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60화 (160/200)

< 160. 너에게 난, 나에게 넌(6) >

모든 투수는 커리어 내내 어느 정도 팔꿈치 통증을 감수하고 산다.

조금이라도 더 빠른 공을 던지겠답시고 자연스럽지 않은 형태로 몸을 비트는데, 멀쩡하기를 바라는 게 비양심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게 심해지면 토미 존 서저리를 받으면 된다고, 그러면 다시 팔꿈치 수명이 늘어나는 거라고. 학생 시절의 모리츠 슈타인마이어는 그렇게 배웠다.

‘개소리지.’

수술은 팔꿈치의 내구도를 높여주고 통증도 줄여주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

대학 시절 말로만 듣던 토미 존 서저리를 직접 받아보고 나서야, 모리츠 슈타인마이어는 그 사실을 실감했다.

메이저와 마이너, 선발과 불펜, 방출과 이적.

굴곡 많은 선수 생활 끝에 드디어 안정적인 자리를 찾았다 싶었던 그 순간.

예전의 그 섬뜩한 통증이 다시 그를 찾아왔다.

‘아닐 거야.’

그냥, 투수에게 따라올 수밖에 없는 만성적인 증상이 도졌다고 생각하며, 진통제만 처방받고 말았다.

충분히 휴식하고 나서 던지면 금방 호전되기도 했고.

그렇게 별일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던 모리츠는, 다음으로 상대할 타자들의 정보를 머릿속으로 되뇌며 걸어가다가.

“팔꿈치가 개박살난 것 같은데 병원 좀 가보지 그래?”

이런 소리를 들었다.

그것도 팀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고 있는, 모리츠 자신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선수에게.

‘내가 지금 들은 게 맞나?’

너무 황당해서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길을 가다 갑자기 뒤통수를 맞으면 화가 나겠지만, 자신을 때린 게 주먹이 아니라 당근이었다는 걸 확인한다면 분노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서는 것처럼.

이유야 어쨌든, 무슨 그런 무례한 소리를 하냐고 곧바로 대들지 못한 시점에서, 이미 모리츠는 구현기의 페이스에 말려든 거나 다름없었다.

“무슨 소리야, Koo. 농담이 좀 지나친 것 같은데.”

어색한 웃음과 함께 어물쩍 넘어가려던 모리츠.

그러자 구현기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불쑥 추가타를 날렸다.

“이건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모리츠 넌 혹시 내가 병X으로 보여?”

“아니, 그게 뭔.”

“너 구위 떨어져서 땅볼 유도하던 구종 던져도 뻥뻥 맞아 나가는데, 그걸 남들이 모를 줄 알았다면 아니라고 알려주려고.”

그 말에는 모리츠도 살짝 욱했지만, 막상 눈을 마주치고 보니 저절로 분노가 조절되는 기분이었다.

자기 얼굴에 스파이크를 들이대던 파드리스 유격수의 정강이를 아작내던 구현기의 표정이 순간 스쳐 지나갔으니까.

“아,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거 아냐? 내가 프로 생활을 더 빨리 시작했다는 거 알고는 있는 거야?”

할 말이 궁해진 모리츠가 할 수 있던 건 그런 궁색한 반박뿐이었지만.

“너 2029 드래프티잖아. 나도 고등학교 졸업하느라 2030년에 데뷔한 거지 계약은 그때 했거든? 그럼 동기나 마찬가진데 어디서 유세야.”

국제 유망주 계약 절차에 대해 잘 모르는 모리츠는 구현기의 개똥 같은 논리에 반박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잘 알았더라도 반박 못 하는 건 똑같았을 거다.

구현기의 기세에 눌려 자신이 사실은 2028 드래프티라는 것도 못 말했으니까.

“모리츠, 내가 이런 얘기를 괜히 하는 게 아니야.”

마구 쏘아붙일 땐 언제고, 갑자기 또 말투를 사근사근하게 바꾸는 구현기.

그러나 이 자리를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었던 모리츠에게는 차라리 그런 태세 전환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만약 네 상태가 안 좋아서 수술이 필요한 거라면, 차라리 지금 다녀오는 게 나아서 그래. 우리 선발진 봐봐. 호세도 떠날 확률 높고. 다니엘도 내년에 구단 옵션 있긴 한데 그걸 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 아냐.”

물론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호세 리카르도가 다저스와 1년 더 함께하며 FA 재수를 선택할지도 모를 일이고, 지금 페이스대로라면 다저스는 다니엘의 구단 옵션을 실행할 게 분명한데다.

아니면 다저스가 트레이드나 FA로 다시 괜찮은 선발 매물을 수급할 수도 있고, 차곡차곡 쌓여 있는 유망주들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모리츠에게는 그 말이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설령 수술해야 한다면 그게 뭐 어때서 그래? 나 좀 봐. 블래스 신드롬 걸리고도 투수로 복귀했는데, 수술 후 재활은 확실한 플랜까지 있잖아?”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던 투수에서, 팀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게 된 선수의 말에는,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설득력이 있었고.

“응······.”

결국 모리츠는 구현기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5분도 안 돼서 사람 한 명 수술대로 보내버리는 거 보소. 진짜 사기꾼 했으면 대성했을 새끼네.]

‘아가리 묵념.’

구현기가 속으로는 본인에게만 보이는 친구와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 * *

[LA 다저스 모리츠 슈타인마이어, 팔꿈치 통증으로 부상자 명단 등재]

바로 다음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경기를 앞두고 모리츠의 이탈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돌발 미션 성공!]

[3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7230]

300포인트를 받아 챙기긴 했지만,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 기분 좋은 티를 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얘는 무슨 티도 안 내다가 갑자기······.”

“모리츠 쟤 옛날에도 팔꿈치 수술받지 않았나?”

“그럼 회복은 좀 오래 걸릴 텐데······.”

수군거리는 선수들의 등짝을 한 대씩 때리며 R.H.가 크게 소리쳤다.

“지금 훈련 시간인 거 몰라? 이따 경기에서 망신당하기 싫으면 몸이나 제대로 풀어!”

아무리 다저스에 뒤숭숭한 분위기를 수습할 베테랑들이 많다지만, 선수단에 어쩔 수 없이 동요가 일어나긴 했다.

어쩌면 자이언츠로서는 우리와의 승차를 좁히고 지구 선두에 가까이 다가갈 기회로 여겼을 수도 있고.

[LAD 9 : 5 SF]

물론 그런 안일한 꿈을 이뤄줄 만큼 다저스는 호락호락한 팀이 아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좀 부진했을 뿐 아무 내색 없던 모리츠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게 충격이긴 했는지, 선발 제리가 5이닝 3실점으로 시즌 최악의 피칭을 선보였지만.

두 시리즈 연속으로 리빌딩 팀의 투수들을 두들겨 패며 끌어올린 타선의 기세는, 자이언츠의 에이스를 상대로도 여지없이 발휘됐으니까.

[‘팔꿈치 통증 호소’ 모리츠 슈타인마이어, 정밀 검사 결과 팔꿈치 내측 측부인대 손상 발견··· 장기 부상자 명단으로 이관]

9연승을 거두고 위풍당당하게 클럽하우스로 돌아온 선수들을 반긴 것은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근데, 만약 모리츠가 아니고 너보다 연차 훨씬 높은 선수였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일단 시간이 촉박하니까 미션은 거절하고, 감독님한테 말해서 밑밥도 좀 깔고, 뭐 이래저래 귀찮긴 했을 것 같은데······.’

베테랑 투수였으면 모리츠처럼 무식하게 버티려는 생각 자체를 안 했을 것 같긴 하다.

아프면 진작에 말하고 병원에 가거나, 만약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다면 올해까지만 참고 던진다거나 했겠지.

그래도 기사를 읽어보니, 인대가 손쓸 도리 없이 손상된 건 아니라서 다시 복귀는 가능하다고 하니,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모리츠의 빈자리를 채워줄 선발 자원 여럿이 마이너에서 대기 중이기도 하고.

[(속보) 오클라호마시티 다저스 소속 우완투수 에드윈 니콜슨, 빅리그로 긴급 콜업!]

그리고 그중 선택을 받은 건, 타고투저 리그인 트리플 A에서도 준수한 성적을 내던 에드윈이었다.

“기분은 좀 어때?”

다니엘이 5이닝 2실점으로 패전을 떠안으며 1승 1패로 시리즈의 균형을 맞춘 날 밤.

오클라호마시티에서 올라오자마자 바로 다음날 선발 등판하게 된 에드윈과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같은 에이전시 소속이라는 인연 때문인지, 감독님에게 잘 좀 케어해주라는 부탁을 받았으니까.

“좋습니다. 하루 더 쉬어서 아주 쌩쌩해요.”

생애 첫 빅리그 콜업인데도 생각보다 차분해 보이는 에드윈.

아마 본인도 알고 있던 거겠지.

로스터에 빈자리가 생기면 올해 안에 빅리그를 밟아볼 수도 있겠다는 걸.

“내가 가르쳐줬던 거 제대로 기억하고 있나 어디 한번 보자. 실투 던지면 어떻게 된다?”

그러자 에드윈이 씩 웃으며 대답한다.

“그런다고 내 인생이 X 되진 않는다.”

커브보다도 더 심혈을 기울여 가르쳤던 마음가짐.

그것만 항상 품고 있어도 빅리그에서 투수로 살아남는 데는 문제 없을 거라고 격려해줬고.

다음날, 에드윈은 매 이닝 주자를 내보내면서도 실점만큼은 허용하지 않으며 꾸역꾸역 막아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내가 가르쳐준 커브로 자이언츠 타자들의 방망이를 끌어낸 끝에.

에드윈의 빅리그 데뷔전 성적은 5이닝 6K 4피안타 2볼넷 무실점.

상대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라는 점, 5이닝 무실점이라는 점, 커브를 결정구 삼아 삼진을 잡아냈다는 점 등등.

지금 와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내 데뷔전과 겹치는 부분이 좀 많았던 경기였다.

[데뷔전에서 신들린 커브볼 선보인 에드윈 니콜슨! Koo가 남긴 유산이 다음 세대로 전승되다!]

근데 이런 선 넘은 기사들도 나왔다는 게 문제지.

유산은 개뿔. 멀쩡히 살아서 투수로도 복귀했구만. 내가 무슨 박도현도 아니고.

* * *

LA 다저스의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

그는 다저스에 부임한 이래 가장 평화로운 기분으로 시즌을 치르고 있었다.

비슷한 생각을 작년에도 했던 것 같지만, 그런 기억 따위는 진작에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5월 말이 가까워져 오는 지금, 다저스의 팀 성적은 34승 19패.

개막 시리즈를 스윕으로 장식한 이후로 1위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저스의 새로운 5선발 에드윈 니콜슨, 4회를 버티지 못하고 강판되며 시즌 2패째··· 하위 선발 불안 해소가 순위 유지의 열쇠]

태블릿 화면에 떠오른 기사 제목을 보며 오브라이언 감독은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팀 돌아가는 꼬라지에 트집을 잡으며 아는 척하는 게 기자들의 역할이라고는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쓰고 있자면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까.

신인 투수가 2승 2패를 거둔 걸 가지고 불안 운운하다니.

지금은 다저스 선발진에서 든든하게 활약해주는 제리와 아드리안도 루키 시절에는 퐁당퐁당을 면치 못했다.

심지어 아드리안은 그게 오래가서 불펜으로 내려간 적도 있고.

‘오히려 쓸데없이 관심받고 있는 걸 생각하면 엄청나게 잘해주는 거지.’

하필이면 데뷔전에서 전통의 라이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무실점 경기를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팬들의 기대치가 장난 아니게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그 기대는 바로 다음 경기에서 제구 불안으로 일찍 강판당하고 나니 그만큼 커다란 실망감으로 돌아왔고.

그런 상황에서도 차근차근 자기 입지를 다져나가는 에드윈을 보며, 오브라이언 감독은 루키 시절의 구현기를 떠올렸다.

투수 구현기는 임팩트는 적었지만 항상 꾸준한 스타일의 선수.

피칭 스타일도 그렇고, 결정구로 커브를 쓰는 것도 그렇고, 에드윈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을까 싶었다.

실제로 마인드 세팅에 구현기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고 보고받은 적도 있고.

[메이저리그의 흥행을 망치고 있는 한 감독의 욕심!]

흐뭇한 표정으로 태블릿 화면을 들여다보던 오브라이언 감독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읽지 않아도 어떤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짐작이 갔다.

연속 경기 안타 기록에 도전 중인 구현기.

박도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깨지지 않을 줄로만 알았던 조 디마지오의 2위 기록, 56경기가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이런 상황에서 투수로서 등판까지 시키며 부담을 주는 건 기록 달성에 악역향을 줄 수 있다는 거지.

‘아니 본인이 올라가겠다는데 어쩌라고.’

심지어 생각보다 체력 부담이 적으니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올라가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떠보길래, 험한 소리까지 해가며 찍어눌렀다.

[Koo,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에 대해 단언하다! “나는 기록을 세우기 위해 야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승리를 위해 야구를 하고 있다.”]

‘그렇지. 야구는 이기려고 하는 거지.’

자신에 대한 논란을 조금은 잠재우게 해준 구현기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오브라이언 감독은 내심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장 계약이 발표됐을 때만 해도, 본인이 무조건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주제에 너무 금액이 과하지 않나 하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 선수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력도 훌륭한데 마인드까지 갖춘 이런 선수를 어디서 또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도 어제처럼.’

늘 주문처럼 외우곤 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경기 준비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오브라이언 감독.

그러나 이렇게 평화에 젖어 있을 때, 야구의 신은 슬그머니 나타나 귀띔하곤 한다.

‘어디서 여유를 처 부리고 앉아 있냐’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