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81화 (181/200)

< 181. 야구의 꽃(3) >

1만 포인트.

박도현의 재능 하나를 뽑는 데 필요한 대가.

그간 해온 노력에 행운이 더해져, 각오했던 것보다는 빠른 페이스로 여러 재능을 뽑을 수 있었는데.

물론 받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가끔은 쓰임새가 애매한 게 나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연속 안타 기록 경신 후 뽑았던 재능 중 하나인 플라이볼 처리에 관한 재능이 그렇고.

이보다 더 심한 건 8월 초입에 40―40을 달성하고 나서 지급된 뽑기권으로 뽑았던 재능이었지.

[숨은 쉬고 삽시다(C등급) ― 상시형]

○ 심폐 지구력이 보정됩니다.

○ 갑작스러운 움직임 이후 호흡을 빠르게 되돌릴 수 있습니다.

경기에 써먹을 여지가 크게 없을뿐더러, 애초에 효과도 체감이 잘 안 될 정도로 미미했다.

굳이 찾아보자면 매일 아침 러닝 때 숨이 좀 덜 차는 정도.

좋은 타구가 꼭 안타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는 것처럼, 고생고생해서 모은 포인트나 뽑기권이 꼭 좋은 재능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걸 새삼 느꼈지만.

딱히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으로선 새로운 무언가를 얻는다고 해도 큰 감흥은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있는 것들만으로도 역대급 성적을 내는 중이고.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기묘한 재능을 또 얻어버리면 일이 이상하게 꼬일까 걱정되기도 했다.

‘왕관의 무게’가 크리스토퍼 엘리엇을 꼬이게 했던 것처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얻은 뽑기권을 안 쓰겠다는 건 아니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A등급) ― 상시형]

○ 타석에 들어갔을 때 관찰력이 상승합니다.

○ 투수의 심리 상태를 직감으로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얻어온 재능들도 몇몇 직관적인 것들을 제외하면 감이 잘 안 잡혔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물음표를 선사한 이번 재능.

‘갖고 있어서 손해는 안 보겠지.’

구체적인 효과는 나중에 경기에서 확인하자며 가볍게 넘어갔지만.

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와, 이게 넘어가네.’

뭔 소리인지 알아먹기도 힘든 이 재능은, 타구가 담장을 가볍게 넘길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라임 오진다. 야구가 아니라 래퍼를 했어야겠는데?’

[넌 이제 선수들한테도 모자라서 음악 하는 사람들한테까지 업보를 쌓아야겠냐?]

* * *

트레이드로 즉시 전력감 선수들을 주고받은 이후의 첫 맞대결은 언제나 많은 관심을 받는다.

대권 도전이 요원한 팀이 미래를 도모하며 유망주를 챙기는 것이 요즘 트렌드이다 보니, 빅리그 레벨의 선수들끼리 팀을 옮기는 게 드물기도 하고.

무엇보다 야구팬들은 남의 팀 팬들한테 마음껏 딜을 박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족속들이 아니었으니까.

[션 언더우드, “컵스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충격 고백! 일리노이주 출신 컵스 로컬보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그런 의미에서, 1차전에서의 션은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어그로 그 자체였다.

애지중지 키우던 연고지 출신 유망주를 보냈는데, 가자마자 고질적인 제구 불안을 해결하더니 심지어 친정팀 상대로 첫 세이브까지 얻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컵스 팬들이 뒷목을 붙잡을 일인데, 경기 끝나고 언해피 인터뷰로 싸다구를 후려버렸지.

“션, 대체 왜 그런 거야? 컵스에 있을 때 누가 네 라커에 오줌이라도 싸 놨어?”

“아니, 그게······.”

당연한 소리지만, 션이 컵스에서 특별히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했던 건 아니다.

확실한 보직 없이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되는 대로 구르는 투수들치고 불만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고. 별명에 들어가는 ‘Dominant’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한 성깔 하는 투수조 조장 A.D. 존슨이 다소 경직된 분위기로 팀을 이끈 것도 한몫했다나.

[얘 진짜 로버트 있을 때 트레이드됐으면 어쩔 뻔했냐.]

‘진지하게 마이너로 쫓겨났을 수도 있을걸?’

멘탈이 그리 강하지 않은 투수들은 강압적인 분위기를 못 견디기도 하는데, 션도 비슷한 케이스인가 보다.

물론 그런 분위기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지.

커리어를 앞세운 꼰대질이 아닌 진짜 카리스마로 기강을 잡는 선수는 팀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기도 하니까.

[A.D. 존슨, 션 언더우드의 친정팀 저격에도 묵묵부답··· 컵스 클럽하우스에선 과연 무슨 일이?]

대신 그 사람이 무너지면 팀도 함께 무너진다는 부작용은 있다.

A.D. 존슨은 이날 경기가 어지간히도 힘들었는지 션의 저격에도 조용히 물러났다.

친정팀을 두고 입을 터는 배신자를 가만두면 쓰겠냐며 사기를 끌어올리는, 팀의 중심이 되는 선수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생략한 채.

[새로운 팀 두둔하는 클레망 파로,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겪어본 컵스는 큰 문제가 있는 팀은 아니었다. 션 언더우드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하다.”]

[션 언더우드, 다저스 공식 채널에서 친정팀에 사과의 메시지. “내 의도를 잘못 전달했다. 지금 다저스에서 행복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컵스에서의 문제는 그 어떤 팀에서도 생길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이었는데 말이 과장됐다.”]

두 팀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걸 바라지 않던 클레망이 중재에 나섰고, 션도 빠르게 인정했다.

이렇게 좀 뜬금없는 언해피 인터뷰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됐지만.

에이스 대 5선발 매치업에서 패배한데다, 인터뷰로 얻어맞기까지 한 컵스는 기세에서 완전히 눌려버렸다.

* * *

따아아악―!

“Koo!!! Koo!!! Koo!!! Koo!!!”

컵스와의 홈 시리즈 2차전.

상대 선발의 체인지업을 받아쳐 3루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는 적시타를 만들어낸 후, 1루를 지키고 있는 클레망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에요, 클레망. 어제 우리 애가 사고만 안 쳤으면 같이 맥주라도 한잔하는 건데.”

전날 타석에서의 내 성적은 5타수 2안타 2홈런.

지금처럼 1루에서 클레망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 따위는 없었다.

“표정 관리 잘해. 카메라에 웃는 거 잡히기라도 하면 너나 나나 곤란해져.”

“대장 노릇 제대로 못 하는 A.D. 때문에 이적하자마자 고생이 많으시네요.”

“넌 내가 많이 아끼는 후배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야.”

4회 말을 맞이한 지금, 다저스는 4대 0으로 앞서 있다.

컵스의 베테랑 야수들이 몸을 아끼지 않으며 가까스로 실점을 억제하고는 있는데.

정작 투수의 컨디션이 온전치 않은 듯 자꾸 점수가 벌어진다.

촤아악!

“세이프!”

연달아 들어오는 견제.

그러나, 좌완임에도 불구하고 전날 선발 A.D.보다 견제 동작이 훨씬 눈에 잘 들어온다.

베이스에서 은근슬쩍 멀어지면서 클레망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금방 갈게요.”

“······망할. 이래서 너랑 적으로 만나기 싫었어.”

뛸 줄 알면서도 못 막는 주자의 존재는 투수에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준다.

올해 2루와 3루, 홈스틸까지 다 해서 59번의 베이스를 훔치는 동안 도루자가 고작 2번.

나 같아도 이런 주자 등 뒤에 두고는 공 못 던지지.

촤아아악!

“세이프!”

한참 늦은 타이밍에 글러브 태그가 닿은 그때.

조명이 요란스럽게 꺼졌다 켜졌다 하더니 경기장 이곳저곳의 전광판에 기념 문구가 떠올랐다.

[Koo, 단일시즌 60도루 달성!]

박도현조차도 감히 넘보지 못한, 아마도 현대 야구에서는 두 번 다시 깨지지 않을 리키 헨더슨의 시즌 130도루에는 한참 못 미치는 기록이지만.

“60―Steals!!!”

“Kooooooooooooooooooo!!!”

“60―Steals!!!”

“Koooooooooooooooo!!!!”

전날 50―50에 이어, 이틀 연속 대기록을 헌납한 컵스의 의지를 완전히 끊어버리기에는 충분했다.

따아아아아악―!

“Koo!!! 전력질주하지 마! 귀한 발목 삐끗할라!”

“저 정도 타구면 문워크로 가도 홈까지 넉넉하게 들어오겠네!!”

3번 타자 R.H.의 담장 직격 2루타에 여유롭게 홈을 밟으며, 스코어는 5대 0.

쐐기 득점을 자축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유독 등짝을 세게 후려치는 손길이 있어 누군지 체크했더니.

“Kooooo!!! 잘했어! 역시 컵스는 두들겨 패야 제맛이지!!”

전날 3이닝을 던지기도 했으니, 이번 시리즈에 더는 등판할 일이 없어진 션 언더우드가 흥분해서 날뛰고 있었다.

이 새끼 반성한 거 맞겠지?

* * *

R.H.의 추가 득점이 결국 컵스의 2선발을 강판시킨 이후, 다저 스타디움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에이스 제리야 말할 것도 없었고, 컵스에서 두 번째 투수로 올린 루키도 다저스 타선을 생각보다 잘 버텨냈다.

[루킹 스트라이크 아웃! 미처 배트를 내지 못한 조지 라모스! 다저스가 5회에 이어 6회 말 공격에서도 삼자범퇴로 물러납니다!]

션 언더우드가 떠난 자리를 채우기 위해 콜업한 선수.

비슷한 유형의 파이어볼러인데, 아직은 퐁당퐁당 기미가 좀 보여도 제구는 나름 틀이 잡혀 있는 느낌이다.

팀이 윈나우를 달리는 중이다 보니 롱릴리프로 기용되고 있는데, 언제든 선발 전환을 노려볼 수 있는 자원.

그래서였을까.

‘이게 또 이런 느낌이구나?’

7회 말 선두 타자로 나간 지금.

관찰력이 늘어나고 심리 상태를 읽을 수 있게 해준다는 새로운 재능 덕분일까.

어떻게든 나를 잡아내고 이번 이닝까지 책임지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훤히 읽힌다.

좀 전에 선발 투수를 상대했을 때는 눈빛도 좀 흐리멍덩하고, 딱히 무슨 직감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길래, 또 그닥 쓸모없는 재능을 뽑은 건가 싶었는데.

그냥 그놈이 아무 생각도 의지도 없었던 모양이다.

“파울!”

근데, 아직은 경험이 부족해서일까.

‘이 재능 없었어도 얘가 승부하고 싶다는 건 읽었을 것 같은데.’

베테랑 투수들이 구위는 떨어져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이유가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허를 찌르는 구종을 가져와서 스윙 밸런스를 무너트리거든.

물론 밸런스를 보정해주는 ‘스윙의 달인’을 얻고 난 이후부터는 베테랑들을 좀 더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게 됐지만.

투수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모르겠을 땐 카운트 싸움에서 다소 불리할 수밖에 없다.

“파울!”

근데 얘는 너무 정직하다.

코너웍이 잘 되는 강속구가 두 번 연속 배트에 빗맞으면서 투 스트라이크.

절대적으로 유리한 카운트에 몰아넣고도 포수와의 사인 교환에 시간이 걸린다.

“볼!”

정석적인 볼 배합을 가져가려는 포수와, 유인구 대신 빠르게 승부를 가져가고 싶은 투수의 의지가 충돌하는 상황.

‘긁히는 날에는 포수 미트만 보고 던지면 되는데.’

어쨌든 승부를 피할 의사가 없다면 고마운 일이다.

패스트볼 타이밍은 이미 읽었다. 정타는 못 만들지언정 맥없이 물러나지 않을 자신 정도는 있다.

다시 길어지는 사인 교환.

분명 카운트는 본인이 유리한데, 오히려 쫓기듯 다급한 몸짓으로 몇 번 고개를 가로젓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세를 잡는 투수.

쐐애애액!

몸쪽 코스로 날아온다는 강렬한 직감이 온몸을 꿰뚫는다.

가상의 히팅 포인트를 설정하고, 구질을 파악하기 위해 온 집중을 기울이면서, 몸쪽 낮은 코스의 체인지업이라는 것까지는 읽어냈는데.

‘어랍쇼······?’

공이 덜 가라앉는다.

홈플레이트 근처까지 와서 가라앉는 포크볼 같은 구종이 아니고서야, 그냥 코너웍만 좋은 배팅볼이나 마찬가지라는 뜻.

만약 지금껏 빅리그에서 한 번도 던진 적이 없는 포크볼을 오직 이 타석만을 위해 숨기고 있었던 거라면.

그 정도 노력이면 기꺼이 삼진 당해줘야지.

그런 생각으로, 하체에서부터 축적된 힘을 한 점으로 죄다 끌어모으며 풀스윙을 가져갔고―

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배트를 뒤로 휙 던지고 차분히 베이스를 돌면서, 새로운 재능의 효과에 감탄하는 시간을 가졌다.

투수의 생각을 전부 읽어내지는 못하더라도, 나한테 승부를 걸어올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만 안다면.

선택의 폭을 말도 안 되게 좁힐 수 있다.

정규시즌의 마지막 달을 앞둔 지금 시점에서 기록한 홈런이 51개.

남은 한 달 동안 새로운 무기의 사용법을 몸에 익힐 수만 있다면.

‘청정타자 홈런 기록 정도는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박도현이 사고를 당하던 해에 기록했던 단일시즌 64홈런.

생각지도 못했던 고지가 전혀 불가능해 보이지만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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