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영구결번(3) >
야구장에서 어떤 행사를 개최할 때의 타이밍은 그 행사의 성격에 따라 결정하곤 한다.
영구결번식이나 대기록 달성 기념행사처럼 축하의 의미가 강한 경우, 보통 경기 전에 하면서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편이고.
반대로 은퇴식처럼 슬퍼하는 팬들이 나올 수 있는 행사는 혹여나 경기력에 영향을 줄까 싶어 경기가 끝난 후에 치르고. 뭐 그런 거지.
이런 분류법을 적용했을 때, 사실 이미 고인이 된 박도현의 영구결번식은 경기 종료 후에 치르는 게 타당하지만.
[절묘하게 겹친 영구결번식과 신기록 도전! Koo는 오랜 친구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하필이면 오늘 영구결번식의 주인공이, 지금 내가 도전 중인 기록의 주인이라는 게 문제지.
이날 경기가 에이스끼리의 맞대결이라는 걸 생각했을 때, 정말 만에 하나라도 기록이 끊어져 버린다면. 안 그래도 축 처질 수밖에 없는 영구결번식이 그야말로 제 2의 장례식이 될 테니.
어쩔 수 없이 경기 시작 전에 행사를 열 수밖에 없었던 거다.
“플레이 볼!”
행사가 끝난 후, 다소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경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덕아웃은 대놓고 파이팅을 외치며 기세를 끌어올리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분위기 면에서 유리하겠다는 기대가 없었다고는 못 할 거다.
전반기 종료를 앞둔 지금, 자이언츠는 디백스에 0.5게임 차로 밀린 지구 3위.
1위 다저스와 2위 디백스 사이에 7게임이라는 적지 않은 격차가 있지만.
만약 이번 시리즈에서 스윕이라도 해서 다저스와의 격차를 줄이면, 후반기 반등에 따라 지구 우승까지도 노려볼 수 있다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거다.
당장 작년만 해도 후반기에 9연패를 기록하는 등 삽질하며 5게임 차 2위까지 추락했던 다저스가, 시즌 막바지에 탄력을 받으며 끝내 지구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으니.
“스트라이크 아웃!!”
비록 타자들이 에이스 제리의 구위를 이겨내지 못하며 1회 초 공격은 삼자범퇴로 끝났지만.
자기네 에이스 역시 리드오프 조지를 루킹 삼진으로 돌려세우자, 관중석 곳곳에 첩자처럼 숨어 있던 자이언츠 팬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Koooooooooooo!!!”
물론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78경기 연속 안타라는 박도현의 기록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심지어 아직도 이어가고 있는 타자가 타석으로 향했으니까.
아마도 지금 전국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을 사람들은, 내 표정이 이 모양인 게 기록에 대한 중압감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포수가 소심하게 걸어온 트래시 토크 때문이었다.
“안녕, 울보.”
이 깜찍한 녀석 같으니라고.
박도현 헌정 영상 때문에 눈물을 보였던 걸 굳이굳이 언급하면서 내 멘탈에 금이라도 가게 하려는 수작을 다 부리네.
“내가 울보라고? 그래. 날 그렇게 불러도 좋아. 왜냐하면 사실이니까.”
“어, 잠깐. 이 말 어디서······.”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포수의 말투가 다급해졌지만, 이미 투수는 와인드업에 들어간 뒤였다.
어디긴 어디야.
오늘 영구결번식의 주인공이 생전에 포수들 엿먹일 때 자주 써먹던 레퍼토리지.
따아아아아아아아아악―!
가르쳐달라는 사람은 많아도 아무나 못 따라 하는, 손목의 스냅이 중요한 K―빠던을 선보인 후.
내야를 한 바퀴 돌아 홈베이스를 밟는 동시에, 포수를 꼬라보며 아마도 이놈이 전에 박도현에게 들어본 적 있었을 명대사를 읊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나를 울보라고 부르는 것만은 참을 수 없다.”
의기양양하게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아까 보니까 타구도 꽤 멀리 뻗는 것 같던데. 이 정도면 영구결번식에서의 모습은 팬들 기억 속에서 사라졌겠지.
“Koo!!! Koo!!! Koo!!! Koo!!!”
연속 안타 기록에 이어, 연속 출루 기록까지.
누군가는 영영 깨지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를 박도현의 기록을 전부 가져온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한 시즌 동안 가장 꾸준하게 활약했던 타자를 논할 때, 아무도 내 이름을 빼놓을 수 없게 됐다.
* * *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까지 끝나지 않은 Koo의 안타 행진! 전반기 모든 경기에서 안타를 때려낸 유일무이한 타자로 등극!]
[‘월드 베스트 히터’ Park의 기록을 덧씌운 유일한 타자 Koo··· 친구의 영구결번식에서 눈물 보여]
[전반기 마지막 시리즈에서 2홈런 추가하며 31홈런 적립! 내셔널리그 홈런왕 경쟁에서 순식간에 1위로 급부상한 Koo!]
0.385/0.472/0.623, 31홈런, 42도루.
현대야구의 스탯이 맞기는 하는가 싶은 올해 전반기 성적은, 내 노력과 박도현의 재능이 더해진 결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연속 안타 기록을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는 건 100퍼센트 행운이다.
빗맞은 타구가 야수들 사이에 떨어지거나, 파울 라인을 타고 구르던 번트 타구가 페어지역에서 멈추는 등등. 하늘이 도왔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일들이 벌어졌지.
그래서였을까.
기록이 끊어지고 난 이후의 부진도 길어지는 것 아니냐는, 뉘앙스에 따라 우려로도 들리고 겐세이로도 들리는 말들이 스멀스멀 나오고 있었다.
‘근데 나보단 주변에서 더 난리일 것 같은데.’
사실 나야 오히려 슬슬 기록이 깨지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중간중간 3루수, 클레망의 트레이드 이후로는 1루수로 나오는 경기가 늘었다지만, 어쨌든 주전 유격수로 뛰면서 벤치를 지키는 날이 없다는 건 부담이 좀 되니까.
나보다는 차라리 다저스 팬들을 걱정하는 게 더 설득력 있겠다.
나한테 볼넷은커녕 볼만 던져도 죽일 듯 야유를 쏟아붓는 바람에, 멘탈이 약한 투수들은 다저스 원정이 고역이라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니.
기록이 허무하게 끊길까 전전긍긍하는 건 사무국도 마찬가지다. ‘뭔진 몰라도 개쩌는 타자가 있대’라는 입소문으로 뉴비들을 실컷 끌어온 모양이니까.
‘기록이 끊기더라도 좀 임팩트 있게 끝났으면 좋겠는데.’
최근 다저스의 상승세가 이어지며 3~4연승 정도는 우습게 하다 보니, 팬들도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져서. 소위 말하는 ‘졌잘싸’가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건 전부 당장 걱정할 일도 아니고.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지금 당장은 87경기 연속 출루 기록을 경신하고 나서 새로 얻은 재능이 더 중요하지.
사실 세계기록은 대만 리그의 세자릿수 기록이 따로 있어서 혹시나 그걸 넘겨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도 메이저리그 기준인 모양이었다.
[리그 수준을 생각해야지.]
‘하긴 다른 리그 기록도 인정되는 거였으면 FA 선언하고 어디 멕시칸 리그 같은 데서 1년 용병 뛰고 왔을 테니까.’
[그딴 꼼수까지 생각했었어?!]
양심이 없다느니, 인생을 그렇게 사니까 크리스토퍼 엘리엇 같은 또라이들이 꼬이는 거라느니.
새삼스레 하나마나한 소리를 지껄여대는 박도현을 무시하면서, 이번에 새로 얻은 재능 뽑기권을 사용했고.
[그 많던 나이는 누가 다 먹었을까(A등급) ― 상시형]
○ 신체의 노화 속도가 큰 폭으로 감소합니다.
○ 기량의 노쇠화가 큰 폭으로 감소합니다.
뭔가 시비를 거는 것 같은 이름이 걸리기는 하지만, 역대급 기록에 어울리는 역대급 재능을 뽑아버렸다.
모든 재능이 그렇듯, 정확한 수치가 제공되지 않으니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자기관리에 따라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
아무리 관리해도 30대 초반만 돼도 훅 가는 선수들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당장은 젊어서 체감이 안 될 뿐 엄청나게 유용한 재능이지.
[내가 동안 소리 듣고 살았던 게 이 재능 때문이구만?]
그새를 못 참고 개소리를 지껄이는 박도현만 아니었어도 기쁨을 만끽했을 텐데.
서른도 안 돼서 요단강 건넌 놈이 뭔 놈의 동안 타령이야.
‘여기 애들이 아시안들 보고 동안이라 그러는 거 하루 이틀이냐. 그리고 원래 20대 땐 따로 관리 안 해도 선크림만 잘 바르면 노안 소리는 안 듣거든?’
[너 따로 피부 관리하는 거 있잖아.]
‘뭔 개소리야. 내가 언제.’
[내 영구결번식 때 남자의 뜨거운 눈물을 꼼꼼히 바르면서 보습 챙긴 주제에.]
음.
아무래도 이 친구가 그날 무척 감명이 깊었던 모양인데.
여기서 정색하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도아야. 잠깐 이리 와 볼래?”
[아니 씹······!]
뭔 짓을 하려는지 깨달았는지, 유일하게 방음이 되는 운동방으로 도망치려던 박도현이었지만.
그쪽 문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아까 열어놨단다.
“올스타전에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좀 돼서. 나 자존감 좀 채워주라.”
“응? 웬일이래. 어떻게?”
“내가 왜 좋은지 이유 좀 말해줘. 발음 또박또박. 최대한 큰 소리로.”
“아이, 진짜. 뭘 또 새삼스럽게······. 음, 일단 되게 믿음직스럽고······.”
“좀만 더 크게! 어차피 이 정도로 소리쳐도 이웃한텐 안 들려!”
“아, 쫌! 믿음직스럽고! 시크한 척하는 주제에 이것저것 배려해주고! 내가 막 혼자 떠들어도 듣는 척하는 게 아니라 옆에서 계속 들어주면서 리액션해주고······!”
[X발 그마아아안!!!]
귀를 틀어막은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박도현.
제리를 포함해 여동생이 있는 놈들은, 자기 동생의 여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면 아주 행복해서 날뛴다던데. 역시나 효과가 탁월하다.
이참에 기강을 좀 다져 줘야지 안 되겠어.
* * *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홈구장 체이스 필드.
2038시즌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이 열리는 장소다.
다저스와는 같은 지구 팀인 만큼, 거리도 비교적 가까운 편이라서 올 때 편하긴 했는데. 문제는 날씨.
어지간한 열정으로는 버텨내기 힘든 더위 탓에, 팬들도 외부 행사 부스는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에어컨을 추울 정도로 틀어두는 실내로 도망쳐버렸다.
[2038 Home Run Derby]
올스타전의 전야제, 홈런 더비를 관람하기 위해서.
“Koo! 홈런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한 다른 타자들이 여럿 고사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Koo! 작년에는 1차전에서 탈락하셨는데요. 올해의 목표는 어디까지인지 포부를 밝혀주시죠!!”
“Koo!!! Koo!!!”
시작도 전부터, 7월의 피닉스 못지않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대는 기자들을 지나쳐, 선수 대기실로 향했다.
‘뭘 물어보나. 올해 배팅볼러로 누구 불렀는지 다 봤으면서.’
작년에는 올스타 브레이크 때 스케줄을 잡아두는 바람에, 컨디션 관리 차원에서 일찌감치 탈락을 받아들였지만. 올해는 그런 것도 아니니까.
100만 달러의 상금을 위해서라도 진지하게 임하기로 했다.
“하필 또 X나게 더운 동네로 부르고 난리야. 오는 길에만 땀 한 바가지 쏟았네.”
“그래도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까 기분 좋죠? 애들 올스타전 구경도 시켜줄 수 있고.”
“개소리 마라. 이미 몇 번이나 데려왔거든?”
작년까지 다저스의 에이스로 활약하다가 은퇴한 로버트 켈리.
지난번에 클레망 일 때문에 부른 지 얼마 안 돼서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각오하면서 질렀는데.
부르면 부르는 대로 은근히 안 빼고 오는 건 유부남의 비애인 걸까.
[아메리칸리그 쪽에 어떤 선수는 아버지가 던져준다던데. 너도 부탁해보지 그랬냐?]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나 영광이지, 우리 아버지한텐 고문이다.’
애초에 일이 바빠 박도현의 영구결번식이 열리고 이틀 뒤에 곧바로 귀국하시기도 했는데.
만약 시기가 맞았더라도 무슨 핑계를 대서든 빠지려고 했겠지.
이해는 간다. 시기상 절대 그럴 일은 없지만, 갑자기 챔스 결승전에 데려가 주겠다고 해도 메날두 정도밖에 모르는 나한텐 곤란할 뿐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부자지간에 서로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로버트네 부자가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아들들한테도 배팅볼 던져주고 그러지 않아요? 완전 전문가겠네.”
“그치. 근데 가끔 제구 흔들려서 헤드샷 나올 수도 있는데, 신경 쓰지 마.”
신경 끄기엔 살벌한 예고를 날린 로버트였지만, 막상 홈런 더비가 시작되고 나니 태도가 바뀌었다.
어디 한번 마음껏 날려보라는 듯 치기 좋은 코스에 연달아 공을 던져줬으니까.
따아아아아아아악―!
따아아아아아아아아악―!
비거리 약 130m 이상의 홈런이 나왔을 때 주어지는 추가 시간까지 알뜰하게 빨아먹으며, 경쟁자를 한 명 한 명 제쳐간 끝에.
[제한 시간이 20초 이상 남은 지금, 2038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홈런 더비의 우승자가 확정됐습니다! 개막 이후 지금까지 모든 경기에서 안타를 때려낸 남자이자, LA 다저스의 새로운 캡틴! Hyun!!! Ki!!! Koo!!!]
그렇게 손에 넣은 100만 달러의 상금.
오늘 로버트를 부를 수 있었던 건, 만약 우승한다면 상금 중 일부를 아들 학교 야구부에 기부한다는 조건을 달아서였다.
사실 탈락했더라도 세금 문제나 이미지 메이킹도 있으니 기부는 했겠지만.
“배팅볼 몇백 개 던지고, 호텔비 포함 경비도 다 지원받으면서 아이들한테 생색도 마음껏 부릴 수 있으니. 이만한 꿀알바가 어딨겠어요?”
“누가 이것만 받고 돌아가 준대냐?”
“네······?”
“더 내놔.”
“······.”
“표정 좀 보소. 쫄았냐?”
그, 뭐냐.
현역에서 은퇴했답시고, 이 양반을 무슨 동네 형님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어지간해서는 남한테 안 꿀리는데. 오금이 다 저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