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마음을 담아(1) >
세상은 점점 바뀌고 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 수준도 함께 바뀌었지만.
뇌를 비우고 떠드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제리 헤이즈택의 여자친구가 UCLA 다니는 아시안이라고? 혹시 공짜로 쓸 수 있는 회계사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 미친놈이네 이거
└ 요새도 이렇게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는 새끼가 있었나?
└ 나도 제리가 인터뷰 때마다 여자친구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는 거 꼴 보기 싫은 사람인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신고 처먹고 조용히 꺼져라.
물론, 이나현은 인터넷에서 떠들어대는 말들에 흔들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에이전시에 전달해 어떻게든 해보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남자친구의 모습이 귀엽다고도 생각했다.
“나현이? 클라라라고 해야지. 메이저리거 애인씩이나 되시는 분인데 경의를 담아야 할 거 아냐.”
“무슨 야구 에이전시랑 제휴 맺고 일한다더니, 내 그럴 줄 알았지.”
“야, 뭘 또 그러냐. 남자 꼬시는 것도 자기 능력이야.”
“아니, 만나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학교는 왜 안 나온대? 진짜 결혼까지 할 줄 알고 저러는 건가?”
그러나 한인 커뮤니티에서의, 친한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뒷담화는 조금 아팠다.
차라리 자연스럽게 멀어질 것을, 괜히 다시 만나러 갔다가 이런 속내를 알게 됐나 싶기도 했고.
불성실하다는 말만 나왔으면 상처받을 일은 없었을 거다. 학업보다 가이드 일을 우선한 건 자신의 선택이었고, 덕분에 졸업이 아슬아슬해지긴 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지하게 만나는 게 아닐 거라는 말은 이나현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남자친구와는 잘 맞는다. 앉은자리에서 몇 시간쯤 쉬지 않고 수다를 떨어도 지루하지 않고, 경기 중에는 누구보다 멋지지만 평소엔 행동 하나하나가 귀엽다.
그러나, 남자친구도 과연 자신과 같은 마음일지, 최근 들어 부쩍 자존감이 떨어진 그녀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임신 사실을 발견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축하드립니다. 4주 차예요.”
예정일이 지나도 소식이 오지 않아, 미리 테스트기로 확인하고 나서 병원을 찾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받는 충격이 줄어들진 않았다.
“출산이요? 네, 메디컬 이슈에 포함됩니다. 진단서만 첨부해주시면 바로 휴학 처리가 가능하고요.”
학교와 병원을 오가며 출산까지의 절차를 알아보면서도, 정작 남자친구에게 사실을 알릴 용기는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반응이 돌아왔을 때, 그 충격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자꾸 연락하는 게 부담스러웠으면 미안해요. 괜찮아졌을 때 꼭 다시 연락 줘요.]
그러나.
이 문자를 마지막으로 남자친구에게서 오는 연락이 끊기며, 한동안 잠잠하던 핸드폰에.
친한 동생이 보낸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언니, 우리 오빠가 그러는데. 제리 선수가 언니랑 연락 끊기고 나서 클럽하우스에서 해조류처럼 지내고 있다네요. 이대로 두면 다른 선수들이 국 끓여 먹을 것 같다는데요?]
남자친구가 자신의 빈자리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는 소식.
순간 아주 약간 안심한 그녀였지만, 곧이어 그보다 훨씬 커다란 자괴감이 찾아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다저 스타디움에 경기를 보러 다니며 낯선 미국 사회에 서서히 녹아든 그녀였다.
야구의 룰은 그녀가 고향 대전에서도,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된 LA에서도 똑같았으니까.
그런 자신이, 자기 감정만 앞세워서 팀의 에이스의 컨디션을 망가뜨리는 이기적인 짓을 하다니.
한없이 부끄러운 감정이 그녀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기······ 가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이나현은 각오를 다졌다.
막대한 연봉과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화려한 삶을 보내는 메이저리거들이 많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티를 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장기계약을 맺은 이후로 더욱 많은 유혹의 손길이 뻗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그쪽에 눈길을 돌리더라도,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돌아와 준다면 괜찮다고 생각한 그녀에게, 제리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그럼 그동안 혹시 임신 때문에 몸 상태가 안 좋았어요? 그래서 연락이 안 됐던 거예요?”
자신을 향한 걱정 말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 말에.
이나현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어, 클라라, 어디 아파요? 근처에 지금까지 여는 병원이 있을 텐데 같이 갈래요? 아니, 일단 뭘 좀 먹어야 하나? 제 동생은 임신했을 때 과일을 잘 먹었······ 읍.”
이나현은 당황해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대는 남자친구의 입에 살포시 입술을 포갰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제리는, 잠시 후 눈을 뜨자마자 살짝 발개진 눈으로 웃고 있는 이나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니에요. 그냥······ 미안해요. 다신 이런 짓 안 할게요.”
서로를 향한 불안과 걱정은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눈 녹듯이 사라졌고.
두 사람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둘만의 시간을 가졌던 바로 그 차 안에서.
* * *
“환상적인 아침입니다!! 오늘도 이길 준비는 완벽한가요?”
클럽하우스에 들어오자마자 냅다 소리부터 지르는 제리를 보며, 어제 일이 잘 풀렸다는 걸 눈치챘다.
[근데 오늘도 이길 준비 됐냐는 말은 적어도 쟤가 할 소린 아니지 않냐?]
‘그러게. 누가 들으면 어제 완봉이라도 한 줄 알겠어. 3.2이닝 4실점 한 새끼가.’
그러나 구체적인 사정을 알 리 없는 다른 선수들은, 일단 전날과 180도 다른 쌩쌩한 모습으로 나타난 제리에게 1차로 당황했고.
여자친구와의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는 제리의 보고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은 듯했다.
“뭐······? 왜······?”
“분명 차였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이번에야말로 저놈이 전 재산 사회에 기부하고 수도원에 들어갈 거라고 확신했는데!”
혼란스러워하는 선수들을 향해, 제리는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렇게들 훈수를 두시더니, 다들 여자를 잘 모르시는군요?”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싸해졌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진짜 만만한 호구로 봤던 놈한테서 옳은 소리로 한 방 먹으면, 차마 반박은 못 하고 열불만 터지는 거.
“제리가 나한테 여자 문제로 훈수를 둔다고?”
“서른 다 되도록 모쏠로 지내던 저 새끼한테?”
“내가 야구계에 너무 오래 있었나 보다······ 이 바닥 빨리 뜨든가 해야지······.”
비척비척 자리를 뜨는 선수들의 뒷모습을 보며 사악하게 웃어대던 제리였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고 나서부터는 표정 관리에 들어가야 했다.
[ARI 1 : 0 LAD]
경기 전 멘탈에 타격을 입은 데다 전날 대량 득점을 뽑아내며 스윙 밸런스가 살짝 흐트러진 타자들에, 하필 오늘따라 결정구 슬라이더가 제대로 긁힌 상대 선발의 컨디션. 결정적으로 이번 시즌도 3점대 초반의 ERA를 유지하며 고작 2승에 그칠 정도로 극악인 다니엘의 승운.
이 모든 게 더해져 만들어낸 것은, 9회를 통틀어 안타 4개를 기록하며 당한 영봉패였다.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최소한의 눈치가 있다면, 아니 사람새끼라면.
선발 투수가 7이닝 1실점을 하고도 패전투수가 된 날 덕아웃에서 이빨을 보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축하해, 제리. 여자친구랑 잘 풀렸다면서?”
“어, 고맙다, 다니엘. 그렇게 됐네. 하하······.”
“나도 누군가와의 감정적 교류가 부족했던 걸까? 내 마음이 온전히 채워졌다면 나도 승리투수가 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생각해? 응? 응?”
“어, 저기. 음······.”
전날 개판을 치고도 노디시전으로 넘어갔던 제리가 공허한 눈빛의 다니엘에게 붙들려 있는 동안, 할 말 없는 타자들은 재빨리 퇴근했지만.
나는 느긋하게 돌아갈 채비를 했다.
안타 하나에 볼넷 하나로 멀티 출루면 밥값은 했지. 후속타가 안 나와서 득점을 못 올린 걸 어떡하라고.
* * *
“고맙다, Koo. 클라라한테 연락해달라고 여자친구한테 부탁해줬다면서?”
질척대는 다니엘에게서 겨우 해방된 제리는, 나한테 잠시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했고.
뭔가 싶어 가보니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비밀 하나를 전해 들었다.
“클라라는 안정기 지나고 나서 밝히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너한테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야. 다른 선수들한테는 비밀로 해줄 거지?”
바로 아직 대학 졸업장도 따지 못한 이나현에게 덜컥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
선수 가족에게 적용되는 건강보험 혜택을 위해 혼인신고는 미리 하겠지만, 식은 천천히 올릴 거라나.
[진짜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네. 넌 대체 어떻게 안 거냐?]
내 예상을 들었을 땐 심드렁했던 박도현도 혀를 내둘렀다.
‘이 바닥에 양아치들이 워낙 많잖아. 이나현이 명색이 야구광인데 그걸 몰랐을 리가 없지.’
지금은 상황이 안 좋으니까 지우라고 꼬드기고는 은근슬쩍 멀어지는가 하면, 양육비는 보내줄 테니 알아서 키우라며 배 째란 식으로 나오는 놈들도 있었다고 하니까.
선배들한테 듣고 완전 동물의 왕국이구나 싶어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난다.
근데 제리 같은 찐따를 남자친구로 두고도 그런 걱정을 하다니.
다른 선수였으면 잠도 제대로 못 잤겠네.
“고맙다는 인사는 됐고. 나 이제 가도 되냐? 슬슬 피곤한데.”
“아, 그게······.”
좀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제리의 얼굴이 급속도로 쪼그라든다.
“사실······ 임신 소식을 부모님들께 아직 못 알려드려서······.”
제리네 부모님은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런 앞길 창창한 여자애가 너를 왜 만나니?’라고 반응하셨다고 하니, 그쪽은 등짝이야 좀 맞을지언정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나현네 집은 이야기가 좀 다르지.
아직 대학도 졸업 못 한 딸내미가 갑자기 애아빠를 데려오는 건데.
“클라라 말로는, 자기 아버지가 이민 1세대라서 미국인보다는 한국인에 더 가깝다고 하던데. 혹시 우리 아버지 또래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 같은 게 있을까······?”
얘 좀 보게.
유교사상으로 무장한 K―장인어른이 만만해 보이나.
“뭘 가져가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을걸? 그냥 포기해. 이쪽 동네 아버님들은 사냥 취미는 별로 없으니까 샷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아······.”
애초에 같은 한국인이라도 취향이 다 다른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아나.
이나현네 아버지에 대해 내가 아는 거라고는, 딸내미를 다저 스타디움에 자주 데려가서 2대째 다저스 팬으로 만들었다는 것뿐이다.
“정 신경 쓰이면. 사인볼이나 배트, 유니폼 뭐 이런 거 챙겨 가면 되지 않겠냐?”
“저기, 그럼 Koo. 내가 공이랑 유니폼이랑 다 준비할 테니 사인만 좀 어떻게······.”
“전에 100만 불까지는 이자 없이 빌려주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이체하면 될까?”
바로 핸드폰을 꺼내려는 걸 기겁하며 말렸다.
농담이 통할 만한 정신상태가 아니라는 걸 깜빡했네.
“그냥 가볍게 만나는 자리면 사실 니가 빈손으로 가도 좋아하셨겠지. 니가 또 명색이 다저스의 에이스잖아.”
“그, 그렇겠지?”
“근데 너 이번 자리에 가벼운 마음으로 나갈 수 있어?”
“못 나가지······.”
여자친구가 생긴 이후로는 한동안 보기 힘들다가 오랜만에 등장한 쭈굴쭈굴 제리.
자주 못 봐서 그런가, 왠지 전보다 더 불쌍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 마음 약해지게시리.
“정 그러면 네놈 퍼펙트 기념구라도 가져가 봐. 따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다, 뭐 이런 의미로다가.”
제리가 작년 후반기 컵스전에서 연속 경기 퀄리티스타트 기록 경신과 함께 달성했던 퍼펙트게임.
그 기념구를 가져가라는 말에, 투수는 해본 적도 없는 박도현이 오히려 펄쩍 뛴다.
[야, 아무리 그래도. 인생에 하나밖에 없는 공을······.]
‘그걸 노리는 거지.’
이나현의 아버지가 진짜 야구팬이라면, 오히려 이걸 가져오면 어떡하냐며 당황할 거 아냐.
그러면 새삼 이 띨빵한 놈이 다저스의 에이스가 맞긴 하구나 싶기도 할 테고, 분위기도 좀 풀릴 테니까.
[그러다 진짜 받으면 어떡하려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내미 식 올리기도 전에 임신시키고 그거 하나로 용서받으면 싸게 먹히는 거 아닐까?’
[그런가······?]
이때의 나는, 박도현이랑 그런 쓰잘데기없는 대화를 나누느라 미처 알지 못했다.
“퍼펙트······ 퍼펙트······.”
이 미친놈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