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꽃(6)
은퇴한 야구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 훌리안 로페즈라고 들어본 적이 있다.
오프 시즌 한 철만 일해서 1년 내내 호화롭게 살 만한 돈을 버는 특급 인스트럭터에.
메이저리그를 폭격하는 제자를 연달아 두 명이나 배출하면서 명예까지 손에 넣은 데다가.
이건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데, 사모님과 사별했으니 미국 전역을 마음대로 쏘다닐 수 있는 게 제일 부럽다나.
“많이 먹어라. 오늘 속이 영 헛헛했을 텐데.”
“그런 말은 사 주시는 분이 하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I got it, Samuel Oh.”
“대체 그딴 한국말은 누가 가르쳐준 겁니까?”
덴버 시의 명물, 로키 마운틴 오이스터를 먹자고 하는 걸 간신히 말려서 평범한 레스토랑으로 데려왔다.
이름만 오이스터지, 실상은 그…… 소의 영 좋지 않은 부위라서.
생전의 박도현은 생각보다 괜찮다며 츄라이 츄라이를 연발했지만, 이 새끼가 못 먹는 음식이 있기나 할까.
“힘쓰는 데 좋지 않겠냐? 너 여자친구도 있잖아. 데이트하는 사이 아니라고 우기던 그 여자애 말이야.”
“저는 그런 거 안 먹어도 힘 잘만 씁니다.”
“그쪽은 꼬맹이가 아닌 모양이구만.”
“진짜 꼬맹이는 따로 있었죠.”
[뭐 이 새끼야?]
박도현이 발끈하는 꼬라지를 보는 건 썩 즐거웠지만,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려고 부르지는 않았을 거다.
“이런 산동네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코스가 끝나가고 커피와 디저트가 나오는, 차분한 이야기를 하기 좋은 타이밍.
여기까지 찾아온 진짜 의도를 물었다.
“네놈 홈런볼 잡아다 팔아서 돈 좀 챙기려고 왔다. 근데 이게 뭐냐? 늙은이를 헛걸음하게 만들고.”
“집에 몇 개 있는데 하나 드릴까요?”
“이 미친놈이 농담을 다큐로 받네.”
농담이었구나.
이 영감님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도현이 죽은 후 한동안 야구계를 떠나 있을 때, 푹 쉬다 왔다던 본인 말을 증명하듯 통통하게 살이 오른 채 나타나기도 했고.
“오늘 경기에서 스윙할 때 뭔가 좀 어색한 거 못 느꼈냐?”
“네……?”
갑작스러운 질문이어서 우물거리긴 했지만, 대답은 ‘No’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딱히 스윙에 대해 고민하지를 않았다.
스윙 밸런스가 보정되는 ‘스윙의 달인’의 효과를 몸소 체험한 후로는, 밸런스 유지에 들일 노력을 다른 데 투자했으니까.
“밸런스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직빵으로 알아내는 방법이 있지. 영업 비밀이니까 소문내고 다니면 뒈질 줄 알아.”
그렇게 말하며, 훌리안은 갑자기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무슨 스포츠 밴드 같은 걸 꺼냈다.
아무리 개인실이라지만 남의 영업장에서 이게 무슨 일이야.
“일어나서 이쪽으로 와라.”
“여기서요?”
“그럼 저기서 하리?”
투닥거리면서도 훌리안이 시키는 대로 자세를 잡았다.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더니, 착용을 끝내고 나서야 떠올랐다.
타자 전향 직후 기초 훈련을 이어갈 때, 스윙 시 팔꿈치 각도를 고정하기 위해 팔을 고정하던 밴드.
“뭐 자세나 밸런스나 이런 거 떠올리지 말고, 아예 머릿속을 비우고, 이 상태 그대로 스윙해 봐라.”
아닌 밤중에 식당에서 장비 차고 허공에 스윙하는 기묘한 풍경.
그러나 채 열 번을 채우기도 전에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수천 번을 휘두르며 몸에 완전히 익혔다고 생각한 각도인데도,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고 삐걱대는 느낌.
“그 상태에서 뭔가 어색한 게 있으면, 네가 스윙할 때 팔꿈치 각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거다.”
순간 아차 싶었다.
‘스윙의 달인’의 효과는, 정확하게 파워가 실리는 스윙에 몸을 저절로 맞춰주는 게 아니다.
그저 밸런스가 무너지겠다 싶을 때 신호를 보내주는 것뿐.
투수를 마주하는 긴장감에 묻히기 마련인, 그런 미묘한 차이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거다.
“당장이야 큰 문제는 안 되겠지만, 계속 네 멋대로 하다간 지금 같은 성적은 못 낼 거다. 사실 지금이 비정상적으로 잘 나오고 있는 거긴 하지만.”
마지막에 그나마 칭찬을 끼워넣긴 했지만, 기뻐할 겨를이 없었다.
‘스윙의 달인’은 도움이 많이 되어준 재능이지만, 그게 없을 때도 타석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때는 매일같이 영상을 돌려보고, 위화감을 느꼈던 타석에서는 자세가 어땠는지 분석하고, 좋은 감각을 최대한 똑같이 유지하기 위해 허공에 수없이 배트에 돌렸다.
재능 하나 얻었답시고 그 노력을 뒤로 미뤄둔 거였다.
“참 나.”
이번 시즌 동안 여러 기록을 갈아치우며 명예의 전당 입성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지금보다 명백히 페이스가 떨어지더라도, 그 속도를 최대한 늦추면서 5년 정도만 버틴다면.
누적 스탯이 좀 부족하더라도 임팩트도르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이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역시 아직 배워야 할 게 많네요.”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했으면 해결하는 건 금방이다.
온갖 핍박에 시달리며 수천 번씩 연습했던 것들이다. 잠깐 삐끗했다고 해도 관성에 따라 금방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올해는 보수를 더 올려드려야 하나 잠깐 고민하는 사이.
훌리안이 콧잔등을 긁적이면서 입을 연다.
“그럴 거 없다.”
그 표정을 보고 나서야 떠올렸다.
훌리안이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으면 잡았지, 이렇게 미리 연락도 없이 찾아왔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그리고, 본인이 직접 말하겠다는 용건이 무엇이었는지도 짐작이 갔다.
“네놈을 이렇게 따로 가르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소리야.”
* * *
“현기야, 너 어제 제대로 못 잤어? 피곤해 보인다.”
올해의 마지막 쿠어스 필드 원정 2차전을 앞둔 클럽하우스.
컨디션 조절을 위해 등판을 건너뛰기로 한 제리의 대체 선발로 낙점된 김희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요, 형님. 당첨이에요.”
“어? 뭐가?”
“방금 형님이 똑같은 질문 일곱 번째로 하셨거든요.”
피곤해 보인다, 표정이 안 좋다, 어제 경기는 신경 쓰지 마라 등등.
심지어 감독님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오늘은 벤치에서 시작해보겠냐고 진지하게 물어볼 정도였다.
그렇게 심각해 보였나. 나름 잠은 푹 잤는데.
[진짜 컨디션에 이상 없는 거 맞지? 휴식은 준다고 할 때 받아놓는 게 좋긴 한데.]
‘거울이나 좀 보고 얘기해라.’
[나 원래 거울에 안 비치는데?]
핀트를 못 잡는 박도현에게 슬쩍 퍽유를 먹여주고는 도망치듯 덕아웃으로 향했다.
지도 풀타임 유격수로 뛰던 시절에 벤치에서 시작하자고 하면 입이 댓 발은 나와 있었으면서.
아직 아무도 나와 있지 않은 원정 덕아웃.
가만히 앉아 전날 훌리안과의 대화를 차분히 떠올려봤다.
‘내 밑천 네놈이 죄다 빨아먹었잖냐. 이제 더는 가르칠 것도 없어. 어디 또 호구 같은 놈 없나 다시 찾아봐야지.’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만두는 게 어딨냐고, 최소 1년 전에는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고집을 부려봤는데 소용없었다.
내가 배울 만한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단호한 대답만 돌아올 뿐.
‘올해 비시즌에는 그냥 어디 따뜻한 동네서 쭉 쉴 거니까 찾지 말아라.’
‘그럼 올해 제 훈련은…….’
‘이제 기술은 더 건드릴 것 없고 몸만 만들면 되잖냐. 네놈 피지컬 데이터는 데릭한테 보낼 거고. 몸 만드는 거 도와줄 놈은 내가 따로 주선해서 말은 해놓을 테니 그리 알고.’
자신이 떠난 후의 뒤처리까지 전부 끝내놓은 상태였는데, 내가 거기서 무슨 말을 더 할까.
“플레이 볼!”
그 와중에 시작된 경기.
1회 초, 다시 리드오프 2루수로 돌아온 조지가 볼넷을 얻어내며 1루에 나갔다.
무사 1루라는, 전날과 똑같은 상황에서 맞이한 오늘 경기 첫 타석.
‘얘 좀 보게.’
전날 로키스 선발 투수는 제법 신중한 편이었는지, 3번의 타석을 상대하는 내내 까다로운 코스만 고집했다.
그걸 인플레이 타구로 만들어 보겠답시고 스윙을 크게 가져갔던 것도, 전날 갑자기 밸런스가 삐끗했던 원인 중 하나였겠지.
그런데, 오늘 이 친구는 아주 눈에서 레이저를 쏘아댄다.
전날 자기보다 살짝 떨어지는 투수한테 꽁꽁 묶이면서 대기록까지 중단됐으니, 자신감이 붙었다 이거지.
게다가 좌투 대 좌타이기도 하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타석에 들어가 잠시 스윙 연습을 이어갔다.
끝없는 연습으로 몸에 새겨놓은 바로 그 폼으로.
공이 날아오는 코스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더라도, 결국 스윙의 출발점에서는 팔꿈치가 똑같은 각도에서 출발하도록.
쐐애애액!
초구부터 과감하게 들어오는 투수.
존 안쪽으로 들어오는 포심이라는 것을 직감하자마자 본능적으로 스윙에 들어갔다.
타격은 제대로 배워 본 적도 없던 나를, 이런 기계적인 대처가 가능해질 때까지 갈구다니.
하여튼 참 강압적이고, 입도 험하고, 선수들 대하는 태도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양반.
그런 사람한테는 지금까지 고마웠다는 말 따위 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헤어지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거였다.
따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내일은 헛걸음 안 하게 할 테니 홈런볼 받을 글러브나 잘 챙기십쇼.’
“으아아아아아아악!!!”
“Koo!!! Koo!!! Koo!!! Koo!!!”
“돌아왔구나 구태식이!!!”
올해의 행보에 실망할 대로 실망해서 경기장을 찾지 않게 된 로키스 팬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다저스 팬들과 60―60 달성을 염원하며 찾아온 일반 야구팬들이었고.
그들이 바라마지않던 홈런이 터져 나온 순간, 원정 경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야, 저기 저 사람 혹시…….]
베이스를 돌다 말고 박도현의 다급한 외침에 전광판 쪽을 쳐다봤는데.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홈런볼이 들어간 글러브를 치켜들고는 포효하는,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중남미계 노인.
선글라스로 가리면 모를 줄 알았나.
화장실에서 똥 싸면서 핸드폰 화면으로 봐도, 저 사람이 훌리안이라는 걸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이 정도면 어제 개인 레슨비는 충분히 갚은 거겠지.
* * *
2차전 역시 전날과 똑같은 타격전으로 흘러갔지만, 경기 양상은 전혀 달랐다.
전날 승부처에서 두 번이나 병살을 때리며 공격의 맥을 끊어놓았던 내가 완전히 부활해서 멀티 홈런 경기를 치렀으니까.
[LAD 12 : 6 COL]
“김희영 선수, 오늘 경기에서 시즌 3승이자 두 번째 선발승을 달성한 소감을 말씀해달라십니다.”
“사실 5이닝 4실점이면 잘 던진 건 아니라 부끄럽긴 한데, 그래도 점수 내줘도 상관없으니 적극적으로 던지라는 감독님 지시는 잘 지킨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 누구한테 감사를 전하고 싶으신지도 말씀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아무래도 현기가 제일 고맙죠. 사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가 싶었는데, 초반부터 점수를 팍팍 내주면서 마음 편히 던질 수 있었어요.”
“저기, 김희영 선수? 지금 리포터가 혹시 입에 뭐 넣고 있는 거 아닌지 궁금해하시는 것 같은데.”
“이거요? 사탕인데요.”
“사탕……?”
“사탕.”
“그걸 인터뷰 중에 왜……?”
“경기 시작 전에 현기가 준 건데, 설마 오늘 인터뷰할 줄 모르고 입에 넣고 있었거든요.”
“리포터가 지금 하시는 말이, 보통은 인터뷰하기 전에 뱉지 않냐고…….”
“뱉어도 될까요? 현기가 준 건데.”
시즌 3승을 기록한 김희영은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인터뷰에서 헛소리를 줄줄 늘어놓았다.
당황한 리포터와 뭐가 잘못됐는지를 전혀 모르는 김희영 사이에서 애꿎은 통역만 ‘극한직업 ― 스포츠 통역 편’을 찍었지만.
그런 김희영이 부끄럽다며 타박하던 한국의 야구팬들은 곧장 다른 데로 관심을 돌렸다.
[LA 다저스 구현기, 연속 멀티 홈런 경기 치러내며 시즌 58홈런 달성! ]
└ 구현기 그만 잘해!!!
└ 이 새끼 때문에 구현기 60홈런 못 찍음 ㅅㄱ
└ 구현기는 니새끼가 죽인 거다
└ 인간쓰레기 새끼
└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보내버리면 어카나;
급격히 올라가 버린 60홈런 달성 가능성에, 다른 사소한 것들은 죄다 묻혀버렸다.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훌리안 로페즈가 내 55호 홈런볼을 캐치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삭제된 게시물입니다.)]
└ 파크 팩터가 어쩌고 하시던 분 어디 갔음?
└ 링크 타고 가보니까 블로그도 지워버렸네
└ ???: 쪽팔려서 돌아가셨나요?
내가 쿠어스 필드 원정에서 홈런을 추가하기 힘들 거라고 예측했다가 1차전이 끝난 이후 아주 잠깐 주목받았던 일부 전문가들이 다시 개같이 멸망하는 사이.
다저스 선수단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홈구장 펫코 파크로 이동했고.
이번 시즌 내내 다저스에게 호구를 잡혀주며 ‘아낌없이 주는 파드리스’의 면모를 보여주던 팀답게.
시즌 막바지까지 나에게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따아아아아아아악―!
[이 타구는! 마침내! See! You! LAter!!! 펫코 파크에서 시리즈 스윕을 가져오는 역전 쓰리런!!! Hyun! Ki! Koo!!! 지금까지 아무도 밟아보지 못했던 60―60의 경지에 발을 들이는 순간입니다!]
처음 두 경기를 연달아 가져오며, 파드리스의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함과 동시에.
3연전 동안 타석에서 차분하게 기다리다가 실투를 받아먹으며 끝내 60홈런 고지에 도달한 것.
‘이제 목표는 반쯤 이뤘어.’
남은 경기는 10경기.
박도현의 청정타자 홈런기록을 달성하기까지 남은 홈런 개수는 5개.
약물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선수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홈런 타자.
그 자격을 얻기 위한 마지막 여정을 떠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