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70화 (170/200)

< 170. 우리 캡틴이 달라졌어요(5) >

투수들이 사사구를 내주며 자초한 위기를 야수들의 호수비로 넘긴 1회 초.

이날 경기의 전체적인 흐름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야수들이 온종일 개같이 굴러다니고, 투수들은 투구 수가 늘어나면서 다함께 고생은 하는데, 점수는 잘 안 나서 팬들도 속 터지는 그런 경기.

그러나 관중들은 경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따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

구현기의 잘 맞은 타구가 펜스 바로 앞에서 잡히자, 관중들은 참았던 숨과 함께 아쉬움을 쏟아냈다.

바로 직전 수비에서는 다저스의 중견수 말릭이 호수비로 2사 2, 3루의 위기를 넘겼는데,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

“정신 나갈 것 같애······.”

선수 가족들이 앉아 있는 구역에서, 다저스의 에이스 제리 헤이즈택의 약혼녀 이나현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으로 축 늘어졌다.

다저스 팬으로서 놓칠 수 없는 경기였기에, 제리에게 최대한 조심하라는 신신당부를 들으며 찾아왔는데. 실시간으로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배를 쓰다듬던 그녀는 옆자리의 친한 동생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피가 마르는데, 선수들은 지금 기분이 어떨까요?”

남자친구의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이 주목받기 시작할 때부터, 박도아는 비슷한 질문을 수도 없이 들어 왔고.

그때마다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다.

“지금 오빠 머릿속에는 팀이 이겨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을걸요?”

물론 그녀 역시 정말로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설령 기록이 중단되더라도 오랫동안 좌절하진 않을 거란 확신은 있었다.

역대급 시즌을 보내면서도 안주하지 않고, 오직 야구와 여자친구인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사람이니까.

남자친구를 향한 걱정은 잠시 접어둔 채, 다저스를 향해 응원을 보내던 박도아였지만.

따아아아아아악―!

오늘 같은 팽팽한 경기에서는 누가 먼저 집중의 끈을 놓는지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많았고.

그 순간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다저스의 선발 에드윈 니콜슨에게 먼저 찾아왔다.

[외야수들이 담장 근처로 다가가지만! 이 타구는! 돌아올 수 없는 곳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2사 1, 2루 상황! 이닝 종료까지 스트라이크 하나만 남겨둔 에드윈 니콜슨이 홈런을 허용하며 스코어 0 대 3!!]

이닝 종료 직전에서 쓰리런으로 이어진 실투 하나.

대부분의 관중들이야 승패에 크게 관심은 없다지만, 다저스 선수들로서는 이 공 하나로 끌려가는 경기를 하게 됐다.

* * *

관심을 많이 받는 경기일수록 지켜보는 팬들은 더욱 맹목적으로 변하곤 한다. 예를 들어 지역 라이벌전이라던가.

대기록이 한창 진행 중인 경기 역시 마찬가지다. 작년과 올해를 통틀어 두 번의 퍼펙트게임을 달성해내면서 절실하게 느꼈다.

그럼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오늘 경기는 어떨까?

“스트라이크 아웃!!!”

“Boooooooooooooooooooo!!!”

뭐긴 뭐겠어. 지옥도의 한 장면이지.

“X발 심판 이 미친놈아!!! 대가리에 눈알 대신 X알이라도 달렸냐?!”

“저딴 공을 치라고?! 배트 대신 널빤지를 갖다줘도 안 닿겠구만 뭔 개소리야!!”

“넌 그냥 생긴 것부터가 맘에 안 들어!!!”

삼진 콜을 덮어씌우는 살벌한 육두문자의 행렬에, 잔뼈 굵은 주심마저도 기가 질린 듯했다.

“오늘 경기 내내 이 코스는 스트라이크였다. 알지?”

“물론이죠.”

스포츠 드라마가 펼쳐지는 경기장에서 혼자 극한직업을 찍고 있는 주심에게 위로의 눈빛을 보내준 뒤.

덕아웃으로 돌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감독님께 농담을 던졌다.

“다음 투수 누구 올릴지 고민 중이세요? 저 한 5일 정도 등판 안 했는데.”

“나를 쫓아내고 싶었으면 그냥 말로 하지.”

물론 감독님은 코웃음을 치며 다음 투수로 김희영을 올렸다.

충분히 역전 가능한 상황에서 멀티 이닝을 든든하게 막아줄 수 있는 투수.

그 기대에 부응하듯, 김희영은 실점 없이 빠른 템포로 에인절스 타선을 틀어막았지만.

[떨어지는 공에 스윙 삼진!! 다저스의 9번 타자 헨리 데이비슨이 물러나면서 잔루 1루로 이닝 종료. 스코어는 여전히 0 대 3. 이제 다저스의 정규시즌 남은 공격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정작 다저스는 점수를 내지 못했고.

나 역시 안타를 때려내지 못했다.

3타수 무안타 1볼넷.

네 번째 타석에서 볼넷이 나왔을 때는, 에인절스의 베테랑 셋업맨조차 움찔할 정도로 거센 비난이 쏟아졌는데. 풀카운트까지 끌고 간 끝에 볼넷을 내준 투수로선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싶더라.

최소한 기록 저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볼넷을 주진 않았을 거다. 카운트 싸움도 손을 댈 만한 공을 줘야 하는 거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앞선 이닝에서 투구 수를 절약했던 김희영이 기어이 8회까지 책임지면서 마운드를 내려왔고.

아마도 마지막 타석이 될, 9회 초 다섯 번째 타석을 위해 배트를 챙겨 가다가, 자리에 털푸덕 주저앉은 김희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어요, 형님.”

그러자, 숨을 헐떡이던 김희영이 고개만 들어 나한테 물었다.

“내가, 왜, 오늘, 바득바득 8회까지 던진 줄 아냐?”

“네?”

“오늘, 2승째. 찍을 각이 보이더라고.”

아마 지금 막 연습구를 던지고 있는 마무리 투수에게서 무언가를 읽어내고서 한 소리는 아닐 거다.

왜냐하면 지고 있는 상황에서 던지고 내려올 때마다 똑같은 소리를 했거든.

[안 가냐?]

‘가야지.’

그래도.

몇 점 차이든 타자들이 역전해서 자신에게 구원승을 선물해줄 거라고 믿는 저 사람처럼, 많은 이들이 내 마지막 타석에서 안타가 나올 거라고 믿고 있을 거다.

에인절 스타디움 전 구역에서 숫자 79가 적힌 피켓을 흔들어대는 관중들은 물론. 집이나 학교, 혹은 직장에서 중계를 보고 있는 팬들.

그리고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오늘도 나와 같은 차를 타고 돌아가 같이 밥을 먹고 같은 이불 속에서 잠들 도아까지. 전부 다.

“아웃!”

그 와중에 선두 타자 조지가 범타로 물러나면서 내 차례가 찾아왔다.

에인절스의 클로저는 사실상 포심과 슬라이더 투 피치에, 구위로 찍어 누르는 전형적인 파워 피처.

스윙에 힘을 애매하게 싣는다면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어내기가 어렵기에,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초구를 기다렸는데.

정작 들어오는 공을 보니 맥이 빠질 지경이었다.

“볼!”

배트를 낼 필요성조차 느껴지지 않는, 멀찍이 날아가 박히는 포심에 관중석이 들썩였지만.

“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이번에는 포수가 몸을 일으켜 잡아내야 할 정도로 높은 볼을 던지는 투수.

방망이 한 번 내지 못한 채 2―0의 카운트.

만약 이대로 볼 두 개가 더 들어온다면,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은 78경기 타이기록으로 막을 내린다.

타석에서 한 발짝 뒤로 슬쩍 물러나며 보니, 투수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웃기고 있네.’

투수는 어설픈 연기로 타자를 속일 수 있어도, 포수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지금의 공 두 개는 사전에 계획한 셋업 피칭이란 확신이 생겼다.

아니면 펄쩍 뛰어오를 정도로 벗어나는 공을 받아내고도 포수가 저렇게 얌전하게 굴 수 없었을 테니까.

타자를 초조하게 만들어 순식간에 카운트를 몰아붙이려는 전략.

그러나, 극단적인 작전에는 그만큼 리스크가 따르는 법.

볼카운트가 투수에게 불리해질수록 타자는 더 자신 있게 풀스윙을 갈길 수 있다.

‘바깥쪽 슬라이더.’

쐐애애액―!

투수의 성향과 볼카운트를 고려해, 조금 전 조지의 타석에서 봤던 변화구 타이밍에 맞춰 배트를 출발시켰지만.

괜히 투 피치만으로 빅리그에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는 듯, 공은 예상보다 더욱 격한 움직임을 보이며 들어왔다.

부우우웅―!

이미 힘이 실린 배트를 무를 순 없었다.

자세를 더 낮추고, 한 손을 놓으며, 어떻게든 갖다 맞추는 데 급급한 볼썽사나운 폼이지만.

‘스윙의 달인’의 보정을 받은 배트가, 공의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겨냥했고.

따아아악!

3루수든, 유격수든, 좌익수든.

아무리 비거리가 짧더라도, 머리 위로 절묘하게 날아가는 타구를 잡아낼 수 있는 야수는 없다.

[히든 업적 달성!]

[매일 안타를 친다는 것은, 모든 야구인이 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상상보다 아주 조금 더 어려운 일입니다. 승부를 피하는 투수들은 물론 수많은 견제에 언론의 과도한 관심까지. 이제 이 모든 걸 이겨낸 당신은 야구의 신에게 봉헌할 꽃 한 송이를 얻었습니다.]

[재능 뽑기권이 지급됩니다.]

[5,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13,290]

눈앞을 어지럽히는 시스템 창이 전부 닫히고 나자, 광기에 젖은 관중들이 눈에 들어왔다.

“Koooooooooo!!!”

“79경기야!!! X발 79경기라고!!! 79경기 동안 빠짐없이 안타를 쳤다고!!!”

“Koo!!! 네가 4억 달러 계약을 맺었을 때 드디어 다저스 프런트가 미쳤다고 비웃어서 미안해!!! 그 방망이로 나를 때려줘!!!”

9회 초, 사실상 마지막 타석에서 경신한 기록이라 그런지, 반응이 아주 격하다.

심지어 다저스 덕아웃에서도 몇몇 선수들이 뛰쳐나오다가, 아직 경기가 안 끝났다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돌아갔고.

곧이어 누군가의 선창으로 시작된 Koo 콜은, 평소보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준 심판진이 적당히 좀 하라고 말릴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기분이 어떠냐? 막 번아웃 오고 그래?]

일부 언론에서는 내가 신기록을 달성할 경우, 긴장이 확 풀리면서 한동안 부진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는데. 그걸 비꼬듯 물어보는 박도현.

‘뭐 지금 그딴 걸 물어보고 그러냐.’

겨우 소란이 가라앉고 다시 시작된 경기.

투수든, 포수든, 심지어 포수 뒤편 좌석에 앉은 에인절스 팬들마저도. 이미 기록은 내줬으니 경기나 깔끔하게 가져오자는, 일종의 체념 같은 걸 느끼는 것 같았는데.

팍! 팍! 팍!

은근슬쩍 베이스에서 거리를 벌리다가, 투구 타이밍을 읽어내자마자 도루를 감행했고.

허를 찔린 포수는 공을 받아 일어서긴 했지만 2루로 뿌리진 못했다.

“세이프!”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배터리를 보니, 둘 다 적지 않은 데미지를 입은 듯하다.

설마 대기록을 작성하자마자 도루를 감행할 줄 저놈들이 예상이나 했을까.

스코어는 아직 0 대 3. 1사 주자 2루.

득점권 찬스에서 클린업 트리오를 상대하는 다저스.

그러게 아직 경기가 안 끝났는데, 어디서 감히 멍 때리고 있어.

* * *

메이저리그의 성인군자.

구설수 한 번 일으킨 적 없는 진정한 프로 선수.

다저스의 베테랑 내야수 클레망 파로는, 이런 자신의 이미지가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포장이라고 믿었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그저 야구에 미쳐 살았고, 남한테 싫은 소리를 잘 못 했을 뿐인데.

성적이 잘 나왔기에 사람들이 좋게 봐줬을 뿐이라고 여겼다.

물론 어처구니없는 역전패를 밥 먹듯이 당하던 암흑기의 다저스에서 집합 한 번 안 걸었다는 것이 그의 인품을 증명하는 셈이었지만,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일생을 다저스에 바친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원클럽맨, 클레망 파로!]

[다저스는 명예의 전당에 모자 하나를 예약해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클레망은 이런 논조의 기사를 볼 때마다 심경이 복잡했다.

팀에서 슬슬 세대교체의 의지를 드러내고 나서부터는 더더욱.

모든 사람들이 그를 다저스의 레전드로서 명예롭게 은퇴하기를 바라는 것 같아 숨이 막히기도 했다.

그는 팀 스피릿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다저스에서 쌓아 올린 커리어를 소중히 여겼지만. 만약 자신을 지명한 팀이 다저스가 아닌 다른 팀이었더라도 똑같이 야구에 전념했을 테니까.

‘야구를 계속하고 싶은 거야, 다저스에 남고 싶은 거야?’

친구 로버트가 남긴, 상식적으로는 다저스를 택하는 게 당연해 보이는 질문.

그렇지만.

만약 다저스를 택한다면, 어떻게든 연장계약을 추가로 맺고 선수 생활을 연장한다고 해도, 구단은 그에게 경기에서의 활약이 아닌 젊은 야수들의 멘토 역할을 기대할 것이다.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며, 팬들이 역시 클레망은 팀을 자신보다 아낀다면서 기뻐할 것을 생각하니.

클레망은 마침내 선택을 마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선발 출장한 경기이자, 아끼는 후배가 79경기 연속 안타라는 대기록을 세운 경기.

만루 기회 앞에 놓인 클레망은 그런 상념에 잠시 빠져 있었다.

[자동고의사구]

구현기의 예상치 못한 도루에 얼이 빠진 배터리가 다음 타자 켄에게 볼넷을 허용하고.

이후 2―0의 카운트에서 투수가 폭투를 저지르며 1루가 비자, 배터리는 미련 없이 1루를 채웠다.

클린업 트리오의 말석을 차지하면서도 최근 부진한 끝에 백업으로 밀려난 자신을 상대하기로 한 것.

그러나, 자존심은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자신에게 아직도 타석에 설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에, 그리고 투수에게 지지 않는 힘이 남아 있다는 것에.

따아아아아아아아아악―!

초구를 그대로 받아쳐 담장 너머로 날려 보낸 클레망은, 베이스를 도는 내내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록 홈구장은 아니지만, 잠시 떠나 있어야 할 LA의 하늘을.

‘내 선택이 옳았어.’

시즌 10호 홈런을 역전 그랜드슬램으로 장식한 클레망 파로.

그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만족감에 젖어들었다.

* * *

[Hyun―Ki Koo, 79경기 연속 안타로 기록 경신!]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꾸준히 안타를 친 선수의 이름이 바뀌다!]

[프리웨이 시리즈에서 이 시대 최고의 타자가 탄생하는 걸 지켜본 유명인들은 누구?]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미리 써둔 기사들이, 9회 초 안타가 터져 나온 순간 이곳저곳으로 송고되며 인터넷을 뒤덮었고.

경기 종료 후 인터뷰를 통해 후속 기사를 내려고 벼르고 있던 기자들이었지만.

그날 밤, 정작 구현기에 대한 기사가 퍼져나가는 속도는 확 줄어들었다.

[LA 다저스 클레망 파로, 2대 1 트레이드로 시카고 컵스행!]

다저스의 원클럽맨이 다저스를 떠난다는, 초대형 폭탄이 떨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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