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78화 (178/200)

< 178. 팀 스피릿(5) >

[SD 3 : 4 LAD]

[세자릿수를 눈앞에 두고 끊어진 대기록! Koo의 연속 경기 안타 기록, 99경기에서 마감!]

[파드리스 스탈링 감독, “패배는 항상 아쉽지만 경기 내용을 보면 칭찬할 점이 많다. 특히 상대 중심 타선을 효율적으로 묶어둔 투수진이 큰 역할을 해줬다.”]

[다저스 오브라이언 감독, “누가 들으면 파드리스가 이긴 줄 알겠다. 이번 시즌 우리와 파드리스의 상대전적을 확인하고 오는 게 좋지 않을까?”]

[‘3타수 무안타’ Koo, 마지막 타석에서 힛 바이 피치 어필한 이유는? “맞았다고 생각해서 어필했을 뿐이다. 기록? 솔직히 Park의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는 신경 쓰였지만, 그 이후로는 언제 깨져도 상관없었다.”]

[만루에서 밀어내기 타점 내주고도 챌린지 없었던 파드리스 벤치, 승리보다 기록 저지가 더 중요했나?]

* * *

모든 프로스포츠를 통틀어, 야구는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가장 많은 편에 속할 거다.

당시에는 최선의 플레이라 생각했던 게 그대로 경기의 무게추를 넘겨주는 결과를 낳는가 하면.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플레이 하나가 결과적으로는 신의 한 수가 되는 경우도 수두룩하지.

예를 들어, 어제 경기 8회 말 2사 만루에서의 힛 바이 피치 어필.

그건 무슨 특별한 의도를 갖고 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기록 연장엔 아무런 미련이 없었고, 무기력한 삼진보다는 한 점이라도 얻는 게 나을 거란 생각 정도는 있었지만.

[그치. 어떻게든 팀에 도움이 되어야겠다느니, 뭐 그런 숭고한 생각 따위 니가 할 리가 없지.]

‘너 내가 운동방에서 도아랑 뭘 할 줄 알고 그러냐? 집에서 방음 되는 곳 거기밖에 없는 거 알지?’

[잘못했습니다.]

말투는 짜증나는데, 영 틀린 말은 아니다.

기록보다 팀을 먼저 생각했다거나, 뭐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이놈의 기록 드디어 끝났구나 하는 후련함이 앞섰으니까.

[다저스의 마무리 새뮤얼 브라운, 12경기 만의 피홈런! 8회 말 밀어내기로 얻어낸 1점이 승패를 가르다!]

└ 새뮤얼이 홈런 맞았다고? 그럼 진짜 그때 Koo가 어필 안 하고 혹시라도 안타도 못 쳤으면 연장 갈 수도 있었던 거야?

└ 그치. Koo 타격감을 생각하면 아직도 좀 아쉽긴 한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네.

└ 근데 그 공 난 잘 모르겠던데. 진짜 스친 거 맞아?

└ 솔직히 애매하긴 했지. Koo가 확신에 차서 어필한 거 아니었으면 판정 어떻게 나올지 몰랐을 듯.

└ 아니, 심판은 그렇다 쳐도. 파드리스 이 새끼들은 뭐 하냐? 밀어내기로 점수가 나게 생겼는데 비디오 판독도 안 해?

└ 냅둬. 시즌 내내 처발렸는데 위안거리라도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냐. :-)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 타점이 없었다면 경기가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게 된 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파드리스는 야구팬들, 특히 다저스 팬들에게 욕을 푸지게 먹었다.

경기를 가져올 기회까지 반납해가며 기록 중단에 올인했다느니 하면서.

감당해야지 어쩌겠어. 다저스도 예전에 나를 좀 일찍 교체했다가 승리보다 기록 연장을 우선했다느니 하고 욕먹었는데.

[LA 다저스 마이크 올리버 단장,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Koo는 팀의 캡틴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다저스 원로 선수들, Koo를 향해 입 모아 칭찬! “개인의 영광보다 팀 승리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행동”]

한편 다저스에서는 온 힘을 다해 구단 차원의 포장 작업에 들어갔다.

연속 안타 기록으로 유입된 팬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서라도 당연한 수순이겠지.

그래서, 이제는 기록도 끊겼으니 벤치도 좀 데워가며 마음 편히 뛰면 되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팀 내부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화가 조금씩 움트고 있었다.

* * *

모든 감독이 꿈꾸는 이상적인 선수를 빚어낸다고 한들, 162경기 전부에서 활약할 수는 없다.

야구는 원래 그런 스포츠다.

한 시즌 99경기에서 안타를 만들어낸 선수는 제법 있지만, 그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명백히 실력의 영역을 벗어난 현상이다.

투박하게 말하자면, 아주 강한 행운이 꼭 필요할 때 몇 번이나 찾아와준 것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오브라이언 감독은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선수 입장에서는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 역시 잘 알았다.

대기록에 마침표를 찍은 선수에게, 그저 행운이 다한 것에 불과하니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만약 그게 구현기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런데 Koo가 아닌 다른 선수라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오브라이언 감독은 구현기의 가장 큰 재능이 절대 꺾이지 않는 멘탈이라고 생각했다.

연속 안타 기록을 이어가는 와중에 두 타석 연속 스트레이트 볼넷을 얻고도 다시 평온한 얼굴로 투수를 마주할 수 있는 선수가 과연 또 있기나 할까.

“네, 뭐. 그렇게 됐네요. 기록도 끝난 김에 벤치에서 시작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만약 자신이 아는 구현기라면, 기록이 끊어진 직후 가진 면담에서의 이 말은 진심으로 한 게 맞을 거다.

99경기가 아닌, 98경기나 100경기에서 기록이 끊겼더라도 지금과 똑같은 반응이지 않았을까. 차라리 다저스의 정규시즌 성적이 99승에 머무르며 100승을 찍지 못했을 때 지금보다 더 울분을 터트리지 않을까.

그리고, 구현기는 자신의 예상에 더욱 강한 확신을 주었다.

바로 다음 경기에서, 멘탈이 흔들릴 거라고 생각했는지 과감하게 카운트 싸움을 걸어온 투수를 상대로 멀티 홈런을 때려내며 건재함을 과시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그래. 어서 들어와.”

그런데, 정작 다른 선수들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는지.

바로 다음날부터 개인 면담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사실 자네 말고도 면담을 신청한 선수가 여럿 있긴 했는데. 제일 먼저 온 게 자네라는 건 좀 의외였어.”

“그러셨군요.”

“저기, 음.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나?”

“궁금합니다.”

“아니, 뭐. 그냥 이렇게 먼저 뭔가를 요청하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자네랑은 이제 고작 2년 차니까 내가 잘못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십니까.”

벤 리히터.

그에게 부족한 것이 싸가지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는 것을, 오브라이언 감독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파드리스에 카일 캠프를 팔아넘길 때 받아 온 선수 중 한 명.

처치 곤란한 고액연봉자로서 끼워팔기식으로 넘어온 선수로, 다저스에서는 백업 외야수 겸 대타 요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물론 연봉 값은 못 하는 선수지만, 함께 받아온 유망주들이 빅리그에 자리를 잡았으니 다저스로서는 손해는 아니다.

어차피 좋은 조건을 맞춰주기는 어려우니, 계약이 만료되는 올 시즌이 끝나면 결별이 유력한 선수였는데.

그런 벤이 뜬금없이 이런 요청을 해왔다.

“중견수로도 출장하고 싶습니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추가적인 전력 보강에 들어가지 않았을 정도로 올 시즌 다저스의 전력은 탄탄했지만.

그중 유일하게 아쉬운 소리가 나오던 것이 중견수였다.

기존에 중견수로 키우려던 말릭은 아직 주전을 맡기엔 수비 경험치가 부족하고. 수비가 좋은 백업 유격수 메이슨은 타격이 아쉽다.

채드윅은 외야 컨버전 1년 차라는 걸 고려하면 무난하게 플레이해주고 있었지만, 구현기의 1루수 기용이 늘어나고 나서부터는 백업 유격수 자리에 집중하고 있다.

“갑자기 중견수로 나가겠다는 이유가 뭐지?”

기존 중견수 루카스를 트레이드로 이적시킨 시점에서, 벤에게 중견수 자리를 제안해 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벤은 FA로 파드리스에 이적하기 전, 몇 년 동안 레인저스의 주전 중견수를 맡아온 경력이 있었으니까.

나이와 부상 이력이 마음에 걸려 결국 실행에 옮기진 않았는데.

후반기에 접어든 이 타이밍에 선수 본인이 직접 요청할 줄이야.

“음······.”

오브라이언 감독은 벤 리히터가 대답을 고르는 모습을 처음으로 봤다.

남들이 뭘 물어봐도 항상 시큰둥한 단답으로 일관하던 선수였으니까.

“Koo를 보니까······.”

그가 보기엔, 최근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 만한 사건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몸에 맞는 공을 어필하며, 스스로 기록 연장의 가능성을 없애버린 구현기.

팀을 위해 망설임 없이 개인의 영광을 포기하는 그 모습이, 잦은 부상과 먹튀라는 오명에 시달리던 이 베테랑에게 어떤 울림을 주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야구를 좀 더 하고 싶어졌습니다.”

벤 이후로도 줄줄이 이어진 면담에서, 선수들이 가져온 용건은 죄다 비슷비슷했다.

“지금보다 더 긴 이닝을 소화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마이너에서는 선발로도 몇 년 뛰었거든요. 점수 차가 벌어진 경기에서 조금만 더 기회를 주시면······.”

트레이드 이후 팀에 잘 녹아들지 못했던 불펜투수 션 언더우드는, 좀 더 오래 마운드를 책임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주제넘을 수도 있지만, 혹시라도 조나단에게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계약 마지막 해를 맞이한 주전 3루수 켄은, 차세대 자원으로 공들여 키우고 있는 조나단에게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도 상관없다면서 오브라이언 감독의 어깨를 가볍게 해줬다.

감독으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우승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바라보며 팀 스피릿을 다지는 것이 이상적인 팀이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우승은 낭만이고, 그 이후의 일은 현실이다. 선수로서는 자신의 커리어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결국 뒤가 없는 선수들만이 절실하게 매달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변화는 구현기가 선수단에 던진 하나의 메시지 덕분이라고 봐야 한다.

‘나는 팀을 위해 저렇게 무언가를 포기해본 적이 있었던가?’

구현기에게 정말로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본인만이 알 일이지만.

자발적으로 뭉치는 선수들을 컨트롤하면서 끝까지 좋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가는, 전부 감독의 역량에 달린 일이었다.

“제리, 자네는 또 웬일인가?”

“다들 의욕을 불태우는 와중에, 팀의 에이스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더군요. 요즘 제 컨디션 아시죠? 어느 정도 투구 수가 오버되는 건 상관없으니 가능한 한 9회까지 믿고 맡겨 주시면······.”

“나가.”

물론 의욕과 만용을 구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 * *

99경기 연속 안타.

메이저리그 역사의 최상단에 새겨놓은 새로운 기록.

솔직히 다음 세대로 도전과제를 넘겨주는 상징적인 숫자 같기도 해서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는데, 팬들도 그렇게 생각해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당장 기록이 끊긴 날도 3연전을 스윕한 팀의 홈구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처졌고.

‘문제는 팀원들이지.’

팬들의 기대를 배반하는 것은 경기장에서 수도 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그보다는 경기력에 영향이 가는 건 아닌지가 더 걱정이었지.

별것 아닌 일로 밸런스를 잃어버리고 슬럼프에 빠지는 선수들이 워낙 많아서.

분명 그랬는데.

[2루수 조지 라모스의 글러브 토스! 1루 주자 아웃! Koo가 잡아서 1루로! 아웃! 1사 만루의 위기를 단숨에 지워버리며 경기 종료! 이로써 다저스는 네 시리즈 연속 위닝시리즈를 가져갑니다!]

[글러브 토스부터 1루 송구까지 모든 플레이가 물 흐르듯 이루어졌습니다! 최근 연승을 이어나가는 동력이 바로 이런 집중력이 아닐까 싶네요!]

오히려 기록이 깨지기 전보다 선수들의 집중력이 올라갔다고 해야 하나.

‘이게 다 캡틴을 잘 뽑은 덕분 아닐까?’

[너 혹시 나 몰래 양심 팔아서 포인트 챙기는 시스템이라도 만들었냐?]

선수 한 명 한 명의 기량은 드라마틱하게 변하기 어렵지만, 약간의 변화가 시너지를 일으키면 극적인 효과가 나오기도 한다는 게 팀 스포츠의 매력.

다저스는 한층 단단해진 채로 무더운 8월을 이겨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