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는 쉽고 풀기는 어려워(4)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미친놈이다.
물론 엄청난 압박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메이저리거인 만큼 멀쩡한 사람 찾는 게 힘든 일이긴 한데.
그보다 한 차원 더 높다고 해야 하나.
얘랑 깊이 엮였다가는 진짜 뭔 개짓거리를 할지 모르겠다는, 그런 본능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놈이다.
[그래서 얘가 나오라면 나오라는 대로 쫄래쫄래 나가는 거냐?]
‘그거라도 없었으면 아무리 얻어먹은 게 많았어도 입 싹 씻고 손절했지.’
챔피언십시리즈 전날의 귀중한 시간.
어지간하면 가족 핑계 대면서 빠져나갔을 텐데, 중요한 할 말이 있으니까 시간 내달라는 말에 그만 혹해버렸다.
생각해보니 얘가 이런 말을 먼저 꺼냈던 적이 한 번도 없더라고.
“냄새가 좀 낯설지? 한국의 전통 음식이니까 많이 먹어라. 모자라면 더 시키고.”
아무리 그래도, 이 미친놈한테 내 시간 쓰면서 내 돈으로 맛있는 것까지 먹이기엔 뭔가 좀 열받아서.
진정한 한국의 맛을 보여주겠다고 꼬셔서 청국장을 주문했는데.
“오, 여기 진짜 오랜만이네.”
아무렇지도 않게 공기밥 쓱쓱 비벼서 잘만 퍼먹었다.
심지어 처음 온 것도 아니라나.
“웬만한 건 다 먹어봤어. 네가 좋은 플레이의 원천이 한국 음식이라고 말했던 게 기억나서.”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오, 이런. 방금 그 말은 Koo가 아니라 Park이 한 말이었지. 내 실수야. 잊어줘.”
‘Koo’와 ‘Park’에 악센트를 주면서, 오직 자신만이 그 둘이 한 몸이라는 진실을 알고 있다는 듯 여유만만한 웃음을 짓는 크리스토퍼.
‘이제 기억나네. 이 지랄하는 거 보기 싫어서 손절하려고 했었지.’
[대체 이 굳센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내 표정이 썩든지 말든지, 청국장 한 그릇에 공깃밥까지 추가해서 야무지게 먹어 치운 크리스토퍼.
그러고 나서야 그 중요한 할 말이라는 것을 꺼냈다.
“내일 인터뷰에서 너를 좀 도발하고 싶어서.”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중요한 할 말이 고작 이딴 거였다는 건 둘째치고.
‘생애 첫 MVP 인터뷰에서부터 다저스한테 극딜을 처박은 놈이 이제 와서 나한테 허락을 받는다고?’
설마 내가 캡틴으로 뽑혔답시고 안 어울리게 배려라도 하려는 건가.
내 표정이 이상해지는 걸 본 크리스토퍼가 빠르게 덧붙였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다저스 말고 Koo 네 얘기야. 너 혼자한테만 포커스를 맞추고 싶다는 거지.”
크리스토퍼의 말을 요약하자면.
각각 동부와 서부의 인기 팀이라는 걸 제외하면 크게 엮일 일은 없었던 필리스와 다저스인지라.
사무국이 자신과 다저스 사이의 악연을 강조하면서 ‘크리스토퍼 엘리엇 VS LA 다저스’의 매치업을 은근슬쩍 밀고 있다고 에이전시가 귀띔했다나.
“기껏 열심히 해서 챔피언십시리즈까지 진출했는데, 내 개인적인 일에만 관심이 쏠리면 팀 케미스트리에 도움이 안 될 것 같더라고.”
“그러니까, 서로 팀 타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으면서 포지션까지 똑같은 우리 둘의 매치업을 강조하면서 관심을 이쪽으로 돌리겠다?”
“역시 이해력이 빠르다니까.”
다른 것보다도 얘 입에서 팀 케미스트리라는 말이 나왔다는 게 가장 놀랍다.
그런 거 X도 신경 안 쓰는 줄 알았는데.
“그게 나한테는 어떤 이득이 있지?”
그냥 나한테 욕만 박고 끝내겠다는 게 아니라, 자기 도발에 대응해달라는 건데.
남의 팀 케미를 위해서 굳이 얘 말대로 해줘야 할 이유는 없지 않나.
당장 떠오르는 이득이라고 하면, 크리스토퍼의 어그로가 다저스라는 팀이 아닌 나한테만 쏠리면 팬들 속이 좀 덜 터질 거라는 것 정도다.
“너희 팀 분위기도 지금 썩 좋지는 않을 거 아냐?”
크리스토퍼는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면서, 나를 연달아 놀라게 만들었다.
“정상 컨디션이 아닌 상대를 때려잡았다는 불합리한 이유로 욕도 좀 먹은 모양이고. 경기가 너무 쉬워서 긴장감을 잃어버린 선수들도 있겠지. 분위기를 바꾸고 싶다면 너희한테도 나쁘진 않을 거라 보는데.”
알다가도 모를 새끼.
나랑 박도현이 한 몸이니 하는 헛다리나 짚는 똥촉 주제에, 이런 건 또 어떻게 눈치챈 걸까.
“구체적으로 얘기 좀 해보자고.”
얘 말대로 한다고 해서, 다저스가 큰 이득을 본다는 보장은 없다.
분위기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영역.
잠깐의 방심이 한 경기의 향방을 좌우할 수도 있는 단기전인 만큼, 선수들이 조금이라도 더 집중하기를 바라며 마련해두는 장치에 불과하지만.
“그럴 줄 알았어, Koo.”
사실 다른 거 다 떠나서, 이 새끼한테 눈치 안 보고 극딜 박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손해는 아니니까.
* * *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이 열리기 전.
각 팀의 감독과 선수들 몇몇이 모여 이루어지는 사전 기자회견 시간.
양 팀의 감독이 반드시 상대를 제압하고 월드시리즈행 티켓을 따내겠다는 대동소이한 메시지를 담은 발언을 마치고.
바통은 선수들에게로 넘어갔다.
“다음은 선수들의 목소리를 들어볼 차례인데요. 크리스토퍼 엘리엇 선수? 준비되셨나요?”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자기 앞에 놓인 마이크를 입에 가져가는 동안.
필리스 감독, 그리고 기자회견장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는 단장은 동시에 마른침을 삼켰다.
‘제발, 제발, 제발, 생방송에서 하면 안 되는 말만 피해다오.’
크리스토퍼는 1년에 한 번쯤 인터뷰에서 대형사고를 쳤다.
F―Word를 사용한다던가, 선수나 감독의 아픈 사생활을 꼬집는다던가, 다저스라는 팀의 역사를 완전히 개무시해버린다던지.
그때마다 뒷수습은 그들의 몫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리에서 아예 빼 버릴 수도 없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강성 팬덤 필리건들에게서 열렬한 지지를 받는 선수였으니까.
사정을 익히 아는 기자들마저도 묘하게 숨을 죽이는, 긴장감 어린 분위기 속에서 크리스토퍼가 입을 열었고.
“제가 전에 했던 발언 한 가지를 정정하고 싶습니다.”
예상보다 온건한 그 말에, 단장과 감독은 어쩌면 이 미친놈이 정신을 차렸나 싶었지만.
“예전에 Koo가 저희 팀에 오면 유격수 자리를 양보할 의향도 있다고 했었는데, 그건 헛소리였어요.”
그 생각을 1초 만에 철회해야만 했다.
“시즌의 거의 3분의 1 정도를 다른 포지션으로 출장했는데 과연 Koo를 주전 유격수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물론 이러고도 Koo는 월드시리즈가 끝나고 나면 유격수 관련 타이틀을 죄다 쓸어 담겠지만, 그래도 제 앞에서 거들먹대는 모습은 딱히 보고 싶지 않습니다.”
구현기와 기자들을 동시에 저격하는 듯한 발언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진다.
다른 팀의 주전 유격수들과 비교하면 타 포지션 출장이 유독 많았던 것은 엄연한 사실.
게다가 작년에 구현기가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을 때도 살짝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무보살 삼중살을 비롯해 번뜩이는 플레이를 여럿 선보였지만, 아직 크리스토퍼 엘리엇에 비해 안정성이 부족하다는 평가 역시 타당했으니까.
“어차피 올해 골드 글러브도 Koo의 차지가 될 것 같은데, 시즌 끝나고 축하 턱이라도 냈으면 좋겠네요. 유격수로서는 모르겠지만 타자로서의 Koo는 여전히 쓸만한 선수라고 생각하니까요.”
팩트를 기반으로 살살 비꼬는 크리스토퍼의 발언이 끝나자,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구현기 쪽으로 향했다.
선을 넘는 일부 한국 언론을 대놓고 들이받은 전적은 있지만, 그래도 구현기는 기본적으로 카메라 앞에서 흥분하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는 선수.
과연 이 도발에 어떤 식으로 대응할 것인지, 받아 적을 준비를 마친 기자들 앞에서 구현기의 입이 열렸지만.
메모할 필요조차 없이, 발언은 고작 5초 만에 끝나버렸다.
“전 X밥이랑 겸상 안 합니다.”
다저스를 상대할 때마다 허구한 날 폭탄을 터뜨리며 주변 사람들을 고생시키는 크리스토퍼 엘리엇이지만.
오늘만큼은 그 폭탄이 엉뚱한 데서 터져버렸다.
* * *
[(NLCS) 기자회견장에서 벌어진 치열한 설전! 경기 시작 전부터 혓바닥으로 치고받는 두 팀의 주전 유격수!]
[크리스토퍼 엘리엇 “Koo의 수비 과대평가”, Koo “크리스토퍼랑 겸상 안 한다”… 살벌한 분위기 연출했던 두 선수]
[기자들과 팬들의 서로 엇갈리는 반응! 기자들 “Koo가 이번만큼은 존중이 부족했다”, 반면에 팬들은 “말 한마디에 넉다운된 크리스토퍼!”]
[평소 친분 자랑하던 두 선수의 첨예한 대립!]
[NLCS 1차전 나란히 선발 유격수로 이름 올린 크리스토퍼 엘리엇과 Koo, 투타 맞대결 성립 가능성은?]
기자회견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마어마한 기세로 기사들이 쏟아졌다.
상대를 깎아내리기보다는 본인 팀의 자신감을 드러내곤 하는 평소의 포스트시즌 기자회견과는 분위기가 달랐으니까.
물론 두 선수의 태도가 평소랑은 조금 달랐다는 걸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리 주목은 받지 못했다.
[근데 오늘 크리스토퍼 엘리엇 저 XX놈이 다저스 욕을 했던가?]
└ 너 기자회견 제대로 안 봤지? Koo한테 극딜 박는 거 못 봤어?
└ 아니, Koo는 Koo고. 얘가 인터뷰에서 다저스라는 이름을 입에 안 담은 게 처음 아니었나 싶어서…….
└ 그러게. 하다못해 우천 취소된 날도 이대로 다저 스타디움이 수몰됐으면 좋겠다고 입 털었다가 벌금 처맞지 않았나?
└ 뭐 그런 걸 따지냐. 이제는 Koo가 곧 다저스인데.
└ Koo도 좀 놀랐어. 원래 이런 말에 발끈하는 편이었던가?
└ 발끈이라고? 쌍욕을 박은 것고 아니고, X밥이라는 표현이 좀 과격하긴 했는데 어쨌든 한마디로 제압해버렸는데 그건 아니지 않나?
└ 발끈은 모르겠고 나는 솔직히 좀 불끈했어
└ 그런 건 제발 혼자 좀 처리해
“흐흐흐흐흐흐흐흐.”
경기를 앞두고, 원정팀 필리스가 훈련을 마치고 그라운드를 비워준 타이밍.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화장실 개인 칸에 틀어박혀 음침하게 웃고 있었다.
남들이 이 모습을 보면 혼자 부적절한 동영상이라도 보고 있는 걸로 오해할지도 모르겠지만.
크리스토퍼의 핸드폰 화면에 올라와 있는 것은, 기자회견에서의 대립을 담은 온갖 언론의 기사들이었다.
“좋아. 잘하고 있어. 더 많이 기사를 쓰고 더 멀리까지 퍼 나르라고.”
구현기의 촉은 정확했다.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팀 케미스트리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가 진짜 원했던 것은, 사람들이 자신과 구현기를 숙명의 라이벌로 받아들이는 것.
언젠가 구현기를 필리스로 끌어들이기 위한, 몇 년 앞을 내다보고 준비 중인 계획의 일환이었다.
물론 팀의 승리에까지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라이벌리를 만들어놓았어도, 정작 자신이 경기를 망쳐버리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획이기도 하고.
그러나 크리스토퍼는 그런 걱정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만약 야구의 신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자신에게 가을에 더 강해지는 재능을 선사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늘 생각해왔다.
포스트시즌 경험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때마다 좋지 않은 기억이 남았던 경기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2032시즌 디비전시리즈. 2034시즌 챔피언십시리즈.’
박도현이 다저스에서 활약하던 시기, 필리스가 다저스와 포스트시즌에서 만났던 경기들이었다.
결과는 1승 1패.
표면상으로는 이번이 구현기와의 첫 포스트시즌 맞대결이지만, 오직 자신만이 지난 전적의 존재를 알고 있다.
‘우선 이번 챔피언십시리즈를 가져오며 2승 1패로 앞서가는 것부터 시작해볼…….’
쾅쾅쾅! 쾅쾅쾅!
“야! 크리스!!! 모이라고 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거기 있으면 어떡해!!!”
그를 찾으러 온 베테랑 투수의 무자비한 노크 소리가 달콤한 상상을 깨트렸다.
“흐흐흐흐흐. 지금 갑니다.”
“아니 진짜 미치겠네. 인터뷰에서 또 헛짓거리해놓고 뭐가 좋다고 웃고 있어?”
“글쎄요. 승리의 달콤함에 조금 일찍 취해버린 걸지도.”
“뭐래 미친놈이. 나도 너 때문에 경기고 뭐고 술 처먹고 뻗고 싶으니까 빨리 처 오기나 해.”
그렇게 화장실에 숨어 있던 마지막 선수가 덕아웃에 합류하면서
마침내 챔피언십시리즈의 막이 올랐다.