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69화 (169/200)

< 169. 우리 캡틴이 달라졌어요(4) >

[작년에 쉼표를 찍은 Koo의 에인절 스타디움 잔혹사, 오늘 경기에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빅리그에 정착한 2033년부터 사고를 당한 2035년까지 로테이션상 매년 에인절스와의 원정 경기에 등판했는데.

그때마다 한 경기도 빠짐없이 말아먹으면서 인간 상성이란 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줬었다.

물론 작년에는 달랐다.

에인절 스타디움 원정 2연전 동안 2타수 2안타 2홈런 6볼넷이라는 기괴한 스탯을 찍으며, ‘114’라는 별명을 새로 얻어냈으니까.

정작 다저스는 외야수 벤 리히터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송구에 맞아 실려간 뒤로 실책을 거듭하며 졸전을 펼친 탓에, 마침표는 못 찍고 쉼표만 찍었지만.

‘도대체 왜 에인절 스타디움만 가면 그렇게 삽을 푸는 거야?’

수도 없이 들었던 질문인데, 그걸 알았으면 해결을 했겠지.

단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에인절스 원정 경기에는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불쾌감 같은 게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느낌이 확 온다. 아무리 잠을 푹 자고 신체 컨디션이 좋아도, 눈을 뜨자마자 기분이 가라앉으면서 집에나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지난 몇 년간 에인절스 원정에서의 투구 밸런스가 개판이었던 건 이 기묘한 감각 탓도 제법 클 거다.

“으으으음. 오빠 일어났어?”

분명히 그랬는데.

지금은 그런 불쾌함 따위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같은 이불 속 도아의 잠이 덜 깬 부스스한 얼굴에 온 신경을 빼앗겨서 그런 걸까.

“더 잘래?”

“아냐. 씻고 와. 아침 먹어야지.”

컨디션은 좋다. 정확히 말하자면, 평소랑 똑같다.

도아가 여름방학을 맞으며 정식으로 동거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원래부터 좋았던 페이스가 더 올라갔다. 야구가 멘탈 게임이라는 말을 전적으로 믿는 건 아니지만, 마음의 안정이 경기력에 분명히 영향을 준다는 걸 직접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경기도 있지만.

예를 들어 포스트시즌이라거나. 한두 게임으로 지구 순위가 바뀌는 시즌 막바지, 혹은 대기록이 걸려 있는 경기 같은 것들.

[준비는 됐냐?]

도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에인절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길.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던 자신의 기록 중 하나가 오늘 깨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기분이 좀 묘했던 건지.

평소에는 말이 더럽게 많은 주제에 오늘따라 유독 조용하던 박도현이 툭 던지듯 물었다.

‘준비는 매일 하는 거고.’

솔직히 여기까지 오면 나도 모르게 기록에 집착하게 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정말로 손톱만큼의 욕심도 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안타를 쳐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평소처럼만 하면 어떻게든 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먼저 든다.

깨질 기록이었으면 진작 깨졌을 거다. 상대 야수의 실책성 플레이가 안타로 기록되거나, 빗맞은 타구가 바빕신의 가호를 받아 상대 내야수를 암울하게 만드는 안타로 둔갑한 것도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는 건 나뿐인지도 모르겠지만.

* * *

“오, Koo. 와, 왔구나.”

원정 클럽하우스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선수는 제리였다.

“나, 날씨 정말 좋다. 오늘은 오랜만에 클라라가 경기장에, 아니,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고. 아니아니, 부담을 준다는 말이 너를 부담스럽게 할지도 모른다는 걸 아주 잠깐 잊어먹었다고나 할까······.”

생애 두 번째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며 성층권까지 솟아오른 제리의 콧대는 장인어른께 탈탈 털리면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떨 일인가.

누가 보면 지가 등판하는 날인 줄 알겠어.

“아, Koo 왔구나. 크흠. 몸은 좀 어때······?”

“평소랑 똑같죠, 뭐.”

“숙소에서 안 보이던데. 오늘은 좀 일찍 출근했나 봐?”

“뭔 소리여. 나 오늘 집에서 바로 왔는데.”

“임신한 여자친구가 오늘 경기 보러 온다고······.”

“그건 저 말고 제리 얘긴데요.”

이윽고 하나둘 나타난 선수들도 어째 하나같이 나사가 좀 빠진 듯했다.

심지어 코칭스태프들도 대놓고 티는 안 낼 뿐, 평소랑 다르게 하는 행동마다 죄다 어색하다.

아니 수비 코치가 배트 들고 어슬렁거리면 어쩌자는 거야.

‘이럴 때 로버트가 있었으면 사자후 한 번 갈겨줬을 텐데.’

좀처럼 차분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분위기에 입맛을 다시고 있던 그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불쑥 끼어들었다.

“다들 지금 뭐 해? 혹시 나 없는 사이에 이미 경기 끝냈어?”

요즘 랜디를 사람 구실 하는 1루수로 만들기 위해 고생하는 클레망 파로.

로버트처럼 눈만 마주쳐도 오금이 저릿할 정도는 아니지만, 묵직한 카리스마에 선수들도 금세 얌전해졌다.

평소에 얌전하고 잘 웃던 사람이라 더 살벌해 보이는 것도 있고.

“아니지? 그럼 헛소리는 그만들 하고 얼른 경기 준비나 하러 가자고. 오늘은 꼭 이겨야 한단 말이야.”

“네? 갑자기 왜 안 하던 말을······.”

“오랜만에 내가 선발 출장하는 날이잖아. 나 같은 백업은 이런 날 한가닥 해 줘야 안 쫓겨난다고.”

뼈가 있는 농담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아메리칸리그 원정이라, 랜디를 지명타자로 보내고 클레망을 1루에 세울 수 있게 된 오늘 경기.

사실 오늘은 내가 지명타자로 나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받긴 했는데, 수비 없이 경기 감각을 유지하는 법을 아직 잘 모르겠어서 그건 거절했다.

[그래도 클레망은 제정신이라서 다행이네.]

‘베테랑이 괜히 베테랑이 아니라니까.’

선수들을 휘어잡는 모습이 하도 자연스러워서, 어쩌면 오늘 경기에 대기록이 걸려 있다는 걸 아예 의식하지 않는 걸까 싶기도 했는데.

몸풀기 훈련을 하러 그라운드로 나가기 전, 복도에서 클레망과 단둘이 마주쳤을 때.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너만한 재능이 있었다면 나도 후회가 안 남았을까?”

오늘 상대할 투수에 대해 잡담을 나누던 도중.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던 듯, 오히려 본인이 더 당황하면서 괜한 헛소리를 했다며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 버린 클레망.

그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덕아웃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도현의 재능이 없었다면 분명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다.

그러나 그것만 믿고 고삐를 느슨하게 조였다면, 깔끔하게 은퇴했을 때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게 됐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여러 선수들을 맡아왔지만 단 한 명도 명전에 보내지 못하고, 끝내 나한테까지 온 박도현이 그 증거다.

명전 입성이 유력한 타자가 내 재능을 부러워하더라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거다.

“다들 뭐 해요? 안 나가고.”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덕아웃에 도착했더니, 다들 이쪽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쟤 좀 봐. 대기록이 눈앞에 있는데 실실 쪼개고 있어.”

“또라이인 건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오히려 저런 놈이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아닐까?”

음.

그래. 나가야지.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바꿀 경기가 아닌, 2038시즌의 162경기 중 한 경기를 치르기 위해.

그전에 잠깐만, 말 함부로 하는 동료들한테 손수 좋아요 좀 먹여주고.

* * *

오늘의 관중석은 평소의 프리웨이 시리즈랑 조금 달랐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양 팀 특성상, 다저스와 에인절스 팬들이 엇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곤 했는데.

아마도 다른 팀을 응원하는 팬들일, 평상복을 입은 사람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비장한 표정으로 손에 무슨 숫자가 적힌 피켓이며 깃발을 들고 있었다.

78.

그리고 79,

기록의 스포츠라 불리는 야구.

그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기록 중 하나가 새로 쓰이는 순간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는 수많은 사람들.

“플레이 볼!”

물론 에인절스야 그런 분위기가 탐탁지 않았을 거다.

작년 프리웨이 시리즈에서 4경기 전패. 올해도 다저 스타디움에서의 2경기에서 스윕을 당하며 가뜩이나 기세에서 밀리는데. 대기록을 내주는 순간을 박제라도 당했다가는 자존심에 제대로 먹칠할 테니.

어떻게든 막아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에인절스 선발투수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렸을지도 모른다.

“베이스 온 볼스!”

1회 초 선두 타자부터 볼넷을 얻어내면서, 무사 주자 1루의 기회가 찾아왔고.

대기 타석 밖으로 한 걸음 옮기자마자 관중들이 죄다 일어서서 목청껏 소리를 질러댄다.

“Koo!!! Koo!!! Koo!!! Koo!!!”

그 뭐냐.

원래 퍼펙트나 노히터 같은 대기록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으면 오히려 좀 조용하고, 언급을 피하고 그러는 것 같던데.

딱히 다저스 팬만 온 건 아니라서 그런가. 그딴 거 알 바냐는 듯 신명나게 79가 적힌 피켓을 흔들어대는 관중들.

그래도 딱히 상관은 없다.

이런 분위기가 부담스러운 건 투수한테도 마찬가지니까.

따아악―!

‘몸으로 말해요’의 보정을 받는 몸쪽 코스, 그것도 살짝 덜 가라앉는 변화구.

지난 오프 시즌 동안 수많은 땀방울을 흘려가며 스프레이 히터로 변신한 나였지만, 여전히 가장 위협적인 타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공이었고.

그렇게 조금은 싱겁게 1회 초부터 안타가 나오는가 싶었지만.

촤아아악―!

주자가 거리를 벌리든 말든 신경 안 쓰겠다는 듯 베이스 뒤편에 서 있던 1루수가, 몸을 날려 안타성 타구를 품에 안았고.

결국 1―2간 안타가 수비 하나에 진루타로 돌변했다.

“야!!! 이게 무슨 아웃이야!!!”

“뭔 놈의 홈 어드밴티지를 이따위로 대놓고 줘?!”

누가 들으면 여기가 다저 스타디움인 줄 착각할 정도로 격한 반응이 쏟아졌고.

감독님도 곧바로 비디오 판독 사인을 보냈지만, 영상을 5분가량 돌려본 끝에 나온 결론은 원심 유지였다.

‘얘네 1루수가 랜디였으면 무조건 안타인데.’

에인절스 역시 다저스와 비슷하게 다른 포지션은 트레이드로 보강하거나 내부 육성 자원을 많이 기용하고, 주로 내야진에 돈을 쓰는 팀.

연봉을 생각하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플레이였기에, 혀 한 번 차고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갔지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정작 다른 선수들은 그럴 수 없었던 듯, 1사 2루의 득점권 찬스에서 선취점을 얻어내지 못한 채 수비로 넘어갔다.

오늘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에드윈 니콜슨.

아직은 퐁당퐁당 투구를 이어가고 있는 쌩 신인이라서, 켄과 클레망을 기용하며 수비에 무게를 둔 다저스였지만.

정작 투수가 본인 공을 못 던지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베이스 온 볼스!”

“볼! 베이스 온 볼스!”

역시나 경기 시작도 전부터 쏟아지던 수많은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초장부터 연달아 볼넷을 내주며 무사 1, 2루의 위기를 자처한 에드윈.

포수가 마운드를 방문해 달래주는 동안, 이번 시즌 에인절스에서 가장 잘 치고 있는 3번 타자가 위협적으로 방망이를 돌리면서 나를 쏘아본다.

투수한테 겁을 줘도 모자랄 시간에 날 보면 뭐 어쩌자는 건가.

포수 헨리가 자리로 돌아오고 나서 다시 시작된 경기.

아직 카운트에 여유가 있을 때 커브 던지는 감을 찾아보자는 건지,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커브 사인이 나왔다.

쐐애애액―!

존 아래쪽 아슬아슬한 곳을 찌르는, 주심에 따라 스크라이크가 될 수도 있고 볼이 될 수도 있는 코스.

건드리기도 힘들고 어떻게 컨택해도 힘없는 타구가 나오기 쉬운, 제대로 던진 커브였지만.

타격감이 물올랐다는 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지, 타자는 끝내 배트 중앙에 갖다 맞히는 데 성공했다.

따아아악―!

홈플레이트 앞에서 커다란 바운드를 일으키는 빠른 땅볼 타구에, 주자들이 재빨리 스타트를 끊었지만.

바운드가 몇 번 일어나기도 전에 타구는 이미 앞으로 달려 나온 내 글러브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내가 당연히 처리할 거라는 듯 미리 2루에 들어가 있던 조지에게, 1루 주자의 발보다 먼저 송구가 도착했고.

“아웃!” “아웃!”

무사 1, 2루를 2사 3루로 바꿔버리는 수비에 허탈한 표정으로 속도를 줄이는 타자.

‘이걸 어쩌나. 유격수가 내가 아니었으면 최소 진루타였을 텐데.’

안타 하나를 빼앗겼으면, 하나를 빼앗아 오는 게 인지상정.

내 역할이 타자뿐만이 아니라는 걸 에인절스는 잠시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