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79화 (179/200)

< 179. 야구의 꽃(1) >

미국처럼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에서는, 같은 날이라도 지역별로 기후가 천차만별이지만.

8월 말이 찾아오면, 미국 전역의 야구장에서 똑같이 가을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이 무렵이 되면, 가을 야구를 바라보는 팀과 그렇지 않은 팀을 나눌 수 있고.

LA 다저스는 그중 명백히 전자에 속했다.

아직 매직넘버를 0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갑자기 기세가 확 꺾이지만 않는다면 지구 우승은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다저스의 안정적인 경기력이 실패할 자유가 충분히 보장된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팬들은 그딴 소리는 나도 하겠다며 코웃음을 쳤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작년 이맘때처럼 순위 경쟁에 허덕이는 신세였다면, 선수들이 지금만큼 매사에 자신감을 갖고 플레이하기는 어려웠을 테니까.

그 자신감이 매번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법은 없지만.

“앤서니, 저한테 욕 좀 해주세요. 전 쓰레기예요.”

“그건 어렵지 않은데. 왜 그래, 션? 혹시 또 다니엘의 승리를 날려먹은 걸 자책하는 거야? 괜찮아.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뭘.”

“문제가 너무 많아서 뭐부터 건드려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투수가 적성에 안 맞는 걸까요?”

“타자 전향을 하고 싶으면 나보다는 Koo한테 상담하는 게 나을 텐데.”

“그, 그건 아니고······ 그냥 답답해서요. 팬들한테 면목도 없고.”

“요즘은 팬들도 나름대로 네가 등판하는 경기를 즐기는 법을 터득했다더라. 네가 선발승을 지워버리고 나면 꼭 Koo가 결승 홈런을 친다던데? Koo의 홈런 요정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저기, 앤서니. 제 착각일지도 모르겠는데, 혹시 지금 위로해주시려는 거 맞나요?”

“그래 보이냐?”

클레망 파로의 반대급부로 다저스에 넘어온 션 언더우드를 비롯해, 필승조 이외의 불펜들이 종종 불안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투수 고쳐 쓰기의 명가라는 이름을 증명하듯, 시즌을 소화해나가며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고혈압을 앓는 팬들이 경기를 보기 전 관짝 견적부터 내야 했다면, 지금은 약물로 충분히 다스릴 수 있을 정도로.

지구 2위 그룹과 어느 정도 승차를 벌려놓은 뒤부터는 타순을 실험해볼 여유도 생겼다.

기존에 3번으로 나오던 켄 워싱턴은 이듬해 이적이 유력하다. 우익수 R.H.와 1루수 랜디를 각각 한 순번씩 당겨 3번과 4번을 맡겼다.

중견수로 나가면서부터 출전 시간이 대폭 늘어난 벤 리히터가 언젠가부터 5번을 꿰찼고. 여러 타순을 오가며 감을 찾아가던 유망주 3루수 조나단은 6번에 박아두니 장타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적절한 타순을 찾아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만한 결실을 맺었다.

한 방이 있는 타자들의 배트에 공이 맞아 나가기 시작하면서 팀 홈런이 부쩍 증가한 것.

보통 이런 식으로 장타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경우, 하락 사이클에 접어든 타격 사이클을 억지로 유지하려다 자기도 모르게 스윙 밸런스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다저스에서는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았다.

팀에 아주 효과적인 겸손 주입기가 있었으니까.

“반갑습니다, 랜디! 오늘 경기의 주인공으로 뽑힌 걸 축하해요! 솔로 홈런에 이어 결승 2루타까지 날리면서 파워를 증명했는데······ 음, 혹시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요.”

“아뇨, 저기, 기쁩니다. 그런데 혹시 오늘 인터뷰를 좀 길게 할 순 없을까요? 알다시피 제가 오늘 경기 수비에서 실책을 해서. 우리 팀 캡틴이 벼르고 있을 것 같아서요.”

“하하하, 새로운 캡틴 Koo가 아주 일을 열심히 하는군요. 그래도 괜찮을 겁니다. 실책이 실점으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오늘은 Koo도 함께 홈런을 추가한 기쁜 날이니까요!”

“사실은 그게 문제거든요······.”

“네?”

“저번에 제가 한번 대든 적이 있거든요. 그날도 오늘처럼 제가 홈런을 치고 실책을 저질렀는데, Koo가 그걸 가지고 볶아대더군요. 물론 제 잘못이긴 한데, 그날따라 뭔가 자존심이 좀 상했다고 해야 하나? 반항하고 싶어지더라고요.”

“대체 뭘 믿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요?”

“당당하게 얘기했죠. 나는 오늘 홈런을 쳐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런 날까지 너한테 잔소리 들어야겠냐.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예상이 가시죠?”

“Oh, Man.”

“이제 본인이 홈런을 때린 날이면 바로 저부터 찾는데, 그 광기에 젖은 듯한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아, 안 돼. 또 환각이 보여요. 탄산수 병을 흔들면서 저한테 다가오는 Koo의 모습이······.”

“랜디, 랜디? 그건 환각이 아니에요. 이런 망할, 카메라맨. 뒤로 물러나요. 우린 이미 늦었어. 카메라 기체가 물을 먹었다간 감당 못 하는 거 알죠?”

당하는 사람은 치를 떨었지만, 이런 갈굼은 친하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구현기는 사람의 특성에 맞게 남을 대할 줄 아는 사람이다.

랜디나 조나단, 또 요즘은 덜 그러긴 하지만 여전히 기분파에 속하는 아드리안 등등.

가만히 놔뒀다간 지나치게 텐션을 올리는 선수들 말고는, 기본적으로 남 일에 터치하는 스타일의 리더는 아니다.

“Koo의 기술적인 컨트롤 덕분에 저와 카메라는 무시했네요. 당신의 흠뻑 젖은 모습을 보니 떠오르는 질문인데, 혹시 세력을 모아 캡틴 자리를 찬탈할 생각은 없나요?”

“아뇨, 그건 절대 아닙니다.”

“방금 Koo가 덕아웃 안쪽으로 들어가는 걸 봤거든요. 솔직하게 말씀해주셔도 괜찮겠는데요?”

“진심이에요. Koo는 성격은 거지 같지만 존경스러울 정도로 자기관리가 뛰어난 선수입니다. 가끔 풀어질 것 같을 때 저 정신 나간 성적을 찍고 있는 놈도 매일 온 힘을 다하는데 내가 이래도 되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죠.”

그 유명한 데릭 지터를 비롯해, 한 해의 메이저리그를 대표할 정도의 슈퍼스타를 캡틴으로 선임한 시도는 여럿 있었다.

그러나 성공보다는 실패한 사례가 더 많았다.

기고만장한 태도로 팀원들의 신임을 잃거나,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캡틴으로서의 책무를 벅차했으니까.

‘나도 이만치 하는데, 니들은 어쩔래?’

아직 베테랑으로 불리기엔 연차가 부족한 구현기가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가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는데.

이게 또 나름 효과가 있어서, 험한 소리 없이도 팀 내부적으로 위닝 멘탈리티를 다져가고 있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성격 운운한 건 괜찮으신가요? 지금보다 클럽하우스 생활이 더 고달파질지도 모르겠는데요.”

“그건······ 어쩌다 말이 그렇게 나왔는데 편집해주실 거라 믿어요.”

“랜디. 슬슬 저희 MVP 인터뷰가 생방송이라는 걸 기억해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 가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선수가 나오기도 했지만.

그걸 제압하는 것 역시 캡틴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 * *

8월이 끝나갈 무렵.

다저스 포럼은 사이트 대문에 매직넘버를 걸어두기 시작했다.

현재 숫자는 12.

다저스가 12승만 더하면, 아직 확정되지 않은 2위 팀을 누르고 지구 우승을 확보할 수 있다는 뜻.

[무슨 8월부터 이런 걸 걸어두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금방 찍을 수도 있겠는데······?]

다저스가 80승 고지에 선착해, 선수들에게 번갈아 휴식을 주며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동안.

디백스, 자이언츠, 파드리스. 이렇게 세 팀이 초장부터 피 터지는 2위 싸움을 벌여준 덕분에, 그사이 멀찍이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금방 찍고 말고가 어딨어. 12승은 누가 공짜로 준대?’

야구는 흐름의 스포츠.

시즌 막판 잠시 삐끗했다가 가을야구가 좌절되는 경우도 수없이 발생한다.

게다가, 8월의 마지막 시리즈를 위해 다저 스타디움으로 불러들인 팀이 절대 만만한 팀은 아니다.

무려 중부지구 1위를 달리고 있는 팀이니.

“다들 건강해 보여서 좋네. 좀 있으면 가을야구도 확정이라면서?”

클레망이 트레이드로 이적한 시카고 컵스.

다른 팀 유니폼을 입은 클레망이라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모습을 실제로 본 선수들이 잠시 서먹해하기도 했지만.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마시죠. 잠시 신원 조회 좀 하겠습니다.”

“다 들었어요. 요새 컵스 내야수들한테 이것저것 다 풀고 있다면서요?”

나를 포함해 몇몇 선수들은, 이제 남의 팀 아저씨가 된 클레망을 거리낌 없이 놀려댔다.

그러자 멋쩍은 웃음을 짓는 클레망.

“여기서 날 데려온 이유 중 하나니까.”

나와 채드윅에게 본인 자유시간까지 반납해가며 온갖 수비 노하우를 전수해준 클레망이었는데, 컵스에서도 똑같이 하고 있는 모양.

컵스 내야수들이 전반기보다 좀 더 빠릿빠릿해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게 그저 우연은 아닐 거다.

게다가 이적 후 붙박이 1루수로 나가면서 8월 한 달 동안 홈런 7개를 더하며 컵스 타선을 한층 묵직하게 만들어주기까지 하니.

어쩔 수 없이 보냈다고는 해도, 반대로 넘어온 놈은 지금 뭐 하고 있냐는 반응이 스멀스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우, 눈빛 살벌한 거 보소.]

다저스 선수들 모두가 클레망을 반갑게 맞아준 것과 달리, 션 언더우드는 원정 덕아웃 쪽으로 다가가지도 않았다.

아무리 팀 안에서 자기 자리를 확보한 선수가 아니라고 해도, 친구가 없진 않을 텐데.

컵스가 자신을 내보낸 게 어지간히도 서운했나 보다.

[요새 몇 경기 그래도 괜찮게 던지긴 했는데, 오늘은 어떨라나?]

‘글세······.’

이번 시리즈에서는 션을 아예 안 쓰거나, 쓰더라도 쉬운 상황에서만 올리지 않을까.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몸에 힘이 들어가면, 기껏 개고생하며 잡아놓은 밸런스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테니까.

“플레이 볼!”

끝날 때까지 모르는 게 야구라지만.

적어도 오늘 경기에서는 점수 차이가 좀 벌어질 확률이 높다고 본다.

1차전의 선발 매치업은 다저스 5선발 에드윈 니콜슨과 컵스의 에이스 A.D. 존슨.

최근 존슨이 다저스를 상대했던 2경기 모두 컵스 타선이 철저히 틀어막히며 퍼펙트를 헌납하긴 했지만, 그건 우리도 에이스 제리를 내서 가능했던 일이고.

존슨 역시 다저스 상대로 강하면 강했지 절대로 약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으니까.

따아아아아악―!

“아웃!”

[4번 타자 클레망 파로의 타구가 담장 앞에서 잡혔고! 그사이 3루 주자는 여유롭게 홈인! 친정팀의 뉴페이스를 상대로 넉넉한 희생플라이를 날리며 새로운 팀에 선취점을 안기는군요!]

연속 안타에 희생플라이까지 나오며 1회부터 실점을 했지만, 어찌어찌 1점으로 이닝을 틀어막은 에드윈.

1회 말 마운드에 선 A.D. 존슨은 이 점수를 결승점으로 만들겠다는 듯, 능수능란한 변화구를 앞세워 리드오프 조지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냈다.

“Koo!!! Koo!!! Koo!!! Koo!!!”

홈팬들의 든든한 응원을 등에 업고 타석으로 들어가는데, 존슨의 심기가 영 불편해 보인다.

일부러 과장되게 분위기를 잡고 있다고 해야 하나.

가만히 있어도 어지간한 타자들은 먼저 눈을 돌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얼굴을 타고났는데 말이야.

“Hey, 너희 투수 오늘 무슨 기분 안 좋은 일 있었어?”

“닥쳐.”

“혹시 날 미워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존슨한테 한 짓이라고는 퍼펙트랑 노히터를 각각 한 번씩 깨트린 것밖에 없는데. 설마 내 역할을 다한 걸 가지고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건 아니겠지?”

“부탁할게. 제발 닥쳐줘.”

초구와 2구는 모두 볼.

그중에서도 2구는 승부에 들어가려다 빗나갔는지, 고개를 살짝 갸웃한다.

‘하여튼 만만치 않은 양반이야.’

존슨은 신체적 전성기가 끝나가는 지금도 분명 훌륭한 투수다.

올해 리글리 필드에서도 다시 한번 느꼈지.

이 사람이 제대로 맘만 먹고 던지면 어지간해서는 배럴 타구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걸.

쐐애애액!

그러나, 전성기가 지나간 투수는 보통 구위와 제구 중 하나는 포기해야만 한다.

존슨 같은 선발투수, 그중에서도 많은 이닝을 소화해주기를 요구받는 에이스는 공 자체의 위력은 좀 떨어지더라도 원하는 코스에 정확하게 던지는 길로 나가는 경우가 많지.

‘투심. 아웃코스.’

바깥쪽 공에 대한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주는 새로운 재능이, 머릿속의 예측에 확신을 더해준다.

작년에 봤던 것보다 아주 조금이지만 덜 지저분한 공.

그리고 작년에 비해 밀어치기로도 장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늘어난 나.

결과는?

따아아아아아아아악―!

에이스는 이런 상황에서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얼른 공이나 달라고 포수한테 재촉할 뿐.

그 당당함을 존중하듯 입 다물고 빠르게 베이스를 돌았다.

경기를 원점으로 돌리는 시즌 49호 홈런.

또 하나의 대기록, 50―50까지는 이제 고작 한 발짝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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