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마음을 담아(2) >
[ARI 5 : 3 LAD]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3차전은 다저스의 패배로 끝났다.
이날 선발 투수 호세 리카르도는 지난 오프시즌 동안 애리조나에서 LA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선수.
1회에 선취점을 허용한 이후, 내내 끌려간 끝에 역전에 실패하며 그대로 경기를 내줬다.
호세의 컨디션이 안 좋았다기보다는, 그냥 호세가 디백스 타자들에 대해 아는 것보다, 타자들이 호세에 대해 더 잘 알았을 뿐이라고 본다.
친정팀이라고 해 봐야 1년밖에 안 뛴 김희영이랑은 사정이 다르기도 하고.
‘루징 시리즈가 거의 한 달만이던가?’
현재 성적 39승 15패.
이렇게 보니 올 시즌 다저스의 페이스가 심상치 않다는 게 새삼 느껴진다.
그러니까 홈에서 루징 시리즈를 당하고도 팬들이 ‘같은 지구 다른 팀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 한다’라며 관대하게 넘어가 주지.
[하필이면 연패당하자마자 또 빡센 데로 가네.]
‘고작 2연패 가지고 뭐. 작년엔 9연패까지 했었는데.’
다음 일정은 중부지구 원정 9연전.
시카고를 연고지로 한 두 팀, 컵스와 화이트삭스를 거쳐 밀워키까지 찍고 돌아오는데.
그중 가장 먼저 상대할 컵스가 지구 1위를 달리며 초반 기세를 제대로 타고 있다.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만큼, 코어 선수들의 역할이 중요한 시리즈.
그중에서도 3차전에 등판할 에이스 제리의 책임이 막중하다.
지난 경기에서의 부진이 여자친구와의 연락 두절 때문이라는 사실이 아직 퍼져나가지 않은 지금.
다음 경기에선 곧바로 제 컨디션을 찾아 명예 회복과 동시에 소문을 원천 봉쇄해야 할 텐데.
“흐흐흐흐흐.”
정작 본인은 기내 와이파이로 여자친구, 아니 이제는 약혼녀가 된 이나현과 메시지를 주고받기 바빴다.
그것도 내내 기분 나쁘게 실실대면서.
“X발, 못 봐주겠네. 분리불안 있는 우리 집 강아지도 저 새끼보다는 의젓하겠다.”
평소엔 비행 내내 얌전히 자리를 지키는, 통로 건너편 자리의 주전 포수 헨리가 결국 못 버티고 탈주했다.
저딴 식으로 온종일 핸드폰 붙잡고 대화만 나누다간 하루도 못 가서 약혼자의 임신 소식을 들킬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주변에 아무도 남기지 않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나.
“흐흐흐흐. 어쩜 사람이 문자에서조차 귀여움이 묻어나올 수 있지? 안 그래, Koo?”
“X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자리 좀 바꿔 달라고 생떼를 부리든가 해야지 원.
‘자료나 보자. 자료나.’
이번 리글리 필드 원정이 평소보다 살짝 부담스러운 건, 물론 열악한 시설과 극성팬들이 넘쳐나는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년에 컵스가 자랑하는 에이스 A.D. 존슨을 컵스 홈구장에서 상대했다가 안 좋은 기억을 좀 심어줬거든.
9회에 내야 안타로 퍼펙트를 깨트리고 심지어 도루까지 했으니.
[작년엔 어차피 1년 뒤에야 올 거라 상관없다더니, 1년 금방이쥬?]
‘아가리 묵념.’
심지어 우리 홈에서는 한술 더 떠서, 노히터마저 깨트린데다 우리 투수 제리는 퍼펙트까지 달성했지.
독기를 품고 마중을 나올 컵스 팬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귀가 따갑네.
[근데, 그때 일 복수한답시고 너한테 무더기로 볼넷 내주면 어떡하냐?]
‘그건 아니라고 본다.’
팀 전체의 플레이 스타일이 감독이나 덕아웃 리더의 성향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적지 않은데.
컵스는 둘 다 뭐라고 해야 하나, 약간 쌩 마초 스타일이라서.
최소한 상대 기록을 의식하느라 승부를 피하는 꼴을 두고 보진 않을 거다.
‘만약 생각대로 된다면······.’
2차전까지 안타 행진을 이어간다면, 딱 56경기.
역대 2위 조 디마지오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 * *
[LAD 4 : 6 CHC]
[LA 다저스, 2038시즌 첫 3연패! 그 원인은?]
[불펜진 보강에 소극적이었던 다저스, 드디어 역풍을 맞나?]
[역대급 강타자에게 찬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Koo, 5타수 2안타 멀티 히트에도 타점과 득점은 ‘제로’]
결과는 패배였지만, 흐름은 나쁘지 않았다.
패장 인터뷰에서 수도 없이 우려먹은 말이라는 걸 나도 알고 감독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알지만, 최근 치른 세 경기를 표현하는 데 그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었다.
다니엘이 등판했던 경기에서야 타자들이 죽을 쒔지만. 그건 상대 타자들도 마찬가지였고.
반대로 그다음 두 경기는 타자들이 짧은 침묵을 마치고 다시 방망이를 살리기 시작했다. 득점권 찬스 자체는 적었지만 점수를 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잘 내줬다. 불펜이 조금만 단단하게 버텨줬다면 충분히 다른 전개가 나올 수도 있는 경기들이었다.
“아드리안! 자기 전에 애들이랑 룸서비스로 간단하게 요기나 할래?”
다만, 최근 개인 연승을 이어가던 아드리안이 패전을 떠안은 건 조금 신경이 쓰였다.
오늘 경기 5이닝 3실점으로, 올 시즌에 같은 성적을 거두고도 투수가 선발승을 얻어냈던 경기가 많았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좋지! 당연히 제리가 사는 거겠지? 원래 투수들 밥값은 에이스가 책임지는 거니까!”
반응을 떠보려고 슬쩍 던져본 질문에 환한 웃음으로 답하는 아드리안.
위기 상황을 맞거나 패전을 떠안을 때면 감정 기복이 심해졌고, 그 때문에 불펜 강등까지 겪었던 예전을 생각하면 괄목상대할 일.
대체 어떤 계기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팀에게는 좋은 일이다.
그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항상 너의 그 포커페이스가 부러웠는데, 이제는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표정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아.”
“읽었다고? 내 표정을?”
“응. 얘가 또 멘탈 개박살나서 몇 경기 말아먹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싶었지?”
단번에 숨은 의도를 간파한 아드리안.
그러고 보니 얘는 머리에 나사가 몇 개 빠졌을 뿐, 박도현처럼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니었지.
“사실은 작년 월드시리즈에서 Koo 네가 해준 말이 기억에 남더라고.”
“아, 그 승리의 요정인가 뭔가 그거 얘기 말하는 건가?”
“그래. 맞아.”
작년 시즌 초반, 내 결정적인 호수비에 힘입어 노히터를 달성한 이후로 내 사진을 코팅해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징크스가 생긴 아드리안.
그걸 덕아웃에 놓고 나와서 자기 공을 못 던지겠다는 개소리를 하길래, 내가 등 뒤에서 수비하는 건 안 보이냐고 팩트를 좀 꽂아줬는데.
그게 효과가 있었다고 하니, 뭔가 좀 뿌듯한 것 같기도.
“그래. 이제 알겠지? 그런 상징물 따위 처음부터 필요하지도 않았던 거야.”
“응? 그게 뭔 소리야?”
“어······?”
대화가 맞물리지 않는 것 같아 아드리안을 쳐다보는데.
애가 갑자기 눈빛이 좀 부담스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 수도 있고.
“덕아웃에 부주의하게 떨어트린 게 잘못이라면, 아예 내 몸에 항상 새겨놓고 다니면 될 거 아냐?”
나도 모르게 시선이 아드리안의 팔뚝을 뒤덮은 문신으로 향했고.
그다음으로는 엉덩이 쪽으로 눈길이 갔다.
지난 시즌 내내 가여운 내 사진이 갇혀 있던,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데다 쓸데없이 후끈후끈할 바지 뒷주머니로.
“아니, 아니지, Koo. 표정이 왜 그래? 설마 내가 엉덩이에 네 얼굴이라도 새겼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아, 하하하. 그치? 나도 참. 괜한 걱정을 다 했네.”
“당연하지. 나도 생각이란 걸 할 줄 안다고. 새겨놓은 건 엉덩이가 아니라 옆구리 쪽이야.”
아니야.
부위 문제가 아니야. 보통 사람은 자기 몸에 동료 얼굴을 새기는 짓거리를 하지 않아.
정상인으로 돌아온 줄 알았더니, 그냥 티가 덜 나는 미친놈으로 진화한 것뿐이었어.
[그럼 이번 시즌 내내 기복이 없어진 게 설마······.]
‘득츠······.’
아닐 거야.
그딴 걸로 제구가 개선되는 투수는 들어본 적도 없고. 있어서도 안 돼.
“이제는 구겨지거나 실수로 떨어트릴 일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편해지더라. 이게 다 네가 준 아이디어 덕분이야.”
팔뚝 말고도 상체 여기저기 문신이 여러 개 있어서, 지금껏 샤워할 때는 눈치를 못 챘는데. 차라리 영영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설마 기분 상한 거 아니지? 팀 전력이 올라갔으니 기뻐해야 할 거 아냐?]
‘득츠르그······.’
차마 그걸 내 눈으로 확인할 용기는 나지 않는다.
앞으로 샤워할 때 쟤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말아야지.
* * *
야구에서 에이스는 단순한 1선발이 아니다.
팀 성적이 죽을 쑤고 있더라도 어떻게든 연패를 끊어줄 거라는 믿음을 주는, 그래서 팬들을 경기장에 오도록 하는 선수.
아무리 약팀이라고 해도, 트레이드를 하든 뭘 하든 선발진에 믿을맨 한 명은 무조건 박아두는 이유다.
그만큼 에이스가 털리고 나면 팀 사기가 팍팍 떨어진다는 부작용도 있지. 로버트가 유독 부진했던 작년 시즌 초반 다저스만 봐도 그렇고.
반대로, 올해의 다저스처럼 팀의 전력이 탄탄한 경우, 연패 중이라도 에이스만 바라보며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다.
[LAD 5 : 1 CHC]
[5선발 에드윈 니콜슨, 6이닝 9K 무실점 호투로 연패 탈출 견인!]
[파드리스의 50위 밖 유망주, 다저스에서 빅리그 선발로 우뚝 서다! 이것이 ‘육성 명가’ 다저스의 힘?]
에드윈이 마운드에 오르자, 리글리 필드는 어디 연패 중에 루키를 올리냐는 컵스 팬들의 야유와 비웃음으로 가득했지만.
마운드가 교체될 때쯤 비난의 대상은 컵스 타자들로 바뀌었다.
“이 X발놈들아!!! 이제 막 콜업된 새끼 공도 못 치면 어떡해!!!”
“저 대놓고 떨어지는 공에 방망이는 대체 왜 내는 거야?!”
대부분 루키들이 그렇듯, 퐁당퐁당 투구를 이어가고 있는 에드윈이었는데. 오늘은 제대로 퐁이었다.
원래 다들 이러면서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하는 거지. 제리도 그렇고, 아드리안도 그렇고.
‘아무래도 커브가 잘 먹히는가에 따라 결과가 바뀌는 것 같아.’
오늘은 컵스 타자들이 떨어지는 커브에 잘 속아 넘어갔는데, 경기가 항상 그렇게 잘 풀리지는 않으니까.
결정구에 너무 의존하다 보면 오히려 꼭 던져야 할 때 실투가 나오는 경우도 많고.
결국 경험이 쌓이면 개선되는 문제니까, 일단은 지켜보기만 하면 되겠지.
1승 1패로 시리즈의 균형을 맞춘 채 맞이하게 된 3차전.
에이스끼리의 맞대결이라는 군침 도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다른 데 쏠렸다.
[Koo, 56경기 연속 안타로 2위와 타이 기록! 영원히 깨지지 않을 줄 알았던 조 디마지오의 기록에 접근한 두 번째 선수가 되다!]
오늘 타석에서의 내 활약은 2루타 하나가 전부였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 난리가 났겠지. 내일 안타를 치느냐에 따라 메이저리그의 연속 경기 안타 부문 1위와 2위의 주인공이 전부 한국인 차지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나현 언니 오늘 학교 나왔어.]
“그래? 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뭐 직장 다니는 임산부들도 많으니까. 너무 과격한 움직임이나 먹는 거만 좀 주의하면 괜찮대.]
잠들기 전 숙소에서 통화하는 시간.
도아는 오늘따라 유독 인터넷 반응이 어땠느니 하는 화제를 피하는 것 같았다.
평소엔 내가 안 물어봐도 먼저 이것저것 체크해서 알려주는 주제에, 국뽕 기사 같은 거 있으면 깔깔대며 놀려먹기도 하고.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래도 마음 씀씀이 자체가 기쁘다.
야구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제풀에 놀라 얼른 화제를 바꾸는 게 귀엽기도 하고.
[제리 선수가 갑자기 용돈 보내주겠다고 해서 말리느라 혼났다니까. 자기 원정 가 있는 동안 클라라 좀 잘 부탁하겠다고.]
“기왕 준다는 거 그냥 받지 그랬어?”
[그래도 그건 좀······. 언니가 나 학교 적응하는 데 도움 많이 주기도 했고. 이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 도와줘야지.]
이번 봄학기까지만 다니고 휴학하기로 했다는데, 제리 입장에선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나 보다.
저렇게 죽고 못 사는 거 보면, 이나현이 지레 겁먹었던 게 이해가 잘 안 가기도 하고.
“역시 아무리 서로 잘 맞아도 만난 시간이 짧으면 불안한 걸까?”
사실 그건 제리 쪽도 마찬가지인데 말이야.
이나현과 연락하는 제리를 분리불안 걸린 강아지에 비교한 헨리에 말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로.
[아마 아닐걸?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 지내왔어도 불안한 건 똑같으니······ 까.]
말을 끝내기 직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깨달은 듯. 도아가 말끝을 흐린다.
“도아야. 그럼 너 대체 언제부터 나한테······.”
[나중에 보자.]
“여보세요. 도아야? 도아야!”
애타게 불러봤자, 전화 너머의 도아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사귀는 사이가 되고부터는 한동안 안 그러더니,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옛 버릇이 도진 건가.
아니면 지금쯤 발로 이불을 뻥뻥 걷어차고 있을까.
[표정 개극혐이다 진짜.]
그 와중에 질색하는 박도현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준 후,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설마 나도 제리랑 똑같은 인간이었던 걸까.
다시 전화해서 지금 당장 만나고 싶다고 하면 혼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