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팀 스피릿(2) >
1사 2, 3루.
안타 하나면 순식간에 넉 점 차로 벌어지는 상황.
만약 여기서 홈런이라도 맞는다면 투수로서의 내가 올스타에 뽑힐 만한 선수는 아니라던 놈들이 기고만장해져서 날뛸 거다.
[감독님은 왜 괜히 인터뷰에서 쓸데없이 불을 질러 가지고······.]
그렇게 투덜대는 박도현이었지만, 글쎄다.
‘내가 보기엔 일부러 부담을 준 것 같기도 한데.’
[그건 또 뭔 소리야?]
‘오늘 내가 실패하는 걸 은근히 바라실지도 모르지.’
선수들한테야 두고두고 영광이겠지만. 감독님에겐 정규시즌과는 상관없는 이벤트 경기일 뿐.
게다가 마운드로 부를 때도, 결과는 상관없다는 말을 강조하듯 반복했다.
어그로는 본인이 끌었으니, 뒷감당도 마땅히 본인이 해주겠다는 것처럼.
‘내가 올해 홈으로 들여보낸 주자가 한 명도 없잖아.’
자책점이 0인 걸 떠나서, 앞선 투수의 책임 주자에게도 득점을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무사 만루도 무실점으로 막고 내려온 적이 있으니까.
소화한 이닝이 워낙 적어서 크게 이슈는 안 됐지만, 다저스 팬들의 기대감이 지나치게 올라가긴 했지.
팀 성적과 상관없는 무대에서 거품을 한 번 빼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셨겠지.
실패하더라도 꼴이 우스워지는 건 내가 아니라 설레발을 친 감독님 본인이니까.
‘물론 이런 깊은 뜻 없이, 그냥 막연히 나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사지로 몰아넣은 걸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다면 언제든 감독의 부담스러운 기용의 피해자로 돌변해 동정 여론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다.
아무리 평소 이런 상황을 자주 마주쳤다 해도, 지금 상황이 가혹하다는 건 팩트이기도 하지.
1루가 비어 있고 3루가 채워져 있으니, 첫 아웃카운트로 무조건 삼진을 잡아야 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Koo! 말 안 해도 알지?”
내 자리에 교체되어 들어오고는, 느끼한 웃음과 함께 가슴을 팡팡 치는 크리스토퍼를 보니 삼진이 더욱 간절해진다.
말을 안 하긴 개뿔이.
지금 니 입에서 튀어나오는 게 말이 아니면 소냐.
괜히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눌러 삼키며 마인드 컨트롤에 들어갔다.
글러브를 바꿔 끼고 투구판을 밟는 순간, 내야수 구현기는 이 세상에 없는 투수가 된다.
‘투타겸업이 빡센 걸 평가에 반영해달라는 말, 한마디도 한 적 없는데.’
투수 구현기를 따로 놓고 평가해야 한다는 사람들이나, 새로운 투수가 올라왔는데도 별 관심 없이 시시덕대기 바쁜 아메리칸리그 올스타는 잊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빅리그 선발 로테이션을 소화할 수 있는 투수에게 오직 한 이닝만 처리하는 임무가 주어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 * *
구현기가 마운드 위에서 연습구를 던질 때.
아메리칸리그 올스타 팀의 덕아웃을 차지한 선수들의 표정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시큰둥하거나, 아니면 비웃거나.
“지금 타자 좌타자지? 대타로나 나가 봤으면 좋겠네.”
“쟤 스위치야. 오른손 비중이 높긴 한데, 왼손으로도 던진대.”
“커브가 괜찮다고 듣긴 했는데······.”
대부분의 선수들은 그냥 별 관심이 없었다.
다저스의 인터리그 일정은 이미 끝났고. 남은 건 월드시리즈인데.
아무 팀이나 그 무대에 도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저쪽 감독도 참 감 없어. 여기서 쟤를 왜 쓰냐?”
그러니까, 굳이 본인들과 큰 연관도 없는 투수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본인 인성에 하자가 있다는 걸 선전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면 매 경기 언론의 관심이 쏟아지는 구현기를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고 있거나.
“아니, 전반기에 20이닝 좀 넘게 던졌는데, 그만큼 관리해주면 누가 못하겠냐고.”
“어쩌다 한두 명 잡고 내려오는 투수를 올스타전에 세우는 용기가 가상하지 않냐?”
애초부터 리그가 다른 선수.
게다가 타자로서의 활약을 다룬 기사만 엄청나게 쏟아질 뿐, 투수로서의 성적은 전혀 조명받지 못하다 보니.
아는 게 거의 없었기에 오히려 용감하게 떠들어댈 수 있었다.
“쟤 던지는 거 본 적은 있어?”
“글쎄, 작년 포스트시즌 때 5타자 연속 삼진 잡았다던데.”
“근데 그건 점수 차 많이 날 때 패전처리로 올린 거라 타자들이 스윙 제대로 안 했을걸?”
“월드시리즈에서는?”
“무슨 0구 세이브인가 기사 봤는데. 1루 주자 견제사로 잡아냈던······ 가······.”
신나게 떠들어대던 선수는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바로 그 경기에서 초구를 던지기도 전에 견제사를 당한 주자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으니까.
‘웃기고들 있네.’
꿈에 그리던 FA를 맞이해, 소속팀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5년짜리 연장계약에 사인한 유진 리빙스턴.
팀의 주전 2루수로 완전히 정착한 그는, 아메리칸리그의 네임드 2루수들이 줄줄이 사퇴하며 벤치 멤버로 올스타에 선정되는 행운까지 누렸다.
유진은 월드시리즈에서의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의 타구로 옛 동료에게 부상을 입히고.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견제사를 당하며 그대로 내줬던 경기.
‘동료가 눈앞에서 부상을 당했을 때조차도 빈틈이 없는 놈인데, 1사 2, 3루가 무슨 대수겠어?’
투수로서의 구현기를 타석에서 상대해본 적조차 없는 유진이었지만.
그날, 아무런 망설임 없이 빠르게 1루로 돌아서던 구현기와 눈이 마주친 순간.
승리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그 눈빛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공포를 느꼈다.
온갖 재능을 덕지덕지 이어붙인 괴물에, 지독한 승부욕을 끼얹어 완성한 무언가.
그것이 구현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마운드 위의 구현기는 타자를 순식간에 몰아붙이더니 아웃카운트 하나를 따냈다.
덕아웃 안의 멍청이들처럼 대놓고 비웃지는 않았어도, 지금 막 돌아오고 있는 타자 역시 오늘 로스터에 오른 투수들 중 그나마 구현기가 상대할 만하다고 생각했을 터.
그런 상대에게 초구 변화구로 카운트를 잡힌다?
아무리 자기만의 존을 확실히 정해둔 타자라도, 평소보다 유인구에 배트를 참아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거다.
“으아아아아아아악!!!”
“Koooooooooooo!!!”
“넌 진짜 미친놈이야!!! 하필이면 X 같은 다저스랑 장기계약을 맺어가지고!!!”
내셔널리그 팬들의 광기 어린 환호가 쏟아지자, 좀 전까지 구현기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던 선수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심지어 평소엔 구현기만 보면 이를 갈아대던 파드리스며 자이언츠 팬들도 위 아 더 월드를 이룩했다.
삼진 하나에 완전히 넘어간 분위기.
“스트라이크!”
전광판에 다음 타자가 떨어지는 커브에 크게 헛치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며, 유진 리빙스턴은 조용히 기대감을 키웠다.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덕아웃 분위기를 틈틈이 체크하던 감독.
그의 눈이 좀 전에 구현기를 비웃던 벤치 내야수들을 훑고 지나가는 걸 유진은 놓치지 않았다.
유진은 오늘 지휘봉을 잡은 감독의 성향을 잘 알았다.
미디어에 비치는 모습은 선수들에게 다소 휘둘리는 젊은 감독이지만, 어쨌든 팀을 월드시리즈까지 이끌었던 감독.
제대로 상대해보지도 않은 투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선수를 신뢰할 사람은 아니다.
* * *
1사 2, 3루에서 연속 삼진으로 이닝 종료.
초구 스트라이크로 혼을 빼놓은 뒤, 타자에게 계속 선택을 강요하다가 결정구 커브로 아웃카운트를 빼앗았다.
‘새삼 생각하는 건데, 내 멘탈이 진짜 개쩌는 것 같아.’
[뭔데 또.]
뭐긴 뭐야.
이 미친 커브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도 제정신을 유지했던 과거의 나를 칭찬하는 거지.
릴리즈 포인트가 패스트볼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면서, 타자 입장에선 구종 파악에 시간이 더 걸리는 데다.
낙폭과 구속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도 있으니, 카운트가 몰리는 순간 타자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는 거다.
오늘 컨디션이 좋은 편이라 유독 잘 긁힌 것도 있지만.
“Koo!!! Koo!!! Koo!!! Koo!!!”
온갖 팀의 팬들, 심지어 일부 아메리칸리그 팀 팬들까지도 한목소리로 보내주는 Koo 콜에 화답하고.
은근히 아쉽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어깨동무를 해 오는 크리스토퍼를 밀쳐내면서 도착한 덕아웃.
“4회엔 다른 투수가 올라갈 거야.”
그곳에서 버선발로 뛰쳐나온 감독님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말로 반겨주었다.
올스타전에서의 오늘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통보.
“만약 3회 말에 제 타석이 돌아오면요?”
“나가고 싶나?”
“당연하죠.”
“그럼 나가야지. 오늘은 자네가 주인공이야.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그렇게 말은 했지만. 두 번째 타석이 돌아오리란 기대는 별로 없었다.
아메리칸리그 선발투수 아이작에게서 얻어낸 건 고작 1회 말 안타 하나에, 그마저도 바로 더블 플레이로 잡혔으니. 7번 타자부터 시작되는 3회 말 공격.
오늘 나올 투수들이 다들 만만치 않다는 걸 생각하면, 아무리 9번 타순에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들어오며 타선의 무게감이 늘어났다고 해도 나까지 기회가 오긴 어렵겠다고 봤는데.
[LA 다저스의 캡틴! 2번 투수! Hyun! Ki! Koo!!!]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도 베이스를 주자들로 꽉 채운 상황에서.
[저 투수는 차라리 아까 2루수가 처리 제대로 못 하길 바랐을 것 같은데?]
아메리칸리그 팀의 두 번째 투수는 처음 출전하는 올스타전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는지, 1사 1, 2루의 위기를 만들어놓고 다음 투수에게 바통을 넘겼는데.
내 바로 앞 타자가 내야 깊숙이 파고드는 타구를 날렸고, 상대 2루수는 그걸 불안정한 자세로 잡아내긴 했지만 송구까지 시간이 걸리며 주자 올 세이프.
1사 만루에서 내 타석이 돌아왔다.
‘얘를 여기서 또 만날 줄은 몰랐네.’
본의 아니게 내 앞에 만루 밥상을 차려준 2루수는, 좀 전에 대수비로 투입된 유진 리빙스턴.
얘가 타구를 놓쳤으면 2루 주자는 홈에 들어왔을 텐데.
같이 한솥밥을 먹었던 정도 있고 해서 눈인사를 건넸더니, 곧바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얘랑 딱히 싸웠던 기억은 없는데 왜 저러지.
설마 월드시리즈 때 견제사 당한 것 때문에 아직도 꽁해 있나.
[어떻게든 출루만 하면 MVP는 확보하겠는데.]
지금 상황을 짚어내는 박도현의 말에, 다시 투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볼넷만 얻어낸다고 해도 멀티 출루에, 위기 상황에서 등판해 무실점으로 막아내기까지.
누가 갑자기 미쳐서 멀티 홈런이라도 뽑아내지 않는 한 이 정도의 임팩트를 이기긴 어려울 거다.
“G―R―A―N―D!!!”
“Slam!!!!”
물론 팬들은 그것만으로는 만족을 못 할 것 같지만.
‘지금까지 올스타전에서 그랜드슬램이 딱 한 번 나왔댔나?’
올스타전은 경기 특성상 만루 상황 자체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애초에 에이스급 투수들만 싸그리 모아둔 데다가, 조금만 흔들린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교체해버리니.
주자가 있고 없고를 떠나 홈런 자체가 그리 자주 나오는 편도 아니지.
게다가 이런 기록은 의식할수록 오히려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랜드슬램을 외쳐대는 팬들이야 뭐······ 사실 야구장에서 팬들이 할 일이 소리 지르고 즐기는 것 말고 뭐가 있겠어.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본인 플레이를 해내는 게 선수가 해야 할 일이지.
첫 타석에서 아이작의 패스트볼을 연달아 커트해내다가, 타이밍을 맞춰 안타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일단 지켜보면서 오늘 투수의 컨디션을 파악해보려고 했는데.
쐐애애애액!
하필이면 가만히 보고만 있기 힘든 공이 들어왔다.
몸쪽으로 꽉 차게 던지려다, 혹여 타자를 맞출까 하는 걱정에 완전히 붙이지 못한 애매한 코스.
올해 스프레이 히터로 변신하기 전, 작년에 때려낸 거의 모든 장타는 바로 이 코스에서 나왔다.
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타구가 어디로 날아가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환호하는 건지 경기를 일으킨 건지 헷갈리는,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열광하는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야를 한 바퀴 돌아 홈으로 돌아갔고.
관중들과 딱히 상태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감독님이 덕아웃 입구까지 나와 계셨다.
“그냥 니가 1번부터 9번까지 다 해 먹어라, 이 미친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