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88화 (188/200)

오해는 쉽고 풀기는 어려워(2)

162경기에 걸친 메이저리그의 기나긴 정규시즌이 마침내 끝났다.

양대리그의 포스트시즌 대진표는 이미 예전에 결정된 상태였다.

그중 내셔널리그는 103승 59패로 가장 승률이 높았던 LA 다저스가 와일드카드 팀과 맞붙게 되었고.

중부지구 1위 시카고 컵스와 동부지구 1위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디비전시리즈를 치르게 되었다.

[와일드카드전 진출이 확정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가족이 깨어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응원 도구를 완벽히 준비해둔 오늘. 애리조나의 뜨거운 햇볕이 창밖에서 쏟아진다.

폭풍전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탈환할 준비가 되었다.

우리가 허접한지 너희가 허접한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 뭐라는 거야

└ 햇볕 뜨겁다면서 뭔 놈의 폭풍 얘기임?

└ 그리고 어차피 너네 와일드카드 결정전 애틀랜타 원정 가서 치르면서 애리조나 날씨가 무슨 상관인데;

└ 양키 놈들 고오급 드립 이해 못 하는 거 보소 ㅋㅋㅋ

└ 뭔 드립인지는 아는 놈들끼리 웃던가 하고, 드립을 쳐도 하필 디백스 가지고 치냐? 다저스는커녕 브레이브스 선에서 정리될 놈들인데.

└ 브레이브스만 이기면 다저스랑은 승산 있거든? 올해 서부지구에서 다저스 상대로 가장 많이 이긴 팀 우리인 거 몰라?

└ 디백스 너넨 일단 개노답 필패조부터 어떻게 좀 해봐라

└ 아니거든? 우리도 필승조 있거든? ERA 1점대 좌완 불펜이 X으로 보이냐?

└ 마리오 로드리고? 다저스에서 데려온 선수 가지고 다저스랑 맞먹으려는 양심 진짜 실화냐?

└ 올해 우승은 컵스지. 후반기 15홈런 타자 영입하면서 타선도 완벽하게 보강했거든?

└ 클레망 그 양반도 다저스에서 데려온 거잖아;

└ 믿고 쓰는 LA산;;

└ 그런 선수들 다 퍼준 너네한테는 뭐가 남았는데?

└ ERA 1점대 후반 선발 투수랑 65홈런 타자?

└ 밸런스 X망겜 수준 보소

└ 우리 팀 26인 로스터 통째로 넘기고 쟤네 둘 받아오면 우리도 우승할 수 있지 않을까?

└ 너네가 어딘데

└ 볼티모어 오리올스

└ 쉽지 않음

└ 그 와중에 불가능하다고는 안 하는 거 보소 ㅋㅋㅋ

이렇듯, 포스트시즌을 앞둔 야구팬들은 서로를 마음껏 물어뜯으며 개싸움을 벌이기 바빴으며.

사용하는 언어만 조금 정중했을 뿐, 담당하는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목마른 기자들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우승은 다저스?’ 언제든 경기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증명한 선수들, 이제는 포스트시즌으로!]

[“올해는 양키스의 독무대가 될 것” 4년 만에 지구 1위 등극한 양키스, NL 향해 선전포고!]

[‘아직 모른다’ 작년 와일드카드에서 NLCS까지 진출하며 저력 선보인 브레이브스, 올해도 출격 준비 완료!]

포스트시즌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부터가, 돈이든 유망주든 출혈을 감수해가며 우승을 위해 달려온 팀이라는 증거.

작년 우승팀이라고 해서 올해도 순조롭게 우승 트로피를 손에 넣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규시즌 종료 후, 와일드카드 결정전의 승자가 정해지기까지의 아주 짧은 휴가.

그동안 선수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포스트시즌을 준비하고 있었다.

* * *

“시작했어요?”

“아뇨, 아직 광고 중이에요.”

LA 다저스의 에이스, 제리 헤이즈택의 집.

나란히 소파에 앉은 제리와 그의 약혼녀 이나현은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요? 저번처럼 배 뭉치거나 그러진 않아요?”

사실, 제리의 관심은 와일드카드전이 아닌 임신한 약혼녀에게 쏠려 있었다.

본업에 소홀한 건 아니었다. 다만 브레이브스와 디백스 중 누가 올라오더라도 상관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굳이 따지자면 브레이브스의 타선이 좀 더 까다로운 건 사실이었지만, 올해 정규시즌에서는 제리에게 딱히 불편한 기억을 심어주진 못했다.

이나현은 다 안다는 듯 웃으며 제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만져보고 싶으면 언제든 와서 만지라니까요. 괜히 눈치 보지 말고.”

“어, 음. 꼭 그러려는 건 아니고…….”

그러면서도 제리는 이나현이 이끄는 대로 부푼 배에 손을 가져다 대고, 내친김에 귀도 가져가면서 마음껏 태동을 느꼈다.

마음만 같아서는 경기고 뭐고 뒷전으로 미뤄둔 채 계속 이대로 있고 싶던 제리였지만.

“어, 경기 시작했다.”

사전 행사가 끝나고 브레이브스의 선발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이나현은 칼같이 야구팬 모드로 돌변했다.

“디백스가 선발을 오래 못 끌고 가면 브레이브스 쪽으로 확 기울 텐데…….”

양 팀 모두 선발 투수가 초반부터 실점을 허용했지만, 이후로는 안정을 찾아가며 접전으로 흘러가는 경기.

“경기장 가고 싶다.”

이닝이 끝날 때마다 손에 쥔 땀을 닦아내던 이나현은, 자기도 모르게 한국어로 툭 내뱉었다.

“네? 뭐라고요, 클라라?”

“아, 아니에요! 그냥, 저런 경기는 현장에서 보는 게 더 재밌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올해 후반기, 안정기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몇 번 경기장을 찾긴 했지만.

소음과 진동, 온갖 험한 소리나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 등등. 통제할 수 없는 환경으로 가득한 야구장은 임산부에게 그리 좋은 장소는 아니었고.

결국 의사와 상의한 끝에, 포스트시즌부터는 그냥 본가에서 가족들과 함께 TV로 관람하기로 결정했다.

“미, 미안해요. 포스트시즌만 기다렸을 텐데 나 때문에 경기장도 못 오고…….”

의기소침해진 제리를 보며, 이나현은 심장을 움켜쥐었다.

바로 이 모습이다.

구현기가 ‘쭈굴쭈굴 제리’라고 부른다는 걸 들었을 때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거라며 무릎을 탁 쳤던, 약혼 이후 자신감이 붙고 나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지금 이 상태.

이것도 나름 밸런스가 중요하다. 지나치게 풀이 죽으면 오히려 안쓰러워진다.

예를 들어, 오늘 완봉승 거두고 오면 아기가 좋아할 것 같다고 장난삼아 말했는데,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고는 7이닝 무실점을 하고도 거의 반나절쯤 우울해했을 때처럼.

그런 불상사가 또 벌어지지 않도록, 이나현은 일찌감치 기분을 풀어주기로 했다.

“서로 얘기하고 낳기로 한 건데, 이게 왜 당신 잘못이에요.”

“그래도…….”

“생각보다는 빠르긴 한데, 저도 원래부터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이런 거 다 하고 싶었어요.”

가뜩이나 시즌이 길게 이어지는 메이저리그.

적지 않은 시간을 떨어져 보내야 한다는 각오까지도 이미 마쳤는데, 고작 경기장 못 가는 정도로 징징댈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만약 아이가 또 생긴다면 다저스가 포스트시즌 못 가는 해에…….’

……라고 아주아주 잠깐 생각했다가, 뱃속 아기가 항의하듯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곧바로 취소한 이나현이었다.

* * *

[(Live) ARI 3 : 3 ATL]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와일드카드 결정전.

솔직히 타선의 무게감을 생각하면 초장부터 브레이브스 쪽으로 확 기울 수도 있겠다고 봤는데.

디백스 에이스가 마운드에서 실점을 최소화하며 끈질기게 버틴 덕분에 제법 오랫동안 호각세가 이어졌다.

“현기야, 지금 올라온 저 투수, 작년까지 너희 팀 선수 아니었니?”

“아, 네. 맞아요. 마리오 로드리고.”

“그치? 이름이 좀 익숙하다 했어.”

어머님의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중계에서 시선을 돌렸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포스트시즌을 함께 관람하기 위해 한국에서 찾아와주신 도아네 부모님.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면서부터 손님이 늘었는데, 같은 다저스에서 뛰게 된 김희영이 SNS에 단골집이라고 홍보해준 덕분에 손님이 한층 더 몰려서.

결국 사람들 성화에 낼 생각 없었던 분점도 내고, 가게 매니저까지 고용해서 요즘은 오히려 시간이 많이 남으신다나.

[너희 아버지는 안 오시냐?]

‘결승전은 보러 오겠다고 하시는 거 보면 안 오시겠지 싶다.’

보니까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절차도 제대로 모르시는 것 같던데. 그 바쁜 일 제쳐두고 여기까지 오시기야 하겠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저 선수 애리조나 가서 잘하던데, 다저스가 왜 내보낸 걸까?”

옆에 앉아 있던 도아가, 이닝의 첫 타자를 삼구삼진으로 잡아내는 마리오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일단 우리가 우승하려면 선발 자원이 필요한데, 디백스는 불펜이 계속 말썽이라 카드가 맞기도 했고. 그리고…….”

[이 타구는! 이 타구는! 담자아아아아아앙! 넘어갔습니다!!! 3대 3의 균형을 깨트리는 작년 신인왕 넬슨 데스파이네의 솔로포!!!]

“……구속은 빠른데, 가끔 저렇게 터무니없는 실투가 나오거든.”

게다가 아드리안과 마찬가지로 홈런 이후의 대처가 별로 좋지 않은 편이라, 다저스에서는 쓰임새가 좀 애매했지.

결국 불펜의 유일한 믿을맨이었던 마리오가 연속 볼넷과 안타로 추가 실점을 허용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더 안 봐도 될 것 같은데? 우리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요?”

“아니 왜? 엄마가 우리 현기랑 딸내미 맛있는 거 해주려고 재료도 다 가져왔어.”

“아빠는 나가서 먹고 싶은데.”

“당신 혼자 다녀올 수 있죠? 이 근처 지리는 다 외웠을 테니까.”

마리오의 뒤를 이어 등판한 불펜들도 평소처럼 게임을 터뜨리면서, 브레이브스 쪽으로 승부가 확 기울었고.

경기에 흥미를 잃어버린 박도현네 가족들이 화목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때.

[아웃! 아웃인데…… 아, 지금 좌익수 뤼카 스킬라치가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네요?]

심상치 않은 멘트에, 가족들의 시선이 다시 TV 화면으로 향했고.

조금 전 상황이 리플레이됐다.

2사 1루 상황에서. 좌측 파울 지역으로 날아가는 뜬공을 쫓아가다가, 그만 스텝이 꼬여 어깨를 벽에 세차게 부딪치고 만 것.

어찌어찌 글러브에 공이 담기며 이닝이 마무리되긴 했지만, 오래지 않아 경기장에 들어온 앰뷸런스가 뤼카 스킬라치를 싣고 사라졌다.

“아이고, 저걸 어째…… 많이 다친 건 아니겠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 같은데, 어쩌다 저런 실수를 다 했대.”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혀를 차는 도아네 부모님.

박도현 역시 한숨을 쉬며 이마를 감싸쥐었다.

[진짜 그놈의 우승이 뭐라고.]

베테랑인데도 저런 실수가 나온 게 아니라, 베테랑이기에 저 상황에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거다.

시즌 초반 계속 부진하다가, 날이 풀리고 나서는 어찌어찌 회복세에 접어들며 스탯을 복구했지만.

성적만 놓고 보자면 프랜차이즈 스타치고는 엄청나게 후려쳤던 연봉 값마저 제대로 하지 못했던 한 해.

그 와중에, 와일드카드 게임에서 중심 타선을 차지하고도 무안타로 묶이고 있었으니. 초조한 마음이 들 법도 하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진리의 산증인이 되었다는 게, 마음이 안 좋긴 하지만.

‘끝났네, 완전히.’

디백스가 경기를 뒤집기는 사실상 어려울 정도로 벌어진 점수 차.

아마도 디비전시리즈의 상대는 브레이브스가 될 거다.

그러나, 브레이브스의 타선을 이끌던 클린업 트리오 중 뤼카 스킬라치는 방금 팀에서 이탈했고.

3번 타자로서 공수 양면으로 쏠쏠히 활약해온 넬슨 데스파이네 역시 다저스 상대로 철저히 틀어막히며 안 좋은 기억을 품고 있는 선수.

아무리 앤드류 매닝이 남은 팀원들을 다독이고, 타석에서 활약한다고 한들.

야구는 혼자 모든 걸 해낼 수 없는 스포츠니까.

* * *

[LA 다저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시리즈 스코어 3대 0으로 완승!]

[뤼카 스킬라치의 이탈로 삐걱대던 브레이브스, 스포츠에 자비는 불필요하다는 걸 보여준 다저스.]

[앤드류 매닝, “캡틴으로서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내 책임… 뤼카는 강한 사람이며,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와 함께 우승을 노릴 것이라 믿는다.”]

[(속보) 뤼카 스킬라치, 후배의 간절한 응원에도 전격 은퇴 결정. “핑계는 대지 않겠다. 내 잘못이 크다. 브레이브스라는 팀에서 커리어를 보낼 수 있어 영광이었다.”]

[디비전시리즈 11타수 6안타 2홈런 5볼넷으로 브레이브스 폭격한 Koo, “브레이브스만큼이나 우리 역시 승리가 간절했고, 나는 내 역할을 했을 뿐이다. 다만 뤼카 스킬라치의 빠른 쾌유와 은퇴 이후의 행복한 삶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한 팀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발휘해온 선수의 이탈은, 어쩔 수 없이 팀에 큰 타격을 가져온다.

다저스 역시 로버트와 클레망이 팀을 떠났을 때 한동안 클럽하우스에서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니까.

그러나, 어떻게든 분위기를 다시 추스를 여유가 있는 정규시즌과는 달리. 포스트시즌의 일정은 숨 가쁘게 돌아갔고.

브레이브스는 한 번 꺾인 분위기를 수습할 수 없었다.

[너도 조심해. 내가 보기에 너 다치면 복귀할 때까지 팀 개판 될 것 같으니까.]

이렇게 핀잔을 주는 박도현도 머리로는 알고 있을 거다.

부상을 방지하는 재능을 이어받은 나라면, 경기 중이라면 어지간한 일로는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다는 걸.

박도현 본인도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진 10일짜리를 넘기는 부상자 명단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알았다.’

그래도 그 마음을 알기에, 토 달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은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컵스와 필리스 중 누가 챔피언십시리즈의 상대가 될 것인지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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