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꽃(8)
정규시즌 최종전 바로 직전에서야 지구 우승을 확정했던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일찌감치 왕좌를 차지하고 아래쪽 순위 다툼을 구경하며 이따금 고춧가루나 뿌리던 다저스.
자연스레 경기의 승패에 대해서는 팬들이나 선수들이나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관심도 구현기가 홈런을 치느냐 못 치느냐에 죄다 쏠려버렸으니.
경기 전 오브라이언 감독의 인터뷰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딱히 없었다.
“오늘 경기는 가능한 한 투수 자원을 적게 소모하는 방식으로 운용할 계획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간 투수 중 조기 강판된 횟수가 가장 많았지만, 제구가 개선된 올해는 현재까지 183과 3분의 2이닝을 소화하며 든든한 이닝이터로 발돋움한 아드리안 빌라.
아드리안이 최소 6이닝, 가능하면 그 이상을 버텨주는 것이 베스트.
그 뒤로 멀티 이닝 릴리버를 투입해 2~3명의 투수로 게임을 끝내는 것이 오브라이언 감독의 플랜.
따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러나, 1회 초 자이언츠의 선두 타자가 초구 홈런을 날려버리면서, 그 플랜에는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실투도 아니고, 몸쪽으로 잘 제구된 포심이었다.
다만 타자의 노림수가 제대로 맞았을 뿐이다. 구현기를 포함해 몸쪽 공 대처 능력이 좋은 타자들은 지금처럼 바짝 붙은 공으로도 장타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문제는 그걸 알아도 홈런의 데미지가 딱히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뒤이어 2번 타자와 3번 타자에게 연달아 볼넷을 내주며 무사 1, 2루.
심지어 3번 타자가 쓰리 볼에서 확 벗어나는 슬라이더에 뜬금없이 헛스윙만 안 했으면 연속 스트레이트 볼넷이 나올 뻔했다.
두 번째 볼넷 이후 마운드를 방문하는 포수를 쳐다보며, 오브라이언 감독은 착잡한 심정을 감추려 애썼다.
초구 홈런의 충격으로 영점을 잡지 못하고 고전하는 아드리안.
경기 플랜이 망가지는 건 상관없지만,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안 좋은 기억을 품는 건 곤란하다.
아드리안은 포스트시즌에서도 선발진의 한 축을 맡아줘야 할 투수니까.
에드윈 니콜슨과 김희영을 모두 소모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드리안의 등판을 일찌감치 끊어줘야 고민하던 오브라이언 감독.
그가 잠시 벤치 코치와 의견을 나누기 위해 뒤돌아선 그 순간.
“아웃!” “아웃!”
워낙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오브라이언 감독은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
팀 내 최고 연봉을 받는 주전 유격수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선발 투수를 멱살 잡고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 * *
[(Live) SF 1 : 0 LAD ― 1회 초]
○ 5구, 볼 (96 MPH, 포심)
○ 4번 타자, 볼넷으로 출루
○ 1루 주자 2루까지 진루
└ 지금 피자 시키면 경기 끝날 때쯤 오겠지?
└ 너네 동네가 어디인 줄 알고 그딴 걸 물어보냐? 그리고 진작 안 시키고 뭐 했어?
└ LA다, 이 개자식아. 그리고 피자는 미리 시켜뒀다고. 울면서 창밖으로 집어던졌을 뿐이야.
└ 미국이 환경 오염 국가 부동의 1위인 게 이 새끼 때문이었구나
└ 아니 아드리안 저 새끼는 내내 잘하다 오늘 갑자기 왜 저래? 가을 타나? 설마 커쇼의 저주가 아직도 안 끝났나?
└ 멀쩡하게 살아 있는 양반을 왜 흑마법사로 만들어;
└ 쟤 원래 저래. 작년 월드시리즈 2차전이었나? 그때도 홈런 처맞고 그랬어.
└ 응? 그랬나? 우리 작년 월드시리즈 스윕한 걸로 아는데.
└ 아드리안이 처발린 거 타자들이 다 메꿔줌 ㅋㅋㅋ
└ 아 ㅋㅋㅋ
└ 쟤는 초반에 흔들리면 우르르 무너지는 저놈의 고질병 못 고치면 절대 빅게임 피처는 못 될ㄱ
○ 5번 타자, 1구 타격(88 MPH, 체인지업)
○ 1루 주자 2루에서 아웃, 타자 병살타 아웃
○ 2루 주자 3루까지 진루
└ ???
└ 와 이걸 이렇게 도와준다고??
└ 방금 Koo 넘어지면서 포구부터 송구까지 한큐에 끝내는 거 봤음?? 저러고도 무릎이 멀쩡한가??
└ Koo 이 새끼 임팩트 원툴로 골드글러브 딴 줄 알았는데 기본기 미쳤네;
└ 너 지금 Koo보고 이 새끼라고 했냐?
└ 죽일까요 마스터?
└ 가을야구 할 때 되니까 미친놈들 늘어나는 거 보소
○ 6번 타자, 1구 타격(89 MPH, 체인지업)
○ 유격수 뜬공 아웃, 이닝 종료
└ ?????
└ 내가 지금 제대로 본 거 맞지?
└ 유격수가 저기서, 그것도 뒤로 물러나면서 저걸 잡는다고?
└ 무사 1, 2루서 공 두 개로 공수교대 실화냐;
└ 아무리 투수가 메롱이라도 지켜보지도 않고 막 건드리면 어떡하니…….
└ Koo가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서 쉬워 보이는 거지, 저거 까다로운 타구인 건 맞음
└ 아드리안 저 새끼 Koo한테 들러붙는 거 봐라;
└ 가만두면 뽀뽀도 할 듯
└ 저거 말려야 하는 아니냐?
└ 그러게. 지금 기다리는 사람이 몇 명인데 어디서 새치기냐
└ 난 작년부터 이미 번호표 뽑았음
└ 돌겠네 진짜
* * *
야구는 흐름의 스포츠이며.
그 흐름을 만드는 것은 타이밍이다.
예를 들어, 오늘 경기 1회 초를 보자.
초구를 통타당해 리드오프 홈런을 허용한 뒤로 영점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아드리안은 전형적인 꼬라박는 흐름에 몸을 맡겼다.
만약 이 홈런이 2회에 맞은 거라면, 하다못해 같은 리드오프라도 카운트 싸움을 좀 하다가 얻어맞은 거라면, 이 지경까지는 안 왔겠지.
보통 초구는 그날 컨디션을 점검해보는 차원에서 던지는 선수들이 많은데. 그게 그대로 넘어가 버렸으니.
안 좋은 타이밍에서 맞은 홈런이 안 좋은 흐름으로 이어진 거다.
반대로, 자이언츠는 무사 1, 2루의 추가 득점 기회를 얻으며 초반부터 좋은 흐름에 올라탔지만.
섣부른 공략이 병살과 뜬공으로 이어지며 그 흐름을 스스로 말아먹고 말았다.
이 경우 오히려 앞선 상황에서의 좋은 흐름이 오히려 독이 된다.
기대감은 잔뜩 올라왔는데, 정작 결과는 공 두 개로 이닝 끝.
본인들이야 이미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됐다지만, 어떻게든 다저스 투수들을 두들겨서 디비전시리즈를 말아먹게 만들겠다는 결의가 맥없이 무너졌겠지.
그리고, 이날 다저스의 수비 이닝은 1회 초와 거의 비슷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1사 만루에서 투수 앞 땅볼! 아드리안 빌라가 홈으로 송구! 아웃! 홈에서 브레이든이 1루로! 아웃! 더블 플레이로 이닝 종료! 다저스가 추가 실점 위기를 이렇게 넘깁니다!]
[유격수 Koo의 다이빙 캐치! 라인드라이브 아웃! 3루 주자는 역동작에 걸리면서 귀루할 수 없습니다! 단숨에 아웃카운트 두 개가 올라가며 자이언츠의 무사 1, 3루 기회가 2사 1루로 바뀝니다!]
자이언츠는 선발 야수 전원이 출루를 기록하며 아드리안을 지독히도 괴롭혔지만.
6회 초까지 총 네 번의 병살을 때려내면서 알아서 자멸했다.
한마디로, 투수와 타자가 서로 이기라고 등 떠미는 와중에 야수들만 개같이 구르는 경기.
“아직 할 만하지, 아드리안?”
아드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얘는 긁히는 날에는 누구보다 유쾌하면서도, 오늘처럼 안 풀리는 날에는 한없이 찌그러진다.
그나마 오늘은 좀 괜찮은 편이다.
6이닝 동안 4실점을 하면서도 투구 수는 75개.
자이언츠 타선도 주자가 좀 쌓였다 싶으면 범타로 물러나준 덕분에, 어쨌든 감독님이 계획한 대로 마운드에서 오래 버텨주긴 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오늘처럼 자신 있게 던져주기만 해. 나머진 야수들이 책임지면 되니까.”
얘 때문에 죽어라고 구른 입장에서 이런 격려까지 하려니 속이 좀 뒤틀리지만, 뭐 어쩌겠나.
야구에서는, 특히 단기전에서는 선발 투수님께서 갑이신데.
안타를 맞고 실점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연속 볼넷은 주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줘야지.
[그런 말을 작년에 이미 7실점 1자책이라는 개막장 경기를 치러본 얘한테 해 봤자…….]
‘도아가 나아아중에 아기 생기면 지어주고 싶다던 이름이 있었는데, 그게 뭐였더라.’
[그런 경기를 겪어봤으니 오히려 야수들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거야. 그치?]
이제야 박도현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이 좀 잡힌다.
그때, 어느새 기운을 차렸는지 아드리안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가 잘못됐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정말?”
“응. 내 수호천사를 옆구리 같은 잘 보이지도 않는 부위에 새겨놓아서 이렇게 됐을 거야. 그러니 투수의 심장이기도 한 어깨 쪽에 하나 더얽.”
내 수비하는 모습이 새겨진 바로 그 부위에 좋아요 18콤보를 먹여줬다.
오늘 선발이라고 오냐오냐해줬더니 선을 넘다 못해 지 맘대로 그리고 있네.
운동장 라인기여 뭐여.
* * *
아드리안은 7회 초 선두 타자를 잘 잡아놓고, 다음 타자에게 2루타를 허용하자마자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했다.
다저스 타선이 어찌저찌 점수를 짜내면서 스코어는 4대 2.
경기 내내 꾸준히 실점을 내줬지만, 어쨌든 6.1이닝을 버티며 기어이 시즌 190이닝을 채운 덕에 나름 만족한 듯했다.
“형님.”
“어, 현기야. 왜?”
“오늘은 늘 하던 말씀 안 하시네요?”
다음 투수로 올라간 김희영은 공 6개로 1사 2루의 위기를 잘 막고 내려왔다.
감독님이 투수를 적게 쓰겠다고 공언한 만큼, 9회까지 책임질 확률이 높은 상황.
이럴 때면 항상 승리투수가 어쩌고 하면서 타자들한테 기웃거리곤 했으면서.
“에이, 무슨 또 그런 얘길. 그냥 추가 실점만 안 하면 너희가 역전해줄 텐데.”
그렇게 말하면서, 김희영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에 쏙 넣고 우물거리더니.
나한테도 하나 던져줬다.
“인터넷에서 봤어. 나한테 준 레몬 사탕 말인데, 생각이 많을 때 먹으면 좋다면서?”
뭔가 해서 보니, 전에 덕아웃에서 줬던 거랑 똑같은 브랜드의 사탕 봉지다.
대체 그런 건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걸까.
“그걸 알고 나니까 뭔가 좀 민망하더라고. 승리투수에 대한 집착을 진작에 버렸으면 더 빨리 달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더라.”
“아, 네. 뭐…….”
“고맙다 현기야. 잡념을 버리는 방법을 지금이라도 알게 해줘서.”
그 말을 남기고는, 함께 배터리를 이루는 브레이든 쪽으로 가버리는 김희영.
뒤따르던 통역과 잠깐 눈이 마주쳤는데.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젓더니 자리를 떴다.
[니가 언제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냐?]
‘뭐래. 그냥 호텔 미니바 무료 코너에 있길래 몇 개 챙긴 건데.’
고작 사탕 하나로 저딴 의미부여를 하는 거 보면 형수님이 무척 피곤할 것 같긴 하지만.
적어도 경기에 나쁜 영향은 미친 것 같지 않으니 상관없겠지.
‘정작 나는 잡념을 못 버리고 있는데 말이야.’
홈런을 못 때리고 있어서 딱히 초조하거나 그렇진 않다.
애초에 의식해봤자 방해가 되면 됐지 절대 도움은 안 되는데 그럴 리가.
문제는 타석에서 묘하게 일이 잘 안 풀린다는 느낌이 든다는 거지.
솔직히 오늘 수비로 추가 실점을 최소 3~4점은 막아냈으니 밥값은 했는데, 운을 거기 몰빵했는지 타석에선 썩 좋지가 않았다.
담장을 직격할 뻔했던 타구가 중견수의 점프 캐치에 잡히거나, 심지어 체크스윙이 내야 땅볼로 둔갑하는 보기 드문 일까지 벌어졌지.
“베이스 온 볼스!”
7회 말 2사에서는 볼넷이 나오면서, 현재로서는 3타수 1안타 1볼넷.
귀중한 타석을 볼넷으로 허비했다는 생각에 빡친 다저스 팬들의 원성이 쏟아졌지만.
그거야말로 자이언츠 선수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홈런을 못 칠 거면 이기기라도 해야지.’
홈런은 기본적으로 투수에게 승부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성이 생기지만, 경기에서 이기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니까.
아무리 잔여 경기라지만, 2점 차이면 충분히 따라갈 만한 점수이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든 우리한테 엿을 먹이고 싶어 하는 저놈들 심보가 마음에 안 들어.’
[그건 인정이지.]
“세이프!”
도루 기록마저도 안 늘려주겠다는 듯, 2루로 뛰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타자만 보고 있는 투수.
그게 더 괘씸해서 아예 3루까지 노려보려고 했지만.
“아웃!”
R.H.의 타구가 3루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이닝 종료.
살짝 맥이 빠지는 걸 숨기려 애쓰면서 덕아웃으로 들어가는데.
미리 나갈 준비를 끝마쳐둔 김희영이 내 등을 툭 치고 지나간다.
“현기야. 내가 아까 준 사탕 먹었어?”
“네? 아뇨.”
“먹고 긴장 풀어. 그리고 안타가 될 타구를 유격수 땅볼로 만들어줘.”
보통 이럴 땐 부담을 덜어주는 말이 나올 타이밍 아닌가……?
황당해하고 있는데, 김희영이 지나가면서 굳이 또 한마디 덧붙인다.
조금 전보다는 작은 목소리로.
“내가 보기에 쟤네도 컨디션이 그닥 좋지는 않거든? 그러니까 타석이 한 번쯤은 더 올 거야.”
설마 홈런 못 때렸다고 초조한 나머지 실책이라도 할까 걱정하는 건가.
내가 오늘 잡아낸 아웃카운트가 몇 갠대.
‘야구처럼 변수가 넘쳐나는 게임을 하면서 어쩌자고 이렇게 장담을 다 하시나.’
야구는 흐름의 스포츠라지만, 그 흐름은 아주 포괄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는 데다 심지어 언제든 바뀔 수도 있다.
막말로, 8회에 역전하고 나서 내 타석이 돌아오지 않은 채 이닝이 끝나기라도 하면.
김희영 본인이 블론이라도 저지르지 않는 한 9회 말 공격 없이 경기가 종료되는 건데.
[오히려 그래서 더 장담할 수 있는 거 아니냐?]
박도현의 말이 맞았다.
어차피 경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쥐뿔도 모른다는 건 나나 김희영이나 피차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
설령 김희영의 말대로 이뤄지지 않더라도, 이미 끝난 경긴데 어쩌겠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천연덕스럽게 나오면 그만이지.
그런 생각까지 하고 나니, 지금 이 싱숭생숭한 기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피식 웃고 말았는데.
‘이게 왜 진짠데.’
9회 말.
2사 만루에서, 마지막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겨두고 고개를 떨군 채 내려가는 자이언츠의 셋업맨.
그리고, 비어 있는 마운드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 마무리 투수.
김희영의 말대로, 나한테 기회가 한 번 더 왔다.
스코어 4대 2. 안타 하나면 최소 동점이 되는 상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