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67화 (167/200)

< 167. 우리 캡틴이 달라졌어요(2) >

[(Live) LAA 4 : 4 LAD ― 10회 말]

○ 2번 타자, 투수, 구현기, 3타수 1안타

└ ?!?! 이거 오류인가? Koo의 포지션이 투수로 나와 있는데?

└ 중계 방금 틀었냐? 오류 아니다. 10회 초에 등판해서 삼자범퇴로 막고 다시 타석 들어온 거야.

└ 지금 보고 왔는데 새뮤얼 9회에 불 질렀네? 아니 잘하던 인간이 갑자기 왜;

└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너무 뭐라 그러지 마라. 지금 6월인데 이번이 고작 블론세이브 두 번째야.

└ 나 자리 비우기 전에 분명 2대 0으로 이기고 있었고 1사 만루 찬스였는데, 지금 스코어 왜 이 모양인지 설명해 줄 사람?

└ 너도 영상 돌려보고 와. 속 터지는 건 각오하고.

└ 지금 선수들 정신 빠진 것 같은데? 필승조 죄다 쓴 것도 모자라 Koo까지 마운드에 올리고도 지면 어떻게 감당하ㄹ

○ 초구 타격, 중월 홈런 (시즌 24호, 비거리 212피트)

└ 경기 종료ㅛㅛㅛㅛ

└ Kooooooooo!!!!

└ 아니 이걸 끝내기로 이기네;

└ 이게 그 독박야구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LAA 4 : 5 LAD]

프리웨이 시리즈 2차전을 지켜본 전문가들은, 승패를 가른 결정적인 요인이 불펜 뎁스라고 분석했다.

양 팀 모두 7―8―9회를 책임질 필승조를 구축해뒀지만, 에인절스가 경기가 연장으로 가면서 클로저에게 멀티 이닝의 중책을 맡겨야만 했던 것과 달리.

다저스는 여차할 때 구현기가 올라가 1이닝까지는 막아줄 수 있었던 것.

한편, 승패 원인을 분석하는 데 딱히 흥미가 없는 일반 야구팬들이 보기에, 에인절스에게 부족했던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느그 팀엔 Koo 없지?]

└ X킹 다저스.

└ Koo 저 새끼는 우리 팀에 무슨 억하심정 같은 거 있나?

└ 너희 팀이 어딘데? 너랑 똑같은 소리 하는 친구들이 워낙 많아서.

└ 졸렬한 LA 원주민 새끼들.

└ 누군가 했더니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친구였구나? 근처 동네에 자이언츠나 파드리스처럼 급 맞는 친구들 많으니까 걔네랑 놀렴 :-)

연장전에서 끝내기 홈런 한 방에 결정이 난 승부.

그것도 1이닝을 철저하게 틀어막은 투수가, 자기 자신을 승리투수로 만들어버린 경기.

[전에도 이런 게임이 있었나?]

└ 있지. 지금까지 총 13번, 그나마 마지막 기록이 1986년인가 그럴걸.

└ 땡큐, 베이스볼 너드. 그럼 선발 야수가 투수로 등판해 1이닝을 막고 끝내기 홈런으로 승리투수가 된 게임은?

└ 있겠냐?

└ 그럼 이제 이런 경기는 Koo Game이라고 부르자! 스코어 8대 7로 끝난 경기는 케네디 스코어라고 부르는 것처럼!

└ ??? 뭔 소리? 8대 7 경기는 루즈벨트 스코어잖아?

└ 안녕, Korean. 안녕, Japanese. 그런 말 쓰는 건 너네들밖에 없지! 내가 모를 줄 알았나?

└ 베이스볼 너드들은 진짜 모르는 게 없구나;

이렇듯.

적지 않은 인구수를 보유한 캘리포니아 및 인근 지역의 눈길을 잡아끄는 프리웨이 시리즈라는 매치업에, 경기 자체도 엄청난 임팩트를 남기면서, Koo Game이라는 신조어가 온라인을 통해 퍼져나가는 데는 하룻밤도 채 걸리지 않았고.

한 경기의 특정 부분에 지나치게 많은 관심이 쏠리면, 뭔가 좀 어색한 부분이 있어도 얼렁뚱땅 넘어가기 마련이다.

[근데 어제 클레망 왜 갑자기 급발진했대?]

└ 어제 뭔 일 있었음??

└ 그 나이대 애들이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

└ 미친놈 아냐 이거

메이저리그를 통틀어 사람 좋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남자, 클레망 파로.

그를 잘 아는 팬이라면, 갑자기 투수를 향해 울분을 터뜨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테고.

얼마 후 벌어질 일들에 대해 조금은 충격을 덜 받았을지도 모른다.

* * *

[클레망 파로, 3경기 연속 무안타! 빈번한 휴식이 오히려 독이 됐나?]

볼넷 하나 없이 깡으로 12타석 무안타.

최근 3경기 동안 클레망이 기록한 성적이었다.

친 다저스 성향의 기자가 그나마 커버를 좀 쳐보겠답시고 휴식이 어쩌고 했지만, 사실은 도저히 써먹을 수가 없으니 강제로 쉬고 있는 것에 가깝다.

[LA 다저스, 홈 8연전에서 연속 위닝 시리즈로 여전히 파죽지세!]

그럼에도 다른 선수들, 특히 날씨가 풀리면서 더욱 단단해진 선발진의 활약으로 팀 성적은 순항을 거듭했기 때문에 팬들이 느끼는 공백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정작 팀 내부, 그중에서도 선수들 입장에서는 적응하기 쉽지 않은 몇몇 변화가 일어났다.

“클레망, 내일 출근 전에 점심 같이 먹을래요? 그때 다같이 갔던 레스토랑에서 이번에 파인애플 양을 3배로 늘린 울트라 하와이안 피자를······. 클레망?”

“······.”

“저기, 클레망? 하와이안 피자 안 먹었던가요?”

“어?! 아냐, 미안. 나도 좋아해. 그래서 언제라고?”

이런 식으로, 누가 봐도 ‘나 생각 많아요’하는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

[그게 왜? 이러는 사람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

박도현 말대로, 사실 이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얼마 안 있어 떠나겠구나 싶은 베테랑 선수들은 가만히 있어도 티가 난다.

오히려 이 정도는 아주 양호한 편이지. 본인이 후배들에게 밀려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괜히 사소한 걸로 트집 잡아 성질부리는 인간들도 있다고 하니까.

“클레망, 요새는 인사도 잘 안 받아주더라. 원래는 오자마자 먼저 반갑게 인사해주던 사람인데······.”

“우리를 향한 사랑이 식은 걸까?”

“어쩌면 최근 몰래 렌즈삽입술이라도 받은 게 아닐까? 그래서 네 면상을 선명하게 보게 된 거지.”

결국 모든 문제는, 이 사람이 클레망 파로라서 생기는 거다.

투수한테 헤드샷을 맞아도 고의만 아니라면 허허 웃으며 넘기는 남자.

성격이 좋다 못해 호구 소리까지 듣는 이 사람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니 다들 적응하기 힘든 게 당연하지.

‘그렇다고 계속 5번에 박아두고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최근 랜디가 늘어난 출장 기회 덕인지, 타격감을 한껏 끌어올리는 와중이라 더더욱 그렇다.

그나마 랜디가 수비에서 고질적인 약점을 보이며 클레망이 정기적으로 출전할 수 있었던 건데.

수비 코치가 이 문제를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 해결해버렸다.

“그냥 가슴팍으로 꽂아줘. 잡기 쉽게.”

“어, 음. 그러니까 지금 하는 말이. 땅볼 잡아내는 것만 해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1루수가 받기 쉽도록 송구까지 신경 쓰라는 거 맞나요?”

“Koo 네 연봉이 얼마더라?”

“까짓거 한번 해보죠.”

1루수의 부족한 포구 능력을, 다른 내야수의 송구 능력으로 커버해버리자는 아주아주 천재적인 발상.

이러라고 내야에 돈을 꼬라박았다면서 당당하게 나오는데 어떡하나. 하라는 대로 해야지.

아무튼, 랜디의 수비에서 느껴지는 허전함이 사라질수록 출전 시간도 그에 비례해서 늘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클레망을 아예 백업으로 돌려버리기도 애매한 것이 지금 다저스가 처한 현실이었다.

이게 뭔 소리냐면.

‘너 클레망 파로가 없는 다저스 타선이 어떨지 상상할 수 있어?’

[음······.]

클레망 파로라는 선수가, 잠깐 부진한다고 해서 출전을 안 시킬 수 있는 선수가 아니란 거다.

뭐 언제든 다시 감을 찾고 부활할 수 있고, 뭐 이런 걸 다 떠나서. 2020년대 후반 암흑기를 버틸 수 있게 해준 선수.

게다가 2010년대에 입단한 선수 중 유일하게 팀에 남아 있는 원클럽맨이기까지 하니 말 다 했지.

팬들의 요구 때문에 경기에 나가고는 있는데.

포지션 경쟁자의 페이스가 너무 좋아서 출전할 때마다 비교가 되는 상황.

[로버트 때랑 비슷한 것 같은데?]

바로 작년 시즌이 개막할 때까지만 해도, 다저스의 에이스가 누구인지 물어보면 다들 로버트 켈리라고 대답했다.

클레망 파로가 없는 야수진이 상상이 잘 안 되는 것처럼, 다저스의 에이스가 아닌 로버트 켈리도 상상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

‘근데 이게 또 사람들이 생각보다 빠르게 잊어버린단 말이야.’

이제 다저스 팬들은 에이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로버트보다 제리의 이름을 먼저 떠올린다.

지난 시즌, 정규시즌 마지막 등판을 마친 로버트에게 뒷방 늙은이는 조용히 있다 반지나 챙겨 가라고 드립을 쳤는데, 그게 농담이 아니게 되어버린 거지.

아무튼.

당장은 별문제 없어 보여도, 클레망이 이렇게 애매하게 나오면 머지않아 팀 분위기가 묘해질 수 있으니.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기 전에 손을 좀 쓰기로 했다.

“집에만 있으려니 심심하죠? 밥 사줄 테니까 나올래요? 저 요새 돈 잘 벌어요.”

[미친 새끼.]

현재 미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백수 중 하나일 로버트 켈리.

클레망의 동년배이자 친한 친구이기도 한 이 양반을 오랜만에 소환했다.

* * *

“클레망, 로버트랑 밥 먹으러 갈 건데. 클레망도 올 거죠?”

클레망 파로는 구현기의 제안을 듣고 생각했다.

자신이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짐작했을 거라고.

“그럼. 가야지.”

작년까지만 해도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개막 이후로는 거의 연락하지 못했다.

팀 분위기나 젊은 선수들의 멘탈을 케어하는 한편, 개인 성적에도 신경 쓰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으니까.

“로버트!! 오랜만이에요!!”

“요새 뭘 하고 다니길래 통 연락이 안 돼요?!”

낮 경기가 끝난 후, LA 모처의 음식점.

어디서 소식이 퍼졌는지 너도나도 같이 가겠다고 조르는 바람에, 처음 계획보다 두 배 정도 인원이 불어난 모임에 로버트가 도착했다.

“잘들 지냈냐?”

오랜만에 만나는 로버트는 딱히 살이 찌거나 수염을 기르거나 하는 일 없이, 클레망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지만.

클럽하우스에서 항상 뿜어내고 다니던 투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뭐야, Koo. 몇 명 안 올 거라며? 내 카드 훔쳐다가 긁으려고 불렀냐?”

“전화로 말했잖아요. 저 요새 돈 잘 번다고요.”

“아니, 이러면 내가 애들 모아서 꼰대짓이나 하려는 사람 같잖아.”

“꼰대 맞잖아요, 로버트.”

“너 이제 나 볼 일 없다고 말을 아주 막 한다?”

예전의 로버트였다면, 까마득한 후배인 구현기랑 농담 따먹기를 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거다.

“오랜만이다, 클레망.”

“어, 응.”

로버트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클레망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을 느꼈다.

경기장을 떠난 선수의 모습에 어서 익숙해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만 같다는, 그런 자격지심에 가까운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리가 마무리될 즈음, 자신의 예감이 100퍼센트 틀리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클레망. 우리 둘이 간단하게 한 잔만 더 하고 들어갈까?”

선수 시절이었다면 한잔하자느니 하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을 로버트의 제안에, 클레망은 자기도 모르게 구현기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여기 계산 담당하는 분 누구죠?”

계산서를 든 채 후다닥 사라지는 뒷모습밖에는 볼 수 없었다.

* * *

스포츠 선수의 음주에 대해서는 다들 의견이 분분했다.

아예 손도 대지 말아야 한다는 강경파가 있는가 하면, 적당한 음주가 스트레스 완화에 큰 도움이 된다는 쪽도 있다.

클레망은 여기에 대해 별생각 없었지만, 가장 친한 친구인 로버트가 시즌 중에는 술을 입에도 안 대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된 케이스였는데.

“크으으으.”

그런 로버트가 위스키 잔을 연달아 들이켜는 모습은 낯설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빨리 마셔도 괜찮아? 원래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나한텐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즐겨야 할 의무가 있어. 오늘은 와이프가 애들 보는 날이라고.”

“어, 그래······.”

잔잔한 음악이 깔린 라운지 바.

아직 조금은 이른 시간 탓인지, 아니면 마음 편히 찾아오기 힘든 가격대 탓인지, 손님은 그들뿐이었고.

남들 듣기에 영 별로인 이야기를 나누기 딱 좋은 장소였다.

“클레망. 내가 원래 좀 직설적으로 말하는 거 알지?”

“어? 그럼. 알지.”

독한 술을 위장에 쏟아붓던 로버트가 불쑥 그런 말을 꺼냈다.

신인 시절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다저스에 합류한 이후의 로버트는 남 눈치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정작 클레망한테 그런 적은 없었지만.

“너는 앞으로 얼마나 더 야구를 하고 싶냐?”

어떤 막말보다도 자신을 아프게 찌르는 그 말에, 클레망은 잔을 향해 가져가던 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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