 말. 상대에게 남은 공격 기회는 3이닝.

뒤집는 게 불가능한 점수 차는 아니지만, 총력전을 벌이기는 또 애매하니.

아예 승리는 포기하고 내 기록을 끝내기라도 하자고 마음만 먹으면, 비어 있는 1루를 채울 수도 있는 상황.

쐐애애애액!

뜻밖에도 파이리츠 배터리는 승부를 걸어오는 걸 택했다.

혹시라도 볼넷을 줬다가 1회 말의 그 비난이 온라인으로 옮겨붙는 걸 걱정했던 건지.

아니면 이왕 팀 승리는 텄으니, 여기서 나한테 삼진이라도 빼앗는다면 자기 가치가 올라갈 거라는 콩가루 마인드에서 비롯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따아아아아아아악―!

리빌딩 팀에서의 선발 경쟁에서 밀린 투수의 위닝 샷에는, 내 스윙을 이겨낼 만큼의 구위가 없었다.

전반기는커녕 5월도 안 끝났는데 벌서 시즌 13호 홈런.

이번 시즌 끝날 때까지 몇 개나 더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센세이셔널한 한 해가 될 거란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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