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팀 스피릿(1) >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이 무대에 선다는 것은, 자리잡는 것도 힘겨운 빅리그에서 놀라운 활약을 선보였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고작 한 타석, 0.1이닝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선수들이 많다.
그만큼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 로스터에 이름이라도 한 줄 올릴 수 있는 올스타전이지만.
몇몇 선수들은, 부상이나 개인 사정으로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일찌감치 자기 자리를 확보해놓기도 했다.
구현기 역시 내셔널리그 올스타 팀의 선발 유격수 자리를 예약해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타격은 말할 것도 없고, 수비도 작년 초와 비교하면 놀랄 만큼 개선됐다.
구현기의 2037시즌 골드 글러브 수상이 무보살 삼중살이라는 임팩트 하나로 따낸 거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조차도, 내야에서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해내고 있다고 인정할 정도로.
그러나, 사무국이 발표한 어떤 소식은 뜻밖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Koo, 사무국 추천으로 올스타전 투수 로스터에 등재! 올스타전 투타 동시 선정은 사상 2번째!]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NPB를 평정하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투타겸업 선수 오타니 쇼헤이가 이미 선발 투수 겸 지명타자로 올스타전에 출전한 적이 있었으니까.
결국 논제는 투수 구현기가 올스타전 마운드에 오를 자격이 있느냐였다.
[Koo가 투수로도 올스타전에 나온다고? 이게 맞아? 아무리 그래도 밀어주기가 너무 심한 거 아냐?]
└ 밀어주기는 개뿔. 뽑을 만하니까 뽑았겠지.
└ 아니, Koo가 투타겸업을 하는 건 나도 알지. 근데 그 임팩트를 빼면 올스타에 뽑힐 만한 투수는 아니지 않나?
└ ERA가 제로에 이닝 당 출루 허용률은 0.5가 안 되는 투수를 안 뽑으면 대체 누굴 뽑게? 디백스에서 허구한 날 선발승 날려먹는 개노답 필패조? 아니면 로키스의 ERA 789 트리오?
└ 걔네들 아직도 방출 안 됐대??
└ 숫자의 속임수지. 전반기에 Koo가 등판한 건 24경기뿐이고, 소화한 이닝은 22.1이닝에 불과해. 전반기 내내 액티브 로스터에 등재된 모든 불펜투수를 통틀어 가장 적게 던졌는데, 그만큼 성적에 거품이 꼈다는 생각은 안 들어?
└ 넌 숫자밖에 볼 줄 모르냐? Koo가 무슨 전업 불펜투수인 줄 알아? 주전 유격수로도 뛰고 있잖아! 그것도 전경기 안타라는 개 X발 쩔어주는 기록까지 세워가면서!
└ 내가 유격수 Koo를 가지고 뭐라 그러는 게 아니잖아. 올스타 투수로서의 자격을 따지는 건데 타격 성적을 뭐 하러 들고 와?
└ 너 Koo가 등판하는 경기 본 적은 있냐? 네 말대로 불펜으로 고작 24경기 던졌는데 8승이라는 게 이상하지 않아? 비기거나 아슬아슬하게 지고 있을 때 등판해서 철저히 막아주니까 그런 거야! 니들 좋아하는 세이버메트릭스에 이런 건 안 나오나 보지?
야구팬들 사이에서 구현기의 인기가 말도 안 되게 치솟고 있는 요즘이기에, 설령 거품이 좀 끼었어도 뭐 어떻느냐는 반응이 우세했지만.
인기에 휩쓸린 과대평가는 오히려 선수에게도 안 좋다는 명분을 내세워, ‘투수 구현기’가 메이저리그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지 계속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정작 관계자들은 조용한데 팬들끼리 벌여대는 개싸움.
2037시즌 월드시리즈 진출팀 감독 자격으로 내셔널리그 올스타 팀 지휘봉을 잡은 오브라이언 감독은, 이 모든 난장판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LA 다저스 오브라이언 감독, “다저스의 감독으로서는 Koo의 등판이 오히려 손해이지만, 마운드 위에 선 그를 보고 싶어 하는 팬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Koo는 평소처럼 아웃카운트가 절실히 필요한 순간 등판할 것이다.”]
등판은 확정됐고, 감당은 선수가 할 것.
감독이 선수를 언론의 포화에서 보호할 생각은 안 하고 부담이나 늘리고 자빠졌다는 극성 다저스 팬들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오브라이언 감독은 어디서 개가 짖냐는 표정으로 귀만 후벼댔다.
올해 전반기를 보내면서, 구현기를 걱정하는 것만큼 쓰잘데기없는 짓은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으니까.
* * *
홈런 더비를 우승으로 마무리하고, 로버트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벗어난 후 맞이한 올스타 본 게임.
컨디션은 좋다. 나 스스로도 조금 놀랍긴 한데, 작년 올스타전 때보다도 훨씬 좋은 것 같다.
작년 이맘때는 주전으로 도약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정기적으로 휴식일을 받던 때라, 체력적인 부분에서 지금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는데도.
“오늘은 잘할 필요 없는 날인 거 알지? 마음껏 즐기고 와.”
같은 방에서 함께 눈을 뜨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나 힘이 될 줄, 작년의 나는 절대로 몰랐겠지.
“너는 어때? 내가 잘하면 즐거울 것 같아?”
“음, 이렇게 가만히 얼굴만 보고 있어도 즐겁긴 한데.”
“그럼 나 아프다 그러고 우리 어디 좋은 데 갈까?”
“얼마나 좋은 델 데려다주려고. 그냥 경기나 잘 뛰고 오세요.”
[X랄들 한다.]
아침부터 애정을 듬뿍 받는 것도 물론 좋은데.
그걸 보는 박도현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썩어가는 게 정말 너무너무 좋다.
군침이 싹 도네 아주.
[아침부터 그 난리를 떨고도 속이 멀쩡하냐? 난 뒤질 것 같은데.]
‘아 꼬우면 너도 어디 처녀귀신이라도 찾아서 내 눈앞에서 이래보던가.’
[나 귀신 아니라니까 이 새끼가 자꾸······.]
누군가에게는 바라마지않는 영광의 무대이고, 나 역시도 마이너 시절 올스타 퓨처스 게임에 출전하며 남몰래 동경해왔던 올스타전.
작년에는 티는 안 냈어도 나름대로 긴장했는데.
올해는 이렇게 박도현이랑 뻘소리나 지껄일 수 있게 됐다는 건,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일 거다.
“아, Koo. 기다리고 있었어. 아쉽게도 올해는 우리 둘뿐이네.”
올해로 벌써 3년 연속 참가하는데도, 여전히 긴장한 듯 묵묵히 앉아 있다가 내가 오자마자 반색하는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야.
“올해는 여기저기서 골고루 뽑혔으니까. 아메리칸리그 팀에 아이작 왔던데 이따 인사하든가.”
“물론 그것도 좋지. 하지만 오늘의 선발 투수끼리 사이좋게 이야기나 나누고 있으면 뜨거운 라이벌리를 기대한 팬들이 실망하지 않을까?”
작년 후반기 다저스에 트레이드로 합류해, 포스트시즌에서 극강의 활약을 보여준 아이작 란드리.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뉴욕 양키스와 두둑한 FA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제는 양키스의 실질적 에이스 자리를 차지하더니, 아메리칸리그 올스타전 선발 자리도 꿰차버렸다.
“개소리하지 마. 오랜만에 보면 어색할까 봐 그러는 거면서.”
“Koo. 다저스의 에이스인 내가 설마······.”
“어색한 거 아니면 제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친구 좀 만들어봐. 맨날 나한테만 붙어 있지 말고.”
내셔널리그 팀의 선발 투수는 다저스의 에이스 제리 헤이즈택의 차지가 됐다.
지휘봉을 잡은 감독과 같은 팀이다 보니, 어지간하면 뭐라 떠들어대는 사람이 나올 텐데. 이번 시즌 제리가 어지간한 투수가 아니라서.
단 한 경기, 이나현과 연락이 끊겼을 때만 빼고는 꾸준히 에이스급 활약을 선보였으니까.
“나는 그저 고통을 나누려는 것뿐이야. 클라라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나 혼자 다른 선수들이랑 어떻게 시시덕대겠어?”
이 기가 막히는 소리가 영 헛소리만은 아닌 게.
원래는 지금 임신 중인 이나현이 걱정된다며 출전을 고사하려다가, 이나현 본인의 설득으로 번복했었다.
근데 그건 그거고.
어디서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 핑계를 대고 있어.
“그럼 나랑도 얘기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니 약혼자는 집에서 혼자 쓸쓸하게 TV로 널 봐야 할 텐데. 고통 분담해야지.”
“어, 그건······.”
내셔널리그 최고의 타자가 최고의 투수를 신나게 갈궈대는 기묘한 모습에 아무도 이쪽으로 다가올 생각을 못 했지만.
가끔은 그런 건 신경도 안 쓰는 놈도 나오는 법이다.
“오랜만이다, Koo.”
올해 역시 후보 야수로 선정된,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주전 유격수 크리스토퍼 엘리엇.
나를 자꾸 박도현인 줄로 아는 건 참을 만한데. 지가 아주 똑똑한 줄 아는 건 가만히 보고 있기 힘들다.
“설마 네가 FA 권리를 포기하는 선택을 할 줄은 몰랐어. 그래도 오늘은 이렇게 너와 같은 팀에서 뛸 수 있게 됐으니 위안이 좀 된다. 그러고 보니 네 등번호를 새긴 필리스 유니폼이 몇 벌 남았는데 혹시 필요하면······.”
“제리, 음료수 좀 떠 오자.”
“그래.”
“음료수 마시려고? 설마 탄산은 아니겠지? 주스도 위험해. 얼마 전 뉴스에서 봤는데 액상과당이 노화를 촉진한다고 하더라. 건강하게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면 식습관부터······.”
남의 팀 유니폼에 남의 등번호를 새긴 것도 얼척없는데, 그걸 왜 나를 주냐고.
작년부터 그러긴 했는데 애가 점점 상태가 이상해진다.
* * *
한동안 귀찮게 굴던 크리스토퍼였지만, 등판이 예정된 날에는 좀 예민해진다는 말로 간신히 떨쳐냈다.
[너 원래 그런 편이었던가?]
‘얘가 뭔 소리래. 당연히 구라지.’
선발 등판이면 몰라. 감독님 말로는 위기 상황이 안 오면 안 올릴 수도 있다는 건데. 예민해지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만약 마운드에 오를 일이 생긴다면, 가능한 한 땅볼을 유도해. 필리스 투수들이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인지 보여줄 테니.”
만약 평소처럼 유격수에서 투수로 포지션을 옮기는 일이 생긴다면, 두 번째 유격수로는 당연히 자신이 올라갈 거라고 여기는 그 태도가 맘에 안 들긴 했지만.
정말로 짜증 나는 건, 이놈 전반기 성적을 보면 실제로도 그럴 확률이 높다는 거였다.
“플레이 볼!”
시즌권을 보유했거나, 비싼 돈 주고 리셀 티켓을 구매한 진성 야구팬들의 격한 환호 속에서 시작된 경기.
아메리칸리그 팀의 공격으로 시작된 1회 초에서, 제리는 야수들에게 활약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삼진 두 개와 투수 앞 땅볼로 이닝을 끝내며 던진 공은 고작 10개뿐.
“수고했어, 제리. 다른 투수들에게도 기회를 주자고.”
“알겠습니다!”
어차피 올스타전 등판 이후 로테이션을 한 번 거르기로 했으니, 한 이닝 정도 더 던져도 상관없겠지만.
올스타전의 본질이 팬서비스라는 것을 잊지 않고, 더 많은 선수들을 출전시키는 걸 선택한 오브라이언 감독님이었는데.
좋은 의도와는 달리, 내셔널리그 팬들이 만족할 것 같지는 않았다.
따아아아악―!
[담장 맞고 떨어지는 타구! 3루 주자 홈으로! 1루 주자는 3루에서 멈춤 지시를 받습니다! 중견수 앤드류 매닝의 깔끔한 펜스 플레이로 추가 실점은 막았지만 2회부터 2대 0으로 끌려가는 내셔널리그 팀입니다!]
기본적으로 올스타전에 선발되는 투수들이 각 팀의 에이스들이긴 한데. 그중에서도 급이 나뉘는 건 어쩔 수 없다.
예를 들어, 작년에 제리와 역대급 사이 영 레이스를 펼쳤던 A.D. 존슨은 어느 지구에 데려다 놔도 타자들을 찍어 누를 힘이 있다.
그런데 그 존슨을 비롯해, 소위 힘깨나 쓴다는 에이스들 몇몇이 부상자 명단에 오르며 올스타전 출전을 고사했던 것.
‘그중 몇 명이나 진짜로 다친 건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만약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다음 경기에 멀쩡하게 등판한다면, 소위 ‘뺑끼’를 쳤다고 봐야지.
1루 커버 도중 타자 주자와 충돌해 나뒹구는 게 중계에 잡혔던 A.D. 존슨은 진짜 다친 거겠지만,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헛스윙 삼진!!! 2이닝 동안 Koo에게 맞은 안타 하나를 제외하면 깔끔하게 틀어막은 아이작 란드리!! 작년 하반기에 잠시 다저스 유니폼을 입기도 했던 아이작이 오늘은 오브라이언 감독을 곤란하게 만드는군요!!]
반대로, 작년 월드시리즈에서 스윕패를 당한 굴욕을 갚아주고 싶기라도 했는지.
아메리칸리그 올스타를 이끄는 블루제이스 감독은 컨디션이 좋은 아이작에게 2이닝을 맡겼다.
‘타석에서 보니까 공이 좋긴 하더라.’
[그러게. 짧게 던질 거라 그런가?]
처음 타석에 들어섰을 땐 전 동료이기도 했던 나에게 친절하게 웃어 보인 아이작이었지만, 공은 하나도 안 친절했다.
이벤트 경기인 만큼 대놓고 스트라이크를 던졌는데도 내셔널리그 타자들이 건드리기 힘들어할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너는 안타 쳤잖아. 그럼 밥값은 한 거지.]
‘글쎄······.’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렸다가 타이밍이 얼추 읽혀서 간신히 안타를 때리긴 했는데.
유인구까지 적극적으로 썼으면 모를 일이다.
아직 이를지도 모르지만, 만약 월드시리즈에서 만나기라도 한다면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
따아아아악―!
내셔널리그 올스타는 3회 초 네 번째 투수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에이스를 올렸지만. 이쪽도 전반기 종료 직전 살짝 주춤하던 컨디션이 여기까지 이어졌던 건지.
볼넷에 이어 중전 안타까지 내주면서 무사 1, 2루 위기에 몰렸고.
따아아악!
“아웃!”
다음 타자가 진루타를 때리면서 겨우 아웃카운트 하나는 잡았지만, 여전히 1사 2, 3루의 위기가 이어졌다.
아무리 이벤트 경기라지만 무력하게 승기를 넘겨주는 건 오히려 팬들에게 안 좋은 추억을 남겨주는 셈.
그리고, 오브라이언 감독님에겐 이런 위기 상황에서 등판시키겠다고 사전에 말해놓은 투수가 있었다.
“Koo. 이리 와줘야겠다.”
감독님의 손짓에 마운드 쪽으로 걸어가자마자, 연이은 실점에 시큰둥해져 있던 내셔널리그 팬들이 Koo 콜을 쏟아냈고.
투수로서의 올스타 게임 첫 등판이 그렇게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