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우리 캡틴이 달라졌어요(1) >
대기록이 진행 중일 때, 팀의 사기가 올라가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고. 굳이 따지자면 떨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자신의 플레이 하나에 이 기록이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공포를 이겨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 이해는 되는데.
또 신기하게도, 특정 시점을 지나고 나면 더는 걱정 안 해도 되겠다는, 성공이 눈앞에 다가온 듯하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해질 때가 있다.
나도 선배들한테 그런 게 있다고 말로만 들었을 뿐, 정확히 무슨 소린지는 알 길이 없었는데. 직접 겪어보니 바로 알겠더라.
제리가 두 번째 퍼펙트게임을 달성하던 날,
좀 늦은 타이밍이긴 한데, 9회 말 채드윅의 호수비로 안타가 뜬공으로 뒤바뀌는 걸 보고도 제리가 웃었을 때, 얘가 결국은 해내겠구나 싶었거든.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제 내가 진행 중인 연속 안타 기록도 똑같이 궤도에 올라온 게 아닐까 싶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이제 팬들이나 선수들이나 내가 안타 치는 걸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지금까지 60경기 넘게 쳤는데, 설마 내일은 못 치겠어? 뭐 이런 거지.
물론 이런 강한 믿음이 주어졌을 때 그 기대를 저버린다면 그만큼 후폭풍도 거세겠지만, 당장은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어 보인다.
중부 원정 시리즈의 남은 6경기에서 나는 매 경기 안타를 쳐냈고, 홈런 3개를 추가했으며, 심지어 구원승도 하나 올렸다.
퍼펙트게임이라는 부스터샷을 맞고 위닝 멘탈리티가 하늘을 찌른 다저스는 추가로 5승 1패를 기록하며, 원정 9연전이라는 지옥의 스케줄에서 7승 2패를 거뒀고.
심지어 제리도 대기록을 세우고 난 다음 경기는 말아먹는다는 유구한 징크스를 개박살내며, 브루어스전에서 6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기도 했으니.
“나현 언니는 요즘 입덧 시작하는 모양이더라.”
“아이고, 고생하겠네.”
“계획에는 없었어도, 둘이 이야기가 잘 돼서 다행이야. 그래도 난 준비가 되고 나서 하고 싶지만.”
“그래야지. 안 그래도 슬슬 더 주문할 때가 되긴 했어.”
“주문? 갑자기 뭘, 아······. 크흠. 한 박스 정도 사놔. 넉넉하게.”
“한 박스? 이번 주만 쓰고 말 거야?”
“아 뭐래 진짜······.”
고된 원정 경기를 마치고 찾아온 휴식일.
내가 박도현을 하루종일 운동방에 처박히게 만들고, 도아한테 그동안 쌓아둔 애정을 마음껏 발산하는 동안.
제리는 그동안 잠시 한국에 머무시느라 인사드린 적이 없다는 이나현의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고 한다.
‘저, 약소하지만 이걸 준비했습니다.’
그놈의 두 번째 퍼펙트게임 기념구를 정말로 들고서.
‘진품인가?’
‘예, 물론입니다. 경기 마치자마자 서명도 했고요. 여기 보시면 ‘클라라 나현 리와 그 가족들을 위해’라고······.’
‘그럼 그걸 이 자리에 가져오면 어떡하나, 이 사람아. 귀중히 보관해야 할 물건을.’
솔직히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긴 했는데.
야구팬치고는 상당히 상식적인 사람이라, 아쉽게도 별 리액션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의 반응이 좀 탐탁지 않았던 건, 자기 딸의 임신 소식을 대충 짐작하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퍼펙트게임 달성 후 MVP 인터뷰에서 질문을 개무시해가며 어설픈 프러포즈를 이어가는 걸 보며, 뭔가 있구나 싶어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하니.
‘우리 집에 방문하는 대신 따로 식당을 예약한 건 자네 생각이었나?’
‘아, 아뇨. 친구가 제안했습니다.’
‘그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게 좋을 거야. 내 취미가 사냥이라 거실에 더블배럴 샷건을 걸어놨거든.’
어째 갑자기 스테이크를 사 준다 했다.
뭘 그렇게 쫄았대. 이쪽 동네에서 흔히 하는 농담이라는 거 본인이 더 잘 알면서.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는 많이 빠르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해.”
아무튼, 대학 졸업도 전에 아이부터 가진 것에 대해 석고대죄를 하고, 본인이 책임지겠노라 읍소한 끝에 결혼 허락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미 장기계약까지 맺은 몸이라 분유버프가 추가로 들어갈지는 모르겠다만.
알아서 잘하겠지.
* * *
달콤한 휴식일 이후에 이어진 홈 8연전.
그중 첫 시리즈는 매년 찾아오는 LA 에인절스와의 인터리그 매치업, 일명 프리웨이 시리즈 2연전이었다.
홈에서 2경기, 원정에서 2경기를 치르는데, 올해는 다저 스타디움에서 먼저 상대를 맞이하게 됐지.
작년에 에인절 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에 원정을 갔을 때, 다저스는 참으로 기묘한 경기를 치렀다.
생일을 맞은 아들을 경기장에 데려온 벤이 머리에 외야수 송구를 맞고 실려 가는가 하면.
선발 투수가 4이닝 7실점을 했는데 자책점은 1점뿐이고, 심지어 노디시전을 기록한 데다.
내가 원정 2연전에서 전 타석 출루했는데, 홈런 두 개에 나머지는 전부 볼넷을 얻어내면서, 슬래시라인 1/1/4라는 어처구니없는 성적을 거뒀으니까.
[올해도 쟤네랑 경기 뛰면서 별 해괴망측한 일 벌어지는 거 아니냐?]
‘만약 그러면 한국에서 무당 불러다가 굿이라도 해야지.’
[Good?]
‘뒤진다 진짜.’
말이 씨가 됐던 걸까.
작년만큼 뭔가에 씌인 것처럼 기묘한 일은 아니었지만, 올해의 프리웨이 시리즈에서도 무언가 일어나기는 했다.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게 하나, 그리고 사고라고 할 만한 게 하나.
미리 말해두자면, 내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이 늘어났다는 건 둘 중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건 이미 다저스 팬들에게는 일상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따아아아아아악―!
[랜디 콘트레라스의 스윙! 투수는 고개를 떨궜고! 외야 관중석 복판에 떨어지는 타구! 오늘 경기에서 멀티 홈런을 때려낸 동시에 커리어 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두 자릿수 홈런 고지에 올라섰습니다!]
먼저 사건이라고 할 만한 건, 랜디가 1차전에서 홈런 두 개를 추가하며 시즌 10호 홈런을 기록한 것.
그전 경기까지 다저스에서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려낸 건 23홈런의 나와 17홈런의 R.H.뿐.
그런데 랜디가 홈런 두 개를 추가하면서 시즌 9홈런을 기록 중이던 클레망을 제치고 다저스 전체 3위로 도약했다.
[인터넷에서 누가 그러더라. 랜디 쟤는 사실상 20홈런으로 쳐줘야 한다고.]
‘본인이 쓴 글 아닐까?’
클레망과 출전 시간을 양분하고 있으니 계산상으로는 그렇게 보이긴 하는데.
애초에 1루 수비가 조금만 더 안정적이었어도 지금보다 훨씬 많은 기회를 받았을 거다.
클레망의 은퇴가 머지않은 지금, 다저스로서도 슬슬 다음 세대 주전 라인업을 가동해야 할 테니.
[LAA 2 : 7 LAD]
어쨌거나, 랜디의 멀티 홈런에 힘입어 1차전은 다저스가 큰 점수 차로 승리를 가져왔지만.
다저스는 2차전 선발 1루수로 전날 승리의 주역이었던 랜디 대신 클레망을 선택했다.
“현재 다저스의 내야진은 주전과 백업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탄탄하다고 생각합니다. 경기마다 필요한 자원이 다르고, 그에 맞게 라인업을 구성했습니다.”
오브라이언 감독님이 어떻게 잘 포장은 했지만, 다저스 팬들 중 지금 같은 선발 라인업에 프런트의 의향이 들어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1루수와 3루수는 앞으로 머지않은 시일 내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져야 하는 포지션.
경험이 많은 선수와 상대적으로 부족한 선수를 엮어서 로테이션을 돌리며, 수비 공백을 최소화하면서도 경험치를 최대한 먹이는 중이니까.
입지가 흔들리게 된 기존 선수로서는 물론 떨떠름한 상황이다.
그나마 아직 30대 초반에 성적도 쏠쏠해서 새로운 팀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켄과는 달리, 은퇴가 머지않은 클레망으로서는 팀의 이런 기조가 더욱 서운할 수도 있고.
이런 전략은 켄과 클레망 모두 얌전한 편이라서 선택할 수 있는 거다.
만약 로테이션을 돌리게 된 두 명의 야수가 자존심 강하고 불같은 성질머리를 가졌다면, 차라리 성적에 따라 계속 주전으로 박아두거나 일찌감치 트레이드로 팔아버리거나 했겠지.
그러나, 2차전에서 벌어진 사고라고 할 만한 일은, 바로 그 클레망이 원인을 제공했다.
* * *
어쩌면 미리 전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경기 초반부터 제구에 애를 먹던 에인절스의 선발이, 볼넷과 안타를 남발한 끝에 만들어낸 2사 만루의 기회.
타율 자체는 2할 7푼대로 작년보다 확연히 떨어졌지만, 부족한 출장 기회 속에서도 9홈런을 기록한 만큼 여전히 위력적인 타자 클레망이 타석에 들어섰고.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안타깝게도 클레망은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헛스윙 삼진으로 득점 없이 이닝 종료.
타격은 원래 10번 중 3번만 성공해도 칭찬받아 마땅한 분야고, 그간 클레망이 팀에 공헌한 게 워낙 많다 보니 홈팬들의 야유도 평소보다는 순한맛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으아아아악!”
콰직!
고함을 내지르며 헬멧을 덕아웃 벤치에 내던지는 클레망.
다른 선수들은 그저 조용히 못 본 척하며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부터 클레망은 타인보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선수다. 게다가 수틀리면 배트로 덕아웃 기물을 두들겨 패는 몇몇 선수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얌전한 편이기도 했고.
“후······ 미안하다. 내가 좀 흥분했어.”
잠깐 화를 낸 다음에는 다른 선수들한테 굳이 안 해도 되는 사과까지 했으니, 뭔가 이상하다는 조짐을 느끼기란 더욱 힘들었지만.
클레망 앞에 두 번째 만루 기회가 찾아왔을 때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아, 에인절스의 투수 코치. 역시나 교체 없이 잠깐 이야기만 나누고 내려옵니다.]
[투구 수 자체는 아직 여유가 있고, 잠깐 제구가 흔들렸을 뿐 흐름이 좋을 때는 잘 던졌으니 괜찮다고 판단했겠죠. 이미 한 차례 만루 위기를 무실점으로 넘기기도 했고요.]
안타, 몸에 맞는 공, 볼넷이 각각 하나씩 나오며 모든 베이스가 채워졌고.
에인절스는 투수 교체 없이 클레망에게 두 번째 만루 기회를 제공했다.
[클레망 개빡쳤겠지?]
‘말해 뭐해.’
3루에 서서 박도현이랑 노가리를 까다 말고 클레망의 얼굴을 살폈는데, 겉으로는 티가 잘 안 났다.
아무리 평소 순둥순둥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얕보는 걸 허허 웃으며 넘어가는 메이저리거는 없다.
그리고 클레망은 분노를 다스려서 힘으로 바꿀 줄 아는 타자이기도 하다.
집중력을 끌어올린 듯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더니, 타자의 눈을 쏘아보며 초구를 맞이한 클레망이었지만―
“힛 바이 피치!! 타자 1루로!!”
Boooooooooo!!!
심판의 선언과 홈팬들의 험악한 야유가 동시에 쏟아진다.
패스트볼이 몸쪽 깊이, 그것도 배트를 쥔 손목 근처로 날아오는 걸 간신히 피하면서 보호대 쪽을 건드리고 지나간 것.
‘이제는 바꾸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밀어내기 득점을 올리기 위해 3루에서 첫발을 떼는 순간.
홈플레이트 쪽에서 커다란 고함이 들려왔다.
“야!!! 공 똑바로 안 던지냐?!”
그러더니 배트를 내던지며 투수를 향해 몇 발짝 옮기는 클레망.
전혀 뜻밖의 반응에 포수는 물론, 심지어 주심마저도 말릴 타이밍을 놓쳤고.
당황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투수 역시 클레망 쪽으로 다가가는 통에, 몇몇 선수들도 마운드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질 듯 말 듯 위태로운 분위기가 드리워지려는 그때.
“클레망! 멈춰! 거기서 더 가면 퇴장이야!”
늦게나마 경고를 보내는 주심의 목소리에, 클레망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제자리에 멈춰 서더니.
“미안. 내가 좀 과민 반응했다.”
짧게 한숨을 쉬고는 투수를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사과를 보냈다.
투수도 어정쩡하게 마주 손을 들어 보인 뒤 그대로 교체되면서, 어색한 대치 상황은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은 채 끝나버렸다.
물론 타자가 공에 맞았다고 투수한테 화내는 게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특히나 에인절스는 다저스와 사이가 안 좋은 편이기도 하고, 같은 이닝에서 이미 한 차례 사구가 나왔으니 더더욱.
그러니 지금 이렇게 다들 귀신에 홀린 듯한 반응을 보이는 건, 화를 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클레망이라서다.
클레망 파로가 사구를 맞았다고 투수한테 화를 낸다?
적어도 내가 빅리그에 콜업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따악!
“아웃!” “아웃!”
아예 참았더라면 분노를 속에 담아두었을 테고, 차라리 벤치 클리어링을 벌이기라도 했으면 시원하게 터뜨리기라도 했을 텐데. 애매하게 화를 내다 만 게 독이 되었던 걸까.
다음 타자 말릭이 병살타를 때리며, 1사 만루에서 다저스가 얻은 점수는 밀어내기로 얻은 1점뿐이었다.
[클레망이 갑자기 왜 저러지?]
수비하러 나가기 전, 걱정스러운 표정의 코칭스태프에게 둘러싸이는 클레망을 보며, 박도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다.’
오늘따라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속에 담아둔 게 드디어 터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클레망 파로가 까칠해졌다.
그것도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