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65화 (165/200)

< 165. 마음을 담아(4) >

반환점을 돌아간 경기가 후반부를 바라볼 때쯤.

다저스를 향해 그토록 악다구니를 쏟아내던 극성 컵스 팬들도 기운을 잃고 조용해졌다.

[LAD 2 : 0 CHC]

그들이 자랑하는 에이스는 이미 하위타선에서 불의의 솔로포를 얻어맞으며, 7이닝 2실점의 성적표를 남기고 마운드에서 내려왔고.

작년에 컵스에게 퍼펙트라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긴 상대 에이스는, 그들의 홈구장에서 다시 한번 그 악몽을 펼쳐내고 있었다.

“하······.”

“X발, X발······.”

이따금 탄식에 가까운 쌍욕만이 터져 나올 뿐, 응원의 목소리는 사라진 관중석.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은 건지, 아무리 증오스러운 놈이라고는 해도 한 투수가 두 번의 퍼펙트를 달성하는 장면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건지.

혹은 좀 현실적인 이유로 어차피 낮 경기라 끝나도 시간이 남으니 보던 경기는 마저 보고 가려던 건지, 그 속뜻은 본인들만 알겠지만.

어쨌든 괴로워하면서도 절대로 경기장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는 않는 관중들 사이에서, 한 컵스 팬이 중얼거렸다.

“대체 우리 팀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언젠가부터 조용해지기만 한 홈팀 덕아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하지만.

시카고 컵스의 코칭스태프들은 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손 놓고 멍 때리고만 있지는 않았다.

“커터 구사율이 줄었습니다. 앞선 이닝에서 집중력 소모가 상당했다는 뜻이니 투 볼까지만 골라내면 실투가 나올 확률이······.”

“타선이 한 바퀴 돌고 나서부터는 초구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좌타자 몸쪽으로 들어오는 공은 일단 손을 대보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실시간으로 수집되는 피칭 데이터와 타자들로부터의 체험담을 모아, 어떻게든 공략법을 만들어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노력이 과연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정작 타석에서 그 투수를 상대해야 할 타자들이, 귀담아들을 생각도 안 한 채 귀신에 홀린 듯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으니까.

‘개판이네.’

컵스의 에이스이자 캡틴, A.D. 존슨은 속으로 혀를 찼다.

성질대로라면 누구 죽었냐는 말부터 시작해 온갖 험한 말이 튀어나와도 모자라지만,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자신이 등판하는 날에는 다른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지적하지 않는 것은 그의 오랜 원칙이었다.

등 뒤를 지켜주는 야수들을 그 나름대로 존중하는 방식이었으니까.

그러나, 속이 헛헛해지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내가 전생에 다저스 선수들한테 똥물이라도 뿌렸나?’

잘 던지고도 타선이 응답하지 않아 패전투수가 되는 건 이미 익숙하지만, 이건 좀 경우가 다르다.

에이스끼리의 맞대결에서 두 번 연속 퍼펙트 허용이라니.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서 잠깐이나마 눈을 돌려보고자 원정 덕아웃 쪽으로 시선을 돌린 A.D.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퍼펙트를 기록 중인 투수가, 도망치는 타자들을 자꾸 쫓아다니며 뭐라 쫑알거리고 있었으니까.

“메이저리그의 역사가 바뀌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해? 30분? 45분?”

기껏해야 추가 득점이나 수비에서의 집중력을 요구하고 있을 거란 A.D.의 예상은 틀렸다.

적어도 이런 뻘소리나 하고 있었을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너는 진짜······ 빌어먹을. 내가 미안해. 앞으로는 적당히 놀릴 테니까 그만 좀 따라와.”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리. 돈 빌린 적은 없지만 돌려드릴게요. 이자도 쳐 드릴게요.”

투수가 오히려 퍼펙트를 언급하며 타자들에게 압박을 주는 괴상망측한 상황.

그러나 다저스 코칭스태프들은 제리의 기행을 내버려 두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 경기에서 자신들이 할 역할은 딱히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미 점수도 났고, 투수가 저렇게 던지는데 우리가 뭘 더 해?’

물론 그들이라고 해서 고민할 일이 하나도 없었겠는가.

7회에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경기를 걸어 잠가야 할 타이밍이 되자, 1루수 랜디를 클레망으로 교체했다. 지금 필요한 건 타격보다는 안정적인 수비였으니까.

채드윅 마틴이 나가 있는 중견수를 두고 교체 카드를 만지작거리다, 결국 내려놓았다. 누구를 넣더라도 수비에서 드라마틱한 차이는 없을 것이고, 채드윅은 좀 전에 A.D.를 상대로 솔로포를 뽑아냈다. 타석에서의 활약이 수비에서 미치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강하다는 걸 오브라이언 감독은 알고 있었다.

‘하여간 저 새가슴들. 왜 저렇게 떨지? 나한텐 아직 한 경기 더 기회가 남아 있는데.’

타자들을 마음껏 놀려먹고 자리에 돌아가 앉은 제리 헤이즈택은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며 히죽거렸다.

이나현의 어머니와는 몇 번 만나 뵙고 인사도 드렸지만, 아버지와는 사정상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께 처음 인사를 드리고 임신 소식을 전하기로 한 날은, 이번 원정 9연전을 마치고 나면 주어질 휴식일.

만약 이번에 퍼펙트게임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밀워키에서 다시 한번 시도해볼 수 있다.

만약 제리의 계획(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을 다른 선수들, 특히 구현기처럼 현실적인 성격의 선수가 듣는다면, 퍼펙트게임이 무슨 동네 뒷산 등정인 줄 아느냐며 황당해하겠지만.

생애 첫 여자친구와 가정을 이룬다는 행복에 도취된 나머지 머릿속에서 이성을 담당하는 부분이 맛이 가 버린 제리는, 아마 딱히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8회 말.

마운드에 올라간 제리가 선두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자, 하얗게 질린 타자의 얼굴이 중계 카메라를 타고 전국으로 퍼졌고.

LA 근교의 한 가정집에서는 중년 남녀가 그 장면을 보며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렇지! 앞으로 다섯 명! 다섯 명만 더!!!”

집값이 미쳐 날뛰는 LA에서 자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중년 부부에게는, 단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었다.

바로 지금 막 이닝의 두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저 투수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자취를 시작한 외동딸의 남자친구라는 것.

“우리 에이스가 진짜 나현이 남자친구가 맞는 거지? 내가 지금 실감이 안 나서 그래.”

“당신도 참. 영상통화로 직접 인사도 해놓고서.”

제리 헤이즈택과 이나현이 남녀 교제를 시작한 것은 작년 말부터였지만, 얼마 전까지 일 때문에 한국에 있다 돌아온 이나현의 아버지는 아직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다.

“에이스가 아니라 에이스 할아버지가 와도 딸내미는 못 준다던 양반 어디 가셨나?”

“그, 그거야 그냥 해본 소리······ 어어어! 쳤다! 쳤······ 나이스! 나이스!”

유격수 구현기가 컵스 6번 타자의 안타성 타구를 정신 나간 호수비로 처리해내자, 이나현의 아버지의 입에서 고함에 가까운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이웃들에게 미안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근처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니까, 제리 선수 만날 때 괜히 기선 제압하겠다고 그러지 말고 잘 좀 대해줘요. 둘만 예쁘게 만나면 되지.”

“크흠, 내가 또 언제······.”

황홀한 여운을 깨트리는 아내의 핀잔에, 이나현의 아버지는 헛기침을 했다.

딸내미를 남자친구에게 넘겨주는 건 모든 아버지들이 힘겨워하는 일이지만.

어쩌면 그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팀의 에이스라는 게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아기 가졌다면서 뻔뻔스럽게 찾아오는 것만 아니라면야, 쌍수 들고 대환영이지.”

거실 한구석에 걸려 있는 더블배럴 샷건에 눈길을 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9회 초 공격은 순식간에 끝났지만, 원정팬들 중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홈팬들 역시 딱히 한 이닝을 잘 막아낸 선수들을 향해 칭찬을 보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쌍욕을 참아내고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게 아닐까 싶긴 하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지금 제리가 던지는 공의 위력이 경기 초반과 비교해서 어떤지 육안으로는 당연히 알 수 없고, 전광판에 대충 나오기야 하겠지만 그걸 볼 여유는 없는데.

지금 막 허망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7번 타자를 보면, 딱히 위력이 떨어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대체 저번이랑은 뭐가 달라진 거지?]

박도현이 말하는 저번이라는 건 작년에 기록했던 퍼펙트를 말하는 거겠지.

야수 입장에서 확실하게 다가오는 변화는, 완벽한 경기와 그렇지 않은 경기를 나누는 결정적인 수비가 확실하게 줄어들었다는 것.

까다로웠던 타구는 8회 말 수비에서 내가 몸을 날려 처리한 안타성 땅볼 하나뿐이다.

‘첫 퍼펙트게임이 너무 가혹하긴 했어.’

남들은 평생 한 번 해보기도 힘든 퍼펙트에 ‘첫’이라는 표현이 붙는 게 어색하긴 한데, 어쨌든 사실이니까.

그놈의 1점을 못 내서 9회까지 퍼펙트로 던지고도 연장 갈 뻔했으니.

남은 아웃카운트는 둘.

대타로 나온 타자에게도 초구 스트라이크를 꽂아 넣으며 넘치는 힘을 과시한 제리였지만.

따아아악!

타자의 배트 컨트롤이 좋았는지, 살짝 빗맞은 타구가 내야를 훌쩍 넘기고 말았다.

배트에 맞자마자 리글리 필드의 관중석 여기저기서 기대감 어린 탄성이 쏟아졌을 정도로 절묘한 코스.

촤아아악!

그러나, 잠깐의 희망은 그저 희망고문에 불과했다.

마이너 시절에만 잠깐 외야를 봤다던 채드윅이, 정상 수비 위치에서 죽어라 달린 끝에 슬라이딩 캐치를 시도해 기어이 성공했으니까.

“Boooooooooo!!!”

이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었다는 잠깐의 희망 때문일까. 죄다 힘이 빠진 줄로만 알았던 컵스 팬들이 오늘 경기를 통틀어 가장 강렬하게 분노를 표출한다.

심지어 니가 그걸 왜 잡냐는, 야구의 상식을 부정하는 불합리한 비난마저 쏟아졌지만, 채드윅은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허억, 허억, 허억······.”

올 시즌 들어 백업 유격수 겸 2루수에 더해 중견수까지 소화 가능한 포지션을 늘리며 기회를 많이 얻는 채드윅이지만, 아마 이런 경기에서 자신이 선발 중견수로 출전할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거다.

퍼펙트가 깨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몸을 던질 거라고는 더더욱.

“굿 잡, 채드윅.”

정작 그 기로에 발을 걸치고 온 제리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글러브 박수 몇 번 치고는 다시 돌아섰다.

만약 중계 카메라가 제리와 채드윅의 얼굴을 화면분할로 클로즈업했다면, 채드윅이 투수고 제리가 타구를 받아낸 베테랑 외야수인 줄 착각하는 사람이 나왔을 거다.

미칠 듯한 호수비로 퍼펙트를 지켜내는 야수는 드물긴 하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까딱하면 퍼펙트가 깨질 위기를 맞았는데도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는 투수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다.

틱!

대타로 나온 9번 타자가 초구에 맥없이 배트를 휘두르고 만 것도, 그런 제리를 보며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공포를 느껴서가 아니었을까.

내야 한가운데로 높이 떠오른 타구에, 결과를 짐작한 홈팬들의 한숨이 쏟아진다.

마운드로 다가가는 야수들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제리가 허공을 향해 글러브를 벌렸고.

“아웃!!!”

9이닝 108구 11K 무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

제리 헤이즈택의 생애 두 번째 퍼펙트게임.

승부가 9회 말에야 나는 바람에 스포트라이트를 온전히 받지 못했던 예전과는 달리, 경기장의 거의 모든 카메라가 오직 한 명의 선수만을 비추고 있었다.

* * *

“제리, 저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인터뷰할 수 있는 영광을 준 신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사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예상이 뻔히 되지만, 당신은 누구한테 감사를 전하고 싶은지 알려줄 수 있나요?”

“클라라, 보고 있나요? 내가 해냈어요.”

“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제가 당신을 MVP 인터뷰에서 마주칠 때마다 다른 답을 내놓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이제 야구 이야기로 넘어가 보죠.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두 번의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투수가 된 소감을 말해주시겠어요?”

“클라라, 이제는 이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어요. 두 번의 퍼펙트게임을 포함해서 말이죠.”

“저기, 제리? 지금 제가 아니라 당신의 애인을 향해 대답하는 것 같은데, 다음 질문엔 저에게 대답해주길 바랄게요. 오늘 최고의 위기라고 한다면 역시 9회 말 중견수 채드윅의 호수비로 아웃카운트를 지워낸 장면인데······.”

“조금 늦었지만, 이 자리를 빌어 꼭 말해주고 싶어요. 나와 가족이 되어줄래요?”

“어, 저기, 제리? 이거 혹시 애인분을 향한 프러포즈인가요? 그럼 당신의 클라라가 이곳 리글리 필드에······.”

“클라라는 LA에 있습니다.”

“아, 처음으로 제 질문에 답해주셨군요. 고마워요. 근데 저기, 당신 말대로라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애인에게 원격으로 프러포즈를 신청한 게 되는데요.”

“이상한가요?”

“어떤 대답이 적절할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리포터 경력을 통틀어 이런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두 번의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투수를 인터뷰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지만요.”

“그렇군요. 아까 하던 말 계속해도 될까요?”

“어, 음······. 거기, Koo! 랜디! 지금 도망가는 거예요? 부탁이니까 이리 와요! 와서 그 통 속의 음료수 좀 나한테 쏟아주세요! 가능하면 카메라에도 좀 뿌려주시고요! 최대한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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