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야구의 꽃(2) >
50―50 클럽.
한 시즌 50홈런과 50도루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
파워가 있는 타자는 기동성이 떨어지고, 베이스를 훔칠 줄 아는 주자는 담장을 넘길 힘이 부족하다는 유구한 격언에 따라.
아무도 밟아보지 못할 미지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어느 미친놈이 풀타임 2년 차에 달성해버리기 전까지는.
[그거 별거 아닌뎅.]
콧잔등을 긁적이면서 태평하게 씨부리는 박도현.
이놈한테 대기록을 헌납했던 투수들한테 이 모습을 꼭 좀 보여주고 싶다.
아무튼, 49홈런이다.
새로운 재능을 얻은 이후, 원래대로라면 아슬아슬하게 잡혔을 타구가 조금 더 뻗기 시작하면서 홈런을 빠르게 적립해나갔다.
한동안 만나는 투수들마다 그나마 약점을 보이던 바깥쪽 빠져나가는 코스만을 주구장창 파던데, 바깥쪽 선구안 역시 큰 폭으로 개선된 덕분에 오히려 3루 쪽 라인을 타는 장타만 늘어났지.
“Kooooooooo!!!”
“오늘이 아니어도 돼!!! 원정 가기 전까지 하나만!!! 딱 하나만 더 날려줘!!!”
경기 내내 타석에 들어가거나, 수비에서 타구를 처리할 때면 팬들의 절규가 쏟아졌다.
‘뭔 소리래. 오늘 끝내야지.’
가능하면 A.D. 존슨이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동안에.
오늘 첫 타석에서 홈런을 허용한 존슨이었지만, 그 뒤로는 정신이 확 들었는지 평소처럼 다저스 타선을 깔끔하게 요리해냈고.
나도 두 번째 타석에서는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로 몰렸다가, 몸쪽으로 파고드는 변화구를 어떻게 컨택을 했는데 2루수에게 잡히며 맥없이 물러났다.
1회 이후 양 팀 모두 추가점을 내지 못하며 스코어 1대 1.
그리고 존슨과의 맞대결에서도 2타수 1안타로 1대 1이다.
‘저 양반은 아홉수 따위 신경도 안 쓸 테니까.’
올스타 끝나고 얼마 안 지나서 39홈런 고지를 밟았을 때.
자꾸 성의 없는 유인구만 깔짝깔짝 던져대는 투수 놈들 때문에 거진 열흘은 볼넷만 왕창 얻었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실투 하나 받아먹어서 40홈런 채우고 나니 오히려 여기까지는 또 금방이더라. 하여튼 가증스러운 놈들 같으니.
[너 예전에 투수 할 때 홈런 아홉수 걸린 놈들 함부로 건드리면 그날 장사 공친다고······.]
‘얘도 참. 무슨 그런 철없을 때 얘기를 꺼내.’
그건 성적도 깜냥도 3선발따리였던 투수 Koo 얘기고.
그래서 이 사람이 그런 식으로 슬슬 피할 수 있나?
선구안 좋은 타자한테는 안 통한다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과연 유인구 위주의 피칭을 할까? 컵스의 정신적 지주 Ace&Dominant가?
“타자 위치로!”
루키이자 5선발 에드윈 니콜슨이 6이닝 1실점 퀄리티 스타트로 역할을 마치고서 맞이한 6회 말.
9번 투수 타순에 대타로 들어간 브레이든 돌턴은 포수 주제에 빠른 발을 살려, 초구 기습번트 내야안타를 만들어냈다.
리글리 필드였다면 온갖 개쌍욕이 쏟아졌겠지만, 여기는 다저 스타디움이니까.
“괜찮아! 지금은 저쪽이 운이 더 좋았어!”
클레망이 다저스를 ‘저쪽’이라고 부르는, 팬들이 들었으면 가슴을 움켜쥘 만한 멘트로 내야진을 다독였지만.
정작 이 한 번의 번트가 흔들어놓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베이스 온 볼스!”
무사 1, 2루.
설령 에이스의 자존심을 버리고 넓게 넓게 승부하고 싶더라도 그러기 힘든 상황.
대기 타석에 들어가 준비하던 도중, 뜬금없이 이쪽을 쳐다보던 존슨과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뭔가 이렇게 될 것 같긴 했다.
다저스와의 경기, 그중에서도 특히 나랑 엮여서 좋은 꼴 못 봤던 게 떠오르기라도 했나.
‘통산 성적만 놓고 보면 별거 아니었는데 말이야.’
내 기억대로라면 이 양반 상대로 멀티 히트를 때려본 적이 없다.
그 안타 하나가 한창 잘나갈 때 흙탕물 뿌린 꼴이라서 문제지.
“50―50!!!”
“Kooooooooo!!!”
“50―50!!!”
“Koooooooooooo!!!”
굳이 한 팀의 에이스가 아니더라도, 빅리그에서 선발로 몇 년 정도 정착해서 먹고산 적 있는 투수라면.
관중들의 반응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다.
너네는 씨부려라, 나는 할 일 할란다, 뭐 이런 생각이 패시브로 장착된다는 거지.
근데 지금은 상황이 좀 특수하다.
이미 퍼펙트게임의 패전투수로 두 번이나 박제됐고, 까딱 잘못했다간 박도현 이후 최초의 50―50 클럽 허용투수가 되기 직전.
볼넷을 줬다간 무사 만루에서 리그 최상위권의 클린업 트리오를 상대해야 하고.
바깥쪽 승부를 들어간다고 해도, 후반기 들어 밀어친 홈런이 부쩍 늘어났으니 딱히 장타를 억제하는 효과도 없지.
‘아재요, 어쩔 겁니까?’
그동안의 흑우 노릇을 청산할 것인지, 아니면 지우기 힘든 상하관계가 성립될 것인지가 걸린 타석.
과연 컵스의 에이스는 어떤 수를 던져올 것인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전장에서 싸움을 앞둔 지금.
주심의 콜과 함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 * *
다저 스타디움의 프런트 중역이 사용하는 응접실.
경기장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한창 맞대결 중인 두 팀의 단장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사 1, 2루. A.D. 존슨이 오늘 경기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리그 최강의 2번 타자 Koo를 상대합니다. 시즌 타율 0.363에 49홈런.]
천장에는 현장 중계가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모니터가 달려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트레이드 성사 이후 첫 맞대결.
제대로 된 승패를 알기 위해 최소 몇 년은 지나야 하는 게 트레이드라지만, 팬들에게는 그만큼의 인내심이 없다.
한마디로, 이번 시리즈에서 지는 팀의 단장이 욕을 배부르게 얻어먹을 예정이라는 거다.
[세이프! 조금 전과는 달리 빠른 견제구를 던지는 A.D. 존슨! 견제구를 받아내는 1루수가 익숙한 얼굴이어서일까요? 아직 타자에게 공을 하나도 안 던졌는데도 평소보다 다저스 팬들이 인내심을 발휘합니다!]
“지금보다 더 빠르게 견제해도 클레망이라면 잘 받아낼 거야.”
뼈가 있는 듯한 그 말에, 시카고 컵스의 단장은 내심 눈살을 찌푸렸다.
성공적인 트레이드라고 자부했다.
장타력과 수비력을 동시에 갖춘 클레망 파로는 딱 기대한 만큼의 활약을 해주며 주전 1루수로 자리잡았다.
반대로 션 언더우드는 현장에서 이미 가치 판단을 끝낸 선수였다. 좌완 파이어볼러인 만큼 끝까지 품고 싶었지만, 준비한 카드 중에서는 가장 싸게 먹힌 편에 속했다.
그런데도, 정작 경기는 영 석연치 않은 양상으로 흘러갔다.
그의 팀이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에이스가 흔들리고 있는 탓이다.
저놈의 망할 타자 한 명 때문에.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네. 윈터 미팅 때 우리가 Koo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지.”
안 그래도 타는 속에 기름을 붓는 소리.
실제로, 풀타임 2년 차의 구현기는 트레이드 제안을 자주 받는 선수 중 하나였다. 에이스급 실링은 없다는 평가가 대다수였지만, 선발 한 자리를 확실히 맡아줄 수 있는 선수는 어느 팀에서나 탐내기 마련이다.
컵스 역시 여러 카드를 제시했는데, 끝내 성사되지는 않았다.
당시 다저스 타선을 이끌던 박도현의 의욕 저하를 우려해, 구현기를 판매 불가 자원으로 분류했으니까.
“그래, 그랬지. 그 선수는 투수 Koo였지만 말이야.”
만약 과거의 자신을 만나서, 구현기가 한 시즌 49개의 아치를 그리는 내야수가 될 거니까 무슨 대가를 내주고서든 데려오라고 귀띔해준다 한들, 과연 제대로 듣기나 할까.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특수한 상황이란 걸 알면서도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초구 스트라이크! 바깥쪽 코스의 투심에 주심의 손이 올라갑니다! 살짝 멀게 느껴졌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Koo!]
그나마, 범타로 묶었던 두 번째 타석에서처럼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았다는 게 위안이었다.
손에 땀을 쥐며 위기를 맞은 에이스를 지켜보는 컵스 단장에게, 다저스의 올리버 단장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클레망한테는 연장계약을 제시할 건가?”
원 스트라이크를 잡은 이후 다시 견제가 이어지며 경기가 늘어지던 타이밍.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대답은 해줬다.
“당연하지. 반 시즌 쓰고 내보낼 거면 뭐 하러 영입했겠어?”
[볼! 조금 전과 비슷한 코스로 들어온 공에 이번에는 판정이 엇갈렸습니다!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지켜보는 Koo!]
말하는 사이, A.D. 존슨이 볼 하나를 내주며 카운트의 균형을 맞췄다.
그러거나 말거나, 올리버 단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마치 다른 동네로 이사 간 아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같은 표정으로.
“기왕 데려갔으니 잘 대우해주라고. 좋은 선수니까.”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야. 다저스야말로 기껏 특급 유망주를 데려갔으니 잘 키워 보시지.”
[3구 파울! 슬라이더일까요? 아래로 확 떨어지는 변화구로 A.D.가 배트를 끌어냈습니다!]
그사이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투수.
그러나 올리버 단장은 불안해하는 기색이 없었고, 컵스 단장 역시 안심할 수 없었다.
투 스트라이크, 심지어 0―2의 카운트에서도 헛스윙 비율이 늘어나지 않는 타자다.
카운트에 상관없이 자기 존에 확신을 갖고 대응할 줄 안다는 뜻.
‘욕심부리지 마, A.D.’
A.D. 존슨에게는 주 구종인 투심을 비롯해 땅볼을 유도해내는 좋은 무기들이 많다.
그러나, 땅볼을 유도하는 구종은 그만큼 안타로 이어질 리스크를 품는다.
풀카운트가 되더라도, 존 바깥을 널찍이 찌르면서 타자의 반응을 살피고, 대응하기 힘든 코스로 던져 마무리하는 게 정석이건만.
자꾸만 길어지는 사인 교환 시간에, 컵스 단장의 머릿속에 한 줄기 불안감이 스쳤다.
‘설마······.’
피칭이 좀 늘어지자 구현기가 귀신같이 타임아웃을 요청하면서 타이밍을 한 차례 흐트러뜨렸고.
결국 짜증을 미처 감추지 못한 채로 4구를 던지게 된 A.D. 존슨.
쐐애애액!
배트 중심에 맞히기도 어렵고, 1루 쪽 땅볼을 유도하기에 적격인데다, 주심에 따라 스트라이크 콜을 얻어낼 수도 있는 바깥쪽 아래 꽉 차는 투심.
그러나, 구현기는 이미 급격히 떨어지는 변화구를 걷어내며 날카로운 타격감을 뽐낸 바 있었고.
애초부터 몸쪽 공에 경이적인 대처 능력을 보이는 타자였다.
따아아아아아아아악!
유리창 너머로 떠오르는 타구를 보자마자, 컵스 단장은 눈을 감아버렸다.
[50―50!!! 50―50!!! 50―50!!!!!]
박도현 이후 처음으로 등장한, 50―50 클럽의 새로운 회원을 축하하는 합창은 아주 커다랗고 집요하게 이어졌다.
잠들기 전까지도 환청으로 들려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 정도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도 이 지경인데, 이걸 직접 감당하고 있는 선수들에게는 도대체 어떻게 들릴까? 또 마운드 위의 투수한테는?
[아, 오늘 경기 A.D. 존슨의 역할은 여기까지군요. 투구 수 83개로 비교적 이른 교체입니다. 5이닝 5K 4피안타 2사사구 4실점. 저희는 잠시 후 컵스의 두 번째 투수를······.]
“슬슬 가 봐도 괜찮을까? 누구랑 통화를 좀 하기로 해서.”
“아, 물론이지.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았군.”
물론 그런 일정 따위 없었지만, 이 자리에 계속 있느니 차라리 마누라가 긁어대는 바가지가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아직 6회 말. 점수 차이는 3점.
경기는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에이스가 상대 타자의 50―50을 완성하는 멀티 홈런을 허용했다는 굴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차라리 트레이드 상대인 클레망이 삽질이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오늘 클레망은 희생플라이 타점에 안타까지 쳤지만, 역전 홈런이라도 날리지 않는 한 컵스 팬들의 울분을 풀기엔 역부족일 거다.
결국 욕을 먹는 건 트레이드를 주도한 자신이 되겠지.
울적한 표정으로 황급히 사라지는 컵스 단장의 등을 향해, 다저스 올리버 단장은 말했다.
“자리를 옮기더라도 경기는 계속 보는 게 좋을 거야. 오늘은 점점 더 재미있어질 거거든.”
전혀 상관없는 구현기가 미쳐 날뛰면서 괜히 쓸데없이 욕먹는 거 아니냐며 걱정하는 것 같던데.
그럴 필요 없도록 깜짝 선물을 준비해뒀다.
‘이기든 지든, 이번 시리즈에서 점수 차가 4점 이상 벌어지는 경우 션 언더우드를 투입할 계획입니다.’
최근 몇 경기에 걸쳐 일부 구종에서 눈에 띄는 제구 회복이 관측되었다는 션 언더우드.
컵스를 향해 적의를 불태우고 있는 이적생이 머지않아 출격할 예정이었다.
* * *
[Again 50―50! 이제 영원불멸의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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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시작도 전에 50홈런 돌파한 Koo, 과연 그 끝은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