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는 쉽고 풀기는 어려워(3)
[NLDS 시카고 컵스 VS 필라델피아 필리스, 승부의 결착은 5차전에서!]
컵스와 필리스가 디비전시리즈의 반대편 블록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끝장 승부를 펼치는 동안.
브레이브스를 3대 0으로 제압한 다저스는 달콤한 휴식을 즐겼다.
[다 X 같다. 그냥 진짜 X 같다.]
└ 말이라도 제대로 하던가, 다짜고짜 욕부터 박으면 어떡하냐;
└ 이 시기에 야구 커뮤니티에서 욕 나올 놈이 브레이브스 팬들 말고 또 있어?
└ 그래도 자제해야지. 다른 놈이 저렇게 혼자 다친 거면 대가리가 무거워서 내용물을 비우고 출전했냐고 욕이라도 할 텐데, 미우나 고우나 우리 원클럽맨이잖아.
└ 자제할 생각 있긴 한 거지?
브레이브스 한 팀에서만 선수 생활을 보낸 프랜차이즈 스타의 부상.
듣기로는 현역 연장 의지를 완전히 접어야 할 수준이었단다.
2020년대 후반 암흑기를 거치며 품었던 독기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다저스 팬들이, 홈에서 열린 1, 2차전에서 박수와 환호를 자제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홈에서도 이럴진대, 원정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과장 좀 보태서 여기가 야구장인지 장례식장인지 헷갈릴 지경이었으니까.
[다저스와 브레이브스, 트루이스트 파크에서 엇갈린 두 팀의 운명!]
원정 클럽하우스에서 챔피언십시리즈 진출을 자축하며 샴페인 파티를 벌이는 다저스 선수단과, 경기 종료 후 그라운드에서 끝내 눈물을 보인 브레이브스 선수단을 이어 붙인 기사.
솔직히 내가 보기에도 좀 안쓰러워 보이기는 하더라.
‘걱정이네.’
그러자 박도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니가 상대팀한테 그런 인간적인 감정도 느낄 줄 아는 놈이었냐?]
‘말투 뭐냐?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남의 팀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
[어?]
‘우리 팀에 포스트시즌 경험 별로 없는 놈들 있잖아. 걔네들한테 혹시라도 영향 갈까 걱정된다고.’
[너어는 진짜…….]
안쓰러운 건 안쓰러운 거고. 남의 팀 걱정을 여기서 뭘 더 해줘.
경기 중 셀레브레이션을 자제한 것만으로도 다저스는 도리를 다했다.
[뭔 그런 걱정을 다 해? 에드윈이랑 또 누구냐, 션? 얘네 빼고는 작년에 이미 포스트시즌 한 번씩 겪어봤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피 튀기는 접전을 펼치고, 월드시리즈에서는 스윕승을 거두며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는 등.
작년의 다저스는 포스트시즌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승리 패턴을 경험했다.
‘근데 작년이랑 선수단이 똑같냐고.’
매년 선수단 구성이 바뀌는 것은 월드시리즈 우승팀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팀 사정상, 작년과는 달리 갑작스럽게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어버린 선수들도 있다는 거다.
[올해부터 주전 먹은 건 랜디 정도 아닌가? 나머지는 아직 베스트 라인업 가동할 수 있으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단순하게 볼 문제가 아니라서 그래.’
다저스에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계약이 끝나는 선수들이 몇몇 있다.
그중에서 주전 3루수 켄과 요즘 중견수로 쏠쏠하게 활약해주는 벤 리히터는 팀을 떠날 확률이 높은 상황.
그 자리를 채워줄 선수들이 성장하는 몇 년 동안, 다저스는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선수들한테 포스트시즌 경험을 쌓게 해줘야 한다는 거네?]
‘그치. 당장 내년부터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윈나우와 세대교체.
올 시즌 내내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만 했던 다저스의 고민이 포스트시즌까지 이어진 셈.
‘어쨌든 제일 중요한 건 우승이니까, 기본적으로는 베스트 라인업을 가동하긴 하겠지만. 지금부터는 선수 구성이 좀 다양해지지 않을까 싶은데…….’
디비전시리즈의 반대편 블록에서 5차전이 벌어지는 날.
자율 훈련을 위해 찾아온 클럽하우스에서 조금은 진중한 대화를 나누던 도중.
저쪽 구석에서 양반은 못 되는 투수 두 명을 발견했다.
‘그치. 바로 저런 애들이 올해는 더 잘해줘야 한다는 거야.’
파드리스에서 트레이드로 넘어왔다가 지난 시즌 중반 콜업된 조쉬 먼로.
클레망의 반대급부로 시카고 컵스에서 넘어온 실패한 1라운더 출신의 션 언더우드.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상대로 만날 수도 있는 컵스에 대해 조언이라도 듣고 있나.
흐뭇한 마음에 말이라도 걸어보려고 다가가려는데.
어째 예상과는 달리 애들 상태가 좀 메롱이다.
[고딩 때 교실에서 저러고 있으면 선생님이 니들이 어둠의 자식이냐면서 커튼 열라고 시켰던 것 같은데…….]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더니, 박도현이 정확히 짚어냈다.
햇볕 비추는 데 놔두고 구석에서 저러고 있으니까 더 감쪽같아.
“션, 정말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브레이브스 선수들의 서글픈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내 잘못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계속 쫓아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디비전시리즈가 끝난 이후, 내가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던 첫 번째 이유.
저러는 놈이 나올까 봐.
별로 이해는 안 되고, 딱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캡틴으로서 노력을 좀 해보자면.
적지에서 승리를 챙기고 야무지게 샴페인 파티까지 벌인 다저스 선수들을 향해, 너무 인정머리없는 거 아니냐며 은근슬쩍 몰아간 일부 언론 탓을 해볼 수 있겠다.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는 시카고나 필라델피아 쪽 언론은 물론.
다저스랑 기본적으로 사이가 안 좋은 샌프란시스코나 샌디에이고에서까지, 선을 두고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잘도 깐족거렸다.
조쉬가 여기저기서 태클 날려대는 게 인기 팀의 숙명이라고 대충 받아들여 준다면 참 좋을 텐데.
모든 선수들한테 그런 생각을 강요할 순 없다. 해봤자 소용도 없고.
“나는 의견이 좀 달라, 조쉬. 우리가 그렇게 침울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오…….]
의외로 단호하게 말하는 션을 보며 박도현이 감탄사를 흘린다.
얘가 이렇게 심지가 굳은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다저스 이적 후 자리를 잡으면서 사고방식도 성숙해진 걸까.
“왜냐하면 우리가 쓰레기에서 조금 비양심적인 쓰레기로 바뀐 것뿐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쓸걸?”
는 개뿔.
아까 조쉬는 환각증세를 보이던데. 그보다도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션.
아직은 컨디션에 따라 제구가 흔들리기도 하는데, 디비전시리즈 3차전에서 그게 좀 크게 터졌다.
[점수 차가 워낙 커서 그랜드슬램이라도 처맞지 않는 이상 딱히 티도 안 났을 텐데.]
‘그래도 5타자 연속 출루는 좀 선 넘긴 했어.’
상대 팀의 악재에 신경을 안 쓰는 건 좋은 일인데, 그 신경을 본인이 삽질한 데 죄다 쏟아버리면 무슨 소용이냐고.
근데 왜 여기서 우리라고 묶냐.
조쉬는 이번 시리즈에서 잘 던졌는데 어디서 묻어가려고.
[저대로 놔두고 가도 돼?]
‘이따 앤서니한테 귀띔해둘 거니까 괜찮아. 전문가한테 맡겨야지.’
로버트의 은퇴 이후 새로운 투수조 조장으로 선출된 앤서니 아우젤로.
그 양반이 평소 하는 행동이 서글서글해서 그렇지, 사람 볶을 땐 또 고슬고슬하게 잘 볶는다.
[어차피 남한테 떠넘길 거면 고민은 왜 했냐?]
‘그걸로는 답이 안 나오는 놈들도 있으니까 문제…….’
“Koooooo!!!”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직접 찾아와버린 당사자.
2년여의 백업 생활로 담금질을 끝내고, 슬슬 주전으로 도약할 준비를 끝내가는 조나단 라틀리프가 복도 건너편에서 후다닥 뛰어왔다.
“복도에서 뛰지 말아라.”
“네?”
“아니, 미안. 아무것도 아냐.”
좀 전에 박도현이 교실 얘기를 꺼내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지적해버렸다.
여기가 무슨 학교도 아니고.
다행히도 조나단은 남의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장점을 발휘해줬다.
“잠은 잘 주무셨어요? Koo는 컵스랑 필리스 중 누가 이길 것 같아요? 그건 그렇고 제 여동생 친구들이 사인 좀 받아달라고 부탁하던데 혹시 11개 정도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보답으로는 SNS에 올린 적 없는 저희 집 고양이 미공개 사진을…….”
“내가 미안해.”
단점은 말이 X나게 많다는 거고.
원래부터 입에 모터를 달긴 했는데. 기분이 좋을 때는 특히 저렇게 난리를 친다.
작년에도 포스트시즌을 경험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경기 후반 투입되는 대타 혹은 대수비 역할.
이번 디비전시리즈 2차전에서 멀티 히트를 기록하며 첫 포스트시즌 선발 출장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Koo!!! 이건 Koo한테만 미리 말해주는 건데요!!! 감독님께서 저를 챔피언십시리즈에서도 선발로 써주시겠대요!!!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이기고 나서도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던 이유 그 두 번째.
이번에 이긴 거 가지고 설레발치는 놈이 나올까 봐.
[얘 3차전에 출전 안 시킨 게 신의 한 수였을지도 모르겠는데.]
‘애틀랜타에서 안타 치고 세레머니 갈겼다가 앤드류 매닝한테도 멱살 잡혔을걸?’
만만치 않은 전력의 브레이브스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불의의 사고로 분위기가 넘어가 버린 덕분.
앞으로의 경기에서의 압박감이 이 정도일 거라고 판단하면 곤란하다.
“너 이겼답시고 막 신나서 떠들고 다니면 안 된다는 말 못 들었냐?”
“아뇨!!! 들었습니다!!! 근데 괜찮아요!!! 몇몇 사람들만 조심하면 별로 상관없을 거라고 랜디가 알려줬거든요!!!”
“상관이 없진 않을 것 같은데.”
“네?!”
“그 조심해야 한다는 사람이 나거든.”
“!!!”
사람이 말 한마디 안 하고 놀라는 얼굴만으로도 시끄러울 수가 있는 거였구나.
어쨌든, 지금보다 더 긴장해야 한다는 식으로 적당히 타일러서 보냈다. 겸사겸사 랜디한테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추궁도 좀 하고.
[생각보다 가볍게 넘어가네?]
‘조질 거면 랜디를 조져야지. 애한테 뭐 이딴 거나 가르치고 있어.’
이렇게 뒤숭숭할 때 로버트나 클레망 같은 베테랑들이 있었다면 분위기를 나름 잘 추스를 수 있었겠지만.
캡틴 완장까지 받은 이상, 이제는 그 역할이 나한테 넘어왔다고 봐야겠지.
물론 이렇게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선수들보다는,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들이 훨씬 많다.
예를 들어, 저기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김희영처럼.
메이저리그 경력은 고작 2년 차에 포스트시즌도 처음이지만, KBO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니까.
디비전시리즈 때도 딱히 긴장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형님. 오늘 좀 일찍 나오…… 셨…….”
뒤돌아보는 김희영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한쪽 팔에 무슨 베개 같은 걸 안고 있나 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사탕 봉지였으니까.
“어, 현기야. 너도 하나 먹을래?”
“아뇨, 별로. 근데 무슨 사탕을 산더미처럼…….”
“알다시피 내가 요새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레몬 사탕을 먹잖아. 근데 좀 심란해서 그런가, 평소보다 자주 먹게 되네.”
그새를 못 참고 봉지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우물거리는 김희영.
이게 정녕 프로 15년 차를 맞이한 베테랑이 맞기나 할까.
[저러다 당뇨 걸리겠는데.]
‘그러고 보니 턱이 좀 사라진 것 같긴 해.’
한사코 거절했는데도 주머니에 강제로 쑤셔 박듯 사탕을 넘기더니 웨이트 가야겠다며 사라져버린 김희영.
해가 끝나가는 마당에 뭐 저런 벌크업을 다 하는가 싶어 어이가 없었지만, 결국 본인이 알아서 할 일.
박도현과 함께 사탕이나 우물거리며 라커룸으로 향했다.
‘이 사람들 데리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해야 한다 이거지.’
팀이 잘나가는 와중에도 이렇게 깝깝한데, 예전 암흑기 땐 오죽했을까.
로버트가 성격 다 버린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 *
5차전까지 끝장 승부로 이어진 컵스와 필리스의 디비전시리즈.
둘 중 챔피언십시리즈의 남은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필라델피아 필리스였다.
내내 엎치락뒤치락하며 팬들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이번 시리즈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노인학대까지 해가면서 매달렸는데도 결국 못 이겼네.’
컵스 팬들의 자존심, 에이스 A.D. 존슨이 3일 휴식 후 등판을 자처하며 1차전과 4차전에서 승리를 가져오고.
더 많은 출전 기회를 위해 컵스로 떠난 클레망도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니라는 듯 연일 맹타를 휘둘렀지만.
좀 더 조직력이 강했던 필리스에게 끝내 5차전을 내주고 말았다.
주저앉아 좌절하는 컵스 선수들을 챙기는 클레망의 모습을 보며, 다저스 팬들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듯했지만.
아마 오래가지는 않았을 거다.
[‘NLDS 필리스 자체 MVP’ 크리스토퍼 엘리엇, 오늘도 여지없는 도발! “상대가 다저스라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 월드시리즈에서 뵙겠다.”]
다저스만 만났다 하면 신나게 입을 털어대는 놈이, 곧 다저 스타디움으로 찾아올 예정이었으니까.
[NLCS 매치업, 필라델피아 필리스 대 LA 다저스로 확정!]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주전 유격수 크리스토퍼 엘리엇.
그는 한때 다저스 팬들에게 애증의 존재였다.
클레망 파로의 1루수 전향과 카일 캠프의 타격 부진으로 유격수 공백을 크게 느끼던 그 시절.
LA 로컬보이 출신으로 팀에 대한 애정이 넘쳐났지만, 트레이드로 팀을 떠나더니 필리스에서 특급 유격수로 펄펄 날아다녔으니까.
“다저스 같은 팀에서 데뷔하지 않았다는 건 하늘이 도왔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는 놀라운 말뽄새로 고작 한 경기 만에 애증을 증오로 바꿔버렸다.
‘저렇게 입 털고서 못하면 비웃기라도 할 텐데.’
경기장에서도 나름 까다로운 선수라는 게 문제지.
특히 이번 디비전시리즈에서도 만점짜리 활약을 해냈다.
승부처에서 거의 100%에 가까울 정도로 출루를 만들어냈으니.
수비에서도 짜증 나는 건 마찬가지다.
안타성 타구를 유격수 땅볼로 둔갑시키며, 기껏 만들어둔 찬스 상황을 병살로 바꿔버리는 선수.
한마디로, 다저스 팬들의 혈압을 쭉쭉 올려대는 놈이자 상대 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선수인데.
“오랜만이야, Koo. 필라델피아에서 만났으면 더 반가웠을 텐데.”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이 열리기 하루 전.
그런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LA 모처의 한식당에서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