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59화 (159/200)

< 159. 너에게 난, 나에게 넌(5) >

김희영은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쓰며, 마운드에 올라 연습구를 던지는 구현기를 쳐다보았다.

스코어 3대 1. 무사 주자 1, 2루.

지금 나가 있는 두 명의 주자가 모두 홈을 밟으면, 기껏 힘들게 만들어놓은 자신의 승리투수 요건이 사라진다.

“Hey, 휴이.”

앞서 등판해 위기를 만들어놓고 내려온 앤서니 아우젤로가 지친 얼굴로 다가와 뭐라 말한다. 통역 말로는 대충 미안하다는 뜻이라나.

그거 한마디 하는 데 2분 넘게 잘도 말하는 게 신기하긴 했지만, 어쨌든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통역 없이는 선수들의 말을 알아듣기 힘든 만큼 팀의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알진 못했지만, 적어도 방금 저 투수가 한두 점 내준다고 해서 곧바로 내려버릴 만한 선수는 아니란 건 알았다.

지금 타이밍에 구현기가 올라온 게, 뒷문을 더 확실하게 잠가줄 선수를 내보내 자신의 첫 승을 지켜주려는 배려라는 것도.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건 분명 달랐다.

“아, 오늘은 홀드 챙겨 가겠네.”

“2루 주자가 과연 들어올 수 있을지 내기라도 할래?”

“들어온다는 데 거는 호구도 있어? 제리도 거긴 안 걸걸?”

김희영은 오늘 등판할 일 없는 다른 투수들처럼 시시덕대며 지켜볼 수 없었다.

‘옛날 전염병 사태 때 백신 맞는 사람들 기분이 이랬을까?’

좀 뜬금없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 세계적 팬데믹 상황 당시 김희영은 멋모르는 고3이었고, 백신 맞으면 야구부 훈련이 이틀간 면제라는 말에 홀랑 넘어가 아무 생각 없이 맞고 왔지만. 그 주사 한 방 때문에 씻을 수 없는 부작용을 겪는 극소수의 사람들의 존재는 나중에야 알았다.

어쩌면 최선의 선택일지 모르지만, 실패 시 부담이 너무나 크다.

아무리 구현기가 이번 시즌 8경기에 등판해 단 한 명의 승계 주자도 불러들이지 않았다고는 해도, 시즌 첫 블론이 오늘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

딱!

“아웃!”

구현기가 상대하게 된 첫 타자가 초구에 희생번트를 성공시키며 주자들이 한 베이스씩 움직이자, 김희영의 불안은 더욱 짙어졌다.

부작용에 대한 공포보다 더 원초적인, 주삿바늘이 팔에 다가와 꽂히기 직전, 괄약근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순간이 떠올라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던 김희영이었지만.

곧 이어진 구현기의 행동에 시선을 빼앗겼다.

‘글러브를······?’

바꿔 끼고 있다.

구현기가 지난 오프 시즌에 스위치 피칭을 익혀 와서 써먹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고, 영상으로도 봤지만, 덕아웃에서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투구에 들어가고 나니, 다른 투수들이 왜 그리도 느긋했는지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스트라이크!”

같은 손 타자의 몸쪽으로 바짝 붙는가 싶더니 확 꺾여서 존에 들어오는 프론트도어 슬라이더.

타자는 포수와 심판을 번갈아 쳐다보며 뭔가 어필하는 듯했지만, 당연히 씨알도 안 먹혔고. 괜히 쿠사리만 먹었는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파울!”

초구 때문에 생각이 복잡해지기라도 한 건지, 이번엔 크게 벗어난 것 같지도 않은 공을 건드려 뒤로 가는 파울을 만들어냈다.

빠른 템포의 투구로, 체감상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써 타자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인 구현기.

그리고.

“스트라이크 아웃!!!”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없다는, 구현기가 빅리그 선발 로테이션에 자기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도와준 위닝 샷 커브볼이, 타자의 배트를 매정하게 피해 포수 미트로 사라졌다.

삼구삼진으로 허무하게 올라간 두 번째 아웃카운트.

“Kooooooooooo!!!!”

“역시 Koo야!!! 성능 확실하구만!!!”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하는 거다, 해적 놈들아!!! 너희는 이런 선수 없지?!”

클린업 트리오의 말석을 차지하던 5번 타자가 삼구삼진을 당하며 확 꺾여버린 기세에, 다저스 팬들의 조롱 공세까지 더해지니.

어지간한 보살이 아니고서야 평정을 유지하기 힘든 건 당연했다.

따악!

마운드 근처로 모여드는 내야수들을 향해 손을 휘저어 보인 구현기가, 한참을 기다려 잡아낸 힘없는 내야 뜬공.

“아웃!”

고작 7구 만에 무사 1, 2루 위기가 깔끔하게 정리되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기적.

실패할 확률이니 뭐니, 그딴 걸 머릿속에 떠올렸던 게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투수한테 실패가 두려워서 위기를 못 맡긴다는 건 얼간이나 하는 짓이라는 생각도.

심판의 아웃 콜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희영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뻐킹 안아키스트!!!”

근처에 있던 동료들의 시선이 죄다 그에게 쏟아졌지만, 공교롭게도 김희영은 그런 걸 딱히 신경 쓰는 편이 아니었다.

* * *

[휴이 킴, 메이저리그 데뷔 411일 만에 첫 승 달성!]

[한국에서 온 33세 투수, 빅리그 통산 ‘1승’ 9패 11홀드 2세이브···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인터뷰 내내 자신의 승리 기념구를 품에 안고 있던 휴이 킴, “인생 최고의 날이다. 이 공을 내게 선물해준 모든 선수들에게 감사하다. 호투의 비결? 전 동료들과의 추억도 물론 소중하지만, 지금에 충실하자는 생각이 도움이 됐다.”]

[‘32경기 연속 안타’ Koo, 마운드에선 1이닝 무실점!]

[혹사 논란에 입 연 Koo, “나는 항상 내 등판 간격을 줄이려는 코칭스태프들과 싸우고 있다.”]

[LA 다저스, 대체 선발 내고도 승리하며 5연승 질주! 지구 2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석패하며 승차는 6경기!]

7회 초를 삼자범퇴로 막아낸 후.

덕아웃으로 돌아온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건, 심각한 표정의 동료들이었다.

“저기, Koo. Kim 있잖아. 혹시 자기 사상에 대해 뭔가 털어놓은 적 있어?”

김희영을 데려다가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안티백서’라는 말이 떠오르지가 않아 ‘안아키스트’라고 외쳤던 거라나.

[야구 보면서 백신 얘기가 도대체 왜 나오는 거야?]

‘별로 궁금하진 않은데.’

경기장 전체가 시끄러운 상황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그 말이 전파라도 탔으면 선수가 덕아웃에서 정치적 발언을 한 의도가 뭐냐면서 기껏 좋은 날에 인터넷에서 개싸움판이 벌어졌겠지.

아무튼, 그토록 원하던 메이저리그 승리투수 기념구를 품에 안고 헤실대던 김희영이, 곧바로 원정길에 올라야 한다는 것도 까먹은 채 돌아가려다 제지당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긴 했지만.

이어지는 원정 시리즈에서도 다저스는 연승 행진을 이어 나갔다.

다음 상대가 개막전부터 스윕을 가져오며 제대로 호구를 잡았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였거든.

따아아아아아악―!

[이 타구의 종착지는 맞자마자 알겠습니다! 펫코 파크의 중심 펜스를 향해! 담장을! 담장을! See! You!! LAter!!!]

[클러치 상황에서 분명히 한방이 있는 선수거든요!! 이전 타석까지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하던 Koo가 역전 쓰리런으로 팀의 믿음에 보답했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Koo가 홈을 밟으며! 9회 말을 치르지 않고 경기를 끝내려던 파드리스의 계획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습니다!]

거의 끊길 뻔했던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을 35경기로 늘린 순간, 이날 경기는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승리를 가져오기 직전 역전을 허용하고 만 파드리스에게 경기를 다시 뒤집을 힘은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LAD 5 : 4 SD]

다저스한테 스윕을 당하며 최악의 기분으로 시즌을 시작한 파드리스였지만, 사실 4월 한 달 동안의 전적은 14승 12패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신임 감독이 선수들 조련을 제법 잘했는지, 작년의 콩가루 같던 모습이 많이 사라지고 짜임새 있는 플레이도 자주 엿보였지.

심지어 바로 직전에는 디백스에게서 위닝 시리즈를 거두며 지구 3위까지 올라가기까지 했고.

[X발 다저스 이 새끼들은 대체 왜 우리만 만나면 이 지랄이야?!]

그 와중에 다저스한테 또 스윕을 당하면서 곧바로 다시 4위로 떨어졌으니, 파드리스 팬들 속이 안 터질 리가 있나.

심지어 3차전에서는 연패도 끊고 내 연속 안타 기록도 저지하기 직전이었는데, 실투 하나로 전부 말아먹었다면서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올해 새로 입단한 마무리 투수는 SNS 계정까지 닫아야 했다.

‘근데 지금 시점에서 순위가 의미가 있나?’

전반기 끝나갈 때쯤이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5월 초에 무슨.

게다가 다음 시리즈에서 우리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두들겨 패고 나면, 순위는 또 어떻게 요동칠지 모를 일이다.

“이번 시리즈 선발 투수는 기존 로테이션대로 운용할 생각입니다. 호세 리카르도, 아드리안 빌라, 그리고 모리츠 슈타인마이어.”

시리즈 시작 전 인터뷰에서 감독님은 5선발 교체 가능성을 일축했다.

로테이션을 한 차례 건너뛰었던 모리츠가 3차전에서 다시 선발 등판한다는 것.

[희영 형님 섭섭해하는 거 아냐?]

‘그 형님 지금 자기 승리 기념구 보살피느라 정신없다. 가만히 냅두면 물도 줄 기세던데?’

어지간하면 매니저한테 맡기고 경기에 집중 좀 하지.

어쨌든, 미리 휴식을 줄 거라고 통보를 받았던 건 지난 시리즈까지였다고 하니, 김희영도 슬슬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 같긴 했다.

‘잘 던지고도 밀릴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려면, 그 정도 수준의 현실도피는 딱 적당하기도 하고.’

감독님은 김희영의 기본적인 실링이 풀타임 선발투수가 되는 건 어렵다고 판단한 모양이니까.

그래도 모든 선발 투수가 등판을 한 차례도 안 거르는 시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럴 때의 옵션 중 김희영은 꽤 높은 순위를 차지하게 될 거다.

‘혹시 또 모르지. 모리츠가 기회를 계속 못 살리면, 지금보다 기회를 더 많이 받을지도.’

[모리츠는 좀 괜찮은 것 같아? 나는 투수 컨디션은 잘 파악이 안 되더라.]

‘나는 뭐 되는 줄 아냐?’

대부분의 투수는 좀 길게 쉬면 좀 나아지긴 하지.

모리츠도 지난번에 휴식일이 끼어 등판을 한 차례 건너뛰었을 때도 그전 등판에 비해 꽤 잘 던졌으니까.

아마 이번에도 5이닝 정도 맡기며 감을 찾도록 하지 않을까, 뭐 그런 추측을 늘어놓으며 호텔 복도를 걸어가던 중.

[어, 쟤도 양반은 못 되나 보다.]

조금 전까지 입에 오르내리던 모리츠와 마주쳤다.

아직 불펜투구도 안 들어간 주제에 묘하게 지쳐 보이는 표정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컨디션이 별로겠거니 하며 지나가려는데.

야구의 신은 생각이 좀 다른 모양이었다.

[돌발 미션 발생!]

[당신의 팀원은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면서 부상을 참고 있습니다. 본인 손으로 커리어를 꼬려고 하는 동료를 설득해서 제때 치료를 받도록 해줍시다!

미션: 모리츠 슈타인마이어의 선발 등판 취소

보상: 300포인트

실패 시: 모리츠 슈타인마이어의 신뢰 최하 수준으로 하락]

작년 시즌 초반부 이후로는 거의 나오지를 않던 돌발 미션 창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이거 초반에 포인트 퍼주려고 내주는 게······ 아니었지.’

박도현한테 물어보려다가, 전에 들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내 야구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거라고 했지.

다만 지금까지 내가 받았던 미션들과 비교하자면, 나 개인과는 크게 상관없어 보인다는 것.

‘이제는 팀의 성공과 내 성공을 굳이 나눌 필요 없다는 건가?’

반대로 말하자면, 팀에 문제가 생길 때 나 역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게 된 거지.

사실상 종신 계약을 맺으며 다저스와 운명을 함께하게 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어떡하려고? 쟤 당장 이번 3차전에 등판할 건데, 수락할 거야?]

물론 돌발 미션은 거절한다고 해서 따로 불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보상은 빈말로도 뛰어나다고 보기 어려운데다, 실패했을 때의 페널티도 상당하지.

그래도.

‘해야지.’

무슨 일인지 설명도 안 해주고, 그냥 등판을 막으라고만 했으면 몰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친절하게 때려박아 주는데도 이걸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만 놔두면 커리어가 꼬인다는데, 그걸 내버려 두면 내가 앞으로 동료니 뭐니 하는 얘기를 어떻게 꺼내겠어.

[언제 얘기할 거야? 시간이 그리 많진 않을 텐데,]

많지 않은 게 아니라, 촌각을 다투는 수준이다.

모리츠는 스케줄상 바로 내일 불펜피칭에 들어갈 텐데, 어차피 등판을 취소시킬 거라면 굳이 몸을 더 혹사시킬 필요가 없으니까.

‘지금 해야지.’

[어? 아니 무슨······.]

박도현이 뭐라 주절대려는 걸 무시하면서, 막 옆을 지나치는 모리츠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모리츠!”

내가 부를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지, 제자리에 잠깐 멈췄다가 슬쩍 뒤돌아보는 모리츠.

이렇게 보니까 왜 이리 티 나는 것 같지.

‘나 뭐 숨기는 거 있어요’라고 쓰여 있는 듯한 얼굴인데.

이럴 땐 굳이 빙빙 돌려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전하고 싶은 뜻을 전부 담아,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너 팔꿈치 개박살난 거 같은데, 병원 가보지 그래?”

[제발 깜빡이 좀 키고 들어가 미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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