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83화 (183/200)

< 183. 야구의 꽃(5) >

9월 중순이 되면, 대부분의 지구에서는 포스트시즌 진출 팀이 결정된다.

내셔널리그의 경우, 다저스가 제일 먼저 서부지구 우승을 확정했고.

뒤이어 중부지구에서는 시카고 컵스, 동부지구에서는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무난하게 포스트시즌 티켓을 거머쥐었다.

[2038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대진표 예측! 디비전시리즈에서 와일드카드 팀과 맞붙을 NL 승률 1위 팀은 현재로선 다저스가 유력!]

개인적으로는 지난번에 제대로 호구를 잡았던 컵스와 다시 한번 만나는 게 가장 편할 것 같긴 한데.

와일드카드 팀과 붙을 때의 체력적인 메리트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지.

물론 그런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와일드카드 팀에게 챔피언십시리즈 한 자리를 넘겨주는 나사 빠진 팀도 있지만. 예를 들어 작년의 필리스라던가.

‘이렇게 보니까 왜 다 할만해 보이냐.’

[누가 상대든 방심하면 안 된다던 새끼 혹시 접시물에 코 박고 뒤졌나?]

‘어디 보자. 전에 도아가 보내준 2분 30초짜리 애교 동영상이 어디 있더라.’

[그게 나였어. 몰랐구나? 나 사실 교통사고가 아니라 설거지하다 황천길 건넌 거야.]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같이 사고당한 사람 앞에서 저런 소리를 할까.

저렇게 몸서리치는 걸 보니, 다음에 꼭 보여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표정 뭐야. 너 X발 또 음흉한 생각하지? 내가 널 몇 년 봤는데 이 뱀보다 더 사악한······. 아니다.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그것만은······.]

자아분열을 시작하는 박도현을 무시하면서, 원래 하던 생각으로 돌아갔다.

현재 와일드카드 레이스에서 둘 중 한 자리는 큰 이변이 없는 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차지가 될 거다.

지구 우승이 좌절된 팀들 가운데 승수도 눈에 띄게 높고 전력 자체도 가장 막강하다. 시즌 중반 선발 투수들이 돌아가며 이탈만 하지 않았더라도 필리스와 막바지까지 비벼볼 만했겠지.

그리고, 나머지 한 자리를 두고 하필이면 서부지구에서 개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잔여 경기에서 2패를 추가하는 순간 진출 가능성이 사라지는 파드리스는 사실상 힘들어졌고, 이제는 2위 디백스와 3위 자이언츠가 1.5게임 차 접전을 벌이는 중.

여기서 잠깐 계산을 좀 해보자.

같은 지구 안에서 한 팀은 100승 페이스를 달리며 우승을 확정지었고, 2위 그룹은 9월이 되도록 와일드카드 레이스를 이어가고 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덴버 시 언론에서 발행된 한 칼럼을 읽어보면 그 안에 답이 나와 있다.

[콜로라도 로키스, 이름은 리빌딩인데 남은 건 폐허뿐! 누가 자재라도 빼돌렸나?]

애정이 많은 만큼 울분도 많았는지, 다소 격앙된 필체로 써 내려간 이 기사는 올 시즌 로키스의 몰락 원인을 조목조목 짚어냈다.

우선, 리빌딩을 할 때는 젊은 선수들이 성장하는 동안 팀의 기둥이 되어줄 베테랑들이 필요한데, 올 시즌 도중 여러 베테랑들이 부상으로 드러누워 버렸고.

작년에 꼴찌로 추락했던 파드리스를 비롯해 지구 내 다른 팀들이 전부 빈틈없이 전력 보강을 하며 상대적 최약체가 되어버린 탓에, 3할대 승률을 간신히 넘는 개막장 팀으로 전락했다는 것.

그러다 보니, NL 서부지구 2위를 차지하는 방법은 다저스에게 최대한 많이 이기고 로키스에게 최대한 지지 않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는데.

실제로 다저스 상대로 그나마 많이 이겼던 디백스가 와일드카드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걸 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닌 듯하다.

아무튼.

원래대로라면 각각 지구 1위와 5위로 순위가 확정된 팀끼리의 매치업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어렵겠지만.

유독 이번에는 과장 좀 보태서 거의 타이브레이커 수준의 관심이 쏟아졌다.

[남은 경기는 16경기, 시즌 54홈런··· 사상 초유의 60―60 클럽 창설 앞둔 Koo는 ‘투수들의 무덤’ 쿠어스 필드로!]

박도현은 생전 시즌 60홈런도 넘겨봤고, 60도루도 기록해본 적이 있지만.

공교롭게도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이뤄본 적은 없었다.

가장 근접했던 건 64홈런에 58도루를 기록 중이었던 2035시즌이었는데. 다들 알다시피 박도현은 그해 정규시즌을 끝마치지 못했고.

60―60 달성은 시간 문제라고 확신했던 다저스는 행사용으로 제작해둔 물품들을 전부 폐기하느라 막대한 손해를 봤다.

“Koo, 내가 지금 하는 말 굉장히 어이없을 거라는 거 알지만, 혹시 시즌 끝나기 전까지 60홈런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나?”

“네? 아니 무슨 그런 질문을······.”

“마케팅 부서랑 재정 부서에서 서로 머리채 잡고 난리를······. 아니지, 아냐. 선수한테 무슨 얘길. 미안하네. 내가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잠깐 어떻게 됐었나 봐.”

작년 후반기에 9연패를 하던 시절보다 더 수척해 보이는 단장님이 불쑥 이런 말을 꺼내기도 했다.

[넌 은퇴하고 나서도 단장은 하면 안 되겠다.]

‘전엔 감독도 하면 안 되겠다면서. 현장도 프런트도 안 되면 대체 뭘 하란 건데?’

[너네 아버지 회사 물려받으면 되지 않냐?]

‘그때쯤이면 이미 회사 매각하고 축구 본다면서 유럽 여기저기 돌아다니실 것 같은데······.’

사회생활의 서글픔을 몸소 보여준 단장님뿐만 아니라, LA는 물론 미국 전역 각계각층의 수많은 야구팬들이 내 홈런을 바라는 와중에.

극단적 타자 친화 구장 쿠어스 필드 원정을 떠나게 된 거다.

‘하던 대로만 하면 돼.’

이 말을 반대로 뒤집어보면, 잘하려고 하면 꼭 일이 이상하게 꼬인다는 말도 된다.

그래서, 이 말을 숙소 도착해서 자기 전에 한 번. 경기장으로 출근하기 전에 한 번. 경기 시작 후 1회 초 대기 타석으로 나가면서 한 번.

총 세 번이나 되뇌면서 경기에 임할 준비를 마쳤는데.

따악!

“아웃!” “아웃!”

유격수 자리는 확장 로스터로 콜업한 유망주에게 맡겨두고, 2번 1루수로 선발 출장한 오늘 경기.

주전 2루수 조지의 타순을 이어받아 리드오프로 출장한 채드윅이 모처럼 안타를 쳤는데, 득점 기회를 날려먹었다.

하던 대로만 하자고 그렇게 말해놓고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끝내 버리지 못했던 걸까.

첫 타석에서부터 그런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 * *

내가 타자 전향을 시도한 이후로, 정말 수없이 많은 전문가들이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었고.

그로부터 대략 2년 좀 안 되게 지난 지금, 내가 출전하는 경기 하나하나마다 스토커마냥 따라붙으며 내 타자 전향이 실패할 거라고 염불을 외는 사람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대부분은 은근슬쩍 의견을 철회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며 끝까지 온갖 음모론을 퍼붓다가 신임을 잃고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본의 아니게 누군가의 일자리를 쥐락펴락하는 선수가 되어버린 셈.

그러다 보니, 소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Koo는 일단 칭찬부터 해주면 중간은 간다’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 소신을 지키며 대세에 반하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Koo가 쿠어스 필드에서 무조건 홈런을 추가할 거란 전문가들의 장담은 과연 타당한가?]

당연히 말을 꺼내기 무섭게 광기에 물든 다저스 팬들의 융단폭격을 맞긴 했는데.

어쨌든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홈런을 포함한 모든 장타를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나는 파크 펙터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선수에 속한다.

작년부터 올해까지의 데이터를 취합한 결과, 오히려 쿠어스 필드에서보다 전형적인 투수 친화 구장 오라클 파크에서 더 많은 장타를 때려낸 것이 근거다.

‘그러니까 구장 빨은 딱히 없고, 요즘 투수들이 계속 건드리기 힘든 공만 고집하는 걸 고려하면 그만큼 홈런이 나올 확률은 떨어진다······ 이건데.’

나는 이런 지조 있는 사람들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이건 상황에 따라 박쥐처럼 오가는 사람들에게 질려서 그런 것도 있다.

내가 블래스 신드롬에 걸리고 나서 유일하게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노골적으로 태도가 바뀌던 몇몇을 걸러낼 수 있었다는 거다.

만약 지금의 다저스 팀원들 사이에서 그런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면, 4억이 아닌 10억 달러짜리 계약서를 가져왔더라도 이 팀을 떠났을 거다.

어쨌든, 1차전에서 내가 홈런을 날릴 가능성이 희박하다던 몇몇 소수 의견은 경기 종료 후 제법 주목을 받았다.

[Koo, 5타수 무안타 2삼진 ‘충격’··· 병살 2개 날리며 팀 패배에 일조하다!]

└ Koo가 5타수 무안타라고??

└ 수비하다가 어디 삐끗하고 그런 건 아니지??

└ 여자친구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 아니, 어쩌다 한 경기 말아먹은 거 가지고 다들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 그리고 여자친구랑 문제 생겼다고 그걸 경기까지 끌고 오는 머저리가 어딨어?

└ 여기 있어 이 새끼야

[Koo의 개막 이후 첫 무출루 경기, 9월이 되어서야 나오다! 연속 경기 출루 기록 141경기에서 마무리!]

└ ???

└ 얘 이거 아직도 안 끝났었어??

└ 아니 이렇게 엄청난 기록이 진행 중인데 왜 아무도 말을 안 했지;

└ 60―60 성공하느냐 마느냐가 너무 임팩트가 커서 그랬을걸?

└ 그리고 연속 안타 기록 끝나고서는 중간중간 휴식일을 가졌으니 정식 기록이 아니라고 우기는 놈들도 있었어.

└ 아, 나도 본 것 같다. 무슨 근본에 어긋난다나?

└ 시즌이 거의 반년인데도 중간에 쉬면 인정을 못 받아? 야구 나한텐 좀 어렵다;

└ 근본 타령하는 놈들 어쩔 거야? 싱싱한 뉴비 하나 도망갔잖아!

└ 착한 일 했네

└ 인정합니다

[콜로라도 로키스, LA 다저스 7대 5로 제압! 다저스 상대로 62일 만에 거둔 귀중한 승리!]

└ 오늘 홈런 친 R.H.랑 벤은 나가 있어······.

└ 만루에서 병살 만들어준 채드윅도 나가 있어······.

└ 덕아웃에서 현란한 댄스를 보여준 랜디도 나가 있어······.

└ 에드윈 니콜슨 너는 남아 있어······.

└ 아무리 쿠어스 필드라도 4회도 못 버티고 4실점 했으면 남아야지;

└ 오늘은 Koo 너도 남아 있어······.

└ 뭘 시키려고 애들을 자꾸 남기냐

└ 청소라도 시키던가

└ Koo는 그동안 해준 게 많으니까 물만 떠 오라 하고 보내자. 양심 있으면 에드윈은 걸레질 끝내고 가라.

경기에서 지고도 팬들이 유쾌하게 받아주는 것은 지구 우승이 확정된 팀의 특권이다.

에드윈은 콜업 이후 타이밍이 잘 안 맞아서 이번이 쿠어스 필드에서의 첫 등판이었다. 나도 처음 이곳에서 공을 던졌을 땐 지금까지 배워온 상식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 아득할 따름이었다.

전형적인 타격전이었다. 우리도 홈런을 때리고. 그쪽도 때렸지만. 주자가 더 많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질 수도 있고, 져도 상관없는 경기였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마저 하나도 없지는 않았다.

‘공이 뜨지를 않았어.’

기후의 영향으로 플라이볼이 수두룩하게 나오는 쿠어스 필드에서 땅볼과 삼진만 나왔다.

내 기억이 맞나 싶어 기록까지 찾아봤는데,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아직 타자로서 많이 미숙했던 작년에도 이 정도로 타구가 안 뻗었던 날은 없었다.

그렇게 호텔 방에 드러누워 경기를 복기해보는데.

에이전트 데릭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Koo. 고산지대에서 경기 치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컨디션은 좀 어떠신가요?]

도아나 팀 동료들을 제외하면 시즌 동안 가장 많이 통화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니 딱히 이상할 건 없는데, 타이밍은 좀 의외다.

내가 어쩌다 한 경기 망쳤다고 해서 걱정할 양반은 아닌데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데릭은 형식적인 위로조차 건너뛴 채 본론으로 들어갔다.

[머지않은 시일 내에 훌리안에게서 연락이 갈 겁니다.]

“네? 아니 그 영감님이 언제부터 연락을 예고하고 했다고······.”

[구체적인 용건은 본인이 직접 전달하시겠다고 신신당부하셔서요. 미리 말씀 못 드리는 건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훌리안이 경기를 보다가 내 플레이에서 뭔가 어색한 게 눈에 띄었던 모양이라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에이전트를 통할 정도니 어쩌면 통화보다는 직접 만나서 해야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싶었고.

[작은 꼬맹이. 내려와라.]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디신데요?”

[너네 숙소 앞.]

아무리 그래도 설마 당장에 쳐들어올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돈 많고 시간 많은 노인네를 얕봐서는 안 되는 거였다.

< 183. 야구의 꽃(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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