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팀 스피릿(4) >
올스타전 이후 얻어낸, 바깥쪽 공에 대한 선구안을 보정해주는 재능.
지금까지 새로운 재능을 얻었을 때 늘 그랬듯, 타석에서의 낯선 감각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기록이 깨지는 것도 각오했는데.
예상은 좋은 방향으로 빗나갔다.
필리스와의 원정 시리즈 1차전, 첫 타석에서 투수는 바깥쪽으로 공 세 개를 연달아 던졌고, 그중 3구가 들어오는 순간 앞선 두 개의 공과는 달리 손을 대봐도 괜찮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과는 유격수 직선타였지만, 크리스토퍼의 미친 수비가 아니었다면 충분히 안타가 되었을 타구.
물론 두 번째 타석에서의 홈런은, 겁도 없이 똑같은 구종과 코스를 선택한 투수의 안이한 판단과 타자 친화 구장에 속하는 시티즌스 뱅크 파크라는 환경의 이점 없이는 어려웠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핫콜드존에서 그나마 새파랗던 코스도 연한 하늘색 정도로 바꿔놓으며, 약점을 메웠다는 건 확인했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던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 홈런 이후 크리스토퍼가 급속도로 시무룩해진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고.
[LA 다저스, 연장까지 가는 혈전 끝에 승리하며 필리스에 스윕승 거둬··· Koo는 시즌 4세이브 수확]
올스타전 선정 인원이 적은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는지, 푹 쉬고 온 선수들도 적재적소에서 활약하면서 원정 9연전의 첫 시리즈는 생각보다 가뿐하게 넘어갔다.
그나마 3차전에서 연장까지 넘어가며 힘을 좀 빼긴 했는데.
10회 초 가까스로 한 점을 짜내고, 8회 도중 올라가 9회까지 20개 넘게 던진 마무리 새뮤얼 대신 10회 말에 등판해 세이브까지 챙겼고.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은 순간, 대기 타석에 있던 크리스토퍼가 지가 삼진당한 것마냥 배트를 패대기치는 모습이 또 합성 소재가 되어 실컷 놀림당하는 모양인데.
본인은 신경도 안 쓰겠지. 이해하려 해봤자 나만 손해다.
[후반기 첫 시리즈부터 스윕승! 다저스, 역대 가장 빠른 타이밍에 PS 매직넘버 완성하나?]
아무튼.
다저스 팬들이며 LA 언론은, 3차전을 제외하면 큰 위기 없이 승리를 챙겨오는 모습에 기대감을 부풀린 모양이었다.
가을 냄새는커녕 쪄 죽게 생긴 7월부터 매직넘버니 뭐니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LA 다저스, 메츠와의 원정 시리즈 3차전 3―4 석패로 연속 루징 시리즈··· 원정 9연전 5승 4패에도 팬들은 ‘한숨’]
그리고 개처럼 떡상한 기대감은 개처럼 멸망했다.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선두를 달리던 필리스를 스윕하고 2위 싸움을 하는 두 팀에게 2승씩을 선물했으니 동부지구를 더 재미있게 해준 거 아니겠느냐고, 몇몇 선수들은 뻔뻔하게 나오기도 했지만.
다저스 팬들이 그걸 칭찬해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사실 장거리 원정에서 5승 4패면 선방한 건데.’
흐름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는 야구라는 스포츠의 특성상, 연속 루징 시리즈를 당하며 팀 분위기가 처질까 걱정하는 마음도 이해는 간다.
당장 작년에도 후반기에 9연패를 하며 주춤하기도 했고.
그러나, 패장 인터뷰에서 감독님은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기자들을 단호하게 쳐냈다.
“팀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그건 다른 팀들도 기나긴 시즌을 이어가는 동안 충분히 겪을 수 있는 것들뿐이죠. 농사를 망칠까 두려워서 농작물을 죄다 뽑아버리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 * *
감독님이 꺼낸 이 알쏭달쏭한 비유는, 팬들의 비난이 특정 선수에게 쏠리는 걸 저격하는 게 아닌가 싶다.
[션 이 새끼는 대체 왜 데려온 거야?]
└ 그러게. 컵스에서도 단장 불륜 증거 갖고 있는 거 아니냐는 소리나 듣던 놈인데.
└ 그럼 우리 프런트는 얘를 대체 왜 오클라호마로 안 보내는 건데? 그새 우리 단장 알몸 사진이라도 찍었나?
└ 이 새끼는 하라는 야구는 안 하고 파파라치 짓이나 하고 다니나?
클레망을 컵스에 보내고 대신 받아온 선수 중 하나인 션 언더우드.
컵스가 애지중지하던 특급 유망주였지만, 고질적인 제구 불안으로 끝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번에 다저스로 오게 됐는데.
사실 처음에는 팀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더라.
“션, 너도 포커 칠 줄 알지? 저기 제리라는 놈만 잘 공략하면 최소한 룸서비스 시켜 먹을 돈 정도는 확보할 수 있는데······.”
“미안. 지금은 좀 자두고 싶어서.”
“어, 그래. 뭐······.”
전 소속팀을 향한 애정이 강한 선수일수록, 트레이드를 받아들이기 힘든 건 당연한 일이긴 한데.
적응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면 누군가는 나서서 액션을 취해야 한다.
만약 션이 다저스에 온 게 작년이었다면 로버트의 정신교육으로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올해의 투수조 조장은 앤서니 아우젤로였다.
“션, 나는 네 마음 이해해. 꼭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너를 잘못 사 왔다느니 하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 정말요······?”
“왜냐하면 지금 네 성적이 사실 컵스에 있을 때랑 크게 다르진 않잖아? 네가 꾸준히 오락가락한다는 걸 알면서 사 온 건데, 어쩜 우리 프런트를 그리 부당하게 깎아내릴 수가 있지?”
“······.”
물론 이런 팩트폭력은 자존심 강한 선수에게는 역효과일 수도 있는데, 자기를 버린 팀한테 대놓고 불만 표시도 못 하는 놈한테 해당 사항은 없다.
앤서니와 바통 터치를 하듯, 투수 코치가 한풀 꺾인 션을 살살 꼬드기기 시작했다.
“투구판 밟는 위치가 약간 가운데로 쏠린 것 같은데 그건 의도적으로 그런 건가? 팔꿈치 각도가 작년에 비해 조금 높아진 것 같은데 이건 무슨 이유로 바꾸려고 한 거고?”
선수를 고쳐 쓴다는 게, 투구폼이나 위닝 샷에 손을 댄다는 게 아니다.
조금씩 이런저런 변화를 시도해보면서 자기에게 맞는 밸런스를 찾아가는 거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패전과 블론은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그건 다 세금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까. 어떻게 던지는 게 편안한지는 경기에서 계속 찾아보자고.”
사실은 좌완 불펜이 조쉬랑 김희영 말고는 다들 고만고만해서, 그나마 구속이라도 빠른 션에게 기회가 많이 돌아가는 거겠지만.
어쨌든 기댈 구석이 생긴 션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원정 9연전에서 1패와 1블론을 기록하면서 성적 자체는 볼품없었지만, 코칭스태프들은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이 개선되고 볼넷이 줄어든 걸 높게 평가했다.
맞아도 되니 볼넷은 주지 말라는 간절한 부탁을 아주 잘 실천하고 있었으니까.
“이봐, 션.”
“아, Koo. 무슨 일이야?”
지금까지의 나였다면 본인이 감당할 문제라고 일축하며 지나쳤겠지만.
이제는 팀 내 최고 연봉자이기도 하고. 클레망에게 받은 주장 완장도 있으니.
힘을 보탤 수 있는 부분은 보태기로 했다.
“내가 아는 놈 중에 크리스토퍼 엘리엇이란 놈이 있는데, 그놈이 글쎄 다저스에서 트레이드된 이후로······.”
트레이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황하는 선수가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교재는 없다.
“그, 그렇구나······. 이제는 컵스를 찍어 누른다는 각오로······.”
물론 교재가 아무리 좋아도 학생이 잘못 이해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지만.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전 소속팀에 대한 복수심이 기량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해석한 듯하다.
나도 모르겠다 이제.
의욕은 생긴 것 같으니 야구의 신이 노하지는 않겠지.
* * *
이렇듯, 지금 두드러지는 문제가 그리 심각한 건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당장의 1승 1패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성적을 두고 주춤한다고 볼 수도 없지만.
설령 지금보다 더 삐걱대더라도 다저스는 언제든 본 궤도를 되찾을 수 있는 팀이다.
물론, 범위를 개인으로 좁힌다면 문제가 없다고는 절대로 못 하겠지만. 그건 감독님 말마따나 이 세상 어느 야구팀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소리다.
타구가 잘 안 뻗는다거나, 유인구가 타자의 눈을 속이지를 못한다던가, 뭐 이런 개인 단위의 문제가 겹쳐 팀의 부진으로 이어지는 거지.
그리고, 나 역시도 이런 개인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슬슬 기록이 방해가 되는 것 같은데.’
개막 이후 지금까지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아직까지 진행 중인 연속 안타 기록.
남들한테 말하면 그게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욕이나 먹겠지만.
이제는 정말로 기록을 이어가는 게 아무런 이득을 주지 못하고 있다.
관심이 지나치다거나, 투수들이 승부를 피한다거나, 이제 이런 건 크게 신경도 안 쓰일 지경인데.
그보다 훨씬 원초적인 문제가 닥쳐오고 있다.
‘이러다 힘들어 뒤질 것 같아.’
중간중간 다른 포지션, 클레망의 이적 이후로는 주로 1루수로 출장하고도 있지만. 만약 ‘체력은 근력’이 없었다면 진작에 퍼졌을 정도로 빡센 일정이지.
한번은 첫 타석과 두 번째 타석 모두 안타를 때려낸 이후 좀 일찍 대주자로 교체됐더니.
이때다 싶었는지 감독님을 저격하는 기사들이 쏟아지기도 했다.
승리를 위한 기용이 아니라, 기록을 위한 기용이라나.
개소리긴 한데, 실제로 그 경기에서 역전패했으니 반박할 말이 마땅치 않았었지.
이제는 기록이 끊긴 후 팀의 사기가 떨어지고 말고를 걱정할 겨를도 없이, 그냥 되면 되고 말면 말고 식으로 타석에 들어가는데도.
따아아아아아악―!
[오늘도 Koo의 방망이는 건재합니다! 이제는 이 선수가 안타를 때려내는 경기가 과연 오기나 할지 의문이군요! 종일 엎치락뒤치락하던 오늘 경기에서 다저스가 다시 한번 앞서나가는 쓰리런입니다!! 시즌 35호!!!]
마음을 비우니까 결과가 따라온다는 옛 격언이 들어맞았던 걸까.
대충 맞겠다 싶으면 과감하게 배트를 돌렸더니, 오히려 장타가 늘어나는 결과가 따라왔다.
그러나.
아무리 볼넷을 주고 시프트를 펼쳐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이 질긴 기록도.
결국 막을 내리는 날이 오긴 왔다.
* *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작년 한 해 동안은 이런저런 악연이 있었던 팀인데.
직접 부딪혔던 선수들은 전부 일찌감치 정리됐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카일 캠프마저도 전반기 종료 직전 끝내 지명할당으로 방출되면서, 이제 이 팀 자체에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파드리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베이스 온 볼스! 대타 채드윅 마틴이 비어 있던 1루 베이스를 채웠습니다! 2사에 주자 만루! 그리고 타석에 들어오는 선수는 바로 Hyun! Ki! Koo!!!]
[파드리스가 여기서 마운드를 교체하는군요. 결국 마무리 투수에게 3연투를 강요하게 만드는 다저스 타선입니다. 더 큰 문제는 앞선 두 경기에서 승부처에 마무리를 내고도 점수를 못 내서 졌다는 거예요!]
[앞선 두 경기뿐만이 아니죠! 올 시즌 현재까지 다저스와의 전적이 11전 전패입니다! 이러다 한 시즌 내내 동일 지구 팀에게 한 번도 못 이겨보게 생겼어요!]
체질 개선을 선언한 이후로, 실제로 팀을 대대적으로 갈아엎으며 지구 2위 경쟁에 뛰어들어 엎치락뒤치락하는 와중에.
유독 다저스만 만나면 맥을 못 추는 바람에, 2위 싸움에서 자꾸만 물을 먹는 파드리스.
이미 1차전과 2차전도 내준 마당에, 3차전인 지금도 1점 차 2사 만루 위기에 몰린 상황.
그러나, 오히려 초조해 보이는 건 다저스 팬들 쪽이었다.
[Koo는 오늘 첫 타석 볼넷, 이후로는 3타수 무안타입니다. 1루수 직선타, 좌익수 뜬공, 삼진.]
[개막 후 현재까지 99경기 동안 단 한 차례도 안타를 거르지 않았던 Koo.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을 세자릿수로 늘릴 기회는, 사실상 이번 타석이 마지막이라고 봐야겠죠.]
100경기라는, 다분히 상징적인 숫자를 달성하는 장면을 기대하며 수많은 팬들이 다저 스타디움을 채워준 가운데.
혹시라도 안타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기록은 그대로 종료.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의연할 수 있는 건, 이미 기록에 대한 미련이 털끝만큼도 남아 있지 않아서고.
팬들이나 동료들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건, 전에도 이미 비슷한 상황에서 마지막 기회를 여러 차례 붙잡은 전적이 있어서겠지만.
“스트라이크! 투!”
“아아아아아아아······!”
그것도 이제는 끝난 모양이었다.
오늘이 3연투째인데도 상당히 위력적인 마무리의 구위에 밀려, 순식간에 잡힌 0―2의 카운트.
내가 보기엔 투수도 볼넷을 줄지 말지, 만약 준다면 티 안 나게 내보낼 수 있을지 수없이 고민했을 것 같은데.
카운트가 여기까지 몰린 이상, 이제 저쪽도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어졌겠지.
그러니 그냥, 요즘 한동안 그랬듯 들어온다 싶으면 배트를 내보기로 하며 3구를 기다렸지만.
쐐애애액!
강렬하게 울려대는 ‘몸으로 말해요’의 직감을 확인하자마자 든 생각은.
‘저 새끼 집중 안 했네.’
투구라는 게 조금만 집중력이 흐트러져도 생각과는 전혀 딴판으로 날아가기 십상인데.
삼진으로 대기록의 마침표를 찍어내는 모습을 상상하기라도 했는지, 원하는 대로 제구를 가져가지 못한 모양이었다.
물론 몸쪽 공을 장타로 연결할 자신은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존에 가까울 때의 일.
급하게 몸을 뒤로 빼자마자, 강렬한 바람이 배 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맞았나?’
일단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망설여서는 안 된다.
“지금 여기 스쳤어요. 보이시죠?”
방금 스친 게 공이었는지, 아니면 바람이었는지, 나 스스로도 구분이 잘 안 될 정도로 아슬아슬했는데.
그건 주심도 마찬가지였는지, 동공에 지진이 일어난 채 가만히 있다가 내가 곧바로 보낸 강한 어필을 확인한 순간.
“힛 바이 피치!!!”
그대로 내 어필을 인정하면서, 나를 1루로 보내버렸다.
2사 만루에서 밀어내기 타점을 올리는 몸에 맞는 공.
그리고, 사실상 연속 안타 기록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기도 했다.
“What?!”
“아니, 이게 무슨······! 아니······!”
“거기서 왜 어필을······.”
볼넷이 나왔다면 투수를 향한 야유를, 삼진을 당했다면 아쉬움이 담긴 탄식을 쏟아냈겠지만.
내가 스스로 기록을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인 이 상황에서, 관중들은 앓는 소리만 낼 뿐이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긴가민가한 표정의 1루 코치가 어정쩡하게 내미는 손에 하이파이브를 하며 떠오른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드디어 끝났네. 이놈의 기록.’
[고생 많았다.]
앓던 이가 빠진 듯한 시원한 기분에, 활짝 웃으면서 다저스 덕아웃을 향해 손을 흔들었는데도.
다들 멍하니 쳐다볼 뿐 호응이 없다.
어지간하면 리액션 좀 해주지. 민망하게시리.
[적응이 안 되나 보지. 하도 오랫동안 안 끝나던 기록이 끝났으니.]
그때는 그냥 박도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지만.
지금의 플레이 하나가 다저스에게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는, 그때의 나로선 전혀 알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