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팀 스피릿(3) >
[2038 All―Star Game MVP는 다저스의 캡틴 Hyun―Ki Koo!]
[Koo, 홈런 더비에 이어 MVP까지 쓸어 담으며 올스타전 완전 접수!]
[결승 홈런+승리 투수, 다저스의 새로운 승리 공식 ‘Koo Game’ 올스타전에 상륙!]
[올스타전 승장 오브라이언 감독, “Koo 같은 선수를 인터리그와 월드시리즈 말고는 만날 일이 없는 아메리칸리그 선수들은 얼마나 행운인가?”]
[2이닝 완벽투에도 올스타전 승리투수 등극 실패한 아이작 란드리, “다저스 시절 Koo의 인상? 동료에겐 자주 웃음을 보였지만 적에겐 그렇지 않았다. 내가 아메리칸리그로 이적한 건 다 이유가 있다.”]
[내셔널리그 올스타의 두 번째 유격수로 등장해 3타수 2안타로 대활약한 크리스토퍼 엘리엇, “마운드에 오른 Koo를 뒤에서 지켜보는 건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Koo, 끈질긴 추파 보내는 ‘절친’ 크리스토퍼에게 까칠한 반박! “그 친구 하는 말 일일이 신경 쓰는 기자가 아직도 남아 있었나요?”]
* * *
이벤트 경기라 크게 힘 안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역대급 올스타전을 만들어버렸다.
운 좋게 만루 기회가 왔는데, 딱 그때 좋아하는 코스로 공이 들어올지 누가 알았나.
‘또 난리 났네. 에이전시 통하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듣지를 않아요.’
[그냥 핸드폰 꺼놓으라니까 그러네.]
개인적인 취재 요청을 싹 다 끊어낸 분풀이라도 하려는 건가.
요새는 안 그러나 싶더니 또 허위사실을 퍼뜨리는 언론도 있다.
누가 누구랑 절친이래. 뒤질라고 진짜.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히려 애쓰며, 올스타전으로 얻은 것들을 정산했다.
홈런 더비 상금 일부는 이미 기부가 진행 중이고. MVP 부상으로 받은 픽업트럭은 도아에게 선물하기로 했는데.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게 남았지.
‘만루홈런 보상이 MVP 보상보다 더 클 줄은 몰랐네.’
[아무리 운이 따라야 한다고는 해도, 워낙 희귀하니까.]
올스타전 그랜드슬램 업적은 3,000포인트, MVP 업적은 2,000포인트.
기존에 모아둔 것들과 합치면 새로운 재능을 하나 더 뽑기에는 충분했다.
[어딜 도망가(B등급) ― 상시형]
○ 바깥쪽 코스에 대한 선구안이 보정됩니다.
○ 유인구에 속을 확률이 줄어듭니다.
‘몸으로 말해요’처럼 타구의 질까지 보정되는 사기적인 재능은 아니지만, 충분히 유용해 보인다.
내가 그나마 약점을 보이던 코스가, 바깥쪽으로 잘 제구되면서 볼 끝이 지저분한 공이었는데.
좋은 타구를 만들기 힘든 공에 손을 덜 대는 것만으로도 더 정확한 타격이 가능해질 테니까.
“일정 이따위로 짠 놈 명치에 딱밤 두 대만 때려주고 싶다.”
“푹 쉬었다 와서 그런지 더 가기 싫어······.”
“그래도 장거리 원정은 이번이랑 8월에 한 번 갔다 오면 끝이잖아. 좀만 힘내보자고.”
“뭐야, 제리. 넌 올스타전 뛰고 왔다고 은근히 우리 멕이는 거야?”
“어?! 아니, 그럴 의도는 전혀······.”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이번 시리즈에는 나올 일도 없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당장 구속해! 그리고 밀 머니를 뺏어!”
“어차피 포커 치면서 죄다 털릴 텐데 굳이 지금 뺏을 필요 있어?”
새로운 무기를 장착한 채 맞이한 후반기의 첫 일정은, 무려 동부지구 원정 9연전.
그중 첫 상대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였다.
원정 경기에서 홈 경기보다 반응이 살벌한 건 맞는데, 그 정도가 좀 심한 팀이 있는데. 필리스가 그 대표격이다.
상대 팬들의 야유가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하는 나조차도 질릴 때가 있을 정도로.
“Booooooo!!!”
“어디서 X밥 냄새가 난다 했더니 너희구나! 반갑다 퍼랭이들아!!”
“얌전히 스윕패나 처먹고 꺼져! 그럼 무사히 보내주지!”
하여튼 영 마음에 안 드는 동네다.
평범한 시민처럼 위장하고 있다가, 선수단 버스가 지나갈 때면 야유와 함께 손가락 욕설을 날리는 필리건들도 싫고.
하지만 필라델피아 원정 때마다 짜증이 치솟는 이유는 따로 있다.
“저번에 약속했었지? 필라델피아에 오면 내가 풀코스로 대접해주겠다고.”
필라델피아에는 미친놈이 한 명 있거든.
내 몸에 박도현의 영혼이 깃들었다느니 하는 네크로맨서에서, 내가 해리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다고 지멋대로 진단하는 정신과 의사로 진화하긴 했는데.
결이 달라졌을 뿐이지 미친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씹어댈 거면 대체 왜 부르는 대로 따라오는 건데?]
‘그게······.’
솔직히 사람 불러놓고 마냥 개소리만 했으면 절대로 안 왔을 텐데.
얘한테서 얻어낸 게 은근히 많다.
같은 빅사이즈 유격수로서 부상을 방지하는 수비 요령도 그렇고. 챔피언십시리즈 때는 브레이브스 선수들에 대한 정보도 받았지.
‘사람 단물만 빨아먹고 손절하는 것도 보기 좀 그렇잖아.’
[개소리하네. 얘 훼까닥 하면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그러는 거면서.]
‘티 나냐?’
지네 팀 유니폼에 뜬금없이 내 이름 새겨다가 SNS에 올리는 미친놈인데. 가만히 놔두면 또 무슨 짓을 하겠어.
“앞으로도 투수는 계속 병행할 생각이야?”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 괜히 지루해졌는지 크리스토퍼가 또 헛소리를 한다.
“크리스토퍼, 그걸 다른 팀 선수인 네가 물어보는 건 좀 그런데.”
“크리스라고 불러달라니까. 그리고 딱히 네 투타겸업을 말리고 싶은 생각도 없고.”
“아니 뭔 소리여. 니가 뭔데 말리고 말고 그런 소릴 해.”
“그냥, 마운드에 올라간 너를 직접 보니까, 네 안의 Park이 점점 사라져가는구나 싶더라고. 너를 통해 원하는 걸 이루고 나면 홀연히 사라져버릴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러더니, 아련한 듯 똥폼을 잡으며 나를 쳐다보는 크리스토퍼.
“만약 그날이 오더라도, 다시 투수로만 뛰진 않을 거지? Park 뒤에 숨어 있는 진짜 너도 그리 재수 없는 놈은 아닌 것 같거든.”
여기가 한국식 식당이 아닌 걸 감사히 여겨야 할 거다.
안 그랬으면 이미 숟가락으로 마빡 X나 세게 때렸을 거거든. 아무리 그래도 포크나 나이프로 때리는 건 특수상해가 성립될 위험이 있으니까.
[아주 혼자 드라마 찍고 있네.]
‘저 새끼 그냥 개 똥촉 주제에 은근히 맞는 구석도 있는 게 제일 빡치지 않냐?’
드르르륵.
“음식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때마침 음식이 나와주면서 크리스토퍼 극장은 겨우 막을 내렸다.
[미친. 개맛있어.]
‘이 새끼 친구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대체 이런 덴 어디서 알아 오는 거지?’
어디 오면 풀코스로 쏘겠다는 거, 말만 요란하고 실속은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애가 짜증나긴 해도 뭘 자꾸 해주니까 관계를 못 끊는 걸지도 모르겠다.
* * *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홈구장 시티즌스 뱅크 파크.
동부와 서부라는 지리적 한계 때문에, 아무리 전국구 팀인 다저스라고 해도 원정팬들은 한 줌에 불과했고.
남은 좌석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지구 선두를 달리면서 한창 충성도가 높아진 필리건들의 차지가 되었다.
“모가지는 잘들 씻고 왔냐?! 오늘 경기장에 걸어둘 건데 예쁘게들 보여야지!!!”
“찔러! 태워! 그리고 증거를 인멸해!!!”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원정 덕아웃을 향해 살벌한 말들이 쏟아졌지만, 경악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X 같은 필리건 새끼들, 하고 나지막이 불평이나 늘어놓을 뿐.
저 미친놈들은 다저 스타디움에 원정을 와 놓고도 똑같이 저랬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매 경기 메이저리그의 기록을 덧칠하고 있는 구현기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FA로 자기 팀에 넘어올 확률이 아예 사라져서인지는 몰라도, 오히려 더 살벌해지기도 했고.
“Kooooo!!! 낯짝은 그따위로 생겼는데 어디 방망이라도 쓸 만한지 볼까?!”
“네놈이 방망이에 한이 맺힌 듯 휘두르는 이유가 뭔지 다 알아!!! 아무리 볼품없다고 해도 엉뚱한 데 화풀이하면 안 되지!!!”
논리 따위는 없는 원색적인 비난들.
그도 그럴 게, 구현기에겐 살살 긁어서 멘탈을 흔들 만한 약점이 별로 없었다.
인종을 건드렸다간 그대로 퇴장당할 수도 있고. 여자친구를 건드리자니 전설적인 선수의 여동생이라 쓸데없이 문제가 커질지도 모르니.
홈팀 덕아웃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눈살을 찌푸렸다.
“필라델피아 사람들이 폭력적이라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왜? 야구장에선 맞는 말이잖아.”
지나가던 동료의 물음에, 크리스토퍼는 원정 덕아웃을 주시하며 대답했다.
탐욕이 가득 깃든 표정으로.
“Koo가 우리 팀에 왔을 때 빨리 적응하기 어려울 거 아냐.”
“뭐? Koo는 이미 다저스랑······ 아니다, 내가 미안해.”
황당해하던 동료는 그의 표정을 보더니 곧장 뒤돌아 도망쳐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리스토퍼의 머릿속에는 아침에 확인했던 온라인 기사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팬들도 의아해하는 뜻밖의 절친··· Koo와 크리스토퍼 엘리엇, 필라델피아 시내에서 함께하는 장면 포착!]
자신과 구현기의 친분을 강조하는 기사.
아는 기자들을 동원해 퍼뜨린 이 기사는, 그의 장기적인 계획을 위한 포석이었다.
‘장기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내가 포기할 줄 알았나?’
정말 놀랍게도,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구현기와 한 팀에서 뛰는 것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우선 구현기와 꾸준히 교류하며 친분과 라이벌리를 강조한다.
박도현이 살아 있을 때, 내셔널리그의 대표 유격수를 논할 때면 항상 크리스토퍼의 이름이 따라붙었던 것처럼.
서로 맞붙을 때 명경기를 만들어내며, 둘이 한 세트가 되었을 때의 기대감을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차근차근 준비하면서, 구현기의 성적이 주춤할 때까지 몇 년이든 기다린다.
아무리 페이스가 좋아도 주춤하는 타이밍이 전혀 오지 않는 선수는 없다. 4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계약을 생각했을 때, 연봉 값을 못 한다는 타박에 구현기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시기가 반드시 온다.
바로 그 타이밍에, 그때쯤이면 이미 구현기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필리스의 대체 불가능한 선수가 되어 있을 자신이 ‘필리스는 언제든 Koo를 두 팔 벌려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나선다면?
‘완벽해.’
불행하게도, 크리스토퍼 엘리엇에게는 이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실행할 만큼의 용기와 재력이 있었다.
만약 구현기가 그들을 절친으로 엮은 기사를 보고 누가 자꾸 이런 개소리를 하냐며 길길이 날뛰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랬다.
계획에 따르면, 그라운드 안에서도 해야 할 일은 있었다.
친분만으로는 대중들의 머릿속에서 한 세트로 묶이기 어렵다.
이미 역대급 시즌을 보내고 있는 구현기이기에, 그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최소한 올해는 2인자로밖에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대등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연속 안타 기록을 끊어내는 거라던가.’
따아아악―!
“아웃!”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했던가.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구현기가 첫 타석에서 만들어낸 안타성 타구를 정신 나간 다이빙 캐치로 지워버렸다.
“이게 유격수란다, 꼬마야!!”
“이제 우리 투수들이 남은 경기 내내 볼넷만 주면 어떡할래?”
필리스 팬들의 원색적인 비난과 조롱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것도 언젠가는 돌이켜보며 함께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될 거라고 그는 진심으로 믿었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지?’
크리스토퍼는 올스타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운드에 오른 구현기의 등 뒤를 지켜주는 경험도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타석에서 배트를 휘두르고 내야수로서 그라운드에 서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린다.
주체하기 힘든 아드레날린이 표정에 드러나는 그를 보며 팀원들이 미친놈 보듯 쳐다보며 수군거렸지만, 그는 딱히 그런 데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다.
‘어서 와, Koo.’
3회 초.
2사 1루 상황에서 두 번째 타석을 맞이한 구현기.
마운드 위의 투수는 좌타자의 땅볼 유도에 특화된 구종을 여럿 구사할 수 있다.
설령 자신에게 타구가 오지 않더라도, 필리스의 내야 수비는 메이저리그 전체를 놓고 봐도 상위권에 속한다.
다시 한번 구현기를 철저하게 봉쇄하면서, 초조해진 그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만끽할 준비가 된 크리스토퍼는.
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바깥쪽 패스트볼을 결대로 밀어친 타구가 좌측 담장으로 향하는 걸 보며.
투수보다도 더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이게······ 왜······.’
그는 잠시 잊고 있었다.
유격수는커녕 그 어떤 야수도 관여할 수 없는, 점수를 확실하게 가져오는 플레이가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