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58화 (158/200)

< 158. 너에게 난, 나에게 넌(4) >

[PIT 0 : 8 LAD]

구현기의 연속 안타 기록을 이어가는 쐐기포에 힘입어, 다저스가 큰 점수 차로 승리를 가져온 1차전.

[PIT 0 : 4 LAD]

파이리츠가 희생번트를 적극 활용하며 어떻게든 주자를 득점권에 보낼 때마다, 내야진이 호수비로 찬스를 빼앗으며 두 게임 연속 영봉승을 거둔 2차전.

사실 둘 다 미국 현지에서는 그다지 큰 반응을 이끌어낸 경기는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두 팀의 전력차가 너무 커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만약 파이리츠가 기적적으로 승리를 챙기거나, 하다못해 구현기의 연속 안타 기록이라도 저지했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그러니까.

1차전과 2차전을 연달아 가져오며 위닝 시리즈를 확보함과 동시에 4연승을 하게 된 다저스 팬들에게 있어 3차전은, 이기면 좋고 설령 임시 선발이 무너지며 패배하더라도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경기. 딱 그 정도였지만.

태평양 너머의 대한민국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내일 휴이킴 드디어 꿈에 그리던 메이저 첫승 달고 성불하는 날이냐?]

└ 아니 사람을 보내버리면 어떡해 미친놈앜ㅋㅋㅋ

└ 사실 작년에 구현기가 파이리츠전에서 홈런만 안 쳤어도 진작 1승 해봤을 텐데

└ ??? : 그런 현기가 이제는 저희 팀 덕아웃에서 자고 있네요

└ 희영이형 불펜에서 그만 구르고 얼른 한국 와서 행복야구하자······.

└ 행복야구? 그렇다면 저희 대전팀!

└ 너넨 일단 좀 나가

└ 꿈 쫒아서 미국 좀 갔다 온 게 그렇게 몹쓸 짓이었냐

김희영이 다저스로 이적하며 구현기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는 사실이 막 알려졌을 때만 해도, 한국인들은 두 사람이 합작해서 팀의 승리를 이끄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그 상상은 시즌 개막과 동시에 시들해졌다.

[근데 김희영은 언제 나옴? 구현기는 맨날 나오는 것 같던뎅]

└ 김희영은 불펜이라 언제 나올지 모름

└ 불펜이 뭔데 씹덕아

└ 감독 X대로 내보내는 투수가 불펜이다 등신아

리그 최고의 유격수로 거듭난 구현기가 김희영의 등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그림을 기대했지만.

불펜투수라는 김희영의 보직 특성상, 그런 장면은 중계에 담기기도 힘들었고. 일주일에 고작 몇 번 정도 나올 뿐이었다.

따라서 김희영이 그동안 부진했던 기존 5선발을 대신해 선발 기회를 얻었을 때, 한국의 야구팬들은 아예 그 자리를 꿰차버리기를 간절히 응원했지만.

정작 김희영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계 투구 수는 70개. 이닝으로는 5이닝 안쪽으로 끊어줄 예정이야.”

언론에 발표하기 전, 미리 선발 등판 기회를 통보하던 날.

말로는 기대가 크다느니, 좋은 영향력을 기대한다느니 했지만, 야구판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았던 김희영은 오브라이언 감독의 태도를 보며 어느 정도 눈치를 챘다.

‘길게는 못 가겠네.’

이미 마음 정리는 끝내둔 상태였다.

작년 후반기 선발로 반짝 활약했던 건, 시즌 말미 대거 기용된 백업 타자들을 상대했다는 게 컸다.

메이저 진출 초기, 타순이 한 바퀴 돌자마자 장타를 뻥뻥 얻어맞던 그 시절이, 이곳에서의 진짜 자신의 위치에 가까웠을 거다. 물론 그때는 적응기이기도 했고 수비 도움도 못 받았으니 그 정도로 심각하진 않겠지만.

“리오! 매튜! 다들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싱숭생숭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건 김희영의 장점이었다.

파이리츠와의 1차전이 열리던 날 경기 전 훈련, 지금은 맞대결 상대로 만났지만 한때는 동료였던 야수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 김희영이었지만.

“어, 그래.”

“딱히 뭐······.”

작년의 서글서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대충 흘려듣는 파이리츠 선수들을 보며, 김희영은 생각했다.

‘이게 아메리칸 스타일이구나.’

물론 실상은 김희영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파이리츠가 김희영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했는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관계자들끼리는 알음알음 퍼져나갔고.

함께 지낼 땐 항상 웃고 다닌 주제에, 그보다 못한 조건에 팀을 떠나버린 김희영을 향한 배신감 때문에 서먹해진 것이었으니까.

[(Live) PIT 0 : 0 LAD]

“플레이 볼!”

진상이야 어쨌든, 상대 선수들의 변한 태도는, 김희영의 마지막 한 줌의 망설임마저 말끔하게 지워버렸고.

그의 머릿속에는 빅리그 진출을 선언할 때부터 꾸준히 언급해왔던 목표, 단 하나만 남아 있었다.

‘메이저리그 승리투수.’

MLB 커리어에 몇 패가 찍히던, 승리 기념구 하나만 챙길 수 있다면, 미련 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각오를 담아, 예전의 동료를 향해 힘차게 공을 뿌렸지만.

따아아악―!

선두 타자한테부터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는 실투를 던지고 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내 능력 밖의 목표를 붙잡고 과욕을 부린 건가, 순간 이런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일단 공을 던지고 나면 투수는 한 명의 내야수가 되어야 한다는 본능에 가까운 생각이 김희영의 몸을 이끌었고.

그렇게 뒤돌아보고 나니, 눈앞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촤아아악!

시프트로 내야 깊숙이 서 있던 구현기가 미끄러지면서 몸을 낮추더니, 그대로 타구를 붙잡은 뒤 스프링처럼 뛰어오르며 1루를 향해 던졌고.

송구는 1루수 랜디가 벌리는 미트에 그대로 들어가 박혔다.

“아웃!”

바로 그 순간, 김희영은 글러브로 얼굴을 덮으며 울컥 치솟는 감정을 삼켜야만 했다.

내야수가 수비를 한다.

아니, 투수한테서 아웃카운트를 뺏는 게 아니라, 상대 타자한테서 안타를 뺏는다.

‘이게 야구지.’

작년, 빅리그와 마이너를 오가며 쌓아온 파이리츠의 동료들과의 소중한 추억이 깨끗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 *

솔직히 말하자면, 김희영의 시즌 첫 선발 등판 상대가 피츠버그 파이리츠라고 들었을 때, 이게 과연 유리할지 불리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설마 저 사람이 공과 사도 구분 못 할까 봐?]

‘그건 아니고.’

메이저리그에서도 트레이드나 FA 등으로 이적하고 나서 옛 소속팀을 처음 상대할 때 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선수는 생각보다 많다.

더구나 김희영은 평소 파이리츠 선수들과 지난 1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즐겁게 떠들어대곤 했으니.

평정심이 조금만 흔들려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곤 하는 마운드 위에서 자기 공을 던질 수 있을까 아주 살짝 걱정했는데.

“스트라이크 아웃!”

그게 괜한 걱정이었다는 건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매 이닝 삼진도 하나씩 곁들여가며, 3회까지는 아예 단 하나의 출루조차 허용하지 않은 채 철저하게 막아냈으니까.

“현기야, 어디 불편한 데 없어? 바나나 까줄까?”

“굳이 말하자면 지금 이런 상황이 좀 불편하긴 한데요.”

오히려 마운드에서는 멀쩡하다가도 공수교대만 하고 나면 좀 이상해졌지.

물론 김희영이 평소 친절하지 않은 건 아닌데, 뭔가 묘하게 질척댄다고 해야 하나.

어쩔 땐 뜬금없이 내 어깨를 주물러주려고 들길래, 한국어를 못 알아듣고 멍하니 지켜보기만 하던 투수 코치가 황급히 달려와 말리기도 했다.

“미스터 리! 통역이 필요한데 대체 어딜 간 거야?!”

“화장실 갔습니다.”

“그럼 Koo 자네가 좀 얘기해줘! 우리 내야 수비에 감동한 건 알겠지만 투수가 덕아웃에서 어깨를 쓰는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하면 어떡하냐고!”

왜 저러나 했더니, 내야수들을 향해 나름대로 고마움을 표현하려던 모양이다.

보다 못한 3루수 켄이 김희영을 붙들고 ‘바나나를 손수 까주는 게 한국에선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여기선 좀 어색한 행동이라고 봐’라고 친절하게 말해주긴 했는데. 본인은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고.

‘오늘 딱히 처리하기 빡센 타구는 안 나왔던 것 같은데. 대체 파이리츠는 어떤 팀이길래······.’

그러자 김희영이 까둔 채로 방치한 바나나를 집어먹던 박도현이 끼어든다.

[일단 쟤네 수비가 심각한 건 맞는데. 너도 수비 잘해.]

‘물론 내가 귀엽고 수비도 잘하는 건 나도 아는데, 뭘 새삼스럽게 그래.’

[귀엽단 소리는 안 했어.]

‘알아. 너 듣기 X 같으라고 하는 소리야.’

말은 이렇게 했어도, 사실 박도현의 재능 없이는 이 정도로 성장할 순 없었겠지.

고작 1년 전까지만 해도 빅리그 내야수가 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던 내가, 지금은 골드 글러브 유격수가 됐으니까.

[솔직히 다른 내야수들도 너 보면서 자극 많이 느꼈을 거다.]

‘······그래?’

[응. 쟤한테 수비로 밀리면 진짜 인생 끝난다는 생각에 목숨 걸고 뛰었을 테니까.]

듣기 좋은 말 안 해준 걸 후회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나, 사람 성질 긁는 거 보게.

* * *

3회까지 유지하던 퍼펙트는 4회 초 첫 타자에게 안타를 내주면서 끊겼다.

희생번트와 진루타로 주자를 3루까지 보내기는 했지만, 홈으로 들여보내진 않았고. 마찬가지로 5회도 무실점으로 막아내면서.

5이닝 4K 2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으로, 오늘 경기에서 김희영의 역할은 끝났다.

“수고했다, 휴이!”

“이제 가서 쉬어! 점수 더 내줄 테니까!”

김희영이 마운드에서 내려온 시점에서 스코어는 3대 0.

득점권에 주자가 나갈 때면 어떻게든 점수로 연결했던 지난 두 경기와는 달리, 생각보다 점수를 많이 짜내지는 못했다.

따아아악―!

[가볍게 밀어친 이 타구가! 3루수 키를 훌쩍 넘깁니다! 좌익수 쫓아가는 동안 Koo는 1루 돌아 2루까지! 2루에서 슬라이딩! 세이프! 선두 타자 Koo가 발로 만들어낸 2루타! 1회에 이어 멀티 히트 게임을 만듭니다!]

당장 이어진 5회 말 공격에서도,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2루타를 날리며 득점권에 들어갔지만. 후속타 불발로 추가점은 물 건너갔고.

[이번 시즌에 다니엘이나 호세가 이런 식으로 점수 내야 할 때 못 내다가 승리 날려먹은 경기가 한둘이 아닌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미친놈아.’

혹시라도 오늘 경기가 묘하게 흘러간다면 전부 네놈 입방정 탓이라고 박도현을 타박했는데.

그런 상황 자체를 떠올리지 말 걸 그랬다.

따아아아아아아악―!

김희영에 이어 두 번째 투수로 올라온 앤서니 아우젤로가 솔로 홈런을 허용했을 때까지만 해도, 다저스는 그다지 심각성을 느끼지 않았다.

투 아웃까지 잘 잡아놓은 뒤이기도 했고, 실투는 언제 어디서든 나올 수 있으며, 앤서니는 홈런을 맞은 후 금방 자기 페이스를 찾을 수 있는 베테랑이었으니까.

“Yeahhhhhhhhhh!!! 바로 이거지!!!”

“계속 이렇게 따라가면 되는 거야! 역전할 수 있어!!”

시리즈 내내 다저스 투수들에게 꽁꽁 묶이며 영봉패 스윕 위기에 놓여 있던 파이리츠 타자들이 기세를 끌어올리는 건 좀 거슬리긴 했지만.

대세에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세이프!”

7회 초 수비, 파이리츠의 선두 타자가 실책으로 2루에 무혈 입성하기 전까지는.

“괜찮아, 랜디! 집중해!”

1루 베이스 근처에서 망연자실하게 엎어져 있던 랜디를 향해 소리쳤다.

저럴 만도 하지.

3루수 켄이 기껏 까다로운 타구를 잡아줬는데, 정작 본인이 포구를 못 하면서 위기를 자초했으니까.

[1루 보면서 이렇게 포구가 불안하면 안 될 텐데.]

작년부터 슬슬 타격 포텐이 터질 조짐이 보이다가, 올해 들어서는 클레망보다 뛰어난 타격 생산성을 자랑하게 된 랜디지만.

아예 클레망을 밀어내고 주전 1루수를 차지하지는 못하는 이유다.

“베이스 온 볼스!”

본인이 잘못해서 홈런 맞는 건 참아도, 야수 실책으로 안 내줘도 될 베이스를 내주는 건 못 참는 투수들이 많다.

괜찮다고 웃으며 화를 삭이던 앤서니였지만, 표정은 숨겨도 컨트롤은 못 숨겼는지, 바로 다음 타자에게 스트레이트 볼넷.

무사 1, 2루로 동점 주자가 나간 상황에서 결국 다저스 벤치는 투수 교체를 선택했고.

“Koo. 보여줘라.”

“넵.”

투수 코치가 심판에게서 받아온 공을 나한테 넘기는, 이번 시즌 들어 다저스 팬들에게는 꽤나 익숙해진 광경.

까딱 잘못했다간 김희영의 시즌 첫 승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 5월의 첫 등판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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