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는 쉽고 풀기는 어려워(1)
[7구 바깥쪽! 그러나 주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습니다! 볼넷으로 1루에 나가는 조지 라모스! 이제 베이스에 더는 빈 자리가 없습니다!]
[오늘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타자, 제발 타석에 한 번만 더 서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했을 바로 그 타자가, 9회 말 2사 결정적인 순간 등장하는군요!]
[이 선수가 누구인지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요? 저희가 잠시 입만 다물고 있어도 현장 마이크에 담길 겁니다!]
Koo!!! Koo!!! Koo!!! Koo!!!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고 기분 좋게 포스트시즌에 임하기를 바라는 팬들의 성원입니다. 홈런도 하나 날려주면 더더욱 좋겠지만요. 아, 그런데…… 자이언츠가 여기서 투수 교체를 선택하네요.]
[어쩌면 현명한 판단일 수 있습니다. 투 아웃을 잡는 과정에서도 투구 수가 제법 쌓였는데, 대타 채드윅 마틴에게 2루타를 허용하면서부터 계속 안 좋은 흐름이 이어졌으니까요. 게다가 Koo는 좌타자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게 과연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는 두고 봐야 알겠죠.]
[무슨 뜻이죠?]
[우선 Koo는 좌투수 상대 타율이 더 높습니다. 좌완투수의 비율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상대하는 투수의 좌우 구분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자이언츠의 클로저가 오늘로서 3일 연속 마운드에 오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봐야겠죠?]
[그렇죠. 아무리 전력을 던져도 되는 환경이라지만, 3연투를 하는 투수는 본래 구위의 70% 정도밖에 발휘하지 못한다고들 하니까요.]
[상대 전적 보시겠습니다. 통산 10타수 4안타로 정확히 4할이네요. 물론 Koo의 타자 전향이 워낙 최근 일이라 스몰 샘플이긴 하지만, 한 팀의 마무리를 상대로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면 되겠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투수가 마운드로 올라옵니다. 저희는 그럼 잠시 후 9회 말 2사, 정규이닝 마지막 승부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 * *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 말을 아무 데나 갖다 붙이는 게 썩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폭력이나 따돌림의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래도, 정해진 규칙 내에서 서로 대립하는 스포츠의 세계에서라면 괜찮지 않을까.
[정말 그럴까? 도시를 개판으로 만들거나 사람 패고 다니는 훌리건들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도시 하니까 떠오르네. 도아랑 처음으로 LA 시내에서 데이트했을 때 일인데…….’
[나도 참. 공권력이 해야 할 일을 괜히 선수들한테 끌고 와 가지고.]
박도현 말대로, 경기장 밖에서의 일까지는 선수들이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아니다.
중요한 건 서로를 향한 적대감이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꽤 많다는 거지.
딴 놈들은 몰라도 저놈들한테 지면 얼굴 못 들고 돌아다닐 거란 생각에 힘이 절로 솟으니까.
[너 크보는 보고 나서 하는 소리냐? 오랜 숙명의 라이벌인 서울팀과 부산팀의 더비는 다른 의미의 명경기가 잔뜩…….]
‘한국에서 도아랑 어떤 일 있었는지 그렇게 알고 싶었어? 미리 말을 하지.’
[아니 이 새끼는 무슨 말을 못 하게 해…….]
아무튼.
LA 다저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처럼 라이벌 관계가 오랫동안 유지된 팀들의 경우, 어떻게 하면 상대를 엿먹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일상다반사인데.
내가 보기에 지금 자이언츠는 양자택일에 놓여 있다.
‘다저스 상대로 승리를 뺏어오는 것과 Koo의 홈런을 막아내는 것. 둘 중 어떤 게 더 다저스를 빡치게 만들까?’
9회에 올라온 투수가 2점 차이에서 만루를 허용한 시점에서 이미 경기의 흐름은 미궁 속에 빠져든 거나 마찬가지.
덕아웃은 오랫동안 자이언츠의 뒷문을 든든하게 지켜온 클로저에게 판단을 맡길 거라고 봤는데.
타석에 들어가 투수를 마주하자마자,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치. 그렇게 나오셔야지.’
평온해 보이는 얼굴 너머로, 너는 내가 어떻게든 잡고 만다는 강렬한 의지가 엿보인다.
아마도 내년을 위한 선택이겠지.
솔직히 승패는 딱히 의미가 없고. 자이언츠에서 탈출하지 않는 한 나랑은 질리도록 마주칠 테니.
그리고 또 한 가지, 굳이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어차피 홈런은 안 맞는다 이건가?’
작년과 올해를 통틀어 10타수 4안타.
타율은 준수하지만, 홈런은커녕 장타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근데 그건 예전 일이고.
장타력이 늘어나는 재능을 손에 넣은 이후로는 이번이 첫 만남이니, 힘 대 힘의 대결로는 눌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물며 지금이 3연투인 투수 상대라면 더더욱.
“볼!” “볼!”
투수도 그걸 아는지, 연속으로 유인구를 던지며 배트를 유혹하려고 했지만. 미동도 하지 않으며 타자의 카운트로 출발했다.
심지어 바운드볼로 들어온 2구는 포수가 가까스로 블로킹하면서 한 점을 막아내기도 했고.
결국 포수가 마운드를 방문하면서 잠깐의 여유가 생겼다.
[만약 너였으면 여기서 뭘 던졌을 것 같냐?]
혹시라도 내가 긴장하고 있을까 봐 그러는지, 아니면 그냥 지가 심심해서인지, 박도현이 그런 질문을 던진다.
‘고민할 게 뭐 있냐. 포수 미트 보고 던지는 거지.’
만약 지금이 순위 다툼 중이거나 포스트시즌이었다면 이것저것 따져볼 게 많았겠지만.
역전패를 당하더라도 크게 타격이 없는 오늘 같은 경기에서는, 오늘 주심의 존을 계속 파악해왔을 포수한테 판단을 맡기는 게 속 편하지.
포수가 자리로 돌아오면서 다시 시작된 경기.
투수가 글러브에 손을 집어넣자 주변의 소음이 싹 사라지면서, 세상에 투수와 나 둘만 남은 듯한 고요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풀어갈지 마운드에서 제대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는지 포수 사인에 연달아 고개를 젓는 투수.
배터리의 연차를 생각했을 때, 결국은 투수의 의향이 좀 더 크게 반영되었을 사인 교환이 끝났다.
그리고, 투수는 카운트가 투 볼로 몰렸음에도 여전히 호전적인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쐐애애액!
좌타자는 좌투수의 릴리즈 포인트를 읽어내기가 어렵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건 투수의 컨디션이 만전일 때의 이야기.
밀어내기로 한 점 더 내주고 나서 줄줄이 들어올 상위 타선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도박을 걸어보려고 했던 건지.
아니면 지금 이 코스와 구종에 자신이 있었던 건지.
투수가 어떤 의도로 선택한 건지는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투수 본인도 공이 손끝을 떠나는 순간 아차 싶지 않았을까.
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종 무브먼트가 거의 걸리지 않은, 그냥 치라고 준 거나 다름없는 체인지업.
어떻게든 바깥쪽 코너를 찌르기는 했는지라 끝까지 결과를 짐작할 순 없었는데.
거의 라인드라이브성으로 날아가던 타구는, 파울 폴대를 강타하고는 다시 다저 스타디움의 그라운드로 돌아왔고.
시즌 65호 홈런볼은 자이언츠 좌익수의 손에서 다저스 구단 직원에게로 넘어갔다.
[Hyun―Ki Koo, 시즌 65호 홈런 달성! (구단 1위)]
Koo!!! Koo!!! Koo!!! Koo!!!
귀가 먹먹해지도록 쏟아지는 Koo 콜.
그 목소리에 화답하는 대신, 끝까지 승부를 피하지 않았던 자이언츠의 클로저를 향한 존중을 담아 묵묵히 베이스를 돌았고.
홈플레이트 근처에 이미 진을 치고 있던 동료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야!!! 물 더 가져와!!! 아주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만들어버려!!!”
“이 미친 새끼야!!! 한 시즌 65홈런을 쳐 놓고도 뭐 그리 담담해?!”
“너 때문에 홈페이지 폐쇄한 칼럼니스트가 몇 명인지 알기나 해?! 실업자 제조기 같으니라고!!”
그 후의 일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는지, 그냥 누가 부르면 부르는 대로 흐느적거리며 남은 하루를 보냈지.
그러니까, 나를 둘러싼 수많은 동료들 중 유독 내 면상에 물을 뿌렸던 친구들의 옆구리에만 시퍼런 멍이 들었다고 해도, 그건 엄청난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Koo, 이제 마지막 질문을 드릴 시간이군요.”
그나마 기억에 남는 거라고 한다면, MVP 인터뷰에서 기자가 남겼던 마지막 질문 정도였다.
“타자 전향 첫 시즌부터 주전 유격수 자리를 차지하면서 동시에 30―30 클럽에도 가입하는 놀라운 활약을 선보였죠. 그리고 올해는 타율을 크게 떨어트리지 않으면서 홈런은 두 배 이상 늘렸고요.”
“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고 이렇게 기름칠을 해 주시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일단은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래서 묻고 싶은 건, 무엇이 당신을 이토록 채찍질하는 것인가입니다. 이미 선수로서 많은 걸 이뤘고, 장기계약까지 얻어내면서 동기부여가 떨어지지 않겠느냔 예측을 한 전문가들도 많았으니까요.”
생각해보니,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마다 어물쩍 넘어갔던 걸로 기억한다.
박도현을 야구의 신으로 만들기 위한 계약을 맺었고, 그걸 완수하지 않으면 지금껏 쌓아둔 것들이 전부 사라진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야 없겠지만.
이제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직은 좀 먼 미래의 이야기지만, 쿠퍼스 타운에 제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졌습니다.”
다저스와의 장기계약이 끝나기까지 앞으로 11년.
그때까지 지금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만장일치도 꿈이 아닐 테니.
* *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시즌 65호 홈런 다시 한번 축하드리고요, 포스트시즌에서도 지금과 같은 활약을 기원하며 오늘 이 자리는 이만…….]
마이크 올리버 단장이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MVP 인터뷰가 끝나가던 TV 화면이 꺼졌다.
“Koo가 저런 야심을 드러내는 건 처음 아니었나?”
“그렇죠. 언론에서 명전행을 언급하며 설레발치는 건 많았으니까요.”
단장 보좌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선수가 하는 말이었다면 괜히 겉멋만 든 게 아닌가 걱정했겠지만, 구현기한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정규시즌 최종 성적 0.316/0.469/0.612.에 OPS는 1.081.
심지어 유격수와 3루수, 1루수 등 여러 포지션을 오가며 기록한 성적인데다.
승부처에 등판해 최대 1이닝씩 철저하게 틀어막아 주면서 ERA 0을 유지하기까지.
“쫑알대는 기자 놈들만 잘 처리하면 문제 없겠구만.”
자신의 프런트 커리어를 걸고 추진한 12년짜리 장기계약.
그 첫해부터 자신은 물론 팬들의 기대마저도 아득히 뛰어넘은 구현기였다.
게다가 다저스 프랜차이즈의 기록이기도 한 청정타자 홈런 1위 기록까지 갈아치웠으니.
만약 계약 기간 중 2~3년 정도 부진하거나 드러누워도 단장직에서 맥없이 잘리지는 않겠지.
“에이전시들 찔러 보라고 했던 건 어떻게 됐나?”
단장이라는 직책은, 당장 눈앞에 닥친 올해의 포스트시즌 말고도 수많은 일거리를 감당해야만 하는 자리다.
그리고 그중에는 내년부터 팀의 주축이 되어줘야 할 선수들을 붙잡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구체적인 조건까지는 아직 따져보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다들 연장계약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선수들도 머리를 굴릴 줄 알게 됐다.
자신들이 FA로 나갔을 때와 일찌감치 장기계약을 맺는 것 중 어떤 게 더 이득일지 따져볼 수 있다는 것.
금액적인 부분은 손해일 수 있어도, 저년차 기간 동안 성적에 신경 쓰지 않고 본인 페이스대로 시즌을 치를 수 있다는 건 상당한 메리트다.
절대 상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선수가 투타에서 각각 한 명씩 있다는 것도 한몫했겠지만.
“올해 우승을 맛보고 나면, 협상에서 좀 더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겠지.”
선수를 붙잡아두고 싶을 때 구단은 자연스레 을이 되기 마련이지만.
만약 선수에게 우승을 향한 열망이 있다면 저울의 무게추가 조금은 균형이 맞는다.
그때, 단장 보좌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단장님. 슬슬 약속 시간이…….”
“어, 그래. 가야지.”
올리버 단장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최근 업무상 만남을 가진 이들 중 가장 사람을 빡돌게 만드는 것은 구현기의 에이전트 데릭 애쉬튼이었지만.
지금부터 만날 사람도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 왔구만. 여기 커피 괜찮네.”
팀의 전력을 구성하는 것은 단장의 중요한 역할이고, 물론 전력은 선수만을 일컫는 게 아니다.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해, 비서가 가져다준 최고급 커피를 홀짝이며 천연덕스럽게 말을 거는 노인.
겉보기로는 특출날 게 없어 보이지만, 저 사람과 제발 미팅이라도 한 번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빅리그 단장이 한둘이 아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페즈 선생님.”
박도현과 구현기를 연달아 성공시키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개인 인스트럭터 훌리안 로페즈.
그에게 코치직을 제안하는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 올리버 단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노력을 들여야 했다.
“약속 시간보다는 좀 이르지만, 지금 바로 시작하는 게 어떤가? 이따 자이언츠 단장 놈이랑도 약속이 있어서 말이지.”
“……그러셨군요.”
“그 친구는 LA에서 대학을 나왔다더라고? 그래서 이 근처 괜찮은 집은 죄다 꿰뚫고 있다고 호언장담하더라니까.”
이 상황에서 흐트러짐 없는 비즈니스 스마일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가 유능한 단장이라는 증거였다.
“LA 맛집은 LA에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알죠.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저희 쪽에서는…….”
어떻게든 이 사람을 붙잡아서 망할 자이언츠 단장 놈한테 물을 먹이리라.
그렇게 다짐하면서, 올리버 단장은 준비해둔 자료를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