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68화 (168/200)

< 168. 우리 캡틴이 달라졌어요(3) >

‘너는 언제까지 야구를 하고 싶어?’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또 다른 질문으로 끝났다.

‘야구를 계속하는 것과 다저스에 남는 것 중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로버트의 그 말은, 다저스에 계속 남는다면 야구를 계속하기 어렵다는 것처럼 들렸고.

클레망은 그게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음날 바로 단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먼저 들어가 계시면 곧 오실 겁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시네요.”

“아닙니다. 제가 좀 일찍 왔는걸요.”

비서의 말에 클레망은 손을 내저었다.

시간은 많았다. 전날에도, 그 전날에도, 선발 라인업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물론 이대로 영영 출전하지 못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단장 집무실의 풍경을 눈에 새겨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첫 콜업 때, 잘하고도 팀 사정으로 마이너로 내려가야 했을 때, 연봉조정을 커버하는 장기계약을 체결할 때, 각종 타이틀을 따냈을 때, 캡틴으로 임명되었을 때 등등.

많은 추억이 어린 이곳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는 동안, 그는 단 한 차례도 팀을 옮기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유니폼을 벗는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돈은 큰 욕심만 없으면 평생 먹고살 수 있을 만큼 벌었다.

프런트나 지도자 등 야구와 관련된 다른 진로를 찾아볼 수도 있고.

부상으로 인해 1루수로 전향했지만, 커리어의 적지 않은 시기를 유격수로 보내면서 500홈런을 때려낸 데다, 원클럽맨 프리미엄도 있으니 명예의 전당 입성도 유력하고.

암흑기의 다저스를 지탱해온 팀의 레전드로서 LA 시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겠지.

‘그럼 만약 은퇴하지 않고 버틴다면?’

과연 그때도 팬들이 지금처럼 변함없는 사랑을 보내줄까.

“오래 기다렸나? 미안하군. 회의가 이제 끝나서.”

“아, 아뇨. 아닙니다.”

클레망은 하던 생각을 멈추고 방 안으로 들어온 올리버 단장을 맞이했다.

자신이 만나 온 단장들 중에서는 가장 유능하고, 선수들과도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지만.

지금 이 순간 이후로도 계속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다름이 아니고, 궁금한 게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음료를 권하려던 올리버 단장은 슬그머니 손을 거두고는 클레망의 맞은편에 앉았다.

적잖이 무거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클레망은 평소 이렇게 다짜고짜 본론부터 들어가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다음 시즌 다저스의 전력 구상에 제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마이크 올리버가 완벽한 단장이었더라면, 시즌 끝나려면 한참 남았는데 무슨 소리냐면서 웃어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커리어 전체를 다저스에서만 보내온 원클럽맨의 진심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고.

“후우······.”

대답 대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요.”

클레망 파로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크 올리버 단장은 다음 세대의 다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 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제야 확실하게 알게 됐다.

* * *

로버트와의 만남 이후.

정확히 어떤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클레망이 클럽하우스에서 멍 때리는 일은 없어졌다.

“그래도 요샌 클레망이 좀 밝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러게. 근데 Koo 너 혹시 클레망이랑 무슨 일 있었어? 요새 왜 그렇게 눈치를 봐?”

“맞아. 클레망한테 눈치 볼 정도면 빅리그 생활이 적성에 안 맞는다는 건데, 너도 제리랑 손 붙잡고 수도원이나······ 컥!”

헛소리나 하는 동료의 옆구리에 좋아요를 눌러주면서, 은근슬쩍 자리를 벗어났다.

[근데 진짜 왜 그랬냐? 괜히 로버트 끌어들였다고 너한테 뭐라 그럴까 봐?]

‘그 반대지.’

내가 로버트를 부르면서 귀띔을 좀 했다는 건 클레망도 이미 알 거다.

원래부터 한 번 찾아올 생각은 있었다고 해도, 어쨌든 까마득한 선배를 부려먹으면서까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셈이니, 아무리 착하다고 해도 잔소리 정도는 들을 줄 알았는데.

“어, Koo! 어젠 잘 들어갔어? 컨디션은 좀 어때?”

“네, 뭐. 좋네요.”

“그래? 이따 훈련 때 보자!”

잔소리는커녕,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평소대로 말을 걸어오니까. 뭔가 좀 꺼림칙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클레망은 다시 마음씨 넓은 베테랑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선수들도 뭔지는 몰라도 복잡한 일이 해결된 모양이라면서 안도했지만.

위화감의 정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클레망 파로, 이번 시즌 첫 4경기 연속 결장··· 팬들 의문에 감독은 “승리를 위한 라인업” 일축]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랜디가 주전 1루수로 나서면서 클레망이 완전히 백업으로 밀려났다는 것.

아직까지는 야수들의 수비 도움이 많이 필요한 5선발 에드윈이 등판할 때를 제외하면 벤치를 지켰다.

당연히 선수들이나 팬들 모두 익숙하지 않은 모습에 당황했고. 이래도 되는 건가 술렁이기도 했지만.

따아아아아악―!

[커다란 타구! 담장 쪽으로! 역시나! See! You! LAter!!! 랜디 콘트레라스의 멀찍이 도망가는 쓰리런!!! 아무리 수비가 불안하고 삼진을 많이 당해도 결국 이런 짜릿한 한 방이 모든 걸 용서하게 만드는 선수입니다!!!]

주전으로 도약한 지 일주일 만에 홈런 3개를 추가하는 괴력을 선보이면서, 감독님을 성토하는 여론은 쏙 들어가 버렸다.

경기 후반부에 대타나 대수비로 자주 출전하면서, 클레망을 보기 위해 찾아온 팬들도 나름대로 납득은 하는 모양이었고.

클레망에게 일어난 변화는 이것 말고도 한 가지 더 있었는데.

“랜디. 준비 됐지? 빨리 끝내고 가자.”

“어, 저기 클레망? 미리 말을 못 했는데, 오늘은 동료들과의 유대를 다지는 시간을 잠시······.”

“유대? 그거 좋지. 같이 훈련하겠다는 친구가 또 있었나 봐? 내야 쪽이라면 내가 도움이 될 텐데.”

“그건 아니고요. 같이 잔을 나누면서 고민도 털어놓고 뭐 그런······.”

“동료랑 한잔하고 싶다는 거구나?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지.”

“저, 정말요?”

“그럼. 오늘도 실책을 저지른 너를 커버하느라 다른 내야수들이 더 고생하겠지만, 그래도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니?”

“지금 가요. 간다구요······.”

클레망 또래의 베테랑쯤 되면, 사람을 볶을 줄 몰라서 못 볶는 게 아니다. 그냥 자기 성격에 안 맞아서 안 건드리는 거지.

그런데도 유독 제리를 옆에 끼고 다니면서 이렇게 들들 볶아대는 거다.

“악마가 따로 없어. 내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코치는 더블 A 수비 코치일 줄 알았는데, 요새 클레망이랑 비교하면 거긴 그냥 보육원이야······.”

랜디 말로는, 경기가 끝나면 매일같이 끌려가 지옥의 수비 특훈을 받고 있다나.

마찬가지로 클레망에게 수비 특훈을 받아 본 입장에서 악마가 된 클레망이 상상이 잘 안 가기는 한데. 효과는 확실해 보인다.

낮게 깔리는 공을 포구할 때 감각에만 의존하는 안 좋은 버릇이 있었는데, 그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으니까.

주전 라인업에서 빠지면서, 후배 선수를 붙잡고 자기 노하우를 전수하는 모습.

이제는 다들 클레망이 무슨 생각인지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클레망도 슬슬 갈 준비를 하나 보네.”

“근데 좀 이르지 않아? 아직 후반기도 안 됐는데.”

“프런트랑 합의를 봤나 보지. 랜디도 경험치를 좀 먹어야 하잖아.”

거의 시즌 끝에 가서야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던 로버트와는 달리, 지금부터 천천히 마무리를 준비하려는 거라고.

물론 그렇게 아름다운 이별이 예정되어 있다면 다행이긴 한데.

‘근데 너무 조급해 보이지 않아?’

[또 뭐가?]

당장 오늘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굴고 있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린다.

내야수로서는 초짜나 다름없던 나를 가르칠 때도, 이렇게 매일같이 붙잡고 살거나 사람을 볶아대지는 않았으니까.

[너랑 비교돼서 그런 거 아냐?]

‘나랑?’

[아니, 너처럼 가르쳐주는 거 금방금방 익히면 가르치는 재미라도 있겠지. 근데 랜디가 과연 그랬을까?]

‘음······.’

랜디한텐 좀 미안하긴 한데, 그럴싸한 추측 같다.

얘가 무서워했던 더블 A 수비 코치는 사실 그리 성격이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랜디가 털리는 걸 직접 봤다던 아드리안이 말하길, 입은 험해도 지금의 클레망처럼 거의 전담으로 봐줬다고 하니.

[지금은 그것보다 신경 써야 할 게 많잖아?]

박도현의 말이 맞았다.

3,000만 달러를 훌쩍 넘기는 연봉은 그만큼 무거운 책임도 함께 가져왔으니까.

“가자, 랜디. 오늘도 송구 받을 때 불안해 보이면 클레망한테 다 말할 거니까 그리 알고.”

“윽······.”

오늘도 선발 1루수로 출장한 랜디를 갈구면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그라운드로 나갔다.

* * *

따아아악―!

[이 타구는! 2루수의 슈퍼 캐치! 그러나 1루에서! 세이프! Koo의 빠른 발이 만들어낸 오늘 경기 첫 안타!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은 오늘도 무사히 이어집니다!]

경기에 나가서 안타를 치는 것.

모든 타자들이 해야 할 일이고, 실제로도 많이들 하고 있지만.

그걸 끊이지 않고 매 경기 이어간다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다.

“오늘 현장 판매분은 매진됐습니다! 온라인 샵에 곧 풀릴 예정이니 기다려주세요!”

“아니 유니폼도 아니고 뭔 놈의 깃발이 이렇게 금방 매진돼?!”

“당장 기록이 언제 끊길지 모르는데 온라인으로 사면 무슨 소용이야!”

“방금 부정 타는 소리 지껄인 야알못 새끼 누구야?! 너 자이언츠 팬이지!!”

다저스의 마케팅 팀은 곧바로 한철 장사에 들어갔다.

매일 다저 스타디움의 기념품 샵에서 내가 안타를 기록한 경기 수를 적은 깃발을 팔고, 다저스 팬들은 다음날 경기 전까지 자기들 집에 그걸 걸어두었다.

[LA 전역을 뒤덮은 의문의 숫자, 그 정체는?]

└ 그러니까 이게 Koo라는 선수가 안타를 친 경기 수라고? 다른 선수들은 이만큼 못 쳤나?

└ 이게 왜 대단한 거냐면, 지금 개막하고 나서 시즌이 절반 가까이 진행된 지금까지 한 경기도 빠짐없이 안타를 친 거거든.

└ 그거 어려운 거야? 야구가 원래 안타 치는 스포츠 아닌가?

└ 그래, 그렇게만 알고 살아라. 괜히 야구 챙겨보지 말고. 가뜩이나 예매하기 빡센데 경쟁률 늘어나니까.

매일매일 거리에 깃발이 걸리고, 그 안의 숫자가 늘어나는 기묘한 풍경에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 역시 하나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마치 LA 사람들이 나 하나만 바라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

“Koo. 이건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는 부담스럽지도 않냐?”

아내가 어째 경기장에 다니는가 싶더니, 자기 집에도 숫자 깃발이 걸리기 시작했다던 채드윅이 질린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부담스럽겠냐?”

만약 기록 끊기기라도 하면 깃발 모아다가 화형식이라도 열 기세인데.

박도현에게서 받은 재능이 없었더라면 스윙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지금 사방에서 쏟아지는 부담감을 떨쳐낼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사고 이후의 그 끔찍한 경험 덕분일지도 모른다.

내가 없어도 팀은 어떻게든 빈자리를 메꿔서 굴러갔고. 내 상태가 어떻든 경기는 정해진 시간에 시작됐다.

재활 훈련이 끝난 후 지친 몸을 끌고 침대에 들어가 태블릿 화면으로 동료들의 활약을 볼 때 느꼈던 거지 같은 기분은 아마 남은 평생 잊지 못할 거다.

[Hyun―Ki Koo, 78경기 연속 안타로 Do―Hyun Park과 타이기록 달성! 신기록 달성이 가려지는 무대는 에인절 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

지금의 영광도 언젠가는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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