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꽃(7)
“요새 야구 보믄 스몰볼이니 작전 야구니 함서 일단 출루시킨 다음 찔끔찔끔 점수 짜내고 다 그카대. 뭐 이기는 데 도움은 될지 몰라도 아들 보기에 뭔 재미가 있긋나. 야구의 꽃은 홈런이다. 그기 야구고 그기 낭만인기라.”
중학생 시절 야구부 감독은 선수들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당연하게도 그걸 귀담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도 사투리가 심하다는 것 말고는 전부 잊어버렸다.
그리고 몇 년 후.
짐도 채 풀지 못한 미국의 작은 원룸에서, 문득 해묵은 기억을 떠올렸다.
[첫 풀타임 시즌에서 40홈런 기록한 Park! 다저 스타디움 연일 전석 매진의 주역으로 우뚝 서다!]
박도현이 놀라운 데뷔 시즌을 보내며 미 전역에 열풍을 불러일으키던 시절.
그때의 나는 하이싱글 A로 콜업된 이후 첫 경기에서 백투백 홈런을 얻어맞고 멘탈이 가루가 되어 있었다.
‘야구 X같이 하네.’
야구의 트렌드는 생각보다 빠른 템포로 바뀐다.
타격 전문가들이 플라이볼 혁명을 일으키자, 투수들은 장타를 억제하는 피칭 디자인을 개발하기도 하고.
스트라이크 존이나 공인구의 변화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한 새로운 접근법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홈런에 대한 패러다임만큼은 기나긴 야구의 역사를 통틀어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평소 팀 배팅을 강조하는 코치라도, 풀스윙을 돌리다 삼진을 먹는 타자에게 쌍욕을 퍼붓던 팬이라도, 어쩌다 홈런 한 방 나오면 다들 손바닥 뒤집듯 태세 전환을 한다.
투수도 마찬가지다. 연속 볼넷을 내줄 때는 버틸 만해도, 홈런을 직감한 순간 힘이 쭉 빠진다.
차라리 홈런을 맞아도 좋으니 볼넷은 주지 말라는 투수 코치의 말은, 진짜 처맞아도 용서해주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짬 좀 먹은 투수라면 누구나 안다.
그래서, 박도현이 시즌 40번째 홈런을 기록했다는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그날, 굳게 다짐했었다.
‘어떻게든 이 팀에 붙어 있어야지. 그래서 저 새끼는 절대 상대로 안 만날 거야.’
하루아침에 소속팀이 바뀌거나 쫓겨나는 일이 허다한 마이너리거 주제에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날의 다짐은 현실이 되었다.
내가 콜업되고, 박도현이 떠나기까지 대략 3년 반 정도.
박도현은 눈치도 더럽게 없고, 틈만 나면 깐족거리면서, 어쩌다 실책이라도 하면 사과 대신 윙크를 날리며 사람을 빡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놈이었지만.
적어도 저 새끼를 상대해야 하는 상대 투수보다는 내가 낫다는 생각이, 한결 편안하게 마운드에 올라갈 수 있게 해주었다.
유일한 아쉬움이 있다면, 이놈이 생전 어떤 생각으로 타석에 임했는지를 직접 듣지 못했다는 거다.
지금의 박도현과 선수 시절의 박도현 사이에는 너무 먼 거리가 있다.
풀타임 내야수로 시즌을 소화하는 다양한 요령은 배울 수 있어도.
한 경기에 볼넷을 가장한 고의사구를 서너 개씩 당하고, 의미 없는 견제구가 수없이 쏟아지고, 원정만 가면 과격한 팬들이 내 가족과 여자친구를 향한 저주를 퍼붓는 와중에 제정신을 유지하는 방법은 알려줄 수 없는 거다.
구체적인 행동이 아니라 마음가짐의 영역이니까.
“이봐!!! 심판!!! 이건 X발 아니잖아!!!”
“당신 지금 욕했어?!”
“아니요!!!”
기록을 저지하려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 혹은 자신의 팀이 대기록의 밑받침이 되는 걸 원치 않는 이들의 견제가 심해지자.
오브라이언 감독님이 덕아웃을 뛰쳐나오는 날이 부쩍 늘었다.
질질 끄는 투수한테 경기 지연 행위가 아니냐고 트집을 잡거나, 선 넘는 관중은 퇴장시켜야 한다고 어필한다던지, 뭐 그런 것들 때문에.
그랬던 감독님은, 시즌 최종전을 앞두고 클럽하우스에서 나와 마주친 순간 이렇게 물었다.
“Koo, 최근에 어디서 무슨 계시라도 받았어?”
“네? 그게 무슨…….”
“이게 참, 구체적으로 뭐라 설명하긴 어려운데, 요새 타석에서 대응하는 걸 보면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진 것 같아서.”
감독님이 원래부터 선수들 상태를 파악하는 눈이 남다르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예민한 줄은 몰랐다.
[잠자는 숲속의 타자(A등급) ― 상시형]
○ 타석에서 외부 자극에 둔감해집니다.
○ 타석에서 일정 수준의 분당 심박수를 초과할 경우 정상 범위로 조절됩니다.
60―60 클럽을 창설하면서 얻은 새로운 재능.
처음 설명을 읽었을 땐, 적어도 경기 중 심장마비 걸릴 일은 없겠다며 박도현이랑 시시덕거렸는데.
이 재능의 진정한 가치는, 60―60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에 맞이한 다음 경기 첫 타석에서 알아낼 수 있었다.
내 뒤에 무시무시한 홈런 타자들이 즐비해 있는데도, 어김없이 쓰리 볼로 시작하는 투수.
명치 쪽에서 미지근한 빡침이 올라오려던 그때.
한순간에 마음이 차분해지더니, 투수의 행동 하나하나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게 됐다.
투수를 향한 팬들의 야유도, 뒤에서 바스락대는 포수도 잠시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오직 세상에 투수와 나만 있는 듯한 감각.
그 지경에 이르고 나니 비로소 떠올랐다.
‘너네도 똑같았지.’
투수 시절, 눈앞에 홈런 타자가 다가올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무리 위협적인 타자를 상대하더라도, 요즘처럼 대기록이 가까워지고 있지 않은 이상 대놓고 공을 빼는 투수는 생각보다 드물다.
투수 시절의 나도 덕아웃에서 넓게 넓게 승부하라는 지시가 나오면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지.
예전엔 대체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잘 몰랐는데.
투타 모두를 겪어보고 나서야 나름대로 대답을 내놓았다.
‘그놈의 홈런이 사람 눈을 멀게 만드는 거야.’
코칭스태프들과 팬들이 홈런 한 방에 그간 쌓인 삼진과 범타를 미뤄두게 된다면.
투수들은 반대로 홈런 밑에 깔린 아웃카운트에 시선이 쏠리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이 타자한테 잡아냈을 때의 쾌감이 머릿속에 어른거린다는 거다.
자신의 공 하나가 언제든 경기의 판도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원초적인 짜릿함.
그건 투수가 경기를 치러내는 가장 큰 원동력인 동시에, 경기를 제어하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이기도 하다.
만약 이 타자만 넘기면 괜찮을 거란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힌다면, 바운드볼이나 심하면 폭투를 만들어서 포수를 괴롭힐 것이고.
반대로 라인에 제대로 걸치는 공 하나만 던지면 생각보다 쉽게 잡아낼지도 모른다는 희망회로가 돌아가 버린다면.
따아아아아아아아아악―!
결과는 재능을 얻은 이후로 추가한 4개의 홈런으로 보여줬다.
투수들이 미련을 못 버리고 은근슬쩍 존 안에 집어넣는 타이밍을 읽어내고 나서부터는, 성급한 스윙으로 범타를 만들어내는 일이 확 줄어들었으니까.
[‘시즌 64홈런’ Koo, 이제는 정규시즌 최종전으로… Park과 타이기록에 만족할 것인가, 친구를 뛰어넘을 것인가?]
박도현과의 타이기록, 시즌 64홈런.
청정타자 기록이라는 의미는 있어도, 앞선 기록들이 말소되지 않는 한 공동 5위에 불과하다는 걸 나도 잘 안다.
그러니 굳이 따로 의식해가면서 경기에 임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그런데.
‘타이기록은 좀 어정쩡하잖아?’
가뜩이나 포스트시즌 진출팀도 확정되면서 잔여 경기만 내내 치르고 있는 마당에.
기록을 넘는 것도 못 미치는 것도 아닌 상태가 딱히 달갑지는 않다.
근데, 타이기록으로 남겨두기 좀 그러니까 홈런 하나 빼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냥 그렇다고.
* * *
“Koo가 Park의 기록을 뛰어넘어주기를 바라는 나와, Park의 이름이 덧씌워지는 걸 원치 않는 내가 서로 싸우고 있다.”
오래전 그라운드를 떠난 한 원로 선수가 남긴 말이었다.
누군가는 구현기에게 응원은 못 해줄망정 힘 빠지는 소리나 하느냐며 발끈하기도 했지만.
박도현을 향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 이 말에 남몰래 고개를 끄덕인 팬들도 적지 않았다.
누적 기록을 제외한, 단기간에 이뤄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타자 관련 기록을 싹쓸이했던 선수.
그리고 그 기록을 차근차근 깨트려가고 있는 그의 절친한 친구.
이 흥미진진한 상황에, 다저스가 일찌감치 지구 우승을 확정한 후로도 다저 스타디움의 매진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어쩌면 다저스 프랜차이즈 시즌 최다 홈런 기록 보유자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사람들은 최종전을 보러 모여들었다.
물론 상대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라이벌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돌고 돌아 결국은 자이언츠네요.”
다저스와의 상대전적이 좀 더 좋았던 디백스를 끝내 추격하지 못하고 와일드카드행이 좌절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만약 상대가 자이언츠가 아니었다면, 제리 헤이즈택의 약혼녀이자 현재 임신 중인 이나현은 경기장에 올까 말까 망설였겠지만.
뼛속까지 다저스 팬인 그녀는 자이언츠 선수들의 똥 씹은 표정을 볼 수 있는 경기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야구장 되게 오랜만이죠, 언니?”
“그쵸. 그래도 이제 안정기라서. 포스트시즌도 홈 경기는 올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무리 의사가 괜찮다고 그래도, 제리 선수는 또 호들갑 떨면서 걱정할 것 같던데.”
“그쵸. 근데 그래서 더 오고 싶더라고요. 머리로는 걱정하는데 몸은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게 귀여워 죽겠어 아주.”
“아, 그렇구나…….”
키가 2미터 가까이 되는 근육질 남자한테서 대체 어떻게 귀여움을 느끼는 건지 도저히 이해는 못 하겠지만.
박도아는 남자친구와 함께 있을 때를 제외하면, 이렇게 이나현과 같이 야구장에 올 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
이나현과 제리 헤이즈택의 관계가 알려졌을 때 겪었던 것과 비슷한 문제를 박도아 역시 겪고 있었으니까.
남자친구 구현기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점도 있어서, 이나현처럼 불합리한 뒷말이 나오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사인을 받아 달라거나, 만나게 해달라거나 하는 요청을 무례하지 않게 받아넘기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특히나 구현기가 다저스 프랜차이즈 시즌 최다 홈런 타이기록을 세우고 나서부터는 이상한 질문을 받는 일이 부쩍 늘기도 했고.
“네가 보기엔 어때? Koo가 Park의 기록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경기를 뛰는 것도 아닌데, 대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건가.
그렇게 황당해하면서도, 매일같이 지친 얼굴로 집에 들어오는 남자친구를 보면 괜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박도현을 소환해서 자꾸만 비교해대는 언론 때문에 안 받아도 될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그러나 바로 오늘 아침.
학교에 가기 전 구현기가 자신을 붙잡고 해준 한마디에, 지금껏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오후 수업 전에 얘기했던 그거 맞지? 허구한 날 기습 쪽지시험 본다는 그 과목.”
그저 지나가듯 한 번 언급했던 걸 기억해준 게 설레기도 했지만.
만약 오늘 홈런을 못 치더라도, 구현기는 자신이 아는 다정한 남자친구의 모습 그대로 남아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기에.
박도아는 살짝 붉어질 뻔한 얼굴을 신발장 쪽으로 돌리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었다,
“그 교수님도 얼른 수업 끝내고 경기장 올 생각밖에 없을 테니까 괜찮아.”
구현기가 시즌 65호 홈런을 날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교수의 얼굴이 떠올라, 박도아는 조용히 웃었다.
박도아도, 이나현도, 경기장 어딘가에서 응원 도구를 주섬주섬 챙기며 목 상태를 점검하고 있을 교수도.
오늘 경기를 지켜보는 마음은 다들 비슷할 것이다.
라이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최종전에서 깔끔하게 제압하며 기분 좋게 디비전시리즈를 준비하는 동시에.
구현기가 홈런 하나를 추가하면서 시즌 최다 홈런 부문 다저스 프랜차이즈 1위이자 청정타자 1위 기록을 경신하는 것.
그러나, 경기에 정신이 팔려있을 줄 알았던 박도아의 전공 교수가 어김없이 쪽지시험을 가져오며 수업은 착실히 진행했던 것처럼.
많은 이들이 염원한다고 해서 상황이 꼭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따아아아아아아아아악―!
경기 시작과 동시에, 다저 스타디움은 침묵에 빠졌다.
오늘 경기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아드리안 빌라.
컨디션에 따라 기복이 심한 탓에 ‘랜덤박스형 투수’로 불렸던 작년까지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확률조작형 투수’라는 새로운 별명이 붙은 그였지만.
[이 타구는!!! 외야수 전원 지켜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저스 대 자이언츠의 시즌 최종전!!! 선발 아드리안 빌라가 초구에 리드오프 홈런을 허용합니다!!! 스코어 1대 0!!!]
다저스 팬들이 바라던 구현기가 아니라, 뜬금없는 데서 터져 나온 홈런.
초장부터 팬들의 기대가 어긋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