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64화 (164/200)

< 164. 마음을 담아(3) >

2037시즌, LA 다저스의 제리 헤이즈택과 시카고 컵스의 A.D. 존슨은 역대급 MVP 레이스를 선보였다.

특히나 이 두 명의 투수가 선발 맞대결을 펼쳤던 경기는 시청자 투표를 통해 2037 최고의 명경기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럴 만하지. 한 명은 퍼펙트, 다른 한 명은 노히터를 이어간 끝에 9회 말 끝내기 장타로 승패가 갈렸던 역대급 투수전이었으니.

[내일 경기 누가 이길 것 같냐? 제리가 또 두드려 팰까? 아니면 A.D.가 드디어 복수할 수 있을까?]

아무리 내 연속 안타 기록에 이목이 몰렸다고는 해도, 몇 개월 만에 다시 성사된 두 에이스의 맞대결에도 적지 않은 관심이 쏠렸고.

자연스레 야구팬들은 편을 갈라 개같이 싸워대기 시작했다.

[아니 그렇게 처발려 놓고 다시 배팅하는 놈들은 대체 어떤 심리야? 이번엔 다르다 뭐 이런 거야?]

└ 처발리긴 무슨. 8이닝 동안 1피안타 1볼넷이 처발린 거야?

└ 그치. 그러고 보니 그 안타 Koo가 쳤었지? 작년에 리글리 필드에서 느그 에이스 퍼펙트 개박살낸 것도 Koo였고!

└ 그때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 좋아. 특별히 너네 에이스도 우리 에이스랑 동급으로 인정해줄게. 근데 혹시 너네 팀에 Koo는 없니? 우린 있는데.

└ X 같은 퍼랭이 놈들.

이런 식으로 논리고 나발이고 개나 줘버린 채 서로 속이나 긁어대는 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에는 나름 진지한 분석을 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작년에는 여러 차례 나왔던 완투 경기가 사라지고, 결정구 투심의 위력도 살짝 떨어진 듯 시즌 ERA 2.78로 평범한(?) 에이스가 된 A.D. 존슨.

시즌 초반까지만 해도 작년의 언터쳐블한 활약을 이어가는 듯했지만, 바로 직전에 등판한 경기에서 3.2이닝 4실점으로 제대로 꼬라박은 제리 헤이즈택.

둘의 현재 상황이 이렇다 보니, 쉽게 승패를 예측하지 못하고 박빙으로 흘러갈 거란 예측이 대부분이었지만.

“다들 컨디션은 좀 어떱니까? 역사에 남을 경기를 완성할 준비는 끝냈나요?”

그거야 외부에서 보기에 그렇다는 거고.

팀에서는 이미 제리가 정상 컨디션을 완전히 되찾았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역사? 역사 좋아하네. 역사책으로 처맞아야 정신 차리지.”

“쟤가 지난 경기 말아먹은 게 여자친구 때문이라는 거 아직도 소문 안 났더라.”

“난 아는 기자한테 이미 얘기했는데?”

“나도.”

“설마 사람새끼라면 진짜 그러겠나 싶어서 아무도 안 믿었던 거 아냐?”

물론 그만큼 동료들도 안심하고 평소처럼 제리를 갈궈댈 수 있었다.

심지어 오늘은 등판하는 날인데도.

“아주 좋습니다. 원래 역사를 바꾼 사람들에겐 모진 핍박이 따라오기 마련이죠.”

평소라면 진작에 울먹이며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겠지만, 오늘따라 아무런 타격이 없어 보이는 제리.

전날 온종일 전화기 붙잡고 살더니 자신감이라도 충전하고 왔나.

[쟤 저대로 경기 내보내도 괜찮을까?]

‘냅둬. 안타 하나 맞고 나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어차피 지난번에 난타당했다가 곧바로 다음 경기에서 컨디션을 끌어올리기도 어렵기도 할 테고.

그렇게 별생각 없이 넘기며 그 자리를 벗어났지만.

야구장에서는 이따금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이때는 잠시 잊고 있었다.

* * *

1회 초 다저스의 공격.

대기 타석으로 나가자마자 지난 이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한 환영 인사가 쏟아졌다.

“이게 누구야?! X 같은 얌생이 새끼 아냐!!”

“잠자리가 뒤숭숭하진 않았냐?! 오늘이 네놈 기록 끊어지는 날인데!”

“영광인 줄 알아라!! 우리 에이스가 친히 나서서 그 개똥 같은 자부심을 꺾어줄 거니까!!”

차마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더니, 관중석에서도 덩달아 신바람을 낸다.

아니 웃기잖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나한테 물을 먹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기세등등하다는 게.

아예 오늘 트릴로지를 완성해야 좀 조용해질까 모르겠네.

‘집중. 집중.’

이미 공략해본 적도 있고, 또 작년보다는 포스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한 팀의 에이스는 고스톱 쳐서 따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따악!

“아웃!”

게다가 딱히 컨디션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투 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던 리드오프 조지가 결국 투심을 건드렸다가 땅볼을 쳐낸 걸 보니.

“투심 어때요?”

“여전히 까다로워. 근데 끝에 가서 좀 밋밋해진다고 해야 하나? 좀만 더 보면 감이 잡힐 것 같은데.”

반가운 소식과 함께 타석으로 들어가, 투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더니. 역시나 절대로 눈을 피하진 않는다.

사실 지금도 그렇고. 영상으로 확인한 지난 경기에서의 모습도 그렇고. 겉으로는 여전히 투지를 불태우면서도 성적이 따라주지 않는 A.D. 존슨을 보며, 다들 나이는 속일 수 없다며 씁쓸해하던데.

‘근데 내가 보기엔 현자타임이 와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단 말이야.’

[현자타임?]

작년에야 토미 존 받고 재활도 잘 끝나서 통증도 없어졌겠다, 그야말로 펄펄 날아다녔는데.

그렇게 역대급 페이스로 시즌을 질주했는데도, 노히터며 퍼펙트며 죄다 9회에 무산된데다 타이틀도 죄다 제리한테 뺏겼지.

‘그러고 나니까 현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한 시즌은 어떻게 버텼는데, 계속 그렇게 긴 이닝을 소화하며 위력적인 공을 던졌다가는 남은 계약 기간 동안 꼼짝없이 먹튀로 전락하겠다 싶었을 거다.

“스트라이크!”

물론, 기본적으로 클래스라는 게 어딜 가지는 않으니. 지금처럼 존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공도 던질 수 있는 거지만.

따아아아아악―!

템포를 조절하는 건 좋은데, 그것도 타자가 누구인지를 봐 가면서 해야지.

조지의 말대로, 작년보다 살짝 체감될 정도로 밋밋하게 들어온 투심을 공략해 여유롭게 2루를 밟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경기장 곳곳의 전광판에 기념 문구가 떠올랐다.

[Koo, 57경기 연속 안타로 역대 2위 등극!]

홈팬들도 내심 기록이 끊기기를 바라는 마음과 대기록에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는지, 타석에 들어갈 때랑 비교하면 한결 온순해진 야유가 쏟아진다.

“Booooooo!!!”

“운 좋은 줄 알아라!!! 우리 Ace&Dominant가 살짝 영점 흔들렸을 뿐이니까!!!”

“안타 좀 쳤다고 너네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너네 에이스 지난 경기 말아먹었다며?!”

애초에 비교 대상이 컵스 팬들이라 딱히 의미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오, 귀 따가워. 지금 1회 맞지?]

이제 나보다 꾸준히 안타를 때려낸 선수는, 지금 내 옆에서 입술을 삐쭉 내민 채 귀를 후벼대는 이 자식밖에 없다.

근데 이 정도가 시끄러우면 어쩌려고 그러냐. 극성 컵스팬들의 본거지에 와 놓고서.

따아아악―!

“야!!! Koo!!! 눈치 없는 새끼가 그걸 또 홈까지 파고드네!!”

“지금 좋아해 둬라, 퍼랭이 놈들아!!! 이따 느그 에이스 처맞고 우는 거 보게 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상냥함의 유효기간은 딱 전광판의 기념 문구가 사라질 때까지였던 듯, 2사에서 터진 R.H.의 중전 안타에 홈을 밟자마자 관중석에서 곧바로 악다구니가 터져 나왔다.

“나이스, Koo! 판단 좋았다!”

“수비할 때 집중만 제대로 유지해! 우리도 오늘 에이스 나온다!”

후속타 불발로 1점에 그쳤지만, 어쨌든 선취점은 가져왔다. 그것도 상대 에이스를 상대로.

오늘 같은 경기에서는 특히 큰 점수가 될 수 있다.

마운드의 주인은 제리로 바뀌었다. 역사를 바꾸겠다느니 어쩌니 설레발을 친 만큼, 컨디션은 그런대로 좋아 보인다.

아까 홈팬들 야유 속에 섞여 있던 소리도 그렇고, 눈을 흉흉하게 뜨며 타석으로 다가오는 타자도 그렇고. 다들 제리의 지난 경기에서의 부진이 최대한 뒤끝이 길기를 바라는 것 같던데.

부우웅!

“스윙! 스트라이크!”

제리가 초구로 던진 무릎 높이의 커터는, 힘차게 배트를 돌린 리드오프의 기대를 꺾어버렸다.

[쟤 지금 속으로 식빵 구웠을 듯.]

‘오늘은 1번부터 9번까지 식빵 공장 풀가동 각이야.’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타자들은 공 하나만 보고도 오늘 경기가 대충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하기도 한다.

오늘 투수가 미쳐 날뛸 것 같다든지, 힘은 좋은데 볼이 좀 정직해서 차분히 노리다 보면 기회가 올 것 같다든지, 코인 이벤트 끝나기 전에 스탯 세탁해야 하는 날이라든지, 뭐 이런 식으로.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야.

‘나도 언제부턴가 그런 게 보이기 시작했거든.’

투수로 뛸 때도 물론 비슷한 직감은 느끼긴 했지.

이 타자가 어느 코스를 노리고 있구나, 뭐 이런 논리적으로 설명은 못 하겠지만 대충 느낌은 오는 것들.

타자도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 나서부터는 타석에 들어설 때 부담이 확실히 줄어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꾸준히 안타를 쳐낼 수 있는 건가?’

아무튼, 컵스의 리드오프가 만약 나와 비슷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면, 지금 대기 타석에 들어가 있는 다음 타자와 덕아웃의 동료들에게 이렇게 전달하지 않을까.

“스트라이크 아웃!!”

우리 오늘 조진 것 같은데, 라고.

* * *

제리와 A.D.의 선발 맞대결이 확정됐을 때 야구팬들이 기대한 경기가 어떤 걸까 잠깐 생각해본 적이 있다.

아마 경기 후반부까지 0대 0, 혹은 1대 1 정도로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다가 집중력을 더 오래 유지한 팀이 승리를 가져오는, 선수들로서는 투타 모두 진이 쫙 빠지는 명품 투수전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컵스의 에이스 A.D. 존슨은 1회부터 실점을 허용하면서, 그런 기대를 저버리는가 했지만.

고작 1점 내준 걸로 흔들리는 투수를 에이스로 둔 팀이라면, 애초에 지구 1위를 달리고 있지도 못했을 거다.

따악―!

“아웃!”

“Hell Yeahhhh!!! 이게 A.D.지!!!”

“Koo!! 그럴 거면 그냥 교체해달라고 조르지 그래!! 어차피 안타도 쳤잖아!!”

1회 이후로는 주자를 내보내더라도 홈으로 들여보내지는 않으며, 추가 득점 기회를 번번이 놓치는 다저스였지만.

선수들은 고작 점수 한두 점 더 못 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5회 말 수비에 들어가는 지금, 제리는 아예 단 한 명의 주자조차 내보내지 않았으니까.

따악―!

앞선 두 타자가 삼진으로 물러난 뒤, 초구를 건드린 컵스의 6번 타자가 힘없는 땅볼을 때려냈고.

타구를 마중 나가 처리한 뒤, 1루수 랜디가 받기 쉽도록 깔끔하게 송구하면서 그대로 이닝 종료.

여전히 안타와 사사구를 허용하지 않은 채로 경기의 반환점을 돌았다.

“······.”

“······.”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덕아웃.

누가 보면 퍼펙트로 묶이고 있는 팀인 줄 알겠지만, 다저스 덕아웃이 맞다.

원래 대기록을 완성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은 힘이 좀 빠진 상태에서 타자들과 세 번째로 마주치는 7회쯤 찾아온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오늘 경기가 좀 특수하지.

이미 한 번 대기록을 달성한 적 있는 투수인데다. 상대 팀도, 심지어 상대 선발 투수마저도 똑같으니.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파장은 어마어마할 거다.

A.D. 존슨과의 맞대결에서 세 경기 연속 물을 먹이는 건 덤이고.

“Koo. 아이가 생기면 네가 대부가 되어주겠다는 약속, 혹시 기억해?”

그 와중에 정작 제리 본인은 옆에 다가오더니 귓속말로 이런 태평한 소리나 하고 앉았고.

숨길 생각은 있나 모르겠네. 사람들 시선 다 지한테 집중되는 거 알기나 하나.

“어디 기분 나쁘게 귓속말하고 지랄이야. 안 꺼져?”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안타 하나 맞으면 정상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설마 안타를 하나도 안 맞을 줄이야.

[쟤 이러다가 진짜 성공해버리면 퍼펙트게임을 두 번 한 최초의 투수가 되는 건가?]

만약 그렇게만 되면, 다저스는 완전 잭팟을 터뜨린 거나 마찬가지지.

퍼펙트 두 번이면 써먹을 수 있는 마케팅 효과가 얼만데. 8년 2억 5천만 달러면 완전 혜자잖아.

퍼펙트 기념 이벤트도 두 번, 유니폼도 두 벌, 기념구도 두 개······.

‘어?’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른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이나현의 부모님을 찾아뵐 때 퍼펙트게임 기념구라도 가져가 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꾸했을 때, 제리가 지 혼자 뭐라 중얼거렸던 게 떠오른다.

이 새끼 설마······?

혹시나 싶어 제리의 얼굴을 쳐다보니,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밖에 없는 기념구를 주기 싫다면, 하나 더 만들면 될 것 아닌가?’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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