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72화 (172/200)

< 172. 영구결번(2) >

올스타 브레이크를 앞두고 맞이한 전반기 마지막 시리즈.

원래부터 매진 행렬이 드물지 않은 다저 스타디움이지만, 이날만큼은 거의 포스트시즌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한 예매 전쟁이 벌어졌다.

이유야 물론 경기 시작 전 진행될 박도현의 영구결번식 때문.

박도현의 사후에 유입된 야구팬들조차도 이놈이 얼마나 미친 선수였는지는 대충이나마 알았기에.

이미 팔아먹을 대로 팔아먹어 더 짜낼 것도 없으리라 여겼던 생중계 이용권 판매량도 큰 폭으로 늘어날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예매는커녕 오히려 다저스 측에서 사정해가며 모셔온 관중들도 있었다.

그중 오늘 영구결번으로 헌액될 박도현의 부모님이 포함되어 있다는 건 딱히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다.

“정장 차림도 잘 어울리네, 우리 큰아들.”

옛 추억에 젖으신 건지, 어린 시절 이후로는 거의 불려본 적이 없는 호칭으로 나를 부르시는 어머님.

다정한 말씀이긴 한데. 박도현의 동생인 도아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지금 듣자니 좀······ 그렇긴 하다.

옆에서 둥둥 떠다니던 박도현도 표정을 썩히며 휙 날아가 버렸고.

“어머님, 아버님! 안녕하세요! 세상에! 오늘은 이렇게 경기장에서 뵙게 됐네요!”

에이전시 제휴 가이드로서 인연을 맺었다가, 이제는 제리의 약혼녀로서 경기장을 찾은 이나현이 살갑게 다가왔다.

분명 생글생글 웃고 있는데 아주 살짝 소름이 돋는다.

아마도 클레망의 이적 때문에 충격을 받지는 않았는지 물었다가, ‘아버지가 어디서 샷건 총알을 구해 오신 것 말고는 딱히 별일 없었어요!’라는 상큼한 대답이 돌아와서겠지.

“이제 배가 좀 나왔네. 손발 저리고 그러진 않아요? 입덧은?”

“요새는 많이 괜찮아졌어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어머님!”

“이럴 때일수록 남편 될 사람이 옆에서 챙겨줘야 하는데. 맨날 원정 다니고 그래서 어쩐대요.”

“그게 좋아서 만나는 건데요 뭐! 그래도 다시 LA로 돌아올 때마다 그만큼 듬뿍 사랑받고 있어요!”

한국어는 쥐뿔도 모르지만, 대충 무슨 말이 오가는지 뉘앙스로 느끼는 듯한 제리는 쭈굴쭈굴 모드에 들어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고.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화목한 고부지간으로 착각할 만한 대화를 지켜보며, 아버님은 실시간으로 늙어가시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나현의 배가 나와 있는 걸 보니 느끼는 바가 있으셨겠지.

끝까지 불신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던 아버님이 어머님 손에 이끌려 자리를 뜬 직후.

올 시즌이 끝나기 전까지는 만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이 찾아왔다.

“아들! 아빠 왔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가장 바빴으니까.

작년에도 내 SOS 콜 한 방에 직접 미국까지 찾아왔다가, 하룻밤 자고 나서 바로 귀국해버린 아버지.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이 걸려 있던 프리웨이 시리즈에 어떻게든 아버지를 초청하려고 구단이 애를 썼다는데, 그때는 도저히 시간을 못 내서 오늘에야 오셨다나.

“오늘은 진짜 큰맘 먹고 시간 많이 빼서 왔다! 미국에서 무려 2박이나 할 수 있어! 대박이지!”

나중에 은퇴하더라도 절대 아버지 사업은 물려받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게 해주는 한마디였다.

“여기 프런트 놈들은 뭐 이리 집요하냐? 얘기만이라도 좀 들어달라고 어찌나 성화던지 원······.”

박도현의 개인 인스트럭터였던 훌리안도 초청받았다.

작년에 월드시리즈 시구 맡았을 때도 그렇고, 다저스가 아직 이 양반을 코치로 데려오는 데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이다.

남들 보기엔 한 철 일하고 1년 내내 놀러 다니는 한량일지 몰라도 능력은 확실하니까.

“그럼 좀 들어라도 보시지 그러십니까? 돈 많이 드린다잖아요.”

“코치는 바쁘잖아. 암 수술까지 받은 노인네를 얼마나 혹사하려고.”

누가 들으면 대수술이라도 한 줄 알겠네.

일찍 발견한 덕분에 입원부터 수술 끝내고 퇴원하기까지 일주일도 안 걸렸으면서.

[클레망은 하필이면 이 시기에 트레이드가 돼가지고. 좀만 더 늦게 가지.]

‘그 양반은 아마 행사 시작하기도 전부터 울었을걸?’

당연한 소리지만, 지금은 시카고 컵스 선수가 된 클레망은 참석할 수 없었다.

박도현의 전성기를 함께 보냈지만, 지금은 팀을 옮긴 선수들이 적지 않다. 메이저리그 팀의 페이롤은 한정되어 있고, 누군가에게 거액의 계약을 안겨준다면 자연스레 다른 누군가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기는 어려워지는 법이니까.

물론 은퇴한 선수들은 여럿 찾아왔지만.

“애들이 니 사인 받고 싶다고 성화를 부리더라.”

작년까지 다저스의 에이스이자 군기반장으로 군림했던 로버트 켈리.

마찬가지로 코치직 제안이 빗발치고 있어도 가족과의 시간이 우선이라며 보류했던 그가, 듬직한 아들 두 명을 양팔에 한 명씩 끼고 나타났다.

“아, 안녕하세요, Koo!!!”

“86경기 연속 안타 축하드립니다!!!”

“그래. 사인해주기 전에 하나만 묻자. 너네 아빠랑 나 중에서 누가 더 훌륭한 선숡.”

아이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추한 어른의 모습을 보였다가 한 손으로 제압당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긴 했지만.

어쨌든, 특별한 날을 위해 경기장을 찾아와준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클럽하우스로 돌아갔는데.

막상 행사가 다가오니, 선수들 사이에서 뭐라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뭐야? 나 잠깐 한눈판 사이에 누가 갑분싸 드립이라도 쳤어?]

‘조용히 좀 해라.’

원래 영구결번식은 한 선수의 업적을 기리는 축제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그라운드 한복판에 세워둔, 45라는 숫자를 본뜬 장식물.

그 옆에서 영광을 누릴 선수가 더는 이곳에 없었으니까.

* * *

영구결번식을 치르는 동안,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얘 장례식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사회 각지에서 엄청난 이름값을 자랑하는 귀빈들이 모여들었다는 박도현의 장례식.

그때 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기에 현장 영상을 지나가듯 본 게 전부였는데. 지금 분위기가 딱 그랬다.

양 팀 선수단과 코칭스태프들이 정장 차림으로 도열한 가운데, 연단 위로 한 명씩 올라가 박도현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는 진행 방식도 비슷했고.

“처음 이 선수에 대한 스카우팅 리포트를 받았을 때, 사이닝 보너스 풀을 탈탈 털어서라도 데려와야 한다는 확신이······.”

“팀보다 위대한 선수가 없다는 말의 유일한 반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선수 스스로가 이 말을 거부한······.”

단장님이며 감독님, 구단주까지. 사회적 지위라는 걸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무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함께 뛰었던 선수들을 대표해 마이크 앞에 선 로버트는 대뜸 극딜부터 박고 시작했다.

“말 겁나게 안 듣고, 말은 또 겁나게 많은 놈이었습니다.”

침울해져 있던 관중들 사이에서 잠시나마 웃음이 일었다.

당사자인 박도현이 이건 전부 모함이라고 발악하는 소동이 (나한테만) 있었지만, 마무리는 나름대로 훈훈하게 지었다.

“그래도, Park이 제 등 뒤에 서는 날이면, 저는 무조건 저놈 쪽으로 타구를 보내기만 하면 이긴다는 생각으로 공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행사의 마지막 순서인, 박도현이 그토록 원하던 동상 대신 준비한 헌정 다큐멘터리가 상영될 시간이 찾아왔다.

이미 예고편만으로 엄청난 화제가 되었으며, 행사 종료 직후 구단 공식 채널에 공개된다는 소식에 팔로우가 어마어마하게 늘었다나.

“Park이 만약 우리와 함께 있었다면 소감을 직접 들어볼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하죠. 그래서 우리가 미력하게나마 그의 목소리를 이 자리에 가져왔습니다.”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경기장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유일한 불빛은 전광판에서 새어 나오는 것뿐.

그곳에서 재생되는 영상의 첫 장면은, 박도현이 빅리그의 부름을 받아 어리둥절한 듯 다저 스타디움의 클럽하우스를 활보하는 모습이었다.

[2030년 8월, LA 다저스는 더블 A의 한 내야수를 콜업한다. 국제 유망주 계약 공식 발표 후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날 박도현은 클럽하우스를 취재하던 기자에게서 인터뷰 요청을 받았고.

팬들을 향한 인사를 보내달라는 말에, 옆에 있던 통역에게 말을 전하는 대신 당당하게 콩글리시를 시전했다.

“하이 에브리원! 마이 네임 이즈 박도현! 나이스 투 미츄 앤드 유?”

그리고, 빅리그에서의 각오를 묻자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월드 베스트 히터!”

만약 박도현에게 주어진 삶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하다못해 명예의 전당 입성 자격을 충족하는 10년만 채웠더라면, 정말로 자신의 각오를 이뤘을 것이다.

영상은 그런 박도현의 활약상을 담아내는 한편, 다른 사람들이 박도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교차해서 보여줬다.

시즌 도중 촬영했던 바로 그 인터뷰 영상으로.

[78경기 연속 안타]

[제가 일찌감치 은퇴한 것에 진심으로 하늘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현역 시절 같은 지구에 저런 타자가 있었다면 저는 야구를 싫어하게 됐을 테니까요. ―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

[86경기 연속 출루]

[그는 타고난 승부사였습니다. 자신을 피하려는 투수의 공에 방망이를 가져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시즌 전 경기 출루라는 대기록을 세웠을지도 모르죠. ― 마이크 올리버 단장]

[유격수 포지션 전 타이틀 5년 연속 석권]

[Park이 유격수로 출장한 첫 경기가 끝나자마자, 비로소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유격수로서의 나는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겠구나, 라고요. ― 클레망 파로]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4할 타자]

박도현의 4할 타율이 확정되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의 모습에 이어, 전광판에 내 얼굴이 떠오르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과연 박도현이랑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온 저 선수는 어떤 소리를 할까, 그런 무언의 기대감이 쌓여간 끝에.

마침내 영상 속 내가 입을 열었다.

[저에게 있어서 Park은······ 등신이었습니다. ― 구현기]

등신이라는 말과 함께, 무거운 BGM이 딱 끊겼고.

생각지도 못했던 펀치에 사람들은 죄다 빵 터져버렸다.

덕분에 그 뒤로 이어진 눈치가 더럽게 없다느니, 자기가 치명적인 줄 착각한다느니, 여자를 밝힌다느니, 뭐 이런 소리에 딱히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는 게 박도현에게는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X랄하지 마라. 이거 SNS에 다 공개되는 거거든?! 내 이미지 나락 가면 어쩔 거야!]

박도현의 발광은 영상 속 내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하자 잦아들었다.

[그래도, 경기장 안에서의 Park은 제가 평생에 걸쳐 따라잡아야 할 존재였습니다.]

말 한마디 얹고 끝났던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카메라 너머에서 들려오는 질문까지 영상에 담겼다.

[그때의 당신은 투수였는데도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그럼요. 아마 사고 이후 제가 쉽게 일어서지 못했던 건 눈앞에 있던 목표가 갑자기 사라져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당시에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럴 겨를도 없었고.

그때는 그런 게 아니었을까, 막연히 추측해볼 뿐.

지금 와서는 딱히 상관없는 문제이기도 하고.

영상은 다음 챕터로 넘어가, 박도현이 다저스에서 이뤄낸 활약상들을 모아 한 편의 서사로 짜깁기하기 시작했다.

액기스 중의 액기스만 모았는데도 30분이 훌쩍 넘어가는 분량.

그리고, 마침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시절의 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주전 유격수를 차지해야 할 카일 캠프가 16타석 연속 무안타를 기록하면서 타석에서의 침묵을······.]

[올 시즌 두 번째 10연패를 당하는 다저스를 지켜보며 팬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박도현이 한순간에 사라진 이후, 다시 암흑기가 도래하는가 싶던 2036년의 다저스.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팬들이 몸서리를 치던 그때.

영상은 뜬금없이 어두컴컴한 CCTV 화면으로 바뀌었다.

‘아니, 미친······.’

다들 왜 갑자기 이런 걸 비추는 건지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저기가 어디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설마 CCTV에 다 찍히고 있었을 줄이야.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만 했습니다.]

화면 속 장소는 박도현의 추모 공간.

그곳을 거닐던 내가, 허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더니 뜬금없이 배트를 쥐고 스윙하는 척하는 게 죄다 박제되어 있었다.

‘저거 그거잖아. 재능 처음 뽑고 시험해보는 거.’

이게 또 남들에게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모습으로 보였는지, 영상은 곧바로 다저스가 부활을 알린 2037시즌의 활약상으로 이어졌다.

작년에 지구 꼴찌를 간신히 면했던 팀이,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손에 넣는 기적과도 같은 여정.

최대한 다양한 선수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서 노력한 것 같은데, 빅리그에서 내가 유격수 포지션으로 투입되며 박도현의 유지를 잇는 장면에서 유독 반응이 격하다.

[우리는 이곳에서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Do―Hyun Park, 2011 ― 2035]

마침내 영상이 끝나고, 경기장의 조명이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현장 카메라는 영상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빨리 깨부수고 싶었는지, 내 얼굴을 클로즈업해 전광판에 띄워버렸다.

[내 영구결번 요구한 게 이미지 관리 차원이라던 놈 혹시 어디 갔는지 아냐?]

아, 진짜.

얘 이런 거 한 번 건수 잡으면 질릴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데.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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