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영구결번(1) >
LA 다저스 선수들의 MVP 인터뷰를 오랫동안 담당해온 한 리포터는, 다저스가 9회에 역전하자마자 급하게 인터뷰를 준비하는 와중에, 스태프로부터 한 사실을 전해 들었다.
오늘 MVP로 선정될 확률이 높은 클레망이 트레이드될 예정이니, 대신 구현기에 대한 질문을 준비하라고.
그러자 리포터는 이렇게 반응했다.
“그래. 알겠어. 그래서 오늘 저녁 도시락 메뉴는 뭔데?”
그 말이 진짜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다가, 인터뷰가 코앞까지 다가와서야 허둥지둥 새로 준비해야 했던 리포터와 마찬가지로.
다저스가 온갖 공식 채널로 클레망 파로의 이적을 발표한 순간, 팬들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분노가 아니라 혼돈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저스 팬 중 클레망이 커리어를 마치고 은퇴하는 것 외의 다른 방식으로 팀을 떠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거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파인애플 피자를 주문했는데 민물새우탕이 나왔을 때처럼, 상황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했던 거다.
혼란이 가라앉고 분노가 그 자리를 채우기에 앞서, 다저스는 선수들이 에인절 스타디움을 떠나기도 전에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MVP 인터뷰를 하러 간 구현기나, 경기 중 가벼운 부상으로 처치를 받으러 간 몇몇 선수들을 제외한 선수단 전원이 당황을 감추려 애쓰며 지켜보는 가운데.
정장을 차려입고 카메라 앞에 선 클레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트레이드는 제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한마디에 카메라 플래시와 질문 세례가 쏟아졌지만, 클레망은 준비해온 말을 꺼낼 뿐이었다.
“다저스에는 젊고 유능한 선수들이 많습니다. 저를 원하는 팀이 있다면, 제가 자리를 옮기는 것이 팀을 위해서도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전 1루수를 맡아줄 후계자가 충분히 성장했으니, 자신을 필요로 하는 다른 팀에서 선수 생활을 연장하고 싶다는 것.
이치에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팬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쉬운 사실은 아니었다.
비록 전성기가 지났다지만, 오랜 시간 동안 다저스를 대표해온 선수를 이대로 떠나보내는 게 맞는가. 심지어 클레망은 올해 다저스의 캡틴이 아니었는가.
“클레망,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이란 건 알지만, 꼭 떠나야만 했나요? 당신의 커리어를 다저스에서 마무리할 순 없었던 겁니까?”
오랜 시간 다저스 클럽하우스에 출입해온 기자의 질문에, 클레망은 말문이 막혔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았다. 항상 그를 응원해준 팬들도, 지금 이 기자회견을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을 선수들도.
“저는······.”
클레망은 몸속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을 참기 어려웠다.
남들이 아무리 말린다고 한들 이미 돌이킬 수 없었고. 돌이킬 수 있는 상황이었더라도 돌이키지 않았겠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 팀을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는······ 아직 야구를 더 하고 싶습니다. 몇 년이나 더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직은 이 빌어먹을 경기장을 떠나기 싫단 말입니다.”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서라도, 기회가 더 주어지는 팀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것.
이것이 자신의 선택이었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주책맞게도 자꾸만 눈물이 쏟아지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면서, 클레망은 다짐했다.
* * *
[‘원클럽맨’ 클레망 파로, 트레이드 발표 후 기자회견장에서 고백! “아직 현역으로 남고 싶다.”]
[LA 다저스 마이크 올리버 단장, “우리가 그의 시간을 빼앗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다.”]
[38세 노장의 눈물··· 레전드 대우를 버리고 야구를 택한 한 남자]
클레망의 기자회견은 야구팬들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사실 선수 본인의, 그것도 혜택을 많이 받는 베테랑의 트레이드 요청은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든데.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생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며 오랫동안 팀을 위해 헌신한 선수인데다, 야구를 향한 진정성 있는 열망까지 드러내 보이며 그런 사소한 문제는 죄다 묻혀버렸다.
그날 밤 내내 클레망 파로라는 한 선수의 일생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메이저리그의 역사에 남을 79경기 연속 안타 기록이 살짝 밀릴 정도로.
[그래서 삐졌냐?]
‘누가 들으면 진짜 그런 줄 알겠다.’
서운한 이유는 따로 있지.
아무리 트레이드가 요청한다고 무조건 된다는 보장은 없다지만, 최소한 그렇게 떠날 거라면 미리 언질 정도는 줘도 됐을 텐데.
‘그래서 그렇게 랜디를 쥐 잡듯이 잡았구나.’
덕분에 요새는 좀 사람처럼 수비하긴 한다만. 옆에서 갈구는 클레망 없이 지금처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 클럽하우스 입구 근처에서 김희영과 마주쳤다.
“어, 현기야. 어젠 잘 들어갔지?”
“그럼요.”
기록이 기록이다 보니, 포스트시즌의 다음 관문으로 넘어갔을 때처럼 LA 전역이 개판이 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너무 충격적인 소식이 터져서 그런가. LA는 기껏 준비한 경찰 인력을 동원하는 일 없이 평화로운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도아도 나름 혼란스러웠는지 한동안 좀 어색했는데. 다저스 극성팬 이나현네는 어땠을지 감도 안 잡히네.
“어제 기사들 뜨는 거 보니까, 기분이 좀 묘하더라.”
“그쵸. 그런 게 있죠.”
함께한 시간은 짧았어도, 나름 클레망이랑 정이 든 모양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내 2승 보도된 거 있나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 설마 한국 언론에서까지 묻힐 줄은······.”
모든 선수가 우울해하지는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시즌 2승 기념구를 장식장에 넣어두고 물도 줘 가며 소중히 키우고 있다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클럽하우스 안쪽으로 들어갔더니.
“다들 안녕. 컵스 선수단에 합류하기 전에 잠깐 들렀어.”
이제는 시카고 컵스 선수가 된 클레망이, 전날 기자회견장에서처럼 정장을 입은 채 클럽하우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째 평소보다 소집 시간이 30분 정도 이르다 싶더니.
마지막 인사를 나누라고 양 구단에서 배려해준 모양이다.
“컵스맨이 여긴 왜 왔어?”
“죄송한데, 외부인은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되거든요?”
몇몇 선수들은 마음 정리를 마친 듯 밝게 웃으며 농담을 건넨다.
유망주 시절이든, 빅리그에 정착하고 나서든, 팀을 옮겨본 경험이 있는 선수들이 대부분이라 그나마 익숙해진 걸 수도 있고.
쭉 늘어선 선수단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이제 정말 헤어질 시간이 찾아왔나 싶었는데.
클레망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다른 프로스포츠에서 영향을 받아,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도입한 유니폼에 부착하는 주장 완장.
“원래는 의견 모아서 뽑아야겠지만. 남은 시즌 동안은 대행 체제로 가야 할 것 같아서.”
완장을 들고 있는 클레망이 멈춰 선 곳은, 다름아닌 내 앞이었다.
“주전 유격수에 투수까지 겸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너라면 잘 해낼 거라고 믿어.”
베테랑 선수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다들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전부 다 거절당한 끝에 나한테까지 온 건지, 미리 말했으면 내뺄까 봐 지금 건네주는 건지. 의심의 시선을 거둘 수 없지만.
“참고로 이거 달면 주장 권한으로 랜디가 뻘짓할 때 마음껏 갈궈도 돼.”
“주세요.”
미끼가 좀 먹음직스럽길래, 얼른 뺏어다가 유니폼에 붙였다.
나라 잃은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랜디를 보고 나서야, 사실 평소에도 딱히 조심스럽게 갈구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뭐 어때.
1루 수비 설렁설렁 하면 어디 어떻게 되나 보자고.
“이제 진짜 간다! 다들 건강해라!”
“기왕 간 거 다치지 말고 잘해요! 참고로 배웅은 안 나갑니다!”
“혹시나 해서 돌아보고 그러지 마요! 진짜 안 나가니까!”
정말로 뒤도 안 돌아보고, 정말로 배웅도 안 나가는, 본인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선수들끼리의 이별.
다저스의 베테랑 중 유일한 원클럽맨이었던 클레망은 그렇게 떠났다.
* * *
클레망 파로의 이적은 많은 팬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다들 감정을 수습하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선수 본인에겐 서글픈 일이겠지만, 그건 클레망이 은퇴가 머지않은 노장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현재 다저스 전력의 기둥이자 아직 젊은 선수인 구현기나 제리 헤이즈택이 같은 식으로 떠났다면, 반응이 지금처럼 온건하지는 않았을 거다.
[너넨 좀 어떠냐? 처음엔 엄청 울었는데 이제 좀 진정이 되더라.]
└ 지칠 정도로 울고 나니 속이 좀 풀리든?
└ 아니, 클레망이 가자마자 시즌 11호 홈런 때리는 거 보고 빡쳐서 단장 사진에 총질하고 왔더니 후련해졌어.
└ 상당한 친구네
중심 타선의 득점력이 고만고만한 시카고 컵스는 한 방이 있는 타자가 절실히 필요했고. 주전 1루수도 유망주 둘이 플래툰으로 맡고 있는 실정이라, 클레망에게 기회가 많이 돌아갈 것이다.
반대로 다저스는 강속구 유망주로서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투수를 데려왔다. 그리고 다저스는 이미 실패한 투수를 고쳐서 쏠쏠히 써먹은 전례가 많은 팀이다.
팬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어쨌거나 선수들이었다.
팀의 중심을 차지하던 선수의 공백은 쉽게 채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나마 축복 속에서 은퇴를 선언한 로버트 켈리의 경우에도 아직까지 그의 빈자리를 느낀다는 선수들이 나올 정도다.
그래서 혹시나, 기껏 79경기 연속 안타라는 정신 나간 기록을 달성하며 끌어올린 분위기가 확 가라앉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팬들이 많았지만.
전부 기우에 불과했다.
따아아아아악―!
[Koo의 타구가 담장을 맞추고 떨어집니다! 3루 주자 홈으로! 1루 주자 홈 승부! 세이프!! 그사이 Koo는 2루까지!! 2타점 적시 2루타로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은 80경기로 늘어났습니다!!!]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들이 팀 분위기를 다잡고, 클레망이 더 많은 기회를 위해 떠난 것이니 응원하자며 서로를 다독인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새로운 캡틴으로 임명된 구현기의 활약이 이어졌다는 것이었다.
연속 경기 안타 기록 경신 후 번아웃에 빠질 것이라는 일부의 분석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로 다음날도 큼지막한 2루타로 기록을 한 경기 더 늘리더니.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안타를 치며, 팬들이 이러다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냐며 심장을 부여잡을 정도로 꾸준히 활약했으니까.
지금의 활약만 이어가도 역대급 몬스터 시즌이 되었을 텐데도.
구현기는 또 한 번 진화를 거듭했다.
따아아아아아아악―!
[소리만 들어도 알아챘을 거라 믿습니다! 담장을! 담장을! See! You! LAter!!! 연장 10회 초 Koo의 역전 투런포! 최근 7경기 동안 홈런 5개를 추가하는 어마어마한 페이스! 시즌 29호 홈런과 함께 경기를 다시 미궁 속으로 끌고 갑니다!!!]
원래부터 홈런 페이스가 작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는데도.
그 페이스마저 우스워질 정도로 장타를 뻥뻥 날려대는 구현기.
팬들은 환호하는 한편, 기록 달성 후 긴장이 풀려 마음 편히 타석에 임하고 있다느니, 동료와의 이별을 통해 각성했다느니, 뭐 이런 근거 없는 추측을 내놓았지만.
대부분의 낭설이 그렇듯, 진실은 본인만이 알고 있는 법이었다.
* * *
[The Catch(C등급) ― 상시형]
○ 뜬공 처리 시 순간 집중력이 올라갑니다.
○ 뜬공 처리 시 낙구 지점 파악 능력이 보정됩니다.
연속 안타 기록을 경신하면서 얻은 두 번의 재능 뽑기 기회.
그중 첫 번째로 뽑은 재능은 약간 애매해 보였다.
‘내가 외야수였으면 엄청 유용했을 텐데.’
내야수 중에서 그나마 유격수가 뜬공 처리에 기여하는 비율이 높다고는 해도, 대부분 처리하는 건 땅볼이니까.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딱히 문제 될 건 없는 재능.
그러나 두 번째 재능은, 뽑자마자 눈이 번쩍 뜨일 정도였다.
[홈런왕의 길(S등급) ― 상시형]
○ 스윙 시 배트 중심에 공을 맞힐 확률이 올라갑니다.
○ 전반적인 타구 질이 보정됩니다.
만약 이 재능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면 그다지 큰 효과는 볼 수 없었을 거다.
그러나 이미 온갖 재능의 버프를 받아, 빅리그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타자가 된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큰 도움이 되는 재능이다.
담장 근처에서 아슬아슬하게 잡히던 타구가 홈런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거니까.
따아아악―!
[Koo의 이 타구는······ 아아아! 좌익수가 약간 물러나서 잡아냅니다! 그래도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겼음에도 상당한 비거리를 뽑아내며 자신의 힘을 증명했습니다!]
물론 모든 재능이 그렇듯 약점이 없지는 않았다.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한 채로 스윙했을 때, 원래대로라면 빗맞은 파울이 되었을 공이 뜬공으로 바뀌기도 한다는 것.
그러나, 카운트가 몰렸거나 경기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등등,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윙을 해야 할 때는 굉장히 큰 힘이 되어주었고.
[Koo, 7경기 동안 5홈런 기록하며 시즌 29호 홈런 달성! 작년 기록 30개까지는 앞으로 단 하나!]
아직까지도 끊어지지 않은 연속 안타 기록에 더불어 홈런까지 추가하면서, 전반기가 끝나가는 7월의 초입에 들어섰고.
전반기의 마지막 홈 시리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3연전을 맞이했다.
현재 내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은 86경기.
시즌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동안 끊기지 않고 안타를 쳤다는, 듣는 것만으로도 아득해지는 기록인 동시에.
테드 윌리엄스의 84경기 연속 출루 기록을 메이저리그 전체 3위로 밀어내는 기록이자, 박도현이 보유한 현재 1위 기록과의 타이기록.
연속 경기 안타에 이어 연속 출루 기록 경신까지 코앞으로 다가온 이날은.
박도현의 등번호 45번이 다저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는 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